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2일 목요일

다이하드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 저녁이면 아이들과 영화를 본다. 웬만한 초딩용 애니는 두루 섭렵한고로 그렇잖아도 최근엔 애니 외의 장르를 곁눈질한 터였다.(무엇보다 디즈니건 드림웍스건 픽사건 이제 엄마 아빠가 더이상 애니는 못보겠어!) 더빙판을 구할 수 없어 자막으로 보았던 '프리윌리'의 경우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재미있게 본 눈치였다. 그에 반해 '인디아나존스’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아이와 함께 볼 영화로 '(키아누리브스와 산드라블럭의) 스피드'를 골랐는데 아이가 손에 땀을 쥐어가며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다는 모 페친의 글을 보고, 우리 집에서도 며칠 뒤 같은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다. (두 초딩은 같은 나이다.) 만화가 아니란 소식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던 우리 집 초딩 역시 영화의 줄거리를 대강 이야기해줬더니 나름 관심을 보인다.
20년이 넘은 영화는 세월만큼이나 때깔이 구리고 대사는 유치하며 편집은 툭툭 끊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녀석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가끔은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늦게 엉뚱한 소리를 하긴 하지만. 여섯 살 둘째는...... 뭐 그냥 패스하자. 아이들과 함께 볼 명목으로 골랐건만 막상 가장 신이 난 관객은 대학 초년생 시절 이 영화를 보고 키아누리브스의 팬이 되었던 아내였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점이 나쁘지 않음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얻은 아빠와 엄마는 올디스벗구디스를 외치며 당분간 추억의 걸작 시리즈를 상영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다이하드'.
다이하드가 어떤 영화인가. 80년대 최고의 액숀 영화이고 브루스윌리스를 일약 최고의 액숀 배우로 만들어 주었으며, 한국에선 서울올림픽 기간에 개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 대박을 일으킨 영화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론 단체 관람 후 엔딩크레딧을 보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던, 십대 시절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던 것이다.
생김새가 다른 서양 배우들의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아이가 가끔 우리 편과 나쁜 놈들을 헷갈리긴 했지만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껄쩍지근한 뒷맛이 남은 건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열광적인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내친김에 이번 주말엔 다이하드 2를 보기로 했다. 참고로 난 존 맥티어넌의 1편보단 레니 할린의 2편을 더 좋아한다.


개고생을 하는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맥클레인 형사 캐릭터는 액션과 함께 영화를 이끄는 두 축이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지금은 촌시러우나 당시엔 그렇지 않았을) 유들유들한 멘트들을 열 살 관객이 이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계속되는 총격전과 폭파씬이 좀 지루해졌는지 약간 삐딱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악당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조용히 추적하는 맥클레인
- 쟤네가 다 나쁜 놈들 아냐? 근데 왜 그냥 보내?
좁은 송풍기 통로로 들어가기 전 윗옷을 벗어던지는 맥클레인
- 옷은 왜 벗는 거야?
맥클레인의 총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악당들
- 저기 나오는 나쁜 놈들은 다 바보인 것 같아.
자동 소총 탄피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격전 중에
- 영화에서 나오는 건 다 가짜 총 아냐?
"야, 그렇게 생각하면 아예 영화를 보지 말아야지. 또 만화는 뭐 하러 보냐? 다 그림인데."
향수에 젖은 40대 관객들의 흥을 딱딱 끊어주는 말에 짜증이 나서 한마디 던지니 입을 다물고 샐쭉해진 녀석. 악당의 비행기가 폭파되고 엔딩크레딧과 함께 '렛 잇 스노우'가 울려퍼지는데 마지막 멘트를 날리고 휙 나간다.
"정말 다이 하드(Die Hard)네."
브루스 형님. 욕 보셨어요.

2018년 2월 20일 화요일

가족이 해야할 일

- 네 아버지가 말이다.

아이들이 잠들자 어머니께서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보통은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가기 전에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를 드리고 안방 중문을 닫고 나오는데, 하고싶었던 말씀이 있었나보다. 어머니의 말씀은 평소보다 더 길게 이어졌지만 내용은 그간 종종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환갑을 넘으시면서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 흉을 보셨다. 그렇다고 친구나 이웃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성격은 아니신지라 아버지에 대한 넋두리를 듣는건 자연스레 누님과 나의 몫이 되었다. 겨우 두세달에 한번씩 본가에 갔었던 나에 비해 가까운 곳에 사는 누님은 훨씬 자주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을 것이다. 지난 일년간 누님이 조카의 입시 준비 때문에 왕래가 줄어들자 그동안 쌓인 게 많으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다. 설 전날 밤늦게 시작된 모자간의 대화는 내가 또 아들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구나 하는 어머니의 자조 섞인 후회로 끝이 났다.

설날엔 처가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평소와 같이 반주를 얼큰하게 하신 장인께선 일찍 잠이 드셨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책상에 앉았는데 거실에서 장모님과 아내가 나누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 네 아빠가 말이다.

장녀인 아내는 장모님을 닮은 걸로는 외모와 성격 모두 딸 셋 중 제일이다. 그래서인지 장모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내이다. 아내는 꼼꼼하고 모든 일들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걱정이 많아지는 성격인데, 장모님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장인께선 다소 즉흥적이고 급한 성격이시라 종종 말다툼이 생기곤 한다. 최근엔 처제의 결혼을 앞두고 신경을 쓰시면서 두 분 사이에 충돌이 늘어난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온 아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하고싶은 말씀이 많으셨나 봐. 따로 이야기하실 곳도 없을텐데 이럴 때라도 잘 들어드려야죠.”

연휴 마지막 날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아내와 다음 주에 있을 처제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들 녀석이 짜증 섞인 말투로 이야기한다.

-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니깐.

제딴에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귀기울여 듣지 않고 다른 대화만 하고 있으니 골이 났나보다. 열한살이 되었지만 아직까진 조잘조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내용이라 해봐야 친구랑 했던 놀이, 최근에 봤던 만화책이나 티비에서 보았던 만화 영화 이야기 정도가 다이지만. 요즘엔 하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포켓몬고 게임에 대한 것이다. 주말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포켓몬들의 소식을 반복해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엄마 아빠에게 자주 말을 건네주는 걸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남자 아이는 사춘기가 되면 말수가 확 줄어든다는데 언젠가 그 시기가 오면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할까 미리 걱정을 하기도 한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렸을 적엔 나도 어머니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랑 했던 놀이, 문구점에 들러 했던 뽑기 이야기나 텔레비젼 만화 이야기 정도가 대부분이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이젠 짐작이 간다. 그땐 주로 내가 말을 하고 어머니가 그걸 들어주셨겠지만 내가 중년이 된 지금은 어머니가 말을 하고 나는 듣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방통행에 가까운 대화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때로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족간에 가장 중요한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개학날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었다.

방학 내내 늦잠을 자는데 익숙해졌던 아들은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잠이 덜깬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밥알을 한알한알 세듯 입을 오물거리던 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빠. 근데 왜 오늘은 늦게 출근해?"
"오늘은 아침에 진료가 없어. 개학날이기도 해서, 너랑 같이 나가려구."
"그렇구나."

심드렁하게 대답한 아이는 숟가락으로 밥공기를 뒤적거렸다.

남자 아이의 등교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를 닦고, 까치집이 생긴 머리칼에 물을 묻혀 가라앉히고, 허물을 벗었다가 새 껍질을 쓰듯 옷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두터운 자켓을 입고, 가방을 메고 현관에 서기까진 십분 정도면 충분했다.

영하 십도를 훌쩍 넘는 아침 날씨였다. 며칠째 한파였으므로 단단히 채비를 하고 나왔지만 코끝이 시렸다.

"아빠가 하나 들어줄게."

개학날이라 들고갈 준비물과 과제가 많았다. 양손에 든 가방 중 하나를 선뜻 건네지 않고 망설이던 아이는 머뭇거리며 로봇영재 수업 가방을 내밀었다.

학교까진 오 분이 채 안되는 거리이다. 어제까지와 달리 아파트단지 내 인도는 학교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약간의 흥분과 소란스러움이 섞인 공기가 볼을 간질였다. 딱 하루 차이인데 아침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새로 출현한 포켓몬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이는 학교가 가까워지면서 불편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빠, 이제 그 가방 나한테 줘."
"왜, 얼마 안남았잖아. 그냥 아빠가 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아이참. 내가 들 수 있어. 그냥 줘."

녀석은 아빠와 나란히 등교를 하는게 부끄러운 눈치였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녀석이 이겼다. 가방을 건네받아 양손에 짐을 든 아이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아빠, 나 간다."

녀석은 재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너 재잘대는 아이들 틈에 끼어 학교 후문 안으로 사라졌다. 한번쯤 뒤돌아 손을 흔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그사이 아빠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