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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4일 토요일

12.13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광장엔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의료 지원 활동은 오후 5시부터로 예고되어 있었다. 서울시 의사회에서 전문의 두 분과 전공의 한 분이, 우리쪽에선 두 명의 교수가 참여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널찍한 천막을 준비해주어서 의료진과 도움을 주시는 분들 모두 천막 안에서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다. 서울시 의사회에서 의료 장비와 의약품을 넉넉하게 가져오셨다. 의원 하나를 차려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겨우 가방 하나에 혈압계와 약품 몇 개를 챙겨간 우리가 면목이 없을 정도였다. 서울시 의사회에선 평소 쪽방촌 봉사를 정기적으로 나가기에 의약품과 장비가 세팅되어 있다고 했다. 모두에게 감사했다.

구호와 외침, 겨울의 대기를 울리는 음악과 군중의 함성으로 바깥 공기는 달아올랐지만 천막 안은 내내 대체로 평온했다. 환자는 뜸했다. 혈압을 재러 들르신 어르신 한 분이 커프를 팔에 두른채 한참 넋두리를 하다 가셨고, 감기 증상을 호소한 환자 서넛이 있었다. 표결 당일이 아닌 전날이라, 모인 이들의 숫자가 지난 토요일만큼은 아니어서일 것이다.

한 쌍의 남녀가 천막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와 토퍼를 기증해도 되느냐 물었다. 의료 부스라 환자용 베드가 필요할 것 같았나 보다. 천막 한쪽에 얇은 캠핑용 매트리스가 있었는데, 그 위에 토퍼를 올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래지않아 두 사람이 돌돌 말린 새 토퍼를 가져왔다. 두께가 꽤 도톰해서 쓸만해 보였지만 설마 환자가 저기 누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결국엔 괜한 생각이었다.

8시가 넘어 공식 집회가 끝나고, 근처 2차 집회와 공연 장소로 옮아가는 사람들이 천막 앞을 지났다. 이제야 도착해 집회 장소를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회 앞에 남은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탄핵 구호를 외쳤다. 국회 앞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킨다고? 언제까지?

의료 지원 부스는 10시까지 운영될 예정이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강해졌다. 바깥을 지나는 사람들도 잔뜩 웅크린 자세였다. 의약품과 장비를 박스에 넣고 자리를 마무리하던 때였다. 젊은 여성 한 명이 비틀거리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기운이 없는지 의료진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다행히 혈압은 정상이었다. 앉아있기 힘들어하는 환자를 부축해 구석의 토퍼-아까 그 토퍼다-에 눕히고 전기난로를 환자 쪽으로 옮긴 뒤 팔다리를 주물렀다. 손발이 얼음처럼 찼다. 탈수가 심했고, 과호흡으로 호흡곤란도 있는 상태였다. 천막엔 수액 세트가 없었기에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한 뒤 손발과 등에 핫팩을 붙이고 두꺼운 옷으로 덮어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순간 119를 부를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환자 상태가 나아지면서 그간의 사정도 들을 수 있었다. 함께 집회에 나온 또래들을 안내하고 연락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데 약을 먹으면 너무 졸릴까 걱정이 되어 먹지를 못했다고 했다. 졸린 걸 왜 걱정을 할까 의아했는데, 이 친구들이 국회 앞에서 릴레이로 밤새 농성을 한단다. 하루종일 뛰어다니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로 조금전까지 무거운 시위 용품을 옮기다가 기운이 빠지고 쓰러질 것 같아 앞에 보이는 천막에 무작정 들어왔다고 했다.

따뜻한 물과 초콜릿을 먹고 기운을 좀 차렸는지, 조금만 더 있다가 동료들이 있는 집회 장소로 다시 가겠다고 한다. 병원이나 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그냥 기운이 빠져서 그런 거고 본래 건강하다고. 삼십분만 쉬면 괜찮다고. 지난 주말에도 밤샘 시위를 했었기에 내 상태는 잘 안다고. 다음 차례에 시위를 이어갈 사람들이 올 때까지는 있어야 한다고. 밤이 늦은 시간이라 연락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결연한 표정에 절박한 말투였다. 결국 우리는 그를 더 말리진 못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부스를 닫지 못하는 상황인 것을 알았는지 연신 우리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돌아오는 길의 9호선 지하철은 시위를 마친 군중으로 가득했다. 군중의 다수는 젊은 여성이었다. 상기된 표정의 얼굴들을 보며 생각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절박하게 만들었나?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절실하게 만들었나?




2024년 11월 28일 목요일

번식에 관한 단상

바다에 사는 모기인 폰토마이아의 생활 주기는 극단적이다. 유충은 수중에서 1년을 살고, 고치를 거쳐 성체 모기가 된다. 성체의 생애는 겨우 3시간이며 이 짧은 생애 동안의 유일한 임무는 짝짓기이다. 그래서 폰토마이아의 몸은 짝짓기에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생식기관, 다리, 날개다. 이것도 수컷의 경우이고, 암컷은 생식기관을 가득 달고 수면 위를 떠도는 벌레 모양의 자루에 불과하다.

Male Pontomyia natans (from Wikipedia)

최근 읽은 해양생물에 관한 책의 일부이다. 책을 읽으며 문득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생존과 번식은 동물의 본능이라고 한다. 자연 다큐멘터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물의 짝짓기 장면을 보다 보면, 후손을 남기기 위한 다양하고 수고로운 노력에 감탄하곤 한다. 진화생물학의 계통수를 거꾸로 따라가 아래쪽 뿌리에 가까운 동물-말미잘이나 촌충 같은-일수록 단순한 번식 외의 존재 의미가 희미해지는데, 이를 보면 번식이란 수억 년 전 태초부터 부여된 본능임이 분명하다. 이들보다 한참 상위에 위치한 곤충쯤 되면 번식 행위에 고차원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지만-짝짓기 임무를 마친 뒤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수컷 사마귀나 거미의 희생적 결말이라던가-, 위의 책에서 소개한 바다모기의 예만으로도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기엔 충분할 것 같다. 3시간의 짝짓기를 위해 1년 동안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생이라니, 이쯤 되면 본래 동물의 생애는 번식을 위해 프로그래밍 되어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본능대로만 살지 않는다. 모두가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태초부터의 본능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 그래서 출산율 0.7을 찍고 있는 이 나라에선 본능을 거스르게 만드는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생존과 번식 두 가지 본능을 모두 챙기는 것이 지나치게 고단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바다 모기처럼 인생 모두를 바칠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출산과 육아는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겨우 오십 년 넘게 살았을 뿐이지만 내 인생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또한 그보다 더 특별한 일도 없었다는 것 역시. 세상엔 의미있는 일이 많을 것이나, 타인의 인생 첫날부터 시작해 가장 가까이에서 매일을 목격하고 함께 겪는 경험을 대신할 만한 일이 있을까. 사랑, 기쁨, 행복감, 충만함, 기대와 실망, 공허함, 자괴감, 불안, 분노, 괴로움. 아이들과 함께 하는 매일매일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같았다-두 아이가 십대가 된 지금은 불안과 짜증의 업힐을 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다 동의하진 않지만 그 경험을 거쳐온 지금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경이로운 순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돌이 되기 전까지는 매 순간이 그랬다. 눈맞춤만 해도, 웃기만 해도, 옹알이를 하거나 뒤집기만 해도 머릿 속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팡팡 탄성이 터졌다.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가족 친지 모두가 호들갑을 떨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이 훌쩍 커가면서 불꽃이 터지는 빈도는 줄었지만 지금도 종종 경이로운 순간이 예고없이 찾아온다.

요즘 그런 순간은 주로 아이들이 겪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큰애는 고등학생이다. 얼마 전 학원 수업을 마친 아이를 데려오며 같은 반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 아이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그 친구는 그나마 아들과 가까운 편이란다. 문제는 아들도 막상 그 친구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들어보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아들은 그 친구를 싫어하는 스스로의 감정이 편견 때문은 아닌지, 감정을 드러내고 친구를 멀리해도 되는 괜찮은지를 자문하고 있었다. 딴에는 친구에 대한 부정적인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었나 보다. 그날 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고민을 털어놓은 아들은 마음이 가벼워졌다며 후련한 얼굴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려서 엄지손가락을 빨던 아이가 이만큼 컸다는 게 신기하고,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어려선 부모가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가르침에 따라 평화롭게 생활했지만, 지금은 울타리를 넘나들다가 언젠가는 아예 떠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어놓은 복잡한 선으로 가득한 바깥 세상에서 그 선을 따라갈 것인지, 넘을 것인지를 지금처럼 계속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발자국이 새로운 선을 만드는 경험도 할 것이다.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든 그 과정을 목격하고 동참하는 것은 부모로서 경이로울 따름이다.

바다모기의 생애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까지 왔다. 지금이야 한밤중에 눈이 쌓인 창밖을 보며 차분히 감상에 젖어있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런 평화로운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당장 이틀 전만 해도 기말고사를 앞두고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가겠다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으니. 인생을 게임에 비유하자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메인퀘스트이고 나머지는 서브퀘스트라는 말도 있는데, 메인이든 서브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역시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과거의 부모님들과 지금 퀘스트 엔딩을 향해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모든 부모들은 존경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2024년 10월 31일 목요일

80년, 82년, 그리고 타이거즈

나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국민학교 입학 전의 일들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앨범 사진같은 몇 개의 이미지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도 80년과 82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였다.

80년은 탄광촌 마을에서 대도시인 광주로 이사를 온 해이자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그래선지 그때부터는 조금은 더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릴 수 있다. 아버지가 일하시던 가게, 흐리게 생각나는 등하교길이나, 담임선생님의 얼굴 같은 것들. 그중엔 그해 5월 어느 날인가의 기억도 있지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해에도 우리 가족은 비교적 안온한 일상을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이건 당시 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의 어렴풋한 기억일 뿐이다.

82년은 프로야구가 시작된 해다. 왜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엔 남자아이들이 모이면 으레 고무공이나 테니스공으로 주먹야구를 했고, 나도 그중 하나였기에 다른 스포츠보다 익숙해서였을 것이다.(광주에선 주먹야구를 '하루'라고 불렀는데 다른 지역에선 '짬뽕'으로 불렀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유야 뭐였던간에 아이들은 새로 출범한 프로야구와 TV에서 볼 수 있는 야구 중계에 금새 빠져들었다. 팀이 지역을 연고로 했다는 것도 인기의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 동네 야구팀이라니, 당연히 응원할 수밖에.

아이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모든 팀이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고, 해태 타이거즈 회원증은 내게 인생 첫 멤버십이었다. 어린이회원 가입 장소는 해태제과 공장이었는데, 5천원짜리 지폐를 들고 황량한 논밭길을 버스로 지나 작은 사무실을 방문했던 기억, 야구모자와 티셔츠, 사인볼과 스티커 사은품에 두근두근하던 기억이 난다.

이듬해인 83년,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을 했다. 공터에서 고무공을 치고 던지는 동네 아이들은 모두가 김봉연이었고 이상윤이었다. 한국시리즈 때는 온 도시가 들썩였다. 우승 후 겨울에 해태제과에서 광주 시내에 우승 기념 전단지를 뿌렸는데, 전단지 하나를 슈퍼에 가져가면 누가바 하나와 바꿔주었다. 부라보콘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누가바라도 어딘가. 동네 아이들과 아파트 우편함에 꽂힌 전단지를 여러 장 모아 한꺼번에 누가바 다섯 개쯤을 받기도 했다.(한꺼번에 더 많이 가져가면 슈퍼 아저씨가 눈총을 주었던 것 같다.) 마침 하늘에서 싸락눈이 펑펑 내려서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눈보라가 치는 아파트 단지 안 길을 강아지마냥 마구 뛰어다녔던 기억.

그날은 마침 휴일 아침이었을 것이다. 잔뜩 고양된 아이들은 내친김에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 사인을 받기로 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선수들이 몇 있었는데, 우리가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차영화, 김성한, 김무종 선수였나? 김성한 선수에겐 호통만 듣고 도망쳐 나왔고, 김무종 선수에겐 사인을 받았던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휴일 아침에 다짜고짜 집에 쳐들어와 사인을 내놓으라 하는 꼬마들이 선수들에겐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그럼에도 그해엔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구단이 매각되기 전 20년 동안 아홉 번 우승했다. 해마다 봄이면 집단 우울증을 앓던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잠시나마 트라우마를 잊게 해주는 프로작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경기 후반부에 울려퍼지던 응원가가 '남행열차'가 아니라 처량하기 짝이 없는 '목포의 눈물'이었다는 것, 2000년 이전까지 5월18일에 단 한 번도 홈경기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엔 모기업도 바뀌었고, 새 홈구장도 생겼고, 이제는 예전만큼 밥먹듯이 우승하던 시절도 지났다. 나도 이제는 어렸을적 무등경기장만큼 야구장에 자주 가지 못하지만, 지금도 야구장을 보면 조금은 마음이 설렌다.

한명재 캐스터의 우승콜이 화제다. 어떤 이는 그 우승콜을 듣고 뭐 그리 유난이냐고, 프로야구 출범하기도 전의 일을 왜 끄집어오냐고, 왜 야구장에서 정치질이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그 해설이 타이거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던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보편타당한 헌사로 들렸다.


"광주,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픔을 야구로 극복한 도시에서, 타이거즈는 운명이자 자랑이었습니다. 그런 KIA 타이거즈가 7년 만에 프로야구 챔피언에 오릅니다."




2024년 8월 19일 월요일

멸종 위기를 대하는 자세

영화 '돈룩업'은 우연히 발견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6개월 뒤 혜성 충돌로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천문학자들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백악관에 보고할 기회를 갖지만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당장 있을 중간 선거에만 관심을 보인다. 언론과 방송에도 사실을 제보하지만 역시나 토크쇼의 가십거리 정도로 치부될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치적 위기에 빠진 대통령이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핵폭탄이 탑재된 우주 로켓으로 혜성의 궤도를 변경하겠다는 발표를 하지만, 이 계획은 거액후원자인 IT 사업가에 의해 중단된다. 알고보니 혜성에는 엄청난 양의 희귀 광물이 묻혀 있었고, 이 광물에 눈이 먼 사업가가 드론을 보내 혜성을 작은 조각들으로 쪼개 떨어뜨리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드론 발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모두가 지구의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영화 속 과학적 계산에 따르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확률은 99.78%이다. (과학자는 본래 100%란 말을 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확신을 갖고 말하지만 이 수치 앞에서 정치인은 계산의 정확도를 의심하고, 토크쇼 진행자는 오히려 과학자의 정신 상태를 트집잡는다. 온라인의 댓글들은 과학자들을 조롱한다. 주인공은 이런 반응이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지구 멸망이 6개월 뒤란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지? 하지만 과학적 추론과 점쟁이의 예언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혜성의 충돌로 인한 인류의 멸종은 한때 유행했던 종말론과 다를 게 없다. 누군가는 기후 위기로 인한 북극곰의 멸종보다도 시덥잖은 주장으로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북극곰은 대표적인 멸종 위기 동물로 꼽히지만, 다른 수많은 멸종위기종에 비하면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다. 국제자연보전연맹에서는 멸종 위기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고 한다. 북극곰은 위기 등급이 가장 낮은 '취약' 단계의 동물이다. 이보다 위기 등급이 높은 '위기' 단계엔 아시아코끼리, 갈라파고스펭귄 등이 있고, 전 세계에 남은 개체수가 수백 마리 뿐으로 가장 등급이 높은 '위급' 단계엔 벵골대머리수리나 수마트라코뿔소와 같은 동물이 있다. 

오래 전부터 의료계에는 멸종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대표적인 멸종위기종으로 선천성 심장병 수술을 하는 소아흉부외과 의사가 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소아흉부외과 전문의는 33명이고 10년 뒤엔 17명으로 줄어든다. 비슷한 처지의 소아외과나 소아비뇨의학과 의사 역시 멸종위기종에 속한다. 최근엔 분만을 담당하는 산과 의사(산부인과는 산과와 부인과로 나뉜다)나 뇌혈관 개두술을 하는 신경외과 의사도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해 멸종위기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앞에서의 국제 분류에 비유하면 소아흉부외과 의사는 벵골대머리수리, 뇌혈관외과 의사는 갈라파고스펭귄쯤 될까. 소아청소년과나 응급의학과는 조만간 북극곰 수준이 될 것 같다. 이러한 멸종 위기는 주로 당직이나 응급콜이 존재하는 과의 문제이므로 내가 속한 과의 의사들은 다행히도 멸종위기종에 포함되지 않지만, 나와 무관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미래에 내 뇌혈관이 터지면 과연 나는 무사히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종에 대한 경고는 오랫동안 무시되었다. 영화에서 혜성을 발견한 과학자들의 경고처럼. 6개월 전 갑작스레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멸종위기종 구제책이 발표되었으나, 오히려 이 구제책은 멸종 위기를 급격하게 키우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혜성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오히려 혜성의 가속페달을 밟은 셈이다. 혜성은 더 빠르게 다가오고 절멸의 시간도 그만큼 당겨졌지만, 이후에도 혜성의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책임자들은 다가오는 거대한 혜성은 그냥 두고 열심히 지상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다. 그러니 예상된 멸종을 앞둔 우리는 실존적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 고민의 과정이 지난 6개월 동안의 시간이었다. 

영화 후반부, 혜성이 가까워지면서 천체망원경으로만 보이던 혜성이 육안으로도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운전 중이던 주인공 과학자는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하늘을 가리키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외친다. 

"저거예요! 저게 그 혜성이예요. 저기 있다고! 내내 말했잖아요. 저기 있다고!"

며칠 전 모 대학병원 응급실 폐쇄 기사를 보며 영화의 그 장면이 생각났다. "그렇게 될 거라고, 우리가 내내 말했잖아요!"

영화의 마지막,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종말을 받아들인다. 파티를 하고,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평소와 같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아이를 목욕시킨다.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한다. 그리고 혜성 충돌로 쓰나미가 닥치기 직전 아내의 손을 잡고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생각해보면, 우린 정말 부족한 게 없었어. 그렇지?" 

종말의 상황이라면 나도 주인공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역시 가족인 것이다. 그러니 절멸의 위기가 닥칠 의료 환경에서 나도 가족도 크게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현재의 실존적 고민은 멸종위기종에 대한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나흘 전 아내가 여행을 갔고, 나와 아이들만 보낼 시간이 아직도 사흘이 더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미래의 위기에 대한 부질없는 넋두리보다 당장의 생존을 고민해야 할 때란 의미다. 

애들 밥이나 챙기러 가야겠다.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변한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길이었다. 아파트 상가 앞을 뛰어다니는 꼬마들이 소란스럽다. 단지 입구에서 자전거를 탄 초등학생 서넛이 엉덩이를 치켜들고 쌩 하니 지나간다. 입구를 지나 단지 안을 나른하게 걷는다. 인공잔디가 깔린 공터에선 남자 아이들이 야구 경기 중이다. 인라인장에서 헬멧과 보호대를 차고 수업 중인 아이들이 올망졸망 귀엽다. 여름이 되면서 가장 소란스러워진 곳은 단연 바닥 분수가 있는 놀이터이다. 분수가 솟아오를 때마다 까르륵 아이들 웃음소리가 기분좋게 퍼진다.

십 년이 넘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멀리 여러 번 이사를 다니지 않은 것만 해도 운좋은 일이다. 주변 환경이 좋은 대단지 아파트라 아이들이 많다. 해지기 전에 거실 창을 열면 늘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린다. 늘상 경험하는 일이라 그간 으레 그러려니 생각해왔는데, 아이들이 많은 풍경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언젠가 같은 단지에 사는 이웃의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지방에 사는 부모님이 가끔 집에 오시면 신기한듯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여기는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구나.'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단지 안에만 초등학교가 두 개고 가장 가까운 중학교는 늘 과밀학급이다. 그러나 출산율 0.6을 찍는 현실에서 서울이라고 다 같을까.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풍경이 달라질 것이다. 학생이 줄어 문을 닫는 학교들도 생겨나고 있는데 십년 뒤 서울의 초등학생 수는 반토막이 날거라고 하니 폐교는 더 빠르게 늘 것이다. 지역으로 내려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서 학교는 둘째치고 마을과 도시 전체의 소멸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원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출근해 아이들이 가득한 동네로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문을 닫는 학교나 지역 소멸은 그저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 멀리 떨어진 곳의 뉴스보다 휴일마다 막히는 집 근처 백화점 앞 사거리 교통 문제나 중학교 신설, 이웃 아파트 재건축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아이들이 많아도 다행히 아파트 단지 단골 소아과엔 오픈런 같은 문제도 없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이 이곳이 아니었다면 일상의 문제들의 경중은 달라졌을 것이다. 서울 변두리였다면, 지방 광역시였다면, 그보다도 더 작은 도시였다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각자가 자신에게 가까운 문제를 자신이 서있는 시선에서 생각하고 사는 것은. 웹툰 <송곳>에서 주인공 구고신의 명대사,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는 말은 그래서 진리다. 하지만 가까운 풍경만을 바라보는 시선은 쉽게 편협해진다. 때로는 내 시선이 다른 각도가 되도록 서 있는 자리를 바꾸어보기도 하고,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관심과 노력도 해야 한다. 타인의 글을 읽든, 이야기를 나누든,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든.

어느 분의 페이스북 글을 보았다. 이번 의료대란 사태를 겪으며 사회적 편견을 억울해하는 의사들의 심정을 공감하고 다독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그런 정도의 억울함이 없는 집단은 없다는 것도 의사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억울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에 맞이할 억울함들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도 했다. 동의한다. 세상에 만연한 억울함들에 관해선 어린아이 수준의 경험만을 가지고 있는지라, 내가 모르는 억울함들이 어디에나 있고 내가 무얼 생각하든 그 무게는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 되새기곤 한다. 다섯달 전 내가 서명한 사직서의 무게와 전장연의 오체투지 시위의 무게는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진료만 잘 하면, 수술만 잘 하면, 의학적으로 최선의 처방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료들을 종종 만난다. 직업인으로서의 지식과 역량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각자의 날을 갈고 닦는다고 모든 톱니가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는 안타깝지만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식과 역량의 부족을 나무라는 것만큼 우리에겐 태도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나 시민의식같은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내가 서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미지의 풍경에 겸허한 태도를 가지는 것, 우선 그 정도면 될 것이다.




2023년 11월 9일 목요일

어느 '저자의 말'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를 엮은 첫 번째 책이 나온 이후 벌써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채널예스에 연재를 시작한 때부터 치자면 육 년입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빠릅니다. ‘첫 번째’란 말은 곧 첫 번째에 그치지 않음을, 그러니까 ‘두 번째’가 존재함을 의미하겠지요. 반딧불 의원의 두 번째 책에 실릴 저자의 말을 쓰면서 이제는 첫 번째라 불리게 될 책을 만들던 때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밤에 여는 작은 의원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과정을 그저 놀랍고 기쁘게 지켜보던 그때는 저자의 말을 다시 쓰게 되리란 기대를 감히 품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작은 진료실이 있는 동네의원과 그곳을 찾는 환자들의 사연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를 이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조금씩 생겼지만 금세 실행에 옮기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해외연수로 이전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이면 초고를 완성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책으로 엮어낼 만큼의 분량을 더 쓰는 데에 반년이 더 걸렸고, 이후로 책 출간까지 또 일 년이 지났습니다. 늘 그렇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빠릅니다.

전문의가 된 뒤로 줄곧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동네의원 의사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게 꼭 밤에만 여는 의원은 아니라 해도. 지금도 가끔 상상합니다. 환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진료실 밖에서의 사는 모습도 좀 더 들여다보는 그런 작은 의원을. 종종 왕진도 나갈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반딧불 의원의 진료실에는 제 사사로운 바램도 조금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진료실은 멀지 않은 곳에 실재합니다. 정부의 시범사업을 통해 왕진에 참여하는 동네의원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동네의원에서 단골 환자의 주치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는 의사 모두의 마음을 조금씩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읽은 어느 독자의 후기를 떠올렸습니다. 책에서는 동네의원을 믿고 치료를 잘 받으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반딧불 의원이 환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 같은 공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책 속에서처럼 몇 번의 진료로 환자의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질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다 보면 의사로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 매 순간 깨닫고 겸손해지게 됩니다. 다만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동네의원과 대학병원이 각자의 역할을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이 환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더 많은 이들이 동네의원을 먼저, 그리고 꾸준히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지난 오 년 동안 도움을 준 이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의힘 김병준 대표와 채널예스 엄지혜 기자께 감사를 전합니다. 두 분이 마련해준 기회가 없었다면 반딧불 의원 이야기도, 두 권의 책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두 권의 책을 내는 동안 김진형, 유승재, 김서영, 우상희, 이렇게 네 분의 편집자와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제게 재능 있고 성실한 편집자들과의 작업은 큰 즐거움이자 깨달음이었습니다. 지금 제게 편집자란 단어는 이들의 모습을 적당히 합쳐놓은 것을 뜻합니다. 이들은 원고의 교정 이외에 원고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 서도 종종 의견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경우 그 조언을 충실히 따랐는데, 되돌아보면 무엇보다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두 권의 책은 이들과의 공동 저작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제 몫일 것입니다.

첫 책을 함께 작업했던 김진형 편집자께는 좀 더 특별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건강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에 지금과 같은 페이크 다큐 형식의 글을 제안해준 이가 그였습니다. 그러니 반딧불 의원은 태생부터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한 편의 원고를 보낼 때마다 그는 빨간펜 선생님처럼 첨삭과 의견을 더한 답신을 보냈고, 책으로 빚기에 글의 얼개가 부족했던 초창기에 그 피드백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고가 과연 읽을만한 것인지 불안해하다 그의 검토를 받고서야 안심을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가 편집을 담당한 다른 책들을 보면서 첫 편집자로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운 좋은 일이었는지 실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첫 책의 마지막 장에 그의 이름이 함께 인쇄되지 못한 점이 늘 아쉬웠습니다. 이 글로 뒤늦게나마 그 아쉬움을 조금은 덜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마지막엔 항상 가족이 있습니다. 아내 지령은 모든 원고의 첫 독자였습니다. 다독가인 그의 객관적인 시각은 원고를 쓸 때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일깨워 주곤 했습니다. 처음 밤에 여는 의원의 이름을 고민할 때 반딧불이란 이름을 냉큼 붙여준 첫째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말 밤 서재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아빠에게 놀아달라 칭얼대던 둘째 아이는 이제 책상 옆 소파에서 얌전히 책을 읽으며 작업이 끝나길 기다릴 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 같은 존재인 세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과 애정을 전합니다.

2023년 초가을에


탕후루란 무엇인가

일주일에 한 번 탕후루 가게에 들른다. 대개 월요일이나 수요일 밤 열시, 매번 같은 시간이다. 

사거리 대로변 프랜차이즈 탕후루 가게는 막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온 아이들로 북적인다. 탕후루 가게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면서 오늘은 뭘 골라볼까 생각한다. 보통은 두 개를 산다. 둘 중 하나는 집에서 탕후루를 기다리고 있는 딸이 고른 걸로. 딸은 요즘 샤인머스켓에 꽂혀있다. 예전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아들을 데리러 올 때마다 탕후루를 사갔는데 밤늦게 설탕 범벅인 간식을 먹는 걸 못마땅해하는 엄마와의 합의를 거쳐 탕후루를 사가는 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기로 했다. 

"블랙사파이어랑 샤인머스켓. 포장이요."

가게 안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해 말소리를 높여야 주문을 전달할 수 있다. 주문을 받은 직원이 묻는다. 

"자주 오셨죠?" 

나는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머뭇거리다 한 박자 늦게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비스로 방울토마토 하나 더 드릴께요." 

활기찬 말투였다.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어진 눈매가 웃는다. 옆에서 포장을 담당하는 직원이 재빠르게 탕후루 세 꼬치를 보냉 봉투에 넣었다. 덕분에 그날 밤엔 아이들에 더해 나까지 탕후루를 하나씩 들고 뿌듯해했다. 이후론 매번 그랬다. 두 개를 시키면 하나 더 서비스. 매장의 매니저쯤으로 보이는 초승달 눈매의 직원은 생색을 내는 일도 없었다. 두 개를 주문하고 별다른 설명 없이 포장 봉투를 받아 열어보면 꼬치 세 개가 들어있었다. 

어느 월요일엔 차를 주차하는 골목 안쪽에 새로 오픈한 가게에서 탕후루를 샀다. 요즘 탕후루 가게가 우후죽순처럼 생긴다던데.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가게는 조그마했고 수더분하게 생긴 사장님 혼자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오픈 기념 할인 행사 중인 그곳에선 설탕 대신 대체 감미료를 쓴다고 했다. 가격도 싸고 건강에도 나을 것 같은 새 가게의 탕후루는 모양은 비슷했음에도 이전에 먹던 그 맛은 아니었다.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가게가 오래 갈 수 있을까. 가게를 열면서 대출을 과하게 받진 않았을까. 매출은 충분할까. 골목은 지나다니는 아이들도 훨씬 적은데.

다음 주엔 다시 대로변 가게에서 탕후루 두 개를 골랐다. 여느 때와 같은 직원이 주문을 받았다. 사실 지난 주에 다른 가게에서 탕후루를 사면서 그를 배신한 것 같아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주문을 받은 그가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말했다.

"세 개 더 골라보세요. 오늘은 서비스 많이 드릴께요." 

나와 아들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마주보다가 꼬치 다섯 개가 든 묵직한 포장 봉투를 받아들고 가게를 나왔다. 아이들은 신나했지만 나는 마음 한켠이 조금 찜찜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초승달 눈매의 직원이 내가 지난 주에 다른 가게를 갔던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오랜 연인에게 외도를 들킨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딱 한 번 뿐이었는데. 

성경의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탕자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던 탕자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환대를 베푼다. 매장을 닫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어차피 남을 상품으로 단골 고객에게 인심을 썼을 뿐일 거라는 생각도 탕후루 세 개만큼의 용서와 환대를 받은 내 찜찜함을 지우진 못했다. 골목 안 조그만 가게의 사장님도 떠올랐다. 분명한 것은 그 사거리에서 이제 다시는 골목 안 가게를 포함해 다른 탕후루 가게에 가진 못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날 밤, 아이들이 때아닌 탕후루 파티를 벌이는 동안 나는 바삭이는 설탕 코팅과 입안을 가득 채우는 과즙을 느끼며 자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탕후루란 무엇인가.

2023년 11월 1일 수요일

꿈 이야기

지지난 토요일, 진료 중에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딸은 심심하다고 전화하기도 하지만 아들은 필요한 경우에만 전화를 한다. 학교를 안가는 토요일 아침이라 늦잠을 잤을텐데, 여느 토요일보단 이른 시간이다. 이럴 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마음 한켠이 덜컹한다. 마침 다음 환자가 들어오기 전이라 급히 전화를 받았다.

조급한 내 마음과 달리 아들 목소리는 느긋하다. 그날 오후에 기차를 탈 예정이었는데, 기차 시간과 언제 출발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막상 별것 아닌 용건임을 확인하자 긴장이 풀리며 살짝 짜증이 났다. 간단히 출발 시간을 이야기해주고 끊으려는데 아들이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지 말끝을 흐리고 우물쭈물한다.

"아빠 진료 중인데, 더 할 말 있니?"

"응...... 그게...... 이상한 꿈을 꾸었어."

"무슨 꿈인데?"

아들이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꿈을 꿨길래.

"꿈에서...... 아빠가 죽었어. 아빠가 죽는 꿈을 꿨어."

그러더니 서럽게 운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좀 우습기도 해 뭐라 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엔 환상과 실재가 뒤섞여 실제로 겪은 일보다 더 생생하고 또렷하게 각인되기도 한다. 구체적인 내용이 잊혀진 뒤에도 그때 느꼈던 감정과 기분은 오래 남는다.

훌쩍임은 이내 잦아들었다. 중학교 3학년. 터져버린 울음이지만 악몽을 꾸었다고 계속 울기엔 너무 커버린 아이다.

아빠 괜찮다고, 좀 이따 집에서 보자고 아이를 다독이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정신없이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면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종종 자는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다 덜컥 겁이 날 때가 있었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는 행복과 동시에 소멸과 부재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한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어느 트로트 가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마음을 노래했는데 아이들의 자는 모습이 딱 그랬다. (물론 깨어 있을 땐 반대의 경우도 자주 있다.)

좀 유치하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수백 번은 느꼈을 그 아이러니한 감정에 대한 약간의 보상을 받은 느낌이랄까.

2023년 7월 8일 토요일

밤 열시, 은마아파트 사거리

누군가 밤 열 시경에 은마아파트 앞 사거리를 지나는 경험을 처음 한다면 아마 눈앞의 풍경에 놀랄 것이다. 밤 늦은 시간임에도 도로의 정체는 퇴근길 러시아워를 방불케 한다. 왕복 8차선 도로와 인도는 차량과 사람으로 가득하다. 보행 신호등이 켜질 때면 백 명은 족히 될 듯한 수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빽빽하게 채운채 길을 건너는 진풍경도 볼 수 있다. 

술집 하나 없는 밤거리가 차량과 인파로 가득한 걸 보고 느끼는 놀라움은 뒤이어 의아함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편도 네 개의 차선 중 인도와 접한 차선은 불법 주정차 차량으로 메워져 있고 나머지 세 개의 차선엔 차량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락션 소리는 뜸하기 때문이다. 옆 차선에서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량에도 대개 선뜻 양보를 한다. 몇 블럭 건너 테헤란로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클락션은 물론이고 욕설이 난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교통 정리를 하는 모범운전자들의 호각 소리가 들릴 뿐이다. 

길을 걷는 이들은 대부분 앳된 얼굴의 십대들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모두가 큰 백팩을 매고 있다. 아이들의 옷차림새도 비슷하다. 무채색 계열의 겉옷을 입은 아이들은 사거리를 둘러싼 건물들에서 쏟아져나와 거리를 바삐 걷다가 정차된 승용차로, 버스 안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삼십 분쯤 시간이 지나면 군중과 차량은 썰물처럼 사거리를 빠져 나가고 거리도 한산해진다. 

몇 달 전부터 일주일에 두어 번씩 아들을 데리러 이곳에 간다. 밤 열 시에 이 거리를 지나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나도 주변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처음 몇 번은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뒷골목을 뱅뱅 돌아야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어느 골목에 빈 자리가 있는지를 대략 파악하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는 게 좋다. 대개는 간식으로 아들이 좋아하는 초코빵 같은 걸 가져가지만, 준비해가지 못하는 날엔 편의점에서 먹을 거리를 사야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편의점 최애 간식은 스팸마요 삼각김밥이다. 그런데 학원에서 몰려나온 아이들로 북적이는 열시 십분 쯤 편의점 매대 삼각김밥 코너는 대개 텅 비어있다. 삼각김밥을 사지 못한 날은 아쉬운대로 핫도그를 산다. 계산을 하며 편의점 안을 둘러본다. 테이블은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의 차지다. 자주 가다 보니 이제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처음엔 밤늦은 시간에 편의점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이 좀 안돼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금 이 시간이 아이들에겐 나름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비어있는 배를 채우든 마음을 채우든, 채울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옆에 선 아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든말든 아이들은 그저 컵라면과 삼각김밥, 닭꼬치와 핫도그를 꾸역꾸역 바쁘게 입에 넣는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내가 '대치동 라이딩'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사교육에 열심인 편이 아닌데다 대치동이 상징하는 사교육 시스템의 꼭짓점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엔 아이들이 커가면서 대치동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은 살고 싶은 동네라기 보다는 유익한 동네였고, 유익함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는 컸다. 어떤 이는 대출을 받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멀쩡히 살던 자기 집을 두고 낡고 좁은 아파트 전세로 가기도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속으로 혀를 차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대치동을 통해 드러나는 날선 욕망을 은근히 폄하했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그저 고고한 척 하는 선비처럼. 하지만 아들이 중학교에 가고, 입시 현실에 대해 좀더 알게 되면서 그런 생각도 좀 줄어든 것 같다.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진 않았지만 라이딩을 하고 있으니 서투른 고고함도 절반쯤은 내려놓은 셈인가. 정지 신호에 줄지어 멈춰선 차량의 후미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거리 정지 신호로 서행하는 차선에서 검은 세단이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어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한 차선을 더 건너가 비상등을 켜고 선 세단 옆으로 회색 후드티에 백팩을 맨 여학생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냉큼 올라탄다. 막히는 거리에서 클락션 소음이 뜸한 건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뚤어진 것은 사회와 시스템이지 사람들이 아니다. 

수학 수업은 일주일에 세 번이다. 아들은 학원에 갈 때는 버스를 탄다. 밤엔 회의나 모임이 있는 날이 아니면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내가 데리러 간다. 셈을 해보니 그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라이딩을 했던 것 같다. 집에서 은마아파트 사거리까진 이십 분 정도 걸리니 아주 먼 거리는 아니다. 라이딩이 힘들어 대치동으로 이사간다는 말도 있는데 내겐 그리 힘들지 않다.(물론 매일 라이딩을 해야 한다면 상황이 다를 것이다.) 오히려 조금은 즐겁고 설레기도 하다. 집에 오는 동안은 온전히 아들과 둘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차 안에선 평소에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새로 전학을 온 친구나 얼마 전 시작한 동아리 활동에 대해 들은 것도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어떤 날은 돌아오는 내내 별다른 대화 없이 아들이 선곡한 음악만 듣기도 하는데 그것도 좋다. 요즘은 학원 앞에서 함께 탕후루를 하나씩 사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일 년 동안 학교 기숙사에 있었다. 통학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그때는 원하는 3학년을 대상으로 기숙사를 운영하는 지방의 고등학교들이 꽤 있었다. 요즘 학교 기숙사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공부에 집중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주중엔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토요일에 빨랫감을 싸들고 집에 갔다. 기숙사에 있는 다른 친구들은 주말이 되어야 부모님을 만났지만, 나는 매일 어머니를 만났다. 오후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기 때문이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매일 같은 시간에 맞춰 어머니를 만나러 나갔다. 어머니는 항상 먼저 와 약속 장소인 운동장 구석에서 나를 반기셨다. 여름엔 토마토를 갈아 만든 쥬스를, 다른 계절엔 곰국을 보온병에 담아 오셨고 나는 화단을 둘러싼 큰 돌에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보온병에 담긴 내용물을 홀짝였다. 기껏해야 쉬는 시간 십여 분이 전부였지만, 어머니는 그 시간을 위해 매일 택시를 타셨다. 집에 자가용이 없던 때라 택시를 이용했고 혼자 왕복했다는 게 다를 뿐, 내 어머니도 수험생 아들을 위해 매일 라이딩을 하신 셈이다. 

얼마 전 아들과 집에 오는 길에 할머니의 라이딩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일 년 동안 매일 택시를 타고 학교에 왔다 가셨다고 하니 아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대?"

"그냥. 그게 할머니의 마음이셨던 거지." 

잠깐동안 말이 없던 아들이 한마디 했다. 

"조금 감동이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좋아하는 뉴진스의 신곡을 실시간으로 함께 들었다. 라이딩을 하다 보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반복해 노래를 들으며 아들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들은 곧 잊어버리겠지만, 내게 둘이서 처음으로 이 노래를 함께 들었던 기억은 오래 갈 것이다. 

삼십 년 전 무덥던 여름날, 보온병을 안고 에어컨도 시원치 않은 작은 택시를 타고 오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땐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때 운동장 구석에서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특별한 이야긴 아니었으리라. 행여 수험 생활로 쌓인 짜증을 괜히 어머니께 쏟아놓거나 심통을 내진 않았을까. 그것도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찰나의 시간들이 어머니에게도 설렘과 즐거움, 그리고 오래 되새길 수 있는 기억을 남겨드렸기를 바랄 뿐이다.

2023년 4월 6일 목요일

러닝 일기

러닝을 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이전엔 트레드밀을 이용했다. 실외 러닝을 시작한 때는 코로나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을 나서 한강을 건너 돌아오는 4킬로미터 남짓 코스였다. 그때는 강 위를 달리는 순간이 그저 마음에 들었을 뿐이고, 속도나 기록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다.

미국에서 보낸 한해 동안엔 좀더 자주 뛰었다. 집에서 출발해 집 근처 공원을 돌고 돌아오곤 했다. 공원을 몇 바퀴 도느냐에 따라 거리가 달랐다. 짧게는 2마일, 길게는 3마일 정도의 코스였다. 뛰다 걷다 하는 식으로 산책하듯 했으므로 3마일이라 해도 그리 힘들진 않았다.

지난해 한국에 돌아와 몇 개월 동안엔 운동을 하지 못했다. 여름이 되면서 다시 러닝을 시작했다. 집에서 출발해 성내천 뚝방길을 두 번쯤 왕복하면 딱 3킬로미터가 나왔다. 두어 달쯤 그렇게 하다 보니 거리를 좀더 늘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뚝방길은 한강 공원까지 이어져 있다. 그곳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로, 조금씩 거리를 늘려 가을쯤엔 6킬로미터까지 뛰곤 했다. 거리가 늘다 보니 10킬로미터를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거리에 대한 목표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역시 기록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킬로미터당 6-7분 정도의 스피드로 달렸던 것 같다. 

그러다 11월에 갑상선 항진증이 찾아왔고, 운동을 할 수 없는 컨디션이 되었다. 약을 먹으며 갑상선 호르몬 수치가 안정이 될 때까지 두어 달 동안 러닝도 쉬었다. 올 초에 다시 운동화를 신고 늘 뛰던 길에 나갔을 때는 체력이 작년보다도 못하게 회귀한 상태였다. 3킬로미터를 뛰는데도 힘에 부쳐서 허덕거렸다. 그래도 한달 정도 지나니 다시 안정이 되었고, 지난 달부턴 다시 거리를 늘려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목표였던 10킬로미터까지 늘려보기로 했다. 내친김에 속도도 좀더 높여보면 어떨까. 킬로미터당 6분 이내 까지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10킬로미터를 6분 페이스로 달리면 1시간이 걸린다. 1시간 내에 10킬로미터를 완주하는 것이 목표였다. 러닝에 익숙한 이들에겐 별것 아닌 기록이겠지만, 그동안 10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뛰어본 적도 없었던 내게는 쉽지 않은 숫자였다.

그리고 어젯밤, 그동안 생각만 했던 목표에 다다랐다. 



2022년 12월 23일 금요일

기술의 발전을 생각하다.

최근 갑상선 기능 항진증 진단을 받았다. 갑상선에서 호르몬을 과하게 만들어내는 병이다. 평소보다 피로가 심해 검사를 했지만 과로 때문으로 생각했고, 채혈을 할 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호르몬 수치에 이상이 있을 거라 예상하진 않았다. 다른 증상들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갑상선 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체중이 줄고 심박수가 빨라지며 숨이 차거나 손이 떨린다. 불면증을 겪기도 하고 설사와 같은 위장 증상이 생기기도 한다. 몇 시간 뒤 확인한 갑상선 호르몬 수치는 정상 범위보다 훨씬 위쪽에 있었다. 그제서야 최근에 증상이 있었던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체중이 1-2킬로그램 정도 줄긴 했다. 평소보다 잠을 설쳤던 것도 같고, 짜증이 늘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것이 과도한 호르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갑상선 이상을 의심하지는 못했으니 아내가 검사를 받아보라고 재촉하지 않았다면 증상이 더 심해진 뒤에야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진료실에서 익숙한 질병임에도 막상 내 문제는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처방전을 챙겨 퇴근을 준비하는데 아이폰 건강 어플리케이션의 알림이 떴다. 애플 워치와 연동된 스마트폰은 가끔 건강 관련 지표의 추세 변화를 알려준다. 대개는 걷기, 운동량, 소비 칼로리 등에 대한 것이고, 지난 달에 비해 걷기 양이 줄었다며 가벼운 경고를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지난 5일 동안 휴식기 심박수가 평균적으로 늘었습니다.’

그래프는 최근 닷새 동안의 분당 심박수가 늘었음을 보여주었다. 큰 변화는 아니었다. 겨우 10회도 안 되는 변화였고 정상 범위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니 스스로 느낄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그렇지만 스마트폰은 그 미묘한 변화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갑상선 이상을 진단받은 날에 알림이 온 것은 그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조금은 놀라웠다.


겨우 분당 69회에서 77회로의 변화였다.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기는 병인 부정맥을 진단하는 표준 검사는 24시간 심전도(홀터 검사)이다. 이 검사는 장비를 받고 반납하는 과정에서 병원을 방문해야 하고 검사 하는 날은 샤워나 운동 등 일상 생활에도 제약이 있어 여러모로 번거롭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부정맥의 속성상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최근엔 가슴에 붙여 일주일 이상 심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작은 패치 형태의 기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리고 편하게 측정 가능한 방법일수록 심장 박동의 변화를 발견해내기에 용이하다. 심전도 측정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 워치가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마트 워치 사용자가 늘어나면서 부정맥을 직접 발견한 환자의 사례는 이제 흔한 뉴스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수십만 명을 대상으로 애플 워치와 핏빗의 심방세동 진단 기능을 확인한 연구가 각각 NEJM과 Circulation 저널에 발표되기도 했다. 조만간 심장 박동을 읽는 기능에 관한 한 디지털 기기가 의사의 진단을 대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며칠 전엔 디지털 기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볼 계기가 있었다. 고혈압 환자에게 생활습관 관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저염식을 권하자 환자의 아내가 잘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염도 측정기 이야기를 꺼냈다. 사나흘에 한 번씩 남편의 소변을 받아 염도를 측정한다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싱겁게 먹기 위해선 우선 내가 얼마나 짜게 먹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지만 사람의 입맛엔 차이가 있어 스스로 정확히 알기 어렵다. 싱겁게 먹는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흔하다. 이러한 이유로 병원에서는 환자의 24시간 소변을 모아 나트륨 함량을 측정한다. 섭취한 나트륨의 대부분은 소변으로 배설되므로 이는 싱겁게 먹는지 묻는 것보다 훨씬 정확한 방법이다. 하지만 일상 생활을 하면서 하루 동안 소변을 모으기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염도 측정기는 소변을 받아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훨씬 간편한데다 매일의 식단에 따른 변화까지 알 수 있다. 앞의 환자의 경우에도 외식을 한 다음날엔 매번 소변의 염도가 높아져서 되도록 집에서 밥을 먹는다고 했다. 내가 먹는 음식에 따른 소금 섭취량 변화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으니 저염식을 실천하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 

나중에 검색을 해보고 염도 측정기 종류가 제법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스마트폰과 연동이 되는 제품도 보였다. 대개는 음식의 염도 측정에 쓰이지만 소변의 염도를 측정하는데 활용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진료실에서 이런 환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기에 저염식을 위한 노력을 칭찬하고 격려해야 마땅했지만 사실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순간 머리 속에 염도 측정을 하는 일련의 과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컵에 샛노란 소변을 받아 조심스럽게 측정기를 담그는, 약간은 민망한 그 광경이. SF 영화 ‘아일랜드’의 첫머리에는 주인공이 소변을 보자 곧바로 변기 위의 스크린이 나트륨 과다를 경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언젠가는 이렇게 염도를 분석해주는 변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고혈압 환자들은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자연스레 전날 먹은 소금의 양을 알게 될 것이고, 나도 민망한 광경을 떠올리지 않고 소변의 염도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불안 때문에 검사를 자주 받기도 한다. 일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고 유방외과를 다니는 내 환자 한 분은 다른 병원에서도 추가로 두세 달마다 초음파 검사를 받고 있었다. 최근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검사를 너무 자주 받을 필요 없다고 충고했는데, 내 말이 유난스런 행동을 나무라는 듯이 들렸는지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나는 환자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주지 못한 데에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불안하니까요. 마음 같아선 집에다 기계를 두고 매일 검사하고 싶어요.” 

물론 암 수술을 받은 환자라 해도 매일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의 바램과 같이 환자 스스로 스캔할 수 있는 기기가 나올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검색대를 통과하거나 거울 앞에 서는 것처럼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이라면, 매일 검사를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유난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주, 그리고 스스로 검사할 수 있는 기기라면 연속혈당측정기를 빼놓을 수 없다. 손가락 끝을 침으로 찔러 혈액으로 검사하는 기존 방법은 통증과 번거로움으로 검사 횟수에 한계가 있다. 반면 팔뚝에 붙이는 이 조그만 기기는 피부 아래 삽입된 센서를 통해 혈당 수치를 5분마다 자동 측정해 스마트폰에 전송하고, 이를 통해 환자는 일상 생활에 따른 혈당의 변화를 즉각 알 수 있다. 혈당을 많이 올리는 음식이나 운동의 효과를 실감하게 되어 자연스레 생활 습관의 중요성도 깨닫는다. 연속혈당측정기는 국내외 당뇨병학회의 진료 지침에도 포함될 만큼 효과를 입증했다3). 측정기를 처음 시험 삼아 사용했을 때 나는 하루 열 번 이상 혈당 수치를 확인했다. 예전이라면 그만큼 손가락을 찔러야 했겠지만 이 기기라면 몇 번을 확인하든지 스마트폰을 팔뚝에 살짝 대기만 하면 된다. 현재는 1-2주 동안 사용하는 제품이 대세지만 6개월까지 사용할 수 있는 이식형 제품도 개발되었으니 앞으로 편의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눈부시다. 손가락만 대어도 심전도를 그려내는 시계와 실시간으로 혈당을 기록하는 측정기는 그 자체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기술이 만들어낸 진정한 성취의 지점은 의료 소비자와 공급자 간의 관계와 역할의 변화에 있다. 병원을 방문하고 의사를 만나야 가능했던 많은 일들이 이제 환자 손에서 이루어진다. 의료 공급자에게 쏠려있던 헤게모니는 점점 소비자인 환자에게로 이전될 것이다. 일찍이 미래 의학 전문가 에릭 토폴은 “The doctor will see you now.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 진료해 주실 거에요.)”란 말은 미래에 “The patient will see you now.”로 바뀔 것이라 했다. 이 전망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이러한 미래가 언제 실현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삼십 년 전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금새 가능해질 거라 기대했던 암과 난치병 정복은 유전체 지도가 완성된 지금도 요원하다. 그렇다 해도 유전체 분석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전체에 대한 지식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진 것은 분명하다. 과거 유전체 프로젝트에 쏟아지던 기대와 찬사는 이제 디지털 기술을 향하고 있다. 그러니 기대만큼의 변화가 없더라도 서두르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변화가 지속되리란 사실은 확실하다.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기술이 만들어가는 성취를 즐기면 될 것이다.


참고문헌

1. Perez MV, Mahaffey KW, Hedlin H, et al. Large-scale assessment of a smartwatch to identify atrial fibrillation. N Engl J Med 2019;381:1909-17.

2. Lubitz SA, Faranesh AZ, Selvaggi C, Atlas SJ, McManus DD, Singer DE, et al. Detection of Atrial Fibrillation in a Large Population Using Wearable Devices: The Fitbit Heart Study. Circulation. 2022;146:1415-24.

3. 에릭 토폴. 청진기가 사라진 이후 (The Patient Will See You Now: The Future of Medicine Is in Your Hands). 청년의사. 2015.


2022년 6월 29일 수요일

집에 가고 싶어

"아빠, 나 집에 가고 싶어."

밤에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데 딸이 말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우리 집의 지 방 침대에 누웠는데 집에 가고 싶다니. 딸과 몇 마디 더 나누고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 

"지금 우리 집에 있잖아. 근데 왜 집에 가고 싶어?"

"내일이 주말인 집에 가고 싶어."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날은 수요일 밤이었고, 다음날 아침엔 여느 때처럼 학교에 가야 했다. 아침엔 여러 번 깨워야 일어나고 주말엔 항상 늦잠을 자는 아이다. 다짜고짜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은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 뒤에도 딸은 종종 비슷한 말을 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 앞엔 다양한 내용이 감추어져 있었다. 어떤 때는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집에 가고 싶었고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하는 딸을 말리지 않으면 매일 저녁마다 함께 넷플릭스를 봐야 한다), 또 어떤 때는 '맛있는 젤리가 있는'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좋아하는 간식이 떨어졌을 때였다). 약속이 있어 집에 늦게 들어간 어느 날 밤엔 ‘아빠가 있는’ 집에 가고 싶디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네, 저는 딸바보입니다).

그러니 딸이 말하는 '집'이란, 닿을 수 없는 이상향. 유치환의 깃발에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향한 '푸른 해원', 최인훈의 광장에서 명준이 선택한 '중립국', 이창동의 박하사탕에서 영호가 돌아가고자 했던 ‘순수한 과거’와 비슷한 존재였던 것이다. 매번 그 이상향의 모습이 바뀌긴 하지만. 

아빠는 내일 출근 안해도 되는 집에 매일 가고 싶단다. 

2022년 4월 9일 토요일

오랜 환자들

진료 전날 예약 환자 명단을 살피다 보면 이름 석 자만으로 파노라마처럼 얼굴과 병력이 떠오르는 분들이 있다. 십 년이 넘게 같은 방에서 환자를 만나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한 환자를 오랫동안 만나다 보면 좋은 점이 많다. 환자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으니 그에게 새로 생긴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수월하게 판단할 수 있다. 증상의 원인은 무엇인지, 의학적인 의미는 어느 정도인지, 걱정을 해야할 문제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일주일 전부터 명치에 생긴 답답함의 원인이 심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환자의 경우엔 위산 역류, 또 다른 환자에겐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비슷한 증상이라도 환자에 따라 진단이 달라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그에 대해 더 잘 알 수록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할 수 있다. 환자와 함께한 시간의 무게는 치료 효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랜 세월만큼 쌓인 신뢰가 있는 환자는 내가 내리는 별것 아닌 처방도 잘 따르게 되니, 이 역시 좋은 점이다.

오랜 환자를 만나는 게 좋지만은 않다. 만성 질환은 나이가 들면서 나빠지기 마련이다. 당뇨병 약 하나를 쓰다가 두 개를 쓰게 되고, 당뇨병 약만 먹던 환자가 고혈압 약도 먹게 되는 식이다. 무릎에 관절염이 있던 환자는 해가 가면서 허리에, 손가락에도 통증이 생긴다. 시간을 가로축, 환자의 건강 상태를 세로축으로 나타낸다면 그래프는 하강하는 곡선을 이룰 것이다. 의사는 그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기껏해야 곡선의 기울기를 조금이나마 완만하게 하려 노력할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외과 의사가 부러워진다. 건강 문제가 생기는 족족 수술로 종양을 떼듯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속시원한 해결이 가능한 문제는 많지 않다. 의무기록에 적힌 환자의 문제 리스트는 점점 길어진다. 환자의 기록을 살피다 보면 보증 기간을 훨씬 넘긴 자동차를 함께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낡은 부품이 돌아가며 문제를 일으키는 걸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면서.

무엇보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은 환자의 믿음만큼 도움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을 때이다. 오래 만날 수록 환자의 신뢰는 깊어지지만 나를 향한 신뢰가 깊어질 수록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은 잦아진다. 고혈압 약이 뇌졸중을 예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증거는 오직 익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뿐이다. 내가 처방한 고혈압 약이 없었다면 그에게 뇌졸중이 생겼을지, 내가 처방한 약이 뇌졸중을 실제로 막아주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래된 요통이나 관절염은 어떤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운동을 권하는 것, 그리고 소염진통제와 같은 대증 처방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험을 매일 겪으면서 무기력함과 함께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연수를 떠나기 전엔 그 우울감이 꽤나 커진 상태였다.

일 년 만에 앉은 외래 진료실에선 반가운 인사가 오간다. 익숙한 이름과 얼굴을 다시 보는 나도 물론 반갑지만, 반가움의 크기는 항상 환자 쪽이 더 크다. 늘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환자가 감정을 담뿍 담은 눈빛으로 그동안의 기다림을 어색하게 고백할 때면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나도 어색한 웃음만 짓게 된다.

지난 주였다. 다음 날 진료를 미리 준비하는 중에 눈에 띄는 환자가 있었다. 당뇨병이 있는 50대 여성 환자로 내 외래를 다닌지는 다섯 해쯤 되었다. 고도비만에 가까운 체중이라 매번 체중을 줄이기로 약속했지만 지난 해까지 몸무게 수치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마지막 진료 기록엔 5kg을 줄인 것으로 적혀 있었다. 워낙 간식을 좋아하는 분이라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음 날 환자를 만나 체중을 어떻게 줄였는지 묻자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생님이 막상 가시고 나니 이제 진짜 건강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안 계시는 동안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면 안되니까요. 그래서 매일 한 시간씩 걸었지요."

환자가 진료실을 나간 뒤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지난 오 년 보다 내가 없었던 일 년이 환자에게 더 큰 변화를 준 셈이다. 주치의로서 그동안 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부지불식간에 내가 그에게 끼친 영향이 생각보다 컸었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진료실에 돌아온지 한 달이 지났다. 환자를 만나는 하루하루의 일상은 이내 익숙해졌다. 그래도 무력함이나 회의감은 이전보다 줄어든 것 같다. 의사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님에도, 돌아보면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에게 지나친 바램을 가졌었단 생각도 든다. 일 년 전과 그다지 변한 건 없다. 여전히 환자와 만나는 시간은 어렵고 고민스런 순간의 연속이고, 내 결정이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부족하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사실을 좀더 여유롭고 담담하게 받아들여 보려고 한다.

2022년 3월 27일 일요일

익숙함과 생소함

샌디에고에서 새로 계약한 집은 이층 건물 아파트의 일층이었다. 첫 며칠 간은 여기저기 생소하고 어색한 것들 투성이였다. 차고와 이어진 현관, 카페트가 깔린 방, 벽지 대신 페인트가 발린 벽, 벽난로가 있는 거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들에 적응이 되었지만 화장실 안에 있는 전등 스위치는 한동안 익숙해지지 않았다. 미국 집의 화장실은 대부분 전등 스위치가 문 안쪽 내부에 있다. 물론 화장실엔 창문이 없다. 화장실에 들어가 깜깜한 벽을 더듬거리며 전등 스위치를 찾을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왜 스위치를 바깥에 만들지 않은걸까?

일 년이 지났다. 귀국 첫날 한국 집에 돌아와 화장실에 처음 갔을 때, 먼저 든 생각은 ‘왜 화장실 안에 전등 스위치가 없지?’ 였다. 무심코 화장실 안에서 스위치를 찾고있는 걸 깨닫고 헛웃음이 나왔다.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화장실 밖에서 스위치를 켜고 들어가는데 익숙해지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걸렸다. 우스운 것은 그 기간 동안 화장실에 갈 때마다 어색함과 불편을 느꼈다는 점이다. 평생 화장실 밖에서 미리 불을 켜고 들어갔었고, 그 순서가 바뀐 것은 겨우 일 년 뿐인데도.

미국에서 외식을 할 때야말로 한국이 그리웠다. 뉴욕이나 LA와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면 맛집을 찾긴 쉽지 않고, 진짜 맛집은 그만큼 비싸다. 차곡차곡 붙는 택스와 팁의 부담도 크다. 한국처럼 다양한 식당과 메뉴를 저렴한 가격에 접할 수 없다. 귀국이 다가오면서 아이들과 한국에서 먹을 음식들을 손으로 꼽아가며 즐거운 상상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서를 가져다 줄 직원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은 일년이 지나도록 익숙해지지 않았다.

자가 격리가 끝나고 아이들과의 첫 외식은 예전 자주 가던 집 근처 양꼬치 식당이었다. 소박한 식당 내부도, 음식 맛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반찬 좀 더 가져다 주세요,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꼬치 추가를 시키자 서비스로 나오는 만두가, 이곳이 한국임을 실감하게 했다. 오랜만에 진정 만족스런 외식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계산서를 가져다줄 직원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카운터로 가 계산을 했다. 이 가격에 이 정도의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니. 새삼 놀라웠다. 딸려붙는 세금도, 팁도 없이 메뉴판 가격 그대로인 영수증은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졌다.

화장실 문 밖에 있는 스위치도, 동네 허름한 맛집에서의 외식도 금새 다시 익숙해졌다. 하지만 문득문득 생소하고 다르게 느껴졌던 그 순간의 기억은 잊지 않으려 한다. 그동안 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은, 응당 그래서야 해서가 아니고 그저 익숙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깨달을 수 있어 다행이다.

2021년 4월 26일 월요일

불확실의 바다 위를 걷는 법

환자와의 진료실 대화 주제는 처음 병원을 찾은 직접적인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사, 자녀의 유학, 가족의 사망과 같은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 될 수도 있고, 최근에 새로 생긴 건강 문제일 때도 있다. 만남이 반복되면서 대화의 주제는 다양해지고 그럴수록 환자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 그 과정은 대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며, 평탄한 길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만족감과 무력감, 생명을 다루는 보람과 그 책임으로 인한 부담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난기류 가득한 복잡계의 항로와 같다.

50대의 그녀가 처음 진료실을 찾은 건 고혈압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사의 지시를 잘 따르는 환자였고 혈압 조절도 잘 되는 편이어서 서너 달에 한 번 오는 진료 시간은 대개 특별한 변화 여부만 확인하는 걸로 이루어졌다. 작년에는 폐경기 증상이 찾아와 힘들어하기도 했다. 나는 걷기 운동을 권했고, 그녀는 그 처방 역시 충실히 따랐다. 남편과 함께 동네의 둘레길을 걸으면서 불편했던 증상도 차차 누그러졌다. 딸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녀에게 갑자기 생긴 비염 증상 때문이었다.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원인이었다. 딸이 키우던 고양이인데 유학을 가면서 다른 곳에 보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동물이라면 질색이었고 고양이를 떼어 놓으면 해결될 증상이었지만, 이젠 정이 들어버려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는 연신 재채기를 했는데, 이후 그녀와 고양이 사이의 문제는 항히스타민제를 처방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외래 진료 전날엔 다음 날 예약된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미리 살펴본다. 그날도 다음 날 예약된 환자들의 기록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익숙한 그녀의 이름과 며칠 전에 시행한 혈액 검사 결과가 눈에 띄었다.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수치가 정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졸음으로 무겁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이 결과 만으로 결론을 내리긴 어려웠지만, 악성 혈액 질환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과거 혈액 검사 결과를 다시 확인했다. 몇 달 전의 검사 결과엔 가벼운 빈혈 소견 만이 있었고, 다음 진료 때 변화를 확인하는 것으로 계획했었다. 그 재검 결과가 이번 수치였다.

진료 시간에 맞춰 찾아온 그녀에게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그녀에겐 특별한 증상이 없었다. 혈액 검사 결과는 그녀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정확한 병명을 말하긴 이른 상황이었다. 혈구 세포들이 많이 줄어든 상태이며 이유에 대한 확인을 해야 한다고, 다시 검사가 필요하며 골수 검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 했지만 추가적인 검사를 위해서 혈액 내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권유에 순순히 따랐다. 진료실 밖에서 대기 중인 환자 수를 어림하며 신속하게 말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만약 몇 달 전 발견한 빈혈의 원인을 그때 바로 찾았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했다. 

한 달 뒤, 진료 예약자 명단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다. 원래 예약된 일정보다 이른 날짜였다. 그동안의 진료 기록을 확인했다. 골수 검사 결과는 급성 백혈병이었다. 그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빠른 항암 치료였고,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지금 그녀가 나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는 현재 상태에 대해 내게 한 번 더 설명을 듣길 원했다. 대부분의 의사는 자신이 직접 치료 중인 문제가 아니라면 환자의 상태나 치료 방침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만큼 알기 어렵고, 해당 분야의 전문의가 아니라면 부정확한 정보로 괜한 혼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대개 환자가 원하는 정보의 수준은 높지 않으며, 보편적인 지식을 환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 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녀와 같은 환자들이 받는 치료에 대한 내 설명을 묵묵히 듣던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께 진료도 꼬박꼬박 받았는데, 왜 더 일찍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항상 담담하던 그녀의 말투는 떨렸고, 나는 그 뒤에 담긴 후회와 원망을 느꼈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마치 이전 검사 결과에서 보였던 빈혈을 왜 그냥 지나쳤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가벼운 빈혈이 있는 중년 여성에서 백혈병이 발견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빈혈의 원인을 빈도 순으로 나열한다면 급성 백혈병은 한참 뒤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 추가적인 검사를 했다 해도 바로 진단이 가능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만약 그때 진단이 되었다면, 몇 개월의 차이가 미치는 영향은 과연 없었을까. 이것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몇 달 뒤 그녀를 다시 진료실에서 만났다. 지난 번보다 표정이 밝았다. 항암 치료 결과가 좋았고, 앞으로도 치료가 남아있지만 골수 이식 없이 항암 치료 만으로 완치가 될 수도 있을 거라 들었다고 했다. 환자의 경과는 그동안의 진료 기록으로 대략 알고 있었지만,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직접 대하니 나도 더 기뻤다. 

"항암 치료를 받을 땐 참 힘들었는데, 선생님 덕분에 제때 발견해 치료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래도 운이 좋은가 보네요. 선생님께 감사하단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그녀의 행운에 감사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였을지도 모른다. 진료실에서의 일상이란 불확실의 바다 위를 건너는 줄타기와 같다고 종종 생각한다. 교과서를 통해 얻은 지식은 환자 개개인에 대해선 정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불확실은 도처에 존재한다. 의사인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할 뿐이다. 그 가운데서 의사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불안해 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상처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통해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을 믿는다. 그 믿음을 발판 삼아 나는 오늘도 불확실의 바다 위를 걷는다. 

2020년 12월 1일 화요일

당신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사무실 내부는 단출했다. 책상과 의자들 외의 집기는 구석의 정수기와 인스턴트 커피 박스 정도였다. 임시로 급히 차려진 공간에 굳이 여러 물품을 구비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가 놓인 사무용 책상들 사이사이마다 야트막한 칸막이가 있었다. 얼핏 보면 콜센터와 비슷했지만, ‘중앙모니터링본부 쓰여진 현수막과 대형 벽걸이 모니터가 이곳이 일반 콜센터가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현황판 역할을 하는 모니터에는 병실 번호와 환자 이름, 나이가 적혀있었다. 여느 병동과 다른 점은 병실 대부분이 1인실이라는 , 그리고 현황판 속의 병실과 의료진의 사무실이 180킬로미터 떨어져있다는 것이었다.


생활치료센터는 입원이 필요치 않은 경증 환자를 위한 시설로, 지난 3 경상북도와 대구 지역에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면서 만들어졌다. 매일 수백 명의 환자들이 새로 생기는 상황에서 기존 병원이 환자 모두를 수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증상이 없거나 가벼운 증상만을 보이는 환자가 많은 것도 이들이 머물 있는 시설을 따로 마련하게 이유였다. 위중한 증상을 위한 집중 치료 장비는 없지만, 경증 환자를 격리하고 바이러스가 사라질 때까지 면밀히 관찰할 있는 . 경상북도 문경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한적한 환경에 위치한 연수원은 그런 시설로 탈바꿈하기에 맞춤한 곳이었다. 개의 정원 객실은 가족 환자 병실로, 건물 대부분을 차지한 정원의 객실은 격리를 위해 일인 병실로 만들어졌다. 본래는 병원 직원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물이고 직원들은 숙박 목적으로도 예약이 가능해 나도 여러 머물렀던 곳이다. 현황판을 보고 있자니 내게도 익숙한 구조가 떠올랐다. 일인용 침대 개와 책상 하나, 소형 벽걸이 티비와 냉장고, 샤워 부스가 딸린 화장실. 저렴한 콘도에서 흔히 있는 자그마한 방이다. 환자 명만 써야 하니 침대 하나는 비워뒀을 것이다. 환자들은 방에서 2 이상을 머물러야 했다.

환자들이 하루에 스스로 체온을 측정하고 증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 서울의 의료진이 기록을 확인하고 상담을 한다. 감염내과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상담과 진료는 모두 이곳 서울의 중앙모니터링본부 사무실에서 스마트폰 메신저를 이용해 화상으로 이루어진다. 문경 현지의 파견 의료진은 대면이 필요한 진찰과 혈액 검사, 코로나 바이러스 PCR, 흉부 X 촬영 등의 검사 시행과 현장에서 생기는 문제 해결을 맡는다. 환자의 퇴소나 상태가 악화된 환자의 전원 중요한 결정을 위해선 문경과 서울의 의료진이 함께 상의했다.

중앙모니터링본부에는 명의 의사와 가량의 간호사가 상주했다. 자리마다 배정된 업무용 스마트폰 메신저에선 이름 대신 의사 1, 간호사 5 같이 고유 번호를 쓴다. 여러 부서에서 돌아가며 파견을 나오므로 해당 번호를 항상 같은 사람이 맡진 않는다. 나도 사흘 전엔 의사 1, 이날 오후엔 의사 2 맡았다. 초기에는 의료진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새로 발생하는 환자 수가 안정을 찾으면서 업무도 수월해졌다고 한다. 현황판에 찍힌 현재 입소 환자 수는 63명이었다. 이날 오후엔 의사 2에게 예정된 정기 상담은 없었으므로, 자리를 지킨 가끔 전달되는 환자의 문의에만 답을 주면 일이었다.

그러게요.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간호사실에서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후 정기 상담 시간에 어느 환자가 하소연을 하는 모양이다. 2 이상 곳에 갇혀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일까. 지내다 보면 없던 두통이 생기기도 하고, 마른 기침만 해도 덜컥 겁이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의 경중에 대한 판단 못지않게 불안을 호소하는 환자에 대한 다독임과 공감이 중요하다. 개중엔 심한 불안과 우울 증상을 호소해서 따로 심리 상담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일반 진료실과 달리 전화와 모니터만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과정에 어려움도 있을 테지만 우리 간호사들은 역할을 해내주고 있었다.

선생님. 오전에 검사 결과가 양성이라고 들었는데, 다음 검사는 언제 받게 되나요?

환자의 문의를 받은 오후 근무 시간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메신저의 이름을 확인하고 의무기록을 살폈다. 젊은 여자 환자였다. 치료센터를 첫날에 입소했으니 어느덧 달이 넘었다. 환자들은 정기적으로 PCR 검사를 받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차례 결과가 연속 음성이어야 퇴소할 있었다. 해당 환자는 3 중순에 시행한 검사 결과 음성이었으나 사흘 양성이 나와 퇴소가 차례 미뤄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직전 검사에서 다시 음성이 나왔고, 어제 재검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결과가 양성이었던 것이다. 오전에 검사 결과를 들었던 모양이다. 다음 검사는 사흘 후라는 문자를 보내자 바로 감사하다는 짧은 답신이 왔다. 담담한 답신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환자는 그동안 번의 검사를 받았다. 음성이었다가 양성이 나와서 퇴소가 미뤄진 벌써 번째이니 실망이 무척 컸으리라. 오늘 검사 결과를 듣기 전까진 이번엔 집에 돌아갈 있을 거라고, 가족들과 마주앉아 저녁 식사를 하게 거라고, 친구를 만나 거리를 걷고 차를 마실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래 수영을 처음 배웠을 기억이 났다.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가고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같았다. 초급반을 졸업하려면 쉬지 않고 한번에 레인 끝까지 있어야 했는데, 일단 물에 들어가면 끝이 그렇게 까마득해 보일 없었다. 위에 엎드려서는 푸른색 타일이 깔린 수영장 바닥을 보며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배수구 개를 지나면 맞은 끝이었다. 처음 개는 수월했고, 다음 개는 힘에 부쳤고, 마지막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번번이 포기했다. 힘을 줘가며 쥐가 정도로 발차기를 해도 몸은 그저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같았으니까. 환자의 프로필 사진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밝게 웃고 있었는데, 사진 그녀 역시 지난 동안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차례의 음성 판정 이후 다시 결과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되풀이해 품었던 희망이 사그라드는 경험을 하며. 자신의 존재가 말끔히 도려내진 여느 해와 같이 봄날을 맞는 바깥 세상을 보며.

36일간의 생활치료센터 운영이 마무리되면서 자연스럽게 중앙모니터링본부도 문을 닫았다. 그동안 이곳 생활치료센터를 거쳐간 환자들은 모두 118명이었다. 남은 소수의 환자들은 가까운 다른 센터로 옮겨갈 예정이었다. 센터의 문을 닫던 , 겨우 차례 근무했을 뿐이었지만 남은 환자 명단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남지 않은 환자 명단의 끄트머리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할 있었다. 그녀가 레인 끝에 무사히 닿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그때까지 물을 젓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번째 유행이 지나고 한동안 50 안팎을 유지하던 하루 환자 수는 8월이 되면서 거짓말처럼 다시 늘어났고,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도 강화되었다. 생활치료센터로 쓰였던 문경의 연수원을 찾은 것은 2 유행이 잦아들던 10월의 주말이었다. 거리두기와 방역은 이번에도 효과를 거둔 했고, 환자 수가 줄어들면서 거리를 걷는 사람들 표정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나들이를 떠났다. 미세먼지가 걷힌 문경의 가을 하늘은 청명했다. 생활치료센터 운영을 마치고도 개월간 닫혀있던 연수원 역시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운영을 재개한 것은 아니기에 숙박객은 거의 없었다. 1층의 데스크는 비어있었고 식당과 매점도 불이 꺼진 문이 닫혀 조금은 을씨년스런 분위기도 풍겼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객실 정리가 되었을까 걱정스런 마음도 들었지만, 막상 문을 열고 확인한 객실 모습은 이전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반듯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집기에서 이곳이 바이러스와 벌인 싸움의 최전선이었음을 있는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욕실에서 낯선 문구가 쓰여진 스티커를 발견하기 전에는.

환자분의 빠른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흰색 스티커는 욕실 타일 높이에 붙어있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욕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문구가 이전에 방에 머무르던 사람이 있었음을 깨닫게 했다. 하루아침에 확진자라는 꼬리표가 붙어버린 그는 자신이 감염된 경로를 되짚으며 원망과 후회를 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우울해하다가도 한편으론 바깥에 있는 가족을 걱정했을 것이다. 갑작스레 들어오느라 미처 처리하지 못한 직장 일을 챙기거나 학교에 제출할 과제와 공부도 했을 것이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면 조마조마한 마음에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탓하며 애꿎은 시계만 반복해 확인했을 수도 있다. 바뀐 잠자리에 잠을 설치고 없던 두통이 생기기도 하고, 마른 기침만 해도 덜컥 겁이 잠을 이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문득 여섯 전에 메신저에서 밝게 웃던 환자가 생각났다. 스티커는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욕실을 나오기 , 문구를 다시 천천히 읽었다.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환자들이 떠난 뒤에도 남겨진 문구는 마치 나를 포함해 방을 거쳐가는 누구든 환자가 있다고, 바이러스와의 지난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같았다.

마침내 번째 유행이 시작되었다. 닫혔던 생활치료센터들도 대부분 운영을 재개했다. 환자 숫자의 파고는 3월의 번째 유행만큼 가팔랐다. 바다를 항해할 때는 중간에 항로가 조금만 바뀌어도 영향이 크다. 오래지 않아 방향을 수정하면 다시 본래의 항로로 돌아가겠지만, 그동안의 변화가 너무 크다면 바다를 표류하거나 엉뚱한 곳에 도착하는 일도 생길 있다. 우리 모두는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길고 고된 항해를 하고 있다. 앞으로도 차례의 격랑을 겪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폭풍이 지나가면 바다도 잠잠해지고 우리는 아무 없었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항로로 돌아갈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일을 겪어버린 우리가 이전과 똑같은 길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새로 찾은 길의 목적지가 이전보다 나은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까지, 당신과 우리 모두의 쾌유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