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8일 화요일

반짝반짝 빛나는

- 스케이트랑 달리기랑 뭐가 더 좋아?
- 스케이트!
- 스케이트랑 고양이랑 뭐가 더 좋아?
- 고양이!

집 근처 스케이트장에 가는 길이었다. 스케이트 타는 데 재미를 붙인 터라 최근 아이들은 거의 매일 스케이트장에서 한두시간 씩을 보낸다. 어제는 설 연휴 때문에 닷새만의 방문이었다.

스케이트장에 갈 땐 대개 친구와 함께이다. 함께 걷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아이의 발걸음은 조금씩 다르다. 단짝 친구와 함께일 땐 평소보다 반박자쯤 빠르고 경쾌하게. 발걸음 뿐 아니라 목소리의 형태도 바뀐다. 크기는 십데시벨쯤 커지고 말투는 진폭이 넓어진다. 주파수를 그린 선을 멀리서 본다면 매끈했던 선이 아몬드가 잔뜩 박힌 초콜릿 표면처럼 오돌토돌해졌을 것이다.

- 그럼 이번엔... 스케이트랑 너네 아빠랑 뭐가 더 좋아?
- 스케이트!

아이는 친구의 연이은 질문에 냉큼 답을 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소리가 어찌나 맑고 쨍한지, 흐리게 내려앉은 하늘 높이가 조금만 더 낮았다면 잔뜩 젖은 공기 틈새로 구멍을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짐짓 모른 척 뒤돌아보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듯이 웃음끝을 흐리며 한 마디 덧붙인다.

- 농담이야.

커다란 웃음 소리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한번 더 허공에 흩뿌려진다. 찬바람과 흥분으로 발갛게 상기된 아이의 얼굴을 보며, 휴일 아침에 단짝 친구와 나란히 걷는 아홉살 여자아이의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다.

이백밀리 사이즈의 주황색 렌탈 스케이트와 노란 헬멧을 씌워 얼음판에 들여보냈다. 연휴 마지막 날이어선지 얼음판은 오전부터 붐볐다. 얼음판 밖에도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이 많았다.

얼음판 밖이나 안이나 온도는 비슷할텐데 안과 밖 공기는 신기할 정도로 다르다. 얼음판 안은 웃음과 장난기로 가득하다. 아이들 뿐 아니라 스케이트화를 신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도,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을 때도. 반면 바깥엔 지루함과 피로의 기운이 찬바람을 타고 떠돈다. 가끔 아이들의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거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 때 미소를 짓지만 한 순간일 뿐이다. 마치 얼음판 가장자리를 따라 투명 돔이 씌워져있고 돔 안쪽에만 웃음가스로 가득 찬 것 같다. 표정에 담긴 즐거움의 높이로만 따진다면 양재대로를 사이에 둔 신축 래미안 아파트와 판자촌 구룡마을만치나 차이가 커 보였다.

스케이트화를 신은 것은 대여섯번 쯤 되었지만 아직 아이의 자세는 신통치 않다. 비슷한 기간에 벌써 물 찬 제비마냥 씽씽 달리는 오빠와는 천지차이이고, 함께 스케이트를 타는 단짝 친구와 비교해도 서툴다. 얼음을 지친다기 보다는 종종걸음에 가깝다. 그렇게 트랙을 따라 그저 뒤뚱뒤뚱 몇 바퀴를 걷는게 전부이다. 트랙 한 바퀴를 도는 동안만도 몇 번씩 넘어지고, 그러면서도 얼굴에선 웃음기가 떠나질 않는다. 강습을 받게 해볼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온라인 신청 시간에 맞출 수가 없어 포기했다. 제대로 속도를 내질 못하니 영 재미가 없을 법도 한데, 그래도 계속 타겠다고 의욕을 보이는 게 대견하기도 하다.

밤에 나란히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아이가 문득 생각난듯 소곤거렸다. 아빠, 내일 또 탈래. 밤기운 가득한 방은 컴컴한데 웃음기 가득한 눈만 반짝인다. 그래 그렇게 하렴. 종종걸음이든 물 찬 제비이든 뭐 그리 중요할까. 얼음 위에서 걷다 보면 언젠가 스케이트 날에 몸을 싣는 법도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한대도 또 어떤가.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로 가득한데.


2020년 1월 7일 화요일

눈뭉치 던지기

일요일에 아이들과 눈썰매장에 갔다. 슬로프 대기 줄이 어찌나 긴지, 서울 시내 아이 있는 집은 모조리 다 출동한 것 같았다. 막상 썰매는 몇 번 타지 못하고 썰매장 한켠 다져진 눈밭에서 눈덩이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올 겨울 아직 눈구경을 제대로 못한 아이들은 사람들 발에 밟혀 본래의 색을 구분하기 힘든 눈밭에서도 손발 시린줄 모르고 고맙게도 한참을 논다.

첫째 녀석이 조그만 눈뭉치를 던지는데 제법 멀리까지 간다. 싱긋 웃더니 나에게도 슬쩍 눈짓을 보낸다. 아빠가 어디까지 던질 수 있을지 보겠다는 눈치다. 괜한 승부욕이 발동하는 순간이다. 눈덩이를 적당히 뭉쳐 크게 팔매질을 했다. 눈뭉치는 긴 포물선을 그리며 아이의 눈덩이가 떨어졌던 지점을 훌쩍 너머 야트막한 담장을 넘어갔다. 아이는 순간 짧은 탄성을 내뱉고는 존경심을 담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답했다. 아빠의 존재감이 오래간만에 휘황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형광등도 가끔은 밝은 빛을 내고, 사그라드는 모닥불도 때로는 밝은 불똥을 튀기는 법이다. 그 빛이 오래가질 않아서 문제지만. 두어 차례 더 눈뭉치를 던져보았지만 처음처럼 우아하고 긴 포물선은 그려지지 않았다. 아이는 금새 눈뭉치 던지기에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눈밭을 파고 있었다. 팔매질을 그만둔 건 다시 담장을 넘기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른쪽 어깨에 뻐근한 통증을 느꼈던 것도 이유였다. 저녁이 되면서 통증이 더 심해져 소염진통제 한 알을 먹었다. 언젠가부터 관절이든 근육이든 여기저기 자주 문제가 생겨 소염진통제는 항상 준비해두어야 한다.

오늘 아침에도 통증은 여전했다. 어깨를 올리는 게 수월치 않아 옷을 입을 때도 평소보다 동작이 굼떠졌다. 아마 어깨 관절을 싸고있는 인대 중 하나에 탈이 났을 것이다. 지금 상태라면 다행히 소염진통제와 며칠의 시간으로 나아지겠지만, 손상이 조금 더 심했다면 오십견이 생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이니 오십견이 생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새삼스레 이제 눈뭉치도 살살 던져야하는 낡은 나이가 되어가는구나 싶어 실소가 나왔다. 오후부턴 비도 오는 궂은 날씨라니 퇴근 전에 미리 파스라도 붙여야 할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