2021년 11월 29일 월요일

연수일기 159. 딸의 covid-19 백신 접종, Happy Thanksgiving

11월 26일 금요일. 307일째 날.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갑다. 여느 아침처럼 공원의 펌프 트랙에선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어제와는 딴판의 날씨. 샌디에고에 돌아온 걸 실감했다. 

집 앞 상가엔 그새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다. 다음 주 토요일에 점등식을 한다니 그날엔 상가에서 저녁을 먹고 구경해도 좋을 것 같다.

오후에 딸이 covid-19 백신을 맞았다. 다행히 특별한 부작용은 없었다. 2차 접종은 1월로 예약이 되었다. 백신 예약 슬롯에 이전만큼 여유가 많진 않아 보인다. 더 이른 일정인 3주 뒤에 워크인으로 와서 접종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안내를 받았다. 한국에 가기 전에 격리 면제 신청 등 처리할 일이 있음을 고려하면 2차도 되도록 빨리 맞는 게 좋을 것 같다. 

H 선생님 가족을 집에 초대해 저녁을 먹었다. 원래 다음 달에 출국 예정이었는데, 둘째의 어린이집 등록 문제로 이번 일요일에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출국을 하게 되었다. 오늘 식사가 페어웰이 되는 셈이다. 오늘 오전에 귀국을 위한 PCR 검사를 받았는데, 주말이라 결과가 늦게 나올지도 몰라 두 군데서 검사했다고 한다. 2학년인 첫째는 백신 접종을 1차만 끝낸 상태라 한국에 돌아가면 자가 격리 대상이 된다. 


11월 27일 토요일. 308일째 날. 뉴욕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던 이웃 가족들을 포함해 네 가족이 다시 모였다. C, Y 선생님 딸의 생일이기도 하다. 중학교 2학년인 아이는 우리 아들과 등하교를 같이 한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나가 있다는 게 학교 생활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Y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치즈 떡볶이와 꼬치 어묵을 준비해 주셨다. 미국에 와서 꼬치 어묵은 처음이다. 아이들이 한국에 있을 때 아파트 앞 상가에서 자주 먹던 어묵을 그리워했는데 오늘 소원을 풀었다. 어제와 오늘, 연휴의 마지막을 추수감사절 답게 보낸 것 같아 감사하다.


11월 28일 일요일. 309일째 날. 아내와 아이들이 트레이더 조에서 사온 진저브레드 하우스를 만들었다. 미국에선 흔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이들과 만든다고 한다. 쿠키는 벽과 지붕이 되고 화이트 크림이 접착제 역할을 한다. 키트에 따라 미리 만들어진 크림이 들어있기도 한 모양인데, 우리가 샀던 건 머랭을 쳐야 해서 아내의 손목이 고생을 좀 했다. 크림에 레몬즙을 넣어서 나중에 굳어질 수 있도록 했다. 만들어진 쿠키 하우스를 보니 그럴 듯 하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집이 생각나는 모양. 

진저브레드 하우스 완성!

오후엔 아이들과 공원을 산책했다. 저녁엔 한국의 후배들과 연구 미팅이 있었다.  

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연수일기 158. 뉴욕 여행- 집으로

11월 25일 목요일. 306일째 날. 추수감사절이다. 체크 아웃 전에 아침을 먹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오늘 아침엔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다. 메이시스 퍼레이드 때문인지 일찍부터 호텔 앞 웨스트 48번가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통제를 한 상태다. 가까이 문을 연 빵집에서 아침 거리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11시에 체크 아웃을 하고 호텔 앞에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뒤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미리 왕복 예약해 둔 한인 택시였는데, 이어서 예약한 손님이 있었는지 기사님이 운전을 험하게 한다. 아들은 원래 멀미가 심한 편인데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초죽음이 된 상태였다.  

마지막 날 아침 호텔 방에서

돌아가는 항공편 역시 제트 블루이다. 13시55분 출발, LA 도착은 17시11분. 동부가 세 시간이 빠르니 돌아갈 때는 세 시간을 버는 셈이다. 동부를 다녀 오는 건 해외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든다더니, 시간대도 그렇고 날씨도 그렇고 그 말이 맞다.

여섯 시간 비행 후 제 시간에 LA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에서 내내 입었던 겨울 점퍼는 가방 속으로 쑤셔 넣었다. 이제 미국을 떠날 때까지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이들도 나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네비게이션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했다. 저녁 메뉴는 집에서 짜파게티를 끓여 먹기로. 돌아오는 길에 알라딘과 디즈니 뮤지컬 음악을 들었다. 

뉴욕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 가족 중 가장 기대를 했던 이는 아내였다. 여행 시기는 아내가 결정한 대로 정했다. 보통 대부분의 계획을 내가 세우는 편이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항공편과 호텔, 뮤지컬 티켓을 예약했을 뿐 그외 구체적인 일정에 대해선 출발 일주일 전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대신 아내가 방문할 곳들을 정하고 할인 패스도 주문했다. 전망대는 이곳이 더 낫대. 스테이크 하우스는 여기로 예약하는 게 좋겠다. 항상 아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내 시큰둥한 반응 때문에 출발 며칠 전엔 조금 다투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내는 결혼 전에 뉴욕에서 십 개월을 살았다. 종종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곤 한다. 십 수년 전에 살던 도시를 다시 가는 기분은 남달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뉴욕 아닌가. 라스베가스나 LA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이지만 아내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뉴욕은 달라."

다르긴 달랐다. 백년은 되었음직한 붉은 벽돌색 아파트, 건물 외벽 낡은 철제 비상 계단, 사람들의 옷차림, 거리를 부유하는 각종 소음들. 쌀쌀한 날씨도, 코끝을 시리게 하는 차가운 공기도 오랜만이니 좋았다. 샌디에고에서 느끼지 못하는 늦가을의 정취도 그랬다. 붉게 물든 단풍 아래 길 위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폭신함만큼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사실 그래서 서울 생각도 많이 났다.) 그래도 그저 처음 와 본 도시이니 새로워 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시가 진정 특별하게 느껴진 순간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널 때였던 것 같다. 다리 입구 주변을 무질서하게 둘러싼 건물들을 벗어나 보행교 중앙에 깔린 나무 데크에 발을 들여놓자 무언가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쇠 난간 아래로 맨해튼을 향해 질주하는 차들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거대한 아치형 주탑 꼭대기에서 거미줄처럼 뻗어나온 철근 케이블 아래에 접어들었을 때, 문득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막상 예전에 살던 동네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일주일 내내 아내는 행복해 했다. 아내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뒤늦게 처음 방문한 이 도시를 즐겼다. 여섯 밤을 오롯이 맨해튼에서 머물기를 잘한 것 같다. 언젠가 또 올 수 있겠지. 그렇게 되었음 한다. 그땐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적당한 흥분과 기대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2021년 11월 25일 목요일

연수일기 157. 뉴욕 여행- 자연사 박물관, 뮤지컬 알라딘

11월 24일 수요일. 305일째 날. 내일은 체크아웃 후 바로 공항으로 갈 예정이라 오늘이 뉴욕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원래 일요일에 자연사 박물관에 갈 계획이었는데, 예약한 바우처를 주말에 받을 수가 없어서 오늘로 변경했었다. 예약을 다시 하면서 입장 시간이 12시로 늦춰졌다. 덕분에 오전 시간이 비어 늦잠을 자고 오전에는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그동안 갔던 미술관과 박물관은 개장 즈음에 입장을 해서 붐비는 시간을 피할 수 있었다. 오늘은 입구에서부터 백신 접종 카드를 확인하는 긴 줄이 늘어서있다. 입장 후에도 바우처를 티켓으로 바꾸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1층 로비에서부터 뼈만 남은 거대한 공룡 두 마리가 시선을 끈다. 우주의 탄생과 빅뱅 이론을 설명하는 짧은 영상을 보고 지구의 다양한 광물과 단층을 전시하는 방을 지났다. 1, 2층엔 박제된 동물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 국립 공원에서 직접 볼 수 있는 동물들이라 새롭진 않았다. 딸이 보고싶어하는 해양생물관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뒤 4층의 공룡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등장한 살아 움직이던 공룡 화석 모형이 있는 곳이다. 복원 가능한 공룡 중 가장 크다고 알려진 Titanosaur의 모형은 전시실 하나를 다 차지했다. 아이들은 전시된 공룡 알과 머리뼈를 만져보며 신기해했다.

박물관 로비

자연사 박물관은 스마트폰 앱이 잘 만들어져 있다. 전시물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고, 지도는 실시간 위치를 파악해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안내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어서 잘 사용하면 동선을 줄일 수 있다. 

박물관의 절반도 못 보았지만 금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관람객은 많은데 카페는 대부분 문을 닫아 휴식 공간이 부족했다. 지하의 푸드 코트는 운영을 했지만 막상 내려가 보니 정신없는 분위기에 음식도 시원치 않았다. 아이스크림만 하나씩 먹고 박물관을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호텔 근처로 돌아와 중국 국수 전문점인 Mee noodle shop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딸이 구글 맵을 검색해 찾은 음식점이다. 코코넛카레 국물에 고기를 넣은 요리, 돼지고기 볶음, 국수는 다 맛있었다. 곁들여 시킨 만두는 피가 너무 두꺼웠다. 

그동안의 빡빡한 일정에 지친 몸을 달래며 호텔에서 게으름을 피워본다. 방에서 쉬다가 알라딘 뮤지컬을 보기 위해 다시 나섰다. 극장에 입장하기 전 타임스퀘어 근처의 파이브 가이즈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언젠가는 먹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뉴욕에서 처음 먹게 될 줄은 몰랐다. 햄버거는 충분히 맛있었지만 내 기준엔 역시 인앤아웃이 최고. 

라이온 킹을 보았던 민스코프 극장에 비해 New Amsterdam Theatre는 고전적인 옛 극장에 좀 더 가까운 모습이다. 좌석 간격도 더 좁은 느낌이다. 지난 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브로드웨이 극장이 1년 반 동안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던 게 올 9월이니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의 흥분과 기대가 더한 듯 하다. 뮤지컬이 시작할 때 울려 퍼지는 환호와 박수엔 오랜 기다림에 목말라한 관객들의 마음이 녹아들었을 것이다. 

공연 시작 전

알라딘 뮤지컬에 대한 한 줄 평은 역시 '지니가 다 했다.' 양탄자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Whole new world' 신은 괜찮았다. 아이들은 라이온 킹보다 알라딘이 더 재미있었다고 한다. 익숙한 음악이 더 많아서인듯. 더 난 라이온 킹에 한 표. 

돌아오는 길에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 한 번 더 들렀는데 폐점 시간이 가까워 오리지널 글레이즈드 도넛이 다 떨어졌다. 달달한 도넛에 맛을 들인 아들이 아쉬워 했다. 이렇게 뉴욕에서의 마지막 밤도 지나간다. 

2021년 11월 24일 수요일

연수일기 156. 뉴욕 여행-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하이 라인

11월 23일 화요일. 304일째 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규모가 크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단 1층 앞쪽에 있는 이집트관과 그리스, 로마관 전시물 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이다. 아들은 미이라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미이라가 있는 박물관은 많지만 이렇게 많은 미이라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 같다. 이집트관 하나만 해도 작은 박물관 하나 정도 크기인데, 심지어는 신전을 통째로 뜯어다 놓은 방도 있었다. 

이집트 신전이 있는 방

아메리카관의 카페에서 카페인을 충전하고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상을 비롯해 중세 유럽 조각품들을 구경했다. 아프리카 오세아니아관은 과감히 스킵. 맨 안쪽에 있는 Robert Lehman Collection에서부터 그림 전시실이 시작된다. 점묘법 화풍으로 유명한 폴 시냑, 마티스, 고갱을 거쳐 2층의 갤러리로 이동해 르누아르와 드가를 만났다.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르누아르의 대표작을 볼 수 있는 미술관도 드물 것 같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아내와 나는 특히 'Woman in White'가 마음에 들었다.)도 있었고, 클림트와 모네, 세잔, 반 고흐의 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미술관을 나와 우버를 타고 첼시 마켓으로 이동했다. 오늘과 내일은 기온이 뚝 떨어졌고 바람도 차다. 아이들과 걷는 거리를 최대한 줄이려 하는데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다. 첼시 마켓의 김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와서 보니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구글 맵의 영업 시간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게 잘못이다. 마켓 안엔 사람이 많고 웬만한 레스토랑 앞엔 대기 줄이 있었는데, 다행히 타이 음식점 한 곳은 레스토랑 안 공간도 넓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지쳤던 아이들도 기운을 차렸다. 

첼시 마켓에서 나와 리틀 아일랜드에 들렀다. 올해 개장한 작은 수상 공원으로, 영국의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이 설계했다. 허드슨 야드의 유명한 건물인 베슬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첼시 구역에선 하이 라인이 가장 유명하지만, 개성으로 따지자면 베슬과 리틀 아일랜드의 명성이 더 높아질 지도 모르겠다. 하이힐 뒤축을 닮은 거대한 콘크리트 화분들은 제각각 높낮이가 달라 묘한 느낌을 주는데, 그 화분들 위에 나무와 잔디, 산책길로 공원을 조성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원형 극장도 있어 날씨가 좋은 계절엔 공연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리틀 아일랜드(왼쪽)로 들어가는 입구

공원을 나와 하이 라인에 올랐다. 휘트니 미술관부터 허드슨 야드까지 이어진 1.5마일 정도의 고가 산책로이자 공원이다. 버려진 화물 철로를 공원으로 만들어 뉴욕에서도 가장 획기적이고 매력적인 장소로 탈바꿈시킨 아이디어는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가을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단풍 나무와 갈대까지, 다양한 종류의 풀과 나무가 있어 공원이란 이름이 어색하지 않았다. 뉴욕의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건물들을 다른 눈높이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곳을 모티브로 한 서울로 7017도 개장 초기엔 보잘 것 없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지역 명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하이 라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길로 자리매김 하길. 

빌딩 숲 사이를 걷는 기분

기온이 내려가고 허드슨 강의 바람이 세서 걷기 쉽지 않았지만 공원의 끝인 허드슨 야드 쇼핑몰에 도착했다. 쇼핑몰 안에서 커피로 잠시 추위를 녹인 뒤 베슬 Vessel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벌집 모양의 독특한 외관으로 2009년 개장 후 단숨에 관광 명소로 떠올랐고 포토 스팟으로 유명해졌지만, 최근 투신 자살 사건이 잇따르면서 현재는 폐쇄된 상태였다. 올 7월에 네 번째 사고 이후 영구 폐쇄도 검토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건물 밖에서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벌집 핏자가 생각나는 외관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Becco는 파스타를 리필해 먹을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마침 같은 시기에 여행을 온 우리 아파트 이웃인 C, Y, L 선생님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 뉴욕의 거리에서 만난 이웃과의 저녁 식사는 따뜻하고 즐거웠다. 하루 종일 추운데서 걷느라 피곤에 지친 아이들도 친구들을 만나니 금새 기운을 차리고 재잘거린다. 

2021년 11월 23일 화요일

연수일기 155. 뉴욕 여행- MoMA, Top of the Rock

11월 22일 월요일. 303일째 날. 오늘 가기로 한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은 호텔에서 걸어서 15분 거리다. 어제 많이 걸어서 오늘은 미술관과 저녁 록펠러 센터 전망대, 두 개의 일정만 소화하기로 했다. 록펠러 2세가 록펠러 센터를 지었고, MoMA를 설립한 이는 록펠러 2세의 부인인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였으므로 오늘 하루는 이 부부의 유산을 보는 셈이다. 

이번 여행에서 세 개의 미술관과 한 개의 박물관을 예약했는데 그중 가장 기대가 되는 게 MoMA 였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외에도 피카소, 달리, 샤갈, 세잔, 모네 등 익숙한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잭슨 폴록이나 앤디 워홀 등의 작품도 유명하지만 이들 현대 미술 작가보단 18-19세기 초까지 작가들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 이들의 작품이 모여있는 5층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캔버스의 크기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 그리고 노래. 푸른색과 회색 하늘, 보라색 안개와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보며 이 노래의 가사와 선율을 떠올렸다.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Shadows on the hills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ry, starry night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Colors changing hue
Morning fields of amber grain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Are soothed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And when no hope was left in sight

On that starry, star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But I could'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Starry, starry night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The silver thorn of bloody rose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세잔과 피카소, 루소와 칸딘스키, 클림트와 샤갈, 마티스와 프리다 칼로, 그리고 달리를 지나쳤다. 유명한 그림이 너무 많아서인지 오랜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금새 지친다. 1층 조각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모딜리아니와 몬드리안을 거쳐 모네의 수련이 있는 방에서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곳에선 마음이 평안해지는 듯 했다. 잭슨 폴락,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지났을 때는 이미 두시간 반이 지난 뒤였다. 아이들이 힘들어 해서 더 머물기는 어려웠다. 나오기 전 기념품 샵에서 마그넷을 샀다. 

미술관을 나오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C, Y 선생님 부부와 마주쳤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연휴에 뉴욕에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뉴욕에 있는 동안 식사를 한 번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오늘 점심은 뉴욕 정통 스테이크. Gallaghers Steakhouse를 예약해 두었다. 29불 짜리 점심 코스 가성비가 훌륭한 곳으로 유명하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편안한 인테리어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메인으로 필렛 미뇽, 양고기, 연어를 주문했다. 고기는 역시 훌륭, 다른 음식 맛도 다 괜찮았다. 하우스 와인 두 잔을 시켰는데, 코스의 가격이 매우 저렴한 반면 와인은 뉴욕 레스토랑 다운 가격이다.

미국의 레스토랑에선 항상 식사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여기서도 식사를 마치기까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예약해 둔 록펠러 센터의 Top of the Rock 전망대 입장이 네 시여서 바로 이동하니 시간이 딱 맞았다. 맨해튼의 랜드 마크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고, 전망대 중에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볼 수 있는 이곳이 가장 인기가 많다.

맨해튼의 야경

일몰과 야경을 볼 수 있는 이 시간에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한다. 예전엔 사람으로 가득해 사진을 찍기도 어려울 때가 많았다고 하는데, 판데믹으로 입장 예약과 제한을 하는 지금은 오히려 전망대에서 차분히 시간을 보내기 더 나은 것 같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저무는 해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그리고 하나둘 켜지는 빌딩 숲 불빛들을 지켜보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딸은 할랄가이즈에 들러 저녁 거리를 사고 아들과 나는 여행사 사무실에 가서 예약해 둔 자연사 박물관 바우처를 받았다. 타임 스퀘어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는 청년들을 구경하고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도 들렀다. 아들은 이곳에서 처음 먹은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 맘에 들었나 보다.

2021년 11월 22일 월요일

연수일기 154. 뉴욕 여행- 스테이튼 아일랜드 페리, 브루클린교, 브로드웨이

11월 21일 일요일. 302일째 날. 호텔 근처 마트의 푸드코트에서 치킨과 립, 연어회로 아침을 먹었다. 음식 종류가 많아 아이들과 아침 식사 장소가 여의치 않을 때 이용해도 좋겠다. 

지하철로 맨해튼 남쪽 끝에 위치한 화이트홀 스트리트 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스테이튼 아일랜드를 왕복하는 무료 통근 페리를 탈 수 있다. 휴일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 도착하고 바로 11시에 출발하는 페리에 올라탔다. 맨해튼의 빌딩 숲이 멀어지면서 멀리 오른쪽에 자유의 여신상이 보인다. 자유의 여신상을 좀더 가까이 볼 수 있는 페리도 있지만 우리에겐 이 정도도 충분하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 바람이 세차다. 오늘 날씨가 따뜻한 편이라 다행이었다. 멀리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도심 안에선 시큰둥하던 아이들도 사진으로만 보던 자유의 여신상은 신기했는지 연신 셔터를 눌렀다. 아들은 학교에서 배웠는지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선물한 것이라는 사실, 에펠탑을 만든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에 참여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구리로 만들어져 처음엔 구릿빛이었다가 산화가 되어 지금과 같은 색이 되었다는 건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아들 덕에 새로 알게 되었다.

자유의 여신상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잠시 내렸다가 돌아오는 페리를 다시 타고 맨해튼에 도착하니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가까운 카페에서 잠시 쉬며 커피를 마신 뒤 월 스트리트로 향했다. 월 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 동상이 있는 곳은 관광객이 많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황소 앞뒤로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황소의 불알을 만지면 돈을 많이 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WTC가 있는 코트랜드 스트리트 역으로 이동했다. 아이들 때문에 짧은 거리라도 되도록 지하철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2001년 9.11 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파괴된 후 현재는 네 개의 빌딩이 새로 들어섰고 두 개는 아직 공사 중이다. 새로 들어선 104층짜리 프리덤 타워도 유명하지만 오늘 여기 온 이유는 오큘러스라 불리는 환승 센터 겸 쇼핑몰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날개를 편 새를 형상화했다고 하는데, 직접 보니 그보다는 뼈와 가시가 드러난 외계 생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새하얀 색깔과 둥그런 곡선을 이룬 지붕 때문인지 엄숙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스페인 건축가 산티아고 칼바트라바의 작품인 이 건물은 워낙 특이해 한 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근처의 베트남 음식점에서 쌀국수와 구운 돼지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어느 도시에서든 베트남 음식은 진리. 입이 짧은 딸도 잘 먹는지라 처음 가는 도시에선 꼭 선택하게 된다. 테이블도 없이 혼자 먹는 선반만 있는 작은 식당이지만 안에서 식사를 한다고 하니 백신 카드 확인을 한다. 뉴욕 어느 레스토랑이든 백신 카드에 대한 확인은 철저한 것 같다. 

배불리 식사를 하고 다시 지하철로 브루클린으로 건너간다. 유명한 포토 스팟인 Dumbo의 맨해튼 브릿지 뷰에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우리도 사진을 찍고, 브루클린 브릿지로 올라갔다. 브루클린 방향에서 맨해튼을 보며 다리를 건너는 것이 족보이다. 1883년 완공된 다리는 당시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이자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이 다리의 아름다움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옛스러움과 현대 도시의 분위기가 너무나 잘 어우러져 있고, 다리 가까이엔 뉴욕 특유의 건물들이, 멀리엔 맨해튼의 고층 빌딩 스카이라인이 배경을 이루어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뉴욕의 관광지 중 유명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브루클린 브릿지 위를 걷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Dumbo

브루클린 다리 걷기

다리를 건너고 나니 아이들은 기진맥진. 아이들이 기운을 차리려면 저녁은 한식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하철로 코리아 타운으로 이동해 설렁탕으로 배를 채우고 뮤지컬 '라이온 킹'을 보기 위해 브로드웨이 민스코프 극장으로 이동했다. 육년 전 런던에서 보고 두 번째이다. Circle of Life의 익숙한 첫 소절이 흐르자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첫 장면의 감동은 여전했다. 하루종일 많이 걸어선지 아내는 중간에 살짝 졸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재미있게 보았다고. 그래도 다음 번 뮤지컬을 보는 날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다. 

2021년 11월 21일 일요일

연수일기 153. 뉴욕 여행- 구겐하임 미술관, 센트럴 파크, Birdland Jazz Club

11월 20일 토요일. 301일째 날. 호텔 근처의 UT47 Manhattan에서 샌드위치와 군만두로 아침을 해결했다. 안쪽 공간은 수리 중이어서 식당 앞 길거리 테이블에 앉았는데 아침 날씨가 많이 춥진 않아서 괜찮았다. 주문을 받았던 직원이 아이들을 위해 핫초코 두 잔을 서비스로 가져다 주었다. 

구글맵이 추천한 경로를 따라 구겐하임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미술관 입장 예약 시간에 맞추기 빠듯해졌다. 구글맵 안내가 대개는 정확하지만 버스는 교통 정체 때문에 도착 시간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구겐하임까지의 멀지 않은 거리를 가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맨해튼에선 웬만하면 지하철을 타는 게 좋을 듯 하다. 결국 예약 시간을 이십 분쯤 넘겼지만 다행히 별다른 문제 없이 입장했다. 

달팽이 집을 닮은 건물 입구를 통해 로비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니 특유의 나선 모양 복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겐하임에서 가장 멋진 예술 작품은 건물 자체라더니 그 말이 맞나보다. 유명한 작품도 물론 많지만 건물의 명성보단 못한 느낌이다. 칸딘스키를 비롯해 현대 미술 작품이 대부분인 것도 이유일 것이다. Rob은 구겐하임을 두고 작품들은 horrible하니 건물만 보고 나오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말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구겐하임 입구

6층에서부터 복도를 따라 내려오면서 흝어만 보았는데도 두 시간 반이 걸렸다. 미술관을 나와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센트럴 파크를 산책했다. 동쪽에서 공원을 가로질러 벨베디어성을 지나 반대편 자연사박물관 쪽의 입구로. 색색으로 물든 단풍과 낙엽에서 샌디에고에서 실감하기 어려운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살찐 청솔모가 공원 곳곳에서 나타나 쪼르르 달린다. 공원엔 산책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잔디밭에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샌디에고라면 이 날씨에 피크닉을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평범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샌디에고나 LA와는 사뭇 다르다. 

센트럴 파크에서 바라본 맨해튼 도심

공원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컬럼비아 대학교로 향했다. 아내는 오래 전 뉴욕에서 열 달 동안 살았는데 그때 이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자주 갔었던 이스트 아시안 라이브러리에 들어가 보고싶어했는데 판데믹 때문인지 외부인은 입장이 안된다고 해 아내가 아쉬워했다. 아이들이 힘들어해 예전에 살던 동네도 차분히 돌아보기 어려웠다. 근처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었다가 호텔로 돌아가기로.

지하철로 타임스퀘어까지 이동했다. 여기서 호텔은 멀지 않다. 커다란 전광판이 내뿜는 빛과 자동차와 사람들의 소음과 음악으로 가득한 거리 분위기는 라스베가스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무질서하지만 유흥의 흔적이 넘실거리는 라스베가스에 비해선 상대적으론 더 정돈된 느낌. 크리스피크림 도넛 몇 개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가져온 컵라면과 햇반으로 저녁을 먹었다. 호텔 방의 전자레인지와 집에서 가져온 전기포트가 아이들 식사를 해결하는 데 유용하다. 

저녁을 먹고 쉬었다가 아이들을 두고 재즈클럽에 다녀오기로 했다. 뉴욕에 왔다면 재즈클럽 한 번쯤은 들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근처에 유명한 재즈클럽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제일 가깝고 예약이 가능했던 Birdland를 선택했다. 찰리 파커와 듀크 엘링턴이 무대에 올랐던 곳이다. 오늘 저녁엔 Alan Broadbent Trio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클럽 앞에 줄을 서 있다 백신 접종 카드 확인 후 입장해 테이블 좌석으로 안내받있다. 일인당 35불의 입장료 외에 20불 이상의 음식이나 술을 주문해야 한다. 아내와 나는 45불짜리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Birdland Jazz Club

연주는 훌륭했다. 한 시간 동안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연주하는 재즈 리듬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곡 한곡이 끝날때마다 사람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두서넛 일행과 함께 온 이들이 많았지만 중간중간 혼자 앉은 사람도 보였다. 옆 자리엔 양복 차림의 남성이 혼자 앉아 우아하게 파스타와 와인을 먹으며 공연을 감상했다. 올 봄 뉴욕의 재즈 클럽이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을 때, 음악을 사랑하고 흥이 많은 뉴요커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짐작이 간다. 

2021년 11월 20일 토요일

연수일기 152. 뉴욕 여행- 출발

11월 19일 금요일. 300일째 날. 아침 일찍 LA 공항으로 향했다. 힐튼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을 타고 공항으로 간다. LA 공항 힐튼 호텔 주차장은 두 번째 이용인데 이용이 편하고 공항과도 가깝다. 미리 예약을 하면 비용도 저렴한 편이고 힐튼 아너스 할인도 받을 수 있다. 

국제선 터미널 앞에서 B 부부를 먼저 보내고 우린 제트블루 항공사가 사용하는 terminal 5에서 내렸다. 공항 터미널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탑승을 기다렸다. 추수감사절 여행객이 많아서인지 이전보다 공항은 더 붐볐다. 

제트블루 비행편은 만족스러웠다. 지난 여름에 탔던 솔트레이크행 아메리칸 항공은 왕복 항공편 모두 출발이 몇 번씩 지연되었었다. 얼마전에도 여러 항공사에서 대규모의 지연과 결항 사태가 있었기에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비행기는 제시간에 출발을 했다. 기내 상태도 깔끔했고 좌석 간격도 넓었다. 좌석 모니터로 다양한 영화와 실시간 티비를 볼 수 있었고, 와이파이까지 무료였다. 딸은 내일 갈 구겐하임 미술관에 대해 검색한 내용을 아이패드의 메모장에 옮겨 정리하느라 바쁘다. 

예습 중

여섯시간 남짓의 비행 후 JFK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로비엔 벌써부터 들어선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우리를 반긴다. 터미널 문을 열자 세차게 불어오는 찬바람이 매섭다. 샌디에고에선 느껴보지 못하는 날씨다. 예약해둔 한인 택시를 타고 맨해튼 숙소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이스트 리버를 지나 맨해튼의 고층 빌딩 불빛을 보지 뉴욕에 온 게 실감이 난다. 여섯 밤을 묵을 숙소는 미드타운의 Belvedere 호텔이다. 타임스퀘어와 센트럴파크 사이에 있어 관광을 하기 좋고 맛집이 많은 9번가와도 가까워 여러모로 편하다. 

8번가와 9번가 사이, 웨스트 48번 스트리트에 내리자 대마초 냄새가 확 풍긴다. 뉴욕에서는 올해 초 대마초가 합법화 되었다. 호텔방에서 잠을 청하는데 늦은 시간까지 이웃한 방에서 대화와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창 밖에선 자동치 클락션 소리, 앰블런스가 지나가는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샌디에고의 조용한 동네에서만 살다 보니 이런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하다. 동부는 세 시간이 빠르니 샌디에고에선 보통 잠자리에 들기 전이지만 지난 며칠간 피로가 쌓였는지 눈꺼풀이 무겁다. 

2021년 11월 19일 금요일

연수일기 151. 손님,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 (2)

11월 16일 화요일. 297일째 날. 이번 주는 딸 학교의 선생님 면담 주간이라 매일 일찍 하교한다. 아이가 일찍 하교하는 걸 깜빡하고 오후에 선생님 면담 일정을 잡았다. 지난 학기엔 화상으로 면담을 했었다. Back to school 행사에서 선생님을 뵙긴 했지만 따로 직접 면담을 하는 건 처음이라, 되도록 함께 가고 싶었다. 딸을 잠시 이웃집에 데려다 놓고 학교에 다녀오기로 했다. 

지난 번 행사 때도 그랬지만 선생님은 경험이 많고 자신의 교육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의 성격과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계셨다. 최근에 학교에서 있었지만 우리가 몰랐던 일 몇 가지도 알게 되었고, 덕분에 딸의 생각과 기분에 대해서도 좀더 알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 비해 영어 읽기도 훨씬 나아졌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말을 건네는 걸 꺼려하던 아이가 최근엔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저녁은 아파트 바베큐장에서, B를 보기 위해 온 S 선생까지 함께 했다. 


11월 17일 수요일. 298일째 날. 아침에 B의 렌트카를 반납하고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에 다녀오기로 했다. 지난 9월에 갔을 때 좋은 느낌을 받아 B 부부가 오면 함께 다시 가보려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침에 문제가 생겼다. B 부부가 금요일 아침 출국을 위해 월요일에 CVS에서 검사했던 covid-19 결과지를 어제 저녁에 받았는데, 결과 보고 일시가 없었다. 대한항공의 경우 한국행 출국 72시간 내에 결과가 보고된 서류가 필요하다. 결과 보고 일시가 적혀있지 않은 경우 결과를 받은 이메일 등으로 갈음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이번 경우엔 내 휴대폰 문자로 결과가 나왔음을 통보받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하루만에 결과가 나오는 유료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하나 고심을 하다 CVS에서 검사를 담당하는 MinuteClinic에 전화를 해보았다. 두세 번의 시도 끝에 고객 센터 직원과 연결이 되었고, 사정을 설명해 검사 일시 외에 결과 보고 일시가 표기된 원본을 이메일로 받았다. 올레! 

예정했던 것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어 마음 편히 출발할 수 있었다. 기차역 옆의 Los Rios 역사 지구에 주차를 하고 같은 이름의 거리를 둘러본다. 자동차 한두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작은 오솔길 양 옆으로 버터플라이 가든, 카페, 레스토랑과 소박한 잡화점 등이 듬성듬성 이어져 있다. 이전에 갔던 Ramos House Coffee가 쉬는 날이라 근처의 The Tea House on Los Rios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는데 이곳도 음식 맛이 좋았다. 레스토랑 이름에 걸맞게 차와 스콘이 특히 훌륭했다. 아내들은 실내 분위기와 앙증맞은 식기들을 마음에 들어했다. 

작은 공방 겸 갤러리

만족스런 식사를 마치고 이웃한 작은 공방 겸 갤러리를 구경한 뒤 미션에 입장했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다. 왜 이 미션이 ‘캘리포니아 미션의 보석 (The Jewel of the California Missions)’이라고 불리워지는지 알 것 같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예배당에 들어서면 예상하지 못했던 분위기와 규모에 설풋 놀란다. 십자가 아래 아치 문을 지나 네 개의 종을 볼 수 있는 sacred garden는 작은 공간이지만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답다. 1812년 대지진으로 무너지기 전의 규모와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그레이트 스톤 처치의 남은 건물 벽과 잔해는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Sacred Garden

저녁은 집 앞 몰의 데킬라 바에서. 몰에 있는 레스토랑과 바 중에 괜찮은 곳 중 하나이다.


11월 18일 목요일. 299일째 날. 오후에 딸의 covid-19 검사를 위해 랜초 산타페의 CVS에 다녀왔다. 다음 주에 뉴욕에서 뮤지컬을 보려면 백신 미접종자의 경우 검사 결과가 필요하다. 딸은 미국에 와서 pcr 검사만 벌써 세 번째이다. 한국보다 수월한 전비강 검사라 딸도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는 건 좋지만 검사를 할 때마다 정확성에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집에서 더 가까운 CVS 검사 예약이 마감되어 좀 먼 곳의 검사소를 선택했는데 길이 막혀 가는 데만 다녀오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다음 주 여행을 다녀와 딸도 백신 접종을 하면 이제 검사를 받을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2021년 11월 16일 화요일

연수일기 150. 헌팅턴, 조슈아 트리 캠핑장

11월 13일 토요일. 294일째 날. 아침 일찍 LA 공항으로 향했다. B 부부를 마중하기 위해서다. 우리 부부와 가장 가까워 판데믹 전엔 캠핑도 함께 자주 가고 매년 한두 번씩은 이이들 없이 함께 여행을 다녔었다. B는 다섯 해 전에 샌디에고에 연수를 와서 일년을 살았다. 이번에 와선 이전에 살던 동네와 즐겨 가던 곳들을 둘러볼 예정이란다. 

LA 공항 로비가 이젠 익숙하다. 국제선 도착 출구는 여전히 한산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금새 보였다. 직접 얼굴을 본 건 작년 12월이 마지막이니 거의 일 년 만이지만 마치 지난 주에 만난 듯 그간의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래되어 편안한 관계라 그럴 것이다. 오늘은 이들과 함께 헌팅턴 라이브러리와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을 거쳐 집으로 갈 예정이다.

먼저 헌팅턴 라이브러리로 향했다. LA 동쪽의 패서디나에 위치한 이곳은 희귀 고서적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곳으로, 1919년 철도와 부동산 재벌이었던 헨리 E. 헌팅턴과 아라벨라 헌팅턴 부부가 설립했다.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1930)과 구겐하임 뮤지엄(1937)보다도 먼저 지어졌으며 개인 콜렉션으로 설립된 문화예술교육기관으로는 미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한다. 이곳엔 1455년 제작된 구텐베르크의 《성경》 초판본과 1623년 만든 셰익스피어의 《희극, 사극, 비극》 초판본, 프랭클린의 자필서 등이 전시되어 있고, 가장 인기가 많은 헌팅턴 갤러리Huntington Art Gallery는 유럽의 15~20세기 작품 1,2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헌팅턴 아트 갤러리

하지만 아쉽게도 판데믹으로 도서관은 문을 닫았고 갤러리의 일부만 운영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헌팅턴 갤러리의 상징 작품 중 하나인 Blue boy를 비롯해 몇몇 작품들을 감상한 뒤 로즈 가든과 데저트 가든을 산책했다. 정원의 규모가 무척 커서 다 돌아보는데엔 몇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중국 정원과 일본 정원도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시간 여유가 없어 들어가보진 못했다. 

인앤아웃에서 점심을 먹고 조슈아 트리로 향했다. B 부부도 예전에 조슈아 트리에 와 봤지만 그때는 낮에만 잠깐 들렀다고 한다. 오늘은 키스 뷰에서 일몰을 볼 예정이라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입구의 보틀샵에 들렀다가 키스 뷰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노을을 보고 키스 뷰를 내려와 공원 남쪽의 코튼우드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여기서부터 한 시간 남짓 거리이다. 수세식 화장실이 갖춰진 몇 안되는 캠핑장 중 하나로, 미리 예약이 필요하다. 

캠핑장으로 가는 길에 주위는 완전히 깜깜해졌다. 예약한 사이트에는 청년 하나가 모닥불 앞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비어있는 걸 보고 아마 예약이 안된 사이트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모닥불을 피우고 자리를 잡은지 얼마 안된 듯 했는데 자리를 뜨게 되었으니 좀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장작에 불을 붙이는 수고를 피할 수 있었다. 

키스 뷰에서 보는 하늘

라면을 끓이고 준비해간 고구마도 모닥불에 넣었다. 배를 채우고 비치 의자와 돗자리에 앉아 하늘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두 달 전엔 그믐이었지만 오늘은 달이 떠서 그때처럼 별이 쏟아질듯 보이진 않았다. 막 긴 비행을 한 이들에겐 조금은 무리한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의 밤하늘을 함께 볼 수 있었으면 했다. 하룻밤을 보내지 못하더라도 국립공원 캠핑장을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캠핑장은 널찍했고 관리 상태도 좋았다. 사이트마다 피크닉 테이블과 화롯대가 있어 편했다. 전기를 쓸 수 없지만 이건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캠핑장의 시간은 언제나 빨리 흐른다. 열 시쯤 되어 철수할 준비를 하는데 별똥별이 배웅을 해주었다. 돌아오는 길엔 B 부부도, 우리 아이들도 떡실신. 이렇게 이틀처럼 보낸 하루가 간다. 


11월 14일 일요일. 295일째 날. 오전엔 집에서 쉬다 오후엔 One Paceo 몰을 구경하고 커피를 마셨다. 이 몰은 B가 살던 때엔 없었던 곳이다. B가 살던 라호야 근처는 5년 전과 비교해 아주 큰 변화는 없지만 카멜 밸리 근처는 많이 변했을 것이다. 솔라나 비치에 들렀다가 피자 포트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번에 오면서 꼭 다시 들러보고 싶었던 곳 중의 하나라고. 옛날 생각이 많이 났던가 보다.


11월 15일 월요일. 296일째 날. B와 UCSD 근처의 렌트카 사무실에 들러 예약한 차를 받았다. 아내는 English chatting 프로그램을 함께 하는 분이 보스턴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잠시 얼굴을 보기로 했다. B의 아내 역시 5년 전에 가깝게 지냈던 분이라 함께 만나게 되었다. 오늘 샌디에고에서 이 세 사람이 함께 모이게 될 거라곤 그들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B 가족이 자주 갔다는 UCSD 근처 일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B 부부는 이전에 살던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저녁 역시 이들이 가고싶어했던 발라스트 포인트 브루어리에서. 

2021년 11월 13일 토요일

연수일기 149. 플루 백신, 리사이클링 센터

11월 10일 수요일. 291일째 날. 할로윈 저녁을 함께 했던 가족들을 집에 초대했다. 다섯 집 아이들이 모이니 온 집안이 시끌벅적. 체스와 장기, 그림 그리기와 레고 놀이에 아이들이 지겨워질 때쯤 차고에 비치 의자와 돗자리를 깔고 포터블 프로젝터로 해리포터 영화를 틀어주었다. 초등 저학년부터 중학생까지 모두가 좋아할만한 영화로 해리포터 만한 것도 없을 듯하다. 마침 얼마 전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다녀온 우리 아이들도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영화에 빠져있는 동안 어른들은 와인을 곁들인 수다에 빠졌다. 


11월 11일 목요일. 292일째 날. 연방 공휴일 중 하나인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이다. 이 날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 휴전 협정에 서명한 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오후에 코스트코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플루 백신을 맞았다. 의료 보험 없이도 월그린, CVS, 코스트코 등의 약국에서 맞을 수 있는데 코스트코의 회원 가격이 가장 저렴하다. 접수를 한 뒤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린 뒤에야 실제 접종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의 개인 의원이나 보건소에서라면 같은 시간에 스무 명 이상은 너끈히 접종을 받았을 것이다.  

약국 체인 별 접종 가격

11월 12일 금요일. 293일째 날. 출근하는 길에 근처의 리사이클링 센터를 들렀다. 캔이나 병에 담긴 음료를 살 때 영수증에 CA CRV 또는 CA REDEMP VA라고 적힌 항목이 있는데, 재활용 비용에 대한 수수료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금액을 리사이클링 센터에서 돌려받을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리사이클링 센터가 있었다. 직원에게 맥주 캔과 병, 페트병 등을 보여주니 이곳에서 수거가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 알려준다. 라벨에 CA CRV라는 표시가 있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고, 해당 표시가 없어도 재활용 표시가 있는 경우엔 대부분 받아주는 것 같았다. 종류 별로 나누어 갯수나 무게를 확인해 현금으로 돌려준다. 어렸을 적 집 앞 수퍼에 빈 병을 팔았던 기억이 났다. 우리가 머무는 잠시 동안에도 차 트렁크 가득 재활용품을 실은 이들이 두어 명 더 도착했다. 우리는 오늘은 첫날이라 가져온 재활용품 양이 많지 않았다. 1불 지폐 두 장과 동전 몇 개를 손에 쥐었다. 아파트 쓰레기장에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구분해 버리도록 되어있지만, 쓰레기를 버리면서도 과연 재활용이 잘 될까 싶어 마음 한구석이 조금 불편했었다. 이제라도 이런 시스템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다행이다. 다음 번엔 좀더 많이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재활용품 별 가격표

저녁에 딸의 초등학교에서 무비 나이트 행사를 했다. 아버지회에서 학교 운동장에 스크린과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경품 쿠폰과 팝콘도 준비했다. 오늘의 영화는 스페이스 잼 2.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꽤 많은 가족이 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이번 주 날씨가 여름만큼 따뜻해서 저녁에도 많이 춥지 않았다. 딸은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는데 이미 어두워진 뒤라 친구들을 찾을 수 없어 서운해 했다. 그닥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함께 온 아들도 심드렁. 그래도 이렇게 아이들과의 추억 한 가지가 또 생겼다. 

2021년 11월 10일 수요일

연수일기 148. Daylight Saving Time (2)

11월 7일 일요일. 288일째 날. 이곳에서 Daylight Saving Time (DST)라 부르는 썸머 타임이 끝나는 날이다. 지난 3월과는 반대로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늦춰야 한다. 당시에 기록했던 DST 제도에 대한 글을 다시 읽었다.

https://fmdoctor.blogspot.com/2021/03/31-daylight-saving-time.html

DST를 시작할 때는 이곳에 온지 얼마 안되는 시기라 모든 것이 새로웠기에 막상 시간대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변화를 톡톡히 느끼고 있다. 해 지는 시간이 한 시간 빨라지면서 오후 다섯 시에 해가 지고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깜깜한 밤이 되어 버린다.

이곳에선 밤에 밖에서 할 일도 없고 돌아다니기도 어려우니 해가 지면 꼼짝 없이 집에 있게 되는데, 한국과 달리 집 안의 조명이 밝지 않아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주변에선 이 시기에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특정 계절에만 겪는 우울증을 계절성 정동 장애(Seasonal Affective Disorder, SAD)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가을 겨울이 되면 우울증이 늘어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덴마크 연구팀의 최근 연구에선 DST가 끝나는 시기에 우울증 위험이 11% 늘어나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https://journals.lww.com/epidem/Fulltext/2017/05000/Daylight_Savings_Time_Transitions_and_the.7.aspx

DST를 적용하는 기간이 8개월, 나머지가 4개월이니 사실 썸머 타임보다는 윈터 타임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린다. 시간대를 바꾸면서 생기는 두 차례의 변화와 네 달 동안의 긴긴 겨울밤을 생각하면 아예 일 년 내내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 고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주 별로 DST 적용 여부가 달라 생기는 혼란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 같다(아리조나는 DST를 적용하지 않는다). 실제로 플로리다에서는 DST를 폐지하고 1년 내내 한 시간을 앞당기는 법안이 승인을 앞두고 있고, 캘리포니아에서도 주민 투표를 한다니 조만간 썸머 타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수도 있겠다.
근데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이렇게 여기저기서 한 시간씩 앞당기다 보면 어느 날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시계를 한 시간 앞당기기로 덜컥 합의라도 하게 되진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오전에 아이들과 수영장에서 한참을 놀았다. 오늘도 풀 안엔 우리 가족 뿐.


11월 8일 월요일. 289일째 날. 농구와 스케이트 보드 수업이 있는 날엔 아들과 둘만 드라이브를 하게 된다. 가족 모두가 있을 때완 기분이 다른데, 짧은 시간이지만 둘만 있는 그 느낌이 좋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듣기도 하고 요즘 듣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있다. 구글 뮤직을 공유하고 있어서 얼마 전부턴 각자 보관함에 정리한 음악을 들으며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기도 한다. 사실 아직 대중 음악을 많이 듣지 않은 아들의 취향을 옛날 음악으로 물들이는 작업 중이다. 비틀즈, 비지스, 사이먼앤가펑클, 퀸, 스팅. 아재 음악이라고 툴툴거리면서도 어느 순간 내가 수십 년간 들어온 음악을 흥얼거리는 녀석을 보면 행복해진다. 

아빠는 너하고 이렇게 둘이서만 드라이브를 하는 시간이 참 좋아. 

오늘 농구 수업에 가는 길에 깜깜해진 밤길을 운전하면서, 문득 보조석에 앉은 아들에게 고백했다. 뜬금 없는 고백에 녀석은 잠깐 당황한 듯 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좋아요. 근데 좀 오글거리네요.  


11월 9일 화요일. 290일째 날. 퇴근하는 길에 플루 백신을 맞았다. 지난 covid 부스터 백신과 마찬가지로 UCSD 안 드라이브 인 접종소에 예약했다. 

저녁엔 한국의 예과 학생들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자유주제탐구 강좌에 특강 형식으로 참여한지 3년 째이다. 연수 기간엔 참여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화상 강의라 다행히 이번 학기에도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의 학생 강의라 그런지 모니터의 학생들 이름만 봐도 반가웠다. 대부분 비디오를 끈 검은 화면이었지만. 

2021년 11월 7일 일요일

연수일기 147. 대면 연구 미팅, 영화관

11월 4일 목요일. 285일째 날. 오전에 Copa Vida에 들러 커피를 주문했다. 샌디에고의 로컬 체인 커피숍 중 하나이다. 동네 커피숍이지만 커피 맛이 괜찮고 분위기도 좋다. 샌디에고에서 맛있는 레스토랑을 찾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맛있는 커피숍과 브루어리는 많다. 

오랜만에 H 선생님 가족과 저녁을 먹었다. 우리보다 한 달 일찍 연수 생활을 시작해 출국도 그만큼 빠르다. 얼마 남지 않은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 생활을 준비 중이라 신경 쓸 게 많은 모양이다. 조만간 우리도 닥칠 문제들이다. H 마트에서 사온 연어회와 장어, 타마고야끼로 초밥을 만들어 대접했다. 지난 번 장인 장모님이 오셨을 때도 이렇게 만들어 먹었었다. 니기리 초밥은 아이들이 좋아해 그동안 외식 메뉴로 그나마 자주 먹었지만 이젠 이렇게 만들어 먹는 것이 낫다. 레스토랑의 니기리 초밥과 맛에 큰 차이가 없는데 연어와 장어로만 배불리 먹었을 때의 가격을 생각하면. 이래서 이곳에서 몇 개월을 살아도 외식을 선호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11월 5일 금요일. 286일째 날. 오늘부터 대면 연구 미팅을 시작했다. UCSD 캠퍼스에서 정식 오프라인 미팅은 처음이다. A 교수님을 직접 만난 것도, 회의실에 앉아 발표를 듣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절반 정도는 아직 화상으로 참여했지만 모니터로만 만났던 연구팀 멤버들을 직접 볼 수 있어 더 반가웠다. 오늘의 발표는 Hass Avocado Board 시니어 디렉터의 아보카도 연구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야말로 아보카도와 관련된 연구만을 하는 기관이지만 펀딩 규모도 크고 연구 성과도 많았다.(아보카도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 발표 말미엔 출판을 앞두고 있는 Habitual Diet and Avocado Trial (HAT) 연구 결과도 살짝 들을 수 있었다. 1천 명을 두 군으로 나누어 일상 식사와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실험군에 단지 아보카도 한 개씩 만을 6개월 동안 먹게 하면서 양 군의 차이를 확인한 재미난 연구이다. 

Avocado에 오롯이 집중했던 한 시간

올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대면 미팅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오랜만에 햇볕을 받으며 캠퍼스를 걸으니 기분도 좋았다. 

딸의 covid-19 vaccine 접종을 예약했다. 이번 주부터 5-11세 아이들에 대한 접종이 시작되면서 캘리포니아 지역도 해당 나이 아이들을 예약할 수 있게 되었다. 화이자 백신을 맞은 아들의 경우 접종 부위 통증 외에 큰 부작용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접종 후 컨디션이 안 좋을 수 있으니 주말이 나을 것 같다. 다음 주에 손님이 오고 이어서 추수감사절 연휴엔 뉴욕 여행을 갈 예정이라, 그 이후로 예약했다. 

저녁에 델 마르 하이랜드 쇼핑몰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극장이다. 영화는 오늘 개봉한 이터널스. 대사를 다 알아듣긴 힘들겠지만 아이들도 좋아하는 마블 영화라 대략적인 내용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 아이들과 줄거리를 미리 살펴보기도 했다. 

럭셔리 극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극장 시설은 괜찮았다. 모든 관이 비슷한 크기로 전동식 안락 의자에 누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상영관 내에서 간식과 음료 주문도 가능했다. 롯데 시네마 샤롯데나 메가박스의 부티크와 비슷한 형태인데, 영화 한 편에 20불이니 가격도 그리 비싸진 않다. 팝콘과 음료수, 맥주를 주문했다. 팝콘은 거의 아이들 세숫대야 만한 그릇에 가득 담아준다. 그런데 뭔가 조금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극장에서 느끼던,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조금은 흥분되고 들뜨던 기분이 들지 않는다. 한국의 멀티플렉스보다 분위기가 차분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극장 입구부터 느낄 수 있는 달달한 팝콘 냄새가 없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미국다운 스케일

영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서로가 이해하지 못한 줄거리를 퍼즐처럼 맞추느라 부산을 떨었다. 설명을 해주는 쪽은 주로 아내였는데, 중요한 대사들을 처음 듣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나에게 아들이 빙글빙글 웃으며 한 마디 한다. 아빠, 그것도 못 알아 들었어요? 자존심 상하지만 이제 아들이 나보다 영어를 잘 알아듣는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11월 6일 토요일. 287일째 날. 아이들이 늦잠을 잤다. 둘 다 오전까진 컨디션도 썩 좋지 않아 보인다. 어제 늦게 영화를 보고 들어와 피곤했나 보다. 

L 선생님 가족과 저녁을 먹었다. 샌디에고 생활이 벌써 네 달이 넘어가는데, 이제 적응이 되어선지 가족들 모두 처음보다 건강하고 편안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쯤이 한참 재미를 느끼기 시작할 때였던 것 같다. 앞으로도 선생님 가족에게 안온한 생활이 계속 이어지길. 

2021년 11월 4일 목요일

연수일기 146. 선거, 전세 제도

11월 1일 월요일. 282일째 날. 연구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 아침 운동은 대개 근처 공원을 뛴다. 가끔은 조금 멀리까지 산책을 가기도 하는데, 오늘은 큰길 건너편 동네를 구경했다. 아파트 옆 몰에서 큰길을 건너 솔라나 랜치 초등학교와 공원까진 몇 번 와 보았는데, 공원을 넘어서 가본 적은 처음이었다. 작은 밸리를 넘어 단독 주택 단지가 있다. 안쪽으로 갈 수록 새로 지은 걸로 보이는 집들이 나타났고, 맨 안쪽엔 공사 중인 집들도 많았다. 기존의 주택들과는 달리 좀더 모던한 형식의 건물들로 약간 판교의 주택 단지와 비슷한 느낌도 준다. 

주택 단지 건너는 밸리 지역이라 맨 끝에 위치한 집들은 전망이 좋아 보였다. 뒤뜰에서 밸리와 델 마르 컨츄리 클럽이 보인다. 전망이 좋은 집을 선호하는 미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위치였다. 전체적으로 동네가 깨끗하고 살기 좋아 보였다. 이쪽 단지는 인기가 많아 이미 분양이 끝났고 대기도 있다고 한다. 주택 가격도 꽤 높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더 오를 것이다. 한국인도 많이 구입했다고 들었다.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부동산 보는 눈은 알아줘야 한다. 


11월 2일 화요일. 283일째 날. 구글 캘린더의 미국 기념일 항목에 선거일이라 적혀 있어서 무슨 선거가 있나 했는데, 버지니아와 뉴저지 주 선거였다. 두 곳 다 민주당 강세로 지난 대선 때 바이든에게 훨씬 더 많은 표를 던진 지역이다. 하지만 개표 결과 버지니아는 공화당 후보가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뉴저지도 개표 막판까지 접전이 벌어지다 현 민주당 주지사가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버지니아에서 공화당 후보가 주지사에 당선된 것은 12년 만이라고 한다. 내년 중간 선거의 전초전 역할을 한 이번 선거에서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중간 평가 결과를 확인한 셈인데, 새 정부가 출범한지 겨우 아홉 달 되었지만 민심은 썩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판데믹에 대한 대처와 지지부진한 새 예산안이 민주당 후보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국민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부가 얼마나 있을지 싶다. 최근 물가가 많이 오르긴 했어도 지난 1년 동안 미국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살림살이 어려움이 자영업자가 많은 한국만 했을까. 최근 유권자들은 자신이 속한 계층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흔히 한다. 빈곤층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사회 안전망을 확대하려는 당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도 그렇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복잡한 셈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나라든 정치란, 선거란 참 어렵다. 


11월 3일 수요일. 284일째 날. 아침엔 안개가 가득 피었다가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졌다. 바닷가 도시라 그런지 아침엔 안개도 종종 끼고 아침엔 구름 낀 흐린 날씨가 잦다. 하지만 오후에는 항상 거짓말처럼 맑아져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 아내의 오늘 날씨 이야기에 이곳에서 십여 년째 사는 노리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That's San Diego."라고 했다고. 

안개가 잔뜩 낀 공원

한국의 집 전세 계약 만기 문제로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최근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오늘 세입자 분이 이사를 나가고 마무리를 다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작년에 연수가 미뤄지면서 조금은 갑작스럽게 집을 마련했던 건 연수를 다녀와서 머물 곳이 미리 정해지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는데, 올해 한국의 아파트 값 상황을 보면 당시 그렇게 결정했던 게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아내가 매주 참여하는 영어 채팅에서 얼마 전 한국의 렌트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전세에 대해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전세 제도는 한국 생활에서 외국인이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제도 중 하나일 것이다. 남의 집을 빌려 살았는데 2년 뒤 그 돈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다니. 이런 환상적인 제도가. 공짜로 집을 빌려주는 거 아닌가? 그럼 집 주인에게 돌아가는 이득은 뭔가? 보증금이란 개념을 설명하기도 어려웠지만(외국인의 경우 이 돈을 deposit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 돈을 정말로 그대로 돌려주는지를 몇 번씩 되묻는 통에 아내가 진땀을 흘렸다고. 과거의 높은 이자율과 부동산 가격의 상승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제도이지만,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는 외국인들 눈엔 비상식적인 계약으로 보이는 게 당연하다. 

아이들 옷을 사러 라호야에 갔다가 BJ's Restaurant & Brewhouse에서 저녁을 먹었다. 캘리포니아에선 괜찮은 브루어리 겸 식당 체인으로 알려져 있다. 분위기는 딱 미국 펍이고 맥주는 평범. 스테이크는 괜찮았지만 잠발라야는 너무 자극적이고 짰다. 사람들이 많이 먹는 딥디쉬피자도 괜찮아 보였지만 그럴 먹기 위해 굳이 다시 오진 않을 것 같다. 

2021년 11월 1일 월요일

연수일기 145. Trick or Treat

10월 30일 토요일. 280일째 날. 아니나다를까, 어제 예방접종의 여파로 오후까지 몸살기가 있었다. 오전엔 내내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 오후에 일어나 딸과 같이 호박을 깎았다. 도안에 맞춰 그려둔 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칼질을 해 고양이 모양을 완성했다. 

딸 친구 J의 가족과 바베큐장에서 저녁을 먹었다. 두 학기째 단짝이고 같은 아파트에 살아서 진즉 식사를 함께 하려 했는데 이제야 기회를 만들었다. 두 가족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LA 갈비를 준비해 오셔서 배불리 먹었다. 딸과 친구는 세 시간이 넘게 자쿠지와 풀을 왕복하며 물놀이를 했다. J의 아빠는 8년 전 주재원으로 미국에 왔다. 2년의 근무 후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첫째 아들이 미국에 남기를 원해 미국 생활을 연장했고, 결국 영주권까지 받았다고 한다. 원래의 계획과 달리 기약없이 길어진 타국에서의 삶은 고달팠을 것이다. 특히 J 엄마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 그래도 최근엔 지인의 도움으로 새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우연히 얻었다고 했다. 고단한 생활에 주어진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가족 모두가 건강하길. 


10월 31일 일요일. 281일째 날. 할로윈이다. 오후가 되면서부터 아파트 단지 안에도 코스튬을 입고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해가 지기 전부터 할로윈 장식에 불을 켜고 초콜릿과 캔디 박스를 준비했다. 이른 저녁을 먹는데 스파이더맨 복장의 아이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첫 번째 방문. 

아이들은 아파트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니기로 했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코스튬을 차려입은 아이들을 데리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호그와트 학생이 셋, 낫을 든 해골이 둘, 마녀, 드라큐라, 뿔 달린 악마, 그리고 정체 모를 티비 스타 각각 한 명씩이 모였다. 가까운 집 대문부터 두드리기 시작한다. 우리 아파트만 해도 삼분의 일 정도는 대문 앞에 할로윈 장식을 한 것 같다. 

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에게 그저 사탕만 나누어주는 사람들도 있고, 직접 코스튬을 입고 기다리다 아이들을 깜짝 놀래키며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백인 부부는 아예 집 옆 주차장에 캠핑 의자를 놓고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사탕 바구니가 빠른 속도로 채워졌다. 멀찌감치 아이들을 따라가며 지켜만 봐도 즐겁다. 네댓 명씩 무리를 지은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연이어 지나간다. 아파트 전체가 평소보다 달뜬 분위기였다. 

출발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동안 해가 완전히 져서 깜깜해졌다. 아파트를 벗어나 큰길 건너 타운하우스 단지를 방문했다. 이곳은 할로윈 장식을 하지 않은 집을 찾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이고 집 입구와 앞뜰의 장식도 더 다양하고 화려하다. 단지 입구의 집에선 흥겨운 음악을 크게 틀고 음산한 조명 아래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앉아 아이들을 기다렸다. 어린 아이들이 많았지만 종종 중학생 쯤으로 보이는 늘씬한 여자 아이들도 깔깔거리며 사탕을 얻으러 다녔다. 

아파트에 돌아와 빠진 집들을 한 바퀴 더 돌고 난 아이들은 C 선생님 댁에 모여 사탕을 교환하기로 했다. 어른들도 식탁에 모여 앉아 예정에 없던 모임을 시작했다. 덕분에 늦은 시간까지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헤어지기 못내 아쉬웠던 엄마들은 조만간 다시 브런치 모임을 하기로 약속까지. 이렇게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추억 하나가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