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5일 토요일

올리버 색스의 유작을 읽고.

올리버 색스의 유작(고맙습니다. Gratitude)을 읽었다. 어려서부터 숫자와 주기율표를 친구로 삼았던 이 특이한 학자가 생일을 맞이하는 방식은 나이에 해당하는 번호의 원소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열한 번째 생일은 나트륨, 일흔아홉 번째는 금,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네 개의 에세이 중 첫 번째는 그가 여든 번째 생일을 앞두고 쓴 '수은'이란 제목의 글이다. 새해에 처음 읽은 글이 삶에 대한 통찰과 애정으로 가득한 것이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주기율표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수소H의 시기에서 생을 시작한 두 명의 아이들은 이제 열 번째 네온Ne과 여섯 번째 탄소C의 시기가 되었다. 화학에 대해선 까막눈인 내게 두 원소는 금속이 아니라는 것 말고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두 아이는 네온과 탄소의 거리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르다. 순한 성격인 오빠와 달리 둘째는 까탈스럽고 고집이 세다. 식습관도 달라서 간식을 따로 준비해주곤 한다. 첫째는 단맛을 좋아하지만 둘째는 그렇지 않다. 달걀 프라이도 첫째는 완숙, 둘째는 반숙이다.

십년 뒤쯤의 아이들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쉽게 그려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율표 상단의 오른쪽 끄트머리, 네온의 위치를 보며 생각한다. 눈부신 빛은 오래 바라보기 어렵다. 눈이 부실만큼 밝진 않아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주홍빛 네온 조명처럼 온기를 전달해주는 존재로 성장하길. 그리고 탄소. 탄소가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탄소에서 출발한 변주에 불과하지 않던가. 탄소는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부드러운 흑연부터 가장 강한 물질인 다이아몬드까지. 지금 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생기를 불어넣는 이 존재는 시간이 지나 무엇이 될까.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아이의 미래는 그저 바램일 뿐, 역시 나는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 알지 못한다.

처음 만났던 열몇 해 전에 나와 아내는 갈륨Ga과 니켈Ni이었고,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루테늄Ru과 나이오븀Nb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둘 다 지구상엔 지극히 적은 금속이라고 한다. 갈륨과 루테늄의 사이를 지나는 동안 큰 풍랑은 없었던 것 같다. 비교적 평온한 항해를 했던 것에 대해 감사해야 마땅하지만, 요즘엔 무채색의 세상 한가운데서 그저 꾸역꾸역 판에 찍어낸 듯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불안한 마음이 문득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그런 순간, 지구상에 드문 존재인 이 금속의 이름을 되뇌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다.

지난 연말, 오랜만에 컴퓨터에 저장해둔 사진을 살펴보았다. 마우스 스크롤을 길게 당길 때마다, 겨우 몇 년 사이의 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찍었던 사진임은 분명한데 이곳에 갔었던가 싶은 풍경도 있었다. 장소가 어딘지 헷갈릴 때는 사진에 숨겨진 지오태깅을 확인했다. 기록을 남겨두지 않은 기억은 잊는다. 잊혀지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억을 붙잡아두고 싶어진다. 언젠가부터 익숙하지 않은 곳을 지나칠 때 사진을 더 찍어두려 하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이다.

루테늄은 백금 원소이고 하드디스크를 만드는 데 쓰인다. 디스크 밀도를 높여 안정적으로 저장 용량을 늘리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역할을 하는 것은 겨우 원자 세 개 두께의 루테늄 층이다.(물론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Pixie Dust(요정의 먼지)'라 부른다고 한다. 팅커벨이 막대를 흔들 때 나오는 반짝이는 가루 말이다. 오늘도 건망증 때문에 치매를 걱정하는 환자에게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그리고 주기율표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이제 조금은 친숙해진 느낌이 드는 원소 이름을 보며 부질없이 생각했다. 해가 갈수록 휘발성이 강해지는 기억 장치를 위해 루테늄의 시기가 끝나기 전 내 머리 위에서도 요정이 막대를 한 번 흔들어 주었으면.

2019년 1월 2일 수요일

의사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에게

의대 진학이 목표라는 네 명의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멀리 대구에서부터 찾아왔다. 앳된 얼굴이지만 뽀얀 피부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비슷한 색깔의 틴트를 바른 입술이 요즘 학생들다웠다.

내가 할 일은 학생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 뿐이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질문은 다양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 뭘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의대 졸업 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문제점이나 의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한계 등 쉽게 답하기 어려운 것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눈높이에 맞지 않는, 너무 주관적이고 지엽적인 내용만 꼰대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의사가 되길 준비하면서 읽었으면 싶은 책 리스트를 뒤늦게 문자로 보내주었다. 아이들은 오늘 처음 만난 의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이내 잊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문답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 대학 생활을 하면서, 수련을 받으면서 꼭 해야할 활동이 있나요?

- 구체적인 활동을 추천하긴 어렵지만 의사가 될 분들이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어요. 학교와 병원에서 배우고 공부할 것들이 많아 힘들거에요. 그래도 학교와 병원 밖에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서 관심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의사가 된 다음,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좌절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병원과 의료계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더 많은 부조리와 문제들이 있고, 내 문제만큼이나 타인의 문제도 중요하다는 걸 잊으면 안됩니다. 적절한 균형 감각이 필요해요. 
지금 의사를 둘러싼 여러 문제는 저를 포함한 의사들이 나와 타인의 문제 인식에 있어 균형 감각을 잊은 채 살아온 것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내 문제야 나만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는 그렇지 않을테니,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금새 균형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책을 읽어도 좋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도 좋아요. 어떤 방식이든 외부에 대한 관심의 끈, 그걸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