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9일 목요일

어느 '저자의 말'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를 엮은 첫 번째 책이 나온 이후 벌써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채널예스에 연재를 시작한 때부터 치자면 육 년입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빠릅니다. ‘첫 번째’란 말은 곧 첫 번째에 그치지 않음을, 그러니까 ‘두 번째’가 존재함을 의미하겠지요. 반딧불 의원의 두 번째 책에 실릴 저자의 말을 쓰면서 이제는 첫 번째라 불리게 될 책을 만들던 때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밤에 여는 작은 의원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과정을 그저 놀랍고 기쁘게 지켜보던 그때는 저자의 말을 다시 쓰게 되리란 기대를 감히 품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작은 진료실이 있는 동네의원과 그곳을 찾는 환자들의 사연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를 이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조금씩 생겼지만 금세 실행에 옮기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해외연수로 이전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이면 초고를 완성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책으로 엮어낼 만큼의 분량을 더 쓰는 데에 반년이 더 걸렸고, 이후로 책 출간까지 또 일 년이 지났습니다. 늘 그렇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빠릅니다.

전문의가 된 뒤로 줄곧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동네의원 의사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게 꼭 밤에만 여는 의원은 아니라 해도. 지금도 가끔 상상합니다. 환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진료실 밖에서의 사는 모습도 좀 더 들여다보는 그런 작은 의원을. 종종 왕진도 나갈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반딧불 의원의 진료실에는 제 사사로운 바램도 조금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진료실은 멀지 않은 곳에 실재합니다. 정부의 시범사업을 통해 왕진에 참여하는 동네의원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동네의원에서 단골 환자의 주치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는 의사 모두의 마음을 조금씩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읽은 어느 독자의 후기를 떠올렸습니다. 책에서는 동네의원을 믿고 치료를 잘 받으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반딧불 의원이 환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 같은 공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책 속에서처럼 몇 번의 진료로 환자의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질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다 보면 의사로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 매 순간 깨닫고 겸손해지게 됩니다. 다만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동네의원과 대학병원이 각자의 역할을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이 환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더 많은 이들이 동네의원을 먼저, 그리고 꾸준히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지난 오 년 동안 도움을 준 이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의힘 김병준 대표와 채널예스 엄지혜 기자께 감사를 전합니다. 두 분이 마련해준 기회가 없었다면 반딧불 의원 이야기도, 두 권의 책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두 권의 책을 내는 동안 김진형, 유승재, 김서영, 우상희, 이렇게 네 분의 편집자와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제게 재능 있고 성실한 편집자들과의 작업은 큰 즐거움이자 깨달음이었습니다. 지금 제게 편집자란 단어는 이들의 모습을 적당히 합쳐놓은 것을 뜻합니다. 이들은 원고의 교정 이외에 원고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 서도 종종 의견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경우 그 조언을 충실히 따랐는데, 되돌아보면 무엇보다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두 권의 책은 이들과의 공동 저작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제 몫일 것입니다.

첫 책을 함께 작업했던 김진형 편집자께는 좀 더 특별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건강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에 지금과 같은 페이크 다큐 형식의 글을 제안해준 이가 그였습니다. 그러니 반딧불 의원은 태생부터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한 편의 원고를 보낼 때마다 그는 빨간펜 선생님처럼 첨삭과 의견을 더한 답신을 보냈고, 책으로 빚기에 글의 얼개가 부족했던 초창기에 그 피드백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고가 과연 읽을만한 것인지 불안해하다 그의 검토를 받고서야 안심을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가 편집을 담당한 다른 책들을 보면서 첫 편집자로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운 좋은 일이었는지 실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첫 책의 마지막 장에 그의 이름이 함께 인쇄되지 못한 점이 늘 아쉬웠습니다. 이 글로 뒤늦게나마 그 아쉬움을 조금은 덜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마지막엔 항상 가족이 있습니다. 아내 지령은 모든 원고의 첫 독자였습니다. 다독가인 그의 객관적인 시각은 원고를 쓸 때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일깨워 주곤 했습니다. 처음 밤에 여는 의원의 이름을 고민할 때 반딧불이란 이름을 냉큼 붙여준 첫째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말 밤 서재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아빠에게 놀아달라 칭얼대던 둘째 아이는 이제 책상 옆 소파에서 얌전히 책을 읽으며 작업이 끝나길 기다릴 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 같은 존재인 세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과 애정을 전합니다.

2023년 초가을에


탕후루란 무엇인가

일주일에 한 번 탕후루 가게에 들른다. 대개 월요일이나 수요일 밤 열시, 매번 같은 시간이다. 

사거리 대로변 프랜차이즈 탕후루 가게는 막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이들로 북적인다. 탕후루 가게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면서 오늘은 뭘 골라볼까 생각한다. 보통은 두 개를 산다. 둘 중 하나는 집에서 탕후루를 기다리고 있는 딸이 고른 걸로. 딸은 요즘 샤인머스켓에 꽂혀있다. 예전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아들을 데리러 올 때마다 탕후루를 사갔는데 밤늦게 설탕 범벅인 간식을 먹는 걸 못마땅해하는 엄마와의 합의를 거쳐 탕후루를 사가는 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기로 했다. 

"블랙사파이어랑 샤인머스켓. 포장이요."

가게 안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해 말소리를 높여야 주문을 전달할 수 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묻는다. 

"자주 오셨죠?" 

나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머뭇거리다 한 박자 늦게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비스로 방울토마토 하나 더 드릴께요." 

활기찬 말투였다.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어진 눈매가 웃는다. 옆에서 포장을 담당하는 직원이 재빠르게 탕후루 세 꼬치를 보냉 봉투에 넣었다. 덕분에 그날 밤엔 아이들에 더해 나까지 탕후루를 하나씩 들고 뿌듯해했다. 이후론 매번 그랬다. 두 개를 시키면 하나 더 서비스. 매장의 매니저쯤으로 보이는 초승달 눈매의 직원은 생색을 내는 일도 없었다. 두 개를 주문하고 별다른 설명 없이 포장 봉투를 받아 열어보면 꼬치 세 개가 들어있었다. 

어느 월요일엔 차를 주차하는 골목 안쪽에 새로 오픈한 가게에서 탕후루를 샀다. 요즘 탕후루 가게가 우후죽순처럼 생긴다던데.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가게는 조그마했고 수더분하게 생긴 사장님 혼자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오픈 기념 할인 행사 중인 그곳에선 설탕 대신 대체 감미료를 쓴다고 했다. 가격도 싸고 건강에도 나을 것 같은 새 가게의 탕후루는 모양은 비슷했음에도 이전에 먹던 그 맛은 아니었다.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가게가 오래 갈 수 있을까. 가게를 열면서 대출을 과하게 받진 않았을까. 매출은 충분할까. 골목은 지나다니는 아이들도 훨씬 적은데.

다음 주엔 다시 대로변 가게에서 탕후루 두 개를 골랐다. 여느 때와 같은 직원이 주문을 받았다. 사실 지난 주에 다른 가게에서 탕후루를 사면서 그를 배신한 것 같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주문을 받은 그가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말했다.

"세 개 더 골라보세요. 오늘은 서비스 많이 드릴께요." 

나와 아들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마주보다가 꼬치 다섯 개가 든 묵직한 포장 봉투를 받아들고 가게를 나왔다. 아이들은 신나했지만 나는 마음 한켠이 조금 찜찜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초승달 눈매의 직원이 내가 지난 주에 다른 가게를 갔던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오랜 연인에게 외도를 들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딱 한 번 뿐이었는데. 

성경의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탕자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던 탕자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환대를 베푼다. 매장을 닫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어차피 남을 상품으로 단골 고객에게 인심을 썼을 뿐일 거라는 생각도 탕후루 세 개만큼의 용서와 환대를 받은 내 찜찜함을 지우진 못했다. 골목 안 조그만 가게의 사장님도 떠올랐다. 분명한 것은 그 사거리에서 이제 다시는 골목 안 가게를 포함해 다른 탕후루 가게에 가진 못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날 밤, 아이들이 때아닌 탕후루 파티를 벌이는 동안 나는 바삭이는 설탕 코팅과 입안을 가득 채우는 과즙을 느끼며 자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탕후루란 무엇인가.

2023년 11월 1일 수요일

꿈 이야기

지지난 토요일, 진료 중에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딸은 심심하다고 전화하기도 하지만 아들은 필요한 경우에만 전화를 한다. 학교를 안가는 토요일 아침이라 늦잠을 잤을텐데, 여느 토요일보단 이른 시간이다. 이럴 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마음 한켠이 덜컹한다. 마침 다음 환자가 들어오기 전이라 급히 전화를 받았다.

조급한 내 마음과 달리 아들 목소리는 느긋하다. 그날 오후에 기차를 탈 예정이었는데, 기차 시간과 언제 출발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막상 별것 아닌 용건임을 확인하자 긴장이 풀리며 살짝 짜증이 났다. 간단히 출발 시간을 이야기해주고 끊으려는데 아들이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지 말끝을 흐리고 우물쭈물한다.

"아빠 진료 중인데, 더 할 말 있니?"

"응...... 그게...... 이상한 꿈을 꾸었어."

"무슨 꿈인데?"

아들이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꿈을 꿨길래.

"꿈에서...... 아빠가 죽었어. 아빠가 죽는 꿈을 꿨어."

그러더니 서럽게 운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좀 우습기도 해 뭐라 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엔 환상과 실재가 뒤섞여 실제로 겪은 일보다 더 생생하고 또렷하게 각인되기도 한다. 구체적인 내용이 잊혀진 뒤에도 그때 느꼈던 감정과 기분은 오래 남는다.

훌쩍임은 이내 잦아들었다. 중학교 3학년. 터져버린 울음이지만 악몽을 꾸었다고 계속 울기엔 너무 커버린 아이다.

아빠 괜찮다고, 좀 이따 집에서 보자고 아이를 다독이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정신없이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면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종종 자는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 덜컥 겁이 날 때가 있었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는 행복과 동시에 소멸과 부재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한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어느 트로트 가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마음을 노래했는데 아이들의 자는 모습이 딱 그랬다. (물론 깨어 있을 땐 반대의 경우도 자주 있다.)

좀 유치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수백 번은 느꼈을 그 아이러니한 감정에 대한 약간의 보상을 받은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