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30일 월요일

기러기 아빠의 건강

2007년 영화 ‘우아한 세계’에서 주인공인 중년 남자는 조직폭력배이면서 가정을 건사하느라 하루하루 애쓰는 평범한 가장이다. 영화는 직업인으로서의 조직폭력배,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빠의 역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는 주인공의 비루한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가족을 캐나다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가 된 그가 혼자 라면을 먹다 흐느끼는 장면은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 중 하나다. 2017년 개봉한 ‘싱글 라이더’의 주인공 역시 기러기 아빠이다. 비극에만 초점을 맞춘 내용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가족을 지키고 싶어했던 주인공은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갈 비행기표만 사두고 약물과 알코올 남용으로 쓸쓸히 죽는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떨어져 사는 가족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조기 유학 관련 통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숫자를 짐작할 수 있다. 조기 유학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인데, 한국교육개발원의 유학생 통계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경우 2000년 705명에서 2006년 13,814명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조기 유학생 중 절반 정도에서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것으로 추산하며, 이들 중 대부분은 엄마와 아이들만 외국에 나간 케이스이다.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그 즈음이다. 이후에는 2009년 글로벌 경제 위기와 조기 유학의 인기 감소로 가족과 떨어져 사는 기러기 아빠 수도 줄었다. 교육통계서비스 자료에 따르면 2020년에는 초중고생 8,458명이 외국 유학을 떠났는데, 이는 코로나19 여파로 전년도에 비해 절반 정도로 감소한 숫자이다. 하지만 올해는 판데믹 상황이 나아지면서 다시 숫자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해외 유학이 줄고 대신 국내 유학이 늘어나면서 최근엔 국제 학교가 있는 제주도와 같은 지역에 가족을 보낸 국내 기러기 아빠도 많다.

기러기 아빠는 대개 4-50대이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나이인데다 혼자 지내며 생활 습관이 나빠져서 관련 질병에 취약해질 수 있다. 불규칙한 식사와 과음으로 중성지방이 높아지는 이상지질혈증이나 간기능 이상, 위장 질환이 생기는 것이 흔한 예이다. 이러한 신체 질환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외로움을 겪으면서 생기는 우울증 역시 큰 문제인데, 악화될 경우 자살 등 극단적 선택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가족과 떨어져 장기간 혼자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 기상과 취침 시간을 일정하게 하고 간단하게라도 아침 식사를 한다. 규칙적인 운동은 필수다. 특별히 불편한 증상이 없더라도 건강검진을 빼먹지 않고 받아야 한다. 외로움은 회식이나 술을 통해 해결하기보다 취미 생활과 운동을 매개로 한 동호회 활동을 통해 달래도록 한다. 친구나 동료, 친지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외로움과 고민을 해소할 필요도 있다. 가족을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스마트폰, 컴퓨터를 이용해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이 좋다. 한국의 아빠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든 모습이나 못난 모습을 가족, 특히 자녀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가족과도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고통과 어려움을 숨기고 의연한 척하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힘들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를 가족과 공유하고 해결책을 함께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2년 5월 23일 월요일

암 검진 몇 살까지 받아야 할까

우리 나라 국민 네 명 중 한 명은 암으로 죽는다. 암은 사망 원인으로 수십 년째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그 비율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로 인해 암 검진의 중요성도 부각되고 있다. 암 종류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암 발생과 사망 위험이 높아지는 40대부터 정기적인 암 검진을 권한다. 그렇다면 몇 세까지 검진을 받아야 할까?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검진을 받는 것이 좋을까?

암 검진은 이득(benefit)과 위해(harm)가 모두 존재한다. 암 검진의 이득은 해당 암으로 인한 사망의 감소이고, 위해는 거짓 양성 결과로 인한 추가 정밀 검사, 정신적 스트레스, 서서히 진행하는 암에 대한 과진단(overdiagnosis)과 과치료(overtreatment) 등이다. 대개 만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칭하며, 75세 이상을 고령 노인, 85세 이상을 초고령 노인으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75세 이상의 고령 노인에서 암 검진의 이득과 위해의 크기는 건강한 장년 성인과 다르다. 암의 경우 사망 감소라는 가장 중요한 이득이 발생하기까지는 대개 10년 이상이 걸린다. 기대여명이 이보다 적은 경우에는 이득은 확실치 않은 반면 검사와 치료 합병증 등의 위해는 커질 가능성이 많다. 고령 노인에서 수술이나 항암 치료 등의 효과는 떨어지는 반면 심각한 부작용의 위험은 높아지는 것이 예이다. 그러므로 미국 암 협회를 비롯한 많은 전문 학회들이 기대여명이 10년 이하인 경우 암 검진을 받지 않도록 권한다. 

국내 지침도 마찬가지이다. 2015년 발표된 국립암센터 권고안의 경우 위암은 74세까지 2년마다 내시경으로 검진을 받도록 하지만 75-84세에는 실익을 따져본 뒤 결정하도록 하며 85세 이상에선 검진을 권고하지 않는다. 이외에도 대장암은 80세, 유방암은 69세, 폐암은 74세까지만 검진을 권장한다. 암 검진에도 은퇴 나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다르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는 기대여명이 9년 미만 노인의 절반 이상이 전립선암, 유방암, 자궁경부암, 대장암 등의 검진을 받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무료로 암 검진 사업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더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2021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75세 노인의 기대여명은 13.2년이다. 75-80세 이상의 경우 암 검진의 이득보다 위해가 클 수 있어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국가 암 검진에는 검진 종료 연령이 없으므로 본인이 원한다면 연령에 관계없이 검진을 받을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암검진 수검 대상자 중 75세 이상은 2,662,759명이었고 그 중 1,012,215(38%) 명이 검진을 받았으며, 이중 85세 이상도 90,132명에 달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나이에 상관 없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만, 암 검진에서 나이는 중요하다. 고령 노인은 조기 발견과 치료로 얻는 이득보다 잃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기대여명을 낮추는 병을 이미 가지고 있거나 건강 상태가 나쁜 경우엔 더 그렇다. 그럼에도 건강보험공단에선 나이 제한 없이 암 검진 안내문을 보내고, 90세가 넘는 노인이 부축을 받으며 내시경을 받으러 오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종종 생긴다. 국가 검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시혜나 복지로 여기는 인식은 이러한 문제를 부채질한다. 이득보다 해가 클 수 있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므로 “이제 암 검진은 그만 받아도 됩니다.”란 말을 들었을 때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의료진 입장에선 “나이 들었다고 검진도 받지 말라니 죽으란 말이냐”는 원망을 받을 것이 염려되어 암 검진 중단을 권하지 못하는 일이 많은데, 암 검진의 근거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고 검진 중단에 대해 상의할 필요가 있다.


* Statistics Korea. Korean Statistical Information Service [Available from: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350&tblId=DT_35007_N010

* 위암 74살, 대장암 80살… 암 검진 ‘은퇴 나이’ 생겼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708988.html

* [김철중의 생로병사] 노년기에 너무나 많이 행해지는 검사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8/2017082803248.html

2022년 5월 20일 금요일

항생제 내성에 대해

신종 감염병의 연이은 유행으로 감염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최근의 신종 감염병은 세균이 아닌 바이러스로 인한 질환이 대부분이라, 세균을 치료하는 항생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지만 감염병의 치료와 예방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생제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항생제의 개발은 현대 의학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다. 1940년대에 알렉산더 플레밍이 푸른곰팡이를 이용한 페니실린을 개발했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언젠가 감염병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세균은 내성을 통해 항생제에 대응하는 법을 빠르게 터득했다. 이후의 감염병 치료 역사는 항생제 내성 세균과의 싸움에 대한 기록에 가깝다. 기존 항생제 내성균을 퇴치하는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하면 수 년 내에 새 항생제에 대한 내성균이 출현한다. 새로운 항생제의 개발 속도에 비해 세균이 내성을 획득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면서 항생제 내성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보건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가장 강력한 항생제 중 하나인 반코마이신에 대한 내성균은 국내에서도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항생제 내성의 주요 원인으로는 오남용이 꼽힌다. ‘오용은 잘못 사용하는 것, ‘남용은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국내 인체 항생제 사용량은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에 속하며, 2021년 발표된 국가 항생제 내성 관리 대책에서는 항생제 사용량을 5년 내 20퍼센트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항생제의 남용을 줄이는 것 못지않게 오용을 피하고 정확히 사용하는 것도 중요한데, 항생제를 처방대로 복용하지 않고 불충분하게 먹는 것이 오용의 대표적 예이다. 이를 줄이기 위해선 항생제 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내성은 견딜 내耐, 성품 성性으로 적는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뜻 풀이는 다음과 같다.

1. 약물의 반복 복용에 의해 약효가 저하하는 현상

2. 생명 세균 따위의 병원체가 화학 요법제나 항생 물질의 계속 사용에 대하여 나타내는 저항성

3. 생명 환경 조건의 변화에 견딜 수 있는 생물의 성질. 내열성(耐熱性), 내한성(耐寒性) 따위가 있다.

많은 이들이 이중 첫 번째와 두 번째 개념을 혼동한다. 첫 번째는 사람의 몸이 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균 자체가 변하는 것이다. 항생제 내성은 두 번째 개념, 즉 세균에 생기는 변화이다. 항생제를 반복해 쓰면 약이 내 몸에 쌓여 약효가 줄어든다는 믿음 때문에 복용을 꺼리는 경우가 있지만 이런 식으로 내 몸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부작용과 내성을 걱정해 항생제를 부적절하게 복용한다. 충분한 기간을 복용하지 않고 조기에 중단하면 당장 병은 낫더라도 살아남은 균이 내성을 획득하고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17년과 2019년 일반인 대상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증상이 나아지면 항생제 복용을 중단해도 된다.’고 답해 인식 개선이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이자 번역가인 강병철 작가는 이러한 현상은 부정확한 개념어가 일으킨 촌극이며, 잘못된 인식을 줄이기 위해 내성이란 용어보다 ‘(항생제) 저항성이란 용어를 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영어의 예를 보자면 위의 첫 번째 개념에 대한 단어는 ‘tolerance’, 두 번째 개념에 대한 단어는 ‘resistance’로 전혀 다르다.

 

* 질병관리청. 내 몸을 위한 항생제, 건강을 위해 올바르게 써주세요! 2021.11.18 보도자료

* 강병철. 무엇이 아이의 건강을 위협하는가-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비판. 스켑틱 72017.

2022년 5월 19일 목요일

내 가족이 암에 걸렸을 때

한국인 세 명 중 한 명은 사는 동안 한 번은 암에 걸린다. 신규 암 발생자 수는 201522만명에서 201925만명으로 늘었으며 최근 매해 꾸준히 증가해 왔다. 예전엔 암이라 하면 죽을 병으로 생각했지만 그런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조기 발견과 치료법의 발전으로 암 생존율은 크게 늘었다. 2019년 기준 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은 70.7%, 십 년 전보다 5퍼센트 가량 높아졌다. 암에 걸려도 열 명 중 일곱 명은 5년 이상 생존하는 것이다. 같은 해 기준 암 유병자(암을 진단받고 치료 중이거나 완치된 사람)215만명이다. 우리나라 국민 25명 중 한 명이 암을 앓았던 사람인 셈이다.

암 환자가 늘어나면서 암 생존자의 삶의 질과 건강 문제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암 환자를 간병하는 가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들은 간병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경제적 스트레스로 암 환자 못지않은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환자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염려해 자신의 문제를 참거나 숨기는 경향이 있다. 암을 진단받은 환자의 가족은 대부분 보호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게 느끼며, 죄책감을 갖는 경우도 흔하다. 예전에 잘못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가족이 암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행동이 가족을 암에 걸리도록 만든 것은 아니며, 가족이 암에 걸리는 것을 내가 막을 수도 없다. 스스로에 대한 책망은 환자에게나 환자를 돌보아야 할 가족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병원에서 환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평소 환자와 연락하지 않고 지내던 가족이 갑자기 나타나 의료진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다 해달라"고 하는 상황을 종종 보게 된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데다 환자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이 더해진 것이 이런 행동의 이유일 것이다. 더 이상의 치료가 의학적으로 의미가 없음에도 가족간의 갈등으로 연명 치료를 지속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빗댄 '캘리포니아에서 온 딸 신드롬(Daughter from California Syndrome)'이라는 표현이 있는 걸 보면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위중한 병을 앓는 환자의 가족이 느끼는 죄책감은 그만큼 보편적인 감정인 것이다.

암 치료라는 힘든 여정을 잘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환자와 가족 모두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관리해야 한다. 가족이 건강해야 환자도 치료를 잘 받고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내 연구에 따르면 암 환자를 돌보는 가족 세 명 중 두 명이 우울 증상을 겪으며, 실제로 우울증이 발생할 확률도 1.6배 높았다. 전문가들은 가족 모두에게 역할을 분배해서 한 명이 전담하는 독박 간병을 피하도록 하며, 주 간병인 역할을 맡더라도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자신을 위해 쓰라고 조언한다. 아파하는 환자를 두고 내 시간을 챙기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신을 위한 휴식은 환자를 더 잘 돌볼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 Rhee YS, Yun YH, Park S, Shin DO, Lee KM, Yoo HJ, Kim JH, Kim SO, Lee R, Lee YO, Kim NS. Depression in family caregivers of Cancer patients: the feeling of burden as a predictor of depression. J Clin Oncol. 2008;26(36):5890–5895.

* 조영대, 전용우, 장성인, 박은철. Family Members of Cancer Patients in Korea Are at an Increased Risk of Medically Diagnosed Depression. 예방의학회지 2018;51(2):1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