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 역학(social epidemiology) 교과서를 읽고 있다. 인구집단의 건강 상태에 대한 분포, 그리고 그 결정 요인에 대한 학문이 역학(epidemiology)이라면, 사회 역학은 사회의 구조, 제도, 상호 관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두는 학문이다. 사회적 지위나 소득 수준이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지금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 역학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것은 겨우 25년 전이니, 이러한 실증적 사실이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한 역사는 일천한 셈이다.
8백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은 사회적 지위, 경제 상태, 차별, 소득 불평등, 노동 환경, 고용 정책, 사회적 관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차례로 살핀다. 여덟번째 챕터는 ‘사회적 자본’에 대한 내용이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회적 관계 속에 내재된 무형의 자원을 의미한다. 사회적 관계에 자본(capital)이란 이름을 붙인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경제학에서 자본은 축적이 가능하고 미래에 이익과 혜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속성을 지니는데, 사회적 관계에도 같은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지나 대학 동창 덕분에 취업 기회를 얻거나 투자 정보를 받았다면, 그가 축적한 사회적 자본이 실질적인 이익을 창출한 셈이다.
사회적 자본은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정신 건강이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가족, 친구, 직장 동료와의 관계를 통해 정서적 지지와 감정적 안정을 얻는다. 타인과의 관계는 건강행동에도 영향을 끼친다. 얼마 전 환자 한 분은 금연 결심을 알리면서 이제 친구들 중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본인 뿐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는데, 이와 같이 건강한 생활습관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에 속한 사람일수록 자연스럽게 좋은 습관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흡연자가 많은 직장에 다닐수록 금연이 어렵고, 술을 마시는 회식이 많은 직장에 다닐수록 술을 끊기 어려운 것처럼. 또한 사회적 자본은 의료 서비스나 건강 정보에 대한 접근성과도 관련이 있다. 건강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의사 친구가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자본이 긍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 사회적 자본의 개념을 널리 알린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적 자본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보았다. 계급, 계층에 따라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에 차이가 있고, 축적된 사회적 자본은 기존의 계급과 계층을 유지하도록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연이나 학연, 특정 직역으로 묶인 관계가 일종의 권력으로 작동하는 사례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미국 부통령인 JD 밴스는 그의 책 ‘힐빌리의 노래’에서 예일대 로스쿨 입학 후 만난 사람들이 가난한 노동 계급 출신의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되돌아보며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에게 사회적 자본은 곧 ‘인맥’이었다.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신뢰, 공동체 활동, 네트워크 등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계급, 권력 구조, 분배 등 구조적 문제와 ‘수직적 불평등’을 가린다는 비판도 있다. 마치 과거에 부실한 경제 정책과 금융 기관 문제로 발생한 외환 위기 해결책으로 국민 각자의 절약과 금모으기 운동을 내세웠던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각은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할 수도 있다.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개인이나 집단의 건강이 나쁜 것을 두고 그들이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다 해도 노오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법이다.
80년대 이후 사회적 자본 개념이 인기를 얻은 것은 당시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회가 파편화되고 안전망이 붕괴되면서 과거의 가치와 공동체를 이상화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향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십 년쯤 늦긴 했지만 외환 위기 이후 비슷한 과정을 겪었던 우리에게도 생소하지 않은 이야기다. 2000년대 이후 과거를 무대로 가족 간의 유대, 이웃과의 정, 따뜻한 사람 냄새를 그려낸 드라마나 영화가 유행했던 데에도 나름의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회적 자본은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으며, 사회적 자본이 전면에 드러나는 서사일수록 다른 문제는 무대 뒤로 가라앉기 마련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대한, 과거를 단순한 향수로만 취급했다는 비판은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폭싹 속았수다’를 뒤늦게 재밌게 보고 있다.(10화까지 시청 중이다.) 미장센은 아름답고 배우들의 연기는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책을 읽고 사회적 자본 개념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불편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라마는 빈곤, 성차별, 군부 독재, 불평등이 만연했던 과거를 종주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내러티브의 현실성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만 양념처럼 배치된다. 그렇기에 때때로 내겐 그런 장치들이 오히려 서사의 진실성과 재현성을 해친다 느껴졌고, 드라마의 장면들은 종종 완벽하게 세팅된, 예쁜 세트장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처럼 보였다.(물론 ‘완벽하게 예쁜’ ‘세트장’이 맞다. 그 자체는 드라마 제작팀의 노고를 치하할 일이다.)
가족 외에 모든 것이 소거되어 버린 드라마라는 냉정한 비판도 있고, 반대로 가슴 따뜻한 드라마일 뿐인데 뭐 그리 까칠하게 보냐는 의견도 있다. 개인적으로 본래 드라마나 영화는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어떤 작품에서도 나름의 장점을 찾아 즐길 수 있는 편임에도 지나치게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무래도 저 드럽게 두꺼운 사회 역학 교과서의 못된 영향 때문인 것 같다. 그나저나 이 드라마를 보며 가장 풀리지 않는 의문은 이것이다. 아이유 딸은 아이유인데 박보검 아들은 왜 박보검이 아닌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