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일 금요일

가정의학교실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전공의 근무를 시작한 게 2003년이니 14년이 지났습니다. 의대를 다니면서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을 이웃처럼 돌보는 동네 의원의 원장이 되겠다는 바램을 가졌었고, 가정의학과를 선택한 것도 개원의가 되기에 가장 적당한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대했던 대로 가정의학과는 개원의가 되기 위한 경험을 쌓고 마음가짐을 준비하기에 딱 맞는 곳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내 환자가 호소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어찌 보면 오만한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때는 분만이나 수술까지도 척척 해냈다는 선배들의 무용담스러운 일화를 들으면서 좀더 일찍 의사 생활을 하지 못했던 걸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의원이 아닌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기도 하지만, 설사 오래 전 바램처럼 동네 의원을 차린다 해도 내가 그런 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제3세계 오지 마을이라면 모를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한 명의 의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의학의 발전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한 명의 의사가 의학 전반에 걸쳐 발전하는 학문과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고 소화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환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둘째치고 내 전공에 해당하는 문제만 해결하기에도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문제를 직접 책임지기 어려운 것도 이유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특정 과의 전문의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현실에선 내 전공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면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문제를 담당하는 다른 전문의에게 맡기면 그만입니다.
의료는 점점 전문화, 세분화 되어갑니다. 이러한 흐름이 의학의 발전에 일조했음은 사실이지만 전문화, 세분화된 의료는 파편화, 개별화로 인한 부작용을 동반합니다. 부작용은 온전히 환자들의 몫입니다. 내과에도 순환기, 호흡기, 소화기 등 여러 개의 분과가 있고 소화기내과에도 위장, 간, 췌장을 보는 의사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종합병원에서 웬만한 경험이 없는 환자라면 길을 잃고 헤메기 십상입니다. 종합병원의 의사가 이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대개는 해당 과의 질병이 아니란 뜻이며, 당신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환자는 어렵게 찾아간 진료실을 나와 막막한 심정으로 다시 다른 과 의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내 건강 문제를 잘 알고 있는 단골 의사가 있어 그와 상의한다면 애초에 병원을 찾아 맴도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전문화, 세분화 되어가는 의료 환경에서 환자의 다양한 증상을 전체적으로 평가하고 적절한 지침을 줄 수 있는 의사가 더욱 필요한 이유입니다.
동네 의사로 환자를 보며 의원을 꾸려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고 합니다. 유명무실한 의료 전달 체계 아래 대형 종합 병원으로의 환자 쏠림은 심해져 갑니다. 일차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여전히 가정의학과 수련의 목표이지만, 가정의학을 전공하는 후배들은 이전만큼 동네 의사를 꿈꾸지 않습니다. 일차 의료가 위기에 빠진 것이 모두 가정의학과의 책임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차 의료를 떼어놓고 가정의학과의 역할과 미래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우리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함은 자명합니다. 이를 위해선 미래에 대한 통찰과 체계적인 전략이 필요할 것입니다. 일찍부터 이러한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노력해오신 선후배들께는 어줍잖은 제언이 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일차 의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을 이끌어 갈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십여 년 전의 바램처럼 언젠가 동네 의원의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며, 환자의 단골 주치의 역할을 하는 선생님들이 좀더 뿌듯함을 느끼는 환경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7.8.

포켓몬 인형 뽑기

툭, 하고 인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게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있던 파이리 인형이 구멍 속으로 떨어진 뒤였다. 떨어졌다기 보다는 빨려들어간 것 같았다. 기대를 하지 않았던 아이는 눈이 동그래져 나를 쳐다보았다. 파이리 인형을 손에 든 아이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지만, 나는 순간 뒷골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아니나다를까, 엄마와 함께 이상해씨가 가득 들어있는 기계 앞에 딱 달라붙어 있던 둘째가 오빠의 손에 들려있는 파이리 인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뿔싸. 
몇 달 전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육 개월 전, 아이들과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에 들렀던 아울렛 매장에서의 일이었다. 식당 입구에 포켓몬 인형 뽑기 기계가 두 대 있었다. 한 번 뽑아볼까?
아내가 매장을 둘러보러 간 사이 무료함을 달래보고자 아이들에게 제안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만원에 열 두판. 이브이 인형을 목표로 삼았지만 무심한 집게는 인형 얼굴을 긁기만 하거나 어렵게 잡아올렸다가도 힘없이 떨어뜨리길 반복할 뿐이었다. 오 분도 안되는 시간에 만원을 날린 뒤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첫째는 아쉬운 얼굴로 돌아섰지만 문제는 뽑기 기계 앞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딸이었다. 딸아이는 이브이 인형과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이 기계에서는 돈을 더 써도 뽑을 수가 없고, 기계 안의 인형은 따로 살 수도 없다고 되풀이해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인터넷으로 사주겠다고, 바로 주문해 주겠다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 이브이~ 이브이~
- 인터넷으로 산 거는 지금 안오잖아~ 엉엉
인형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땅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우는 아이를 달래다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나도 함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곁눈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결국 쇼핑은 시작도 못하고 그냥 서울로 돌아왔고, 그 뒤로도 주문했던 이브이 인형이 도착할 때까지 이틀을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오늘 신천역 인형 뽑기 방에서도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진 않을까. 나는 빠르게 딸아이의 눈치를 살폈고, 오빠를 원망스럽게 보는 딸아이의 눈망울 속에서 짧은 순간 동공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일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상해씨가 든 기계로 다가가 지폐를 넣고 스틱을 움직였다. 몇 차례 시도했지만 아까와 같은 행운은 따르지 않았고, 기계 안을 살펴보니 한 마리의 인형 탈출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최대한 태연하고 쿨하게 행동해야 했다.

- 이상해씨는 오늘 안되겠다.

뒤돌아선 아빠의 말에 딸아이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잔뜩 긴장을 했지만 이번엔 소리를 지르거나 떼를 쓰진 않았고 이상해씨를 목놓아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서럽게 울 뿐이었다. 겨우 육 개월만에 생긴 엄.청.난. 변화였다. 나는 아내와 눈짓을 교환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파이리 인형을 안고 촐싹대는 첫째에게 눈을 부라리며 딸아이를 안고 토닥이자 아이는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눈물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 아빠, 이상해씨는 언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