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9일 토요일

오랜 환자들

진료 전날 예약 환자 명단을 살피다 보면 이름 석 자만으로 파노라마처럼 얼굴과 병력이 떠오르는 분들이 있다. 십 년이 넘게 같은 방에서 환자를 만나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한 환자를 오랫동안 만나다 보면 좋은 점이 많다. 환자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으니 그에게 새로 생긴 문제에 대해서도 보다 수월하게 판단할 수 있다. 증상의 원인은 무엇인지, 의학적인 의미는 어느 정도인지, 걱정을 해야할 문제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일주일 전부터 명치에 생긴 답답함의 원인이 심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환자의 경우엔 위산 역류, 또 다른 환자에겐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비슷한 증상이라도 환자에 따라 진단이 달라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그에 대해 더 잘 알 수록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할 수 있다. 환자와 함께한 시간의 무게는 치료 효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랜 세월만큼 쌓인 신뢰가 있는 환자는 내가 내리는 별것 아닌 처방도 잘 따르게 되니, 이 역시 좋은 점이다.

오랜 환자를 만나는 게 좋지만은 않다. 만성 질환은 나이가 들면서 나빠지기 마련이다. 당뇨병 약 하나를 쓰다가 두 개를 쓰게 되고, 당뇨병 약만 먹던 환자가 고혈압 약도 먹게 되는 식이다. 무릎에 관절염이 있던 환자는 해가 가면서 허리에, 손가락에도 통증이 생긴다. 시간을 가로축, 환자의 건강 상태를 세로축으로 나타낸다면 그래프는 하강하는 곡선을 이룰 것이다. 의사는 그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기껏해야 곡선의 기울기를 조금이나마 완만하게 하려 노력할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외과 의사가 부러워진다. 건강 문제가 생기는 족족 수술로 종양을 떼듯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속시원한 해결이 가능한 문제는 많지 않다. 의무기록에 적힌 환자의 문제 리스트는 점점 길어진다. 환자의 기록을 살피다 보면 보증 기간을 훨씬 넘긴 자동차를 함께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낡은 부품이 돌아가며 문제를 일으키는 걸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면서.

무엇보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은 환자의 믿음만큼 도움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을 때이다. 오래 만날 수록 환자의 신뢰는 깊어지지만 나를 향한 신뢰가 깊어질 수록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은 잦아진다. 고혈압 약이 뇌졸중을 예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증거는 오직 익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뿐이다. 내가 처방한 고혈압 약이 없었다면 그에게 뇌졸중이 생겼을지, 내가 처방한 약이 뇌졸중을 실제로 막아주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래된 요통이나 관절염은 어떤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운동을 권하는 것, 그리고 소염진통제와 같은 대증 처방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험을 매일 겪으면서 무기력함과 함께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연수를 떠나기 전엔 그 우울감이 꽤나 커진 상태였다.

일 년 만에 앉은 외래 진료실에선 반가운 인사가 오간다. 익숙한 이름과 얼굴을 다시 보는 나도 물론 반갑지만, 반가움의 크기는 항상 환자 쪽이 더 크다. 늘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환자가 감정을 담뿍 담은 눈빛으로 그동안의 기다림을 어색하게 고백할 때면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나도 어색한 웃음만 짓게 된다.

지난 주였다. 다음 날 진료를 미리 준비하는 중에 눈에 띄는 환자가 있었다. 당뇨병이 있는 50대 여성 환자로 내 외래를 다닌지는 다섯 해쯤 되었다. 고도비만에 가까운 체중이라 매번 체중을 줄이기로 약속했지만 지난 해까지 몸무게 수치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마지막 진료 기록엔 5kg을 줄인 것으로 적혀 있었다. 워낙 간식을 좋아하는 분이라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음 날 환자를 만나 체중을 어떻게 줄였는지 묻자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생님이 막상 가시고 나니 이제 진짜 건강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안 계시는 동안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면 안되니까요. 그래서 매일 한 시간씩 걸었지요."

환자가 진료실을 나간 뒤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지난 오 년 보다 내가 없었던 일 년이 환자에게 더 큰 변화를 준 셈이다. 주치의로서 그동안 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부지불식간에 내가 그에게 끼친 영향이 생각보다 컸었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진료실에 돌아온지 한 달이 지났다. 환자를 만나는 하루하루의 일상은 이내 익숙해졌다. 그래도 무력함이나 회의감은 이전보다 줄어든 것 같다. 의사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님에도, 돌아보면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에게 지나친 바램을 가졌었단 생각도 든다. 일 년 전과 그다지 변한 건 없다. 여전히 환자와 만나는 시간은 어렵고 고민스런 순간의 연속이고, 내 결정이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부족하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사실을 좀더 여유롭고 담담하게 받아들여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