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9일 토요일

동물구충제 펜벤다졸, 그리고 면역항암제

- 60대 남성이 마른 기침으로 병원을 찾았다. 환절기 감기야 늘상 겪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한달이 넘게 기침이 계속되고 있었다. 흉부 CT 촬영 결과를 본 의사가 큰 병원 방문을 권유했을 때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병원에서 시행한 기관지내시경 결과는 소세포폐암이었다.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나빴다. 암세포는 폐 외에도 주변 림프절과 흉골, 갈비뼈, 요추, 골반뼈에 자리잡은 상태였다. 다발성 골전이가 있는 소세포폐암 환자의 기대 여명은 1년 미만이다.
환자는 곧바로 항암화학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내 먼 친척이었고, 내가 한 일은 진료 의뢰와 예약을 도운 것이 전부였지만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할 때마다 그는 매번 내게 전화해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는 듯이. 치료 초반에는 종양의 크기가 다소 줄어들었다. 하지만 첫 공격을 받고 잠시 주춤한 듯 보이던 종양은 이내 이전과 같은 기세등등한 모습을 되찾았다. 여섯 차례 치료를 마쳤을 때 종양은 처음보다 더 커져있었다. 약제를 바꾸어 세 번의 치료를 더 시행했지만 종양이 자라는 속도는 꺾이지 않았다. 치료가 끝날 때마다 듣는 전화기 건너편 그의 목소리 역시 종양이 커진만큼 힘을 잃어갔다. 기존의 치료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보였다.
종양내과에서는 마지막으로 최근에 개발된 신약 치료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기존 항암제에 반응이 없는 경우라 해도 어쩌면 새로운 약제가 조금이나마 경과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새 약제를 두 번째 투여한 한 달 뒤, 척수에 전이된 암은 그의 하지를 마비시켰다. 별다른 처치를 받지 못하고 가족의 부축을 받아 응급실을 나서며 그는 내게 다시 전화했다. 기운이 떨어져 말을 잇기도 힘든 상태였다. 내가 환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요양병원에서 호스피스 병동 전원을 기다리던 그는 며칠 뒤 사망했다. 폐암을 진단받고 십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겨우 두 달 전의 이야기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투여했던 신약의 이름은 옵디보(Opdivo, nivolumab). 2014년에 세계 최초로 개발된 PD-1 면역항암제였다.

- 의학은 업데이트가 빠른 학문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암 치료 분야는 가장 신속하게 발전하는 영역이다. 내가 의대에서 배웠던 암 치료법은 일부를 제외하곤 현재 쓰이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당시 교과서에 수록된 항암제들은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1세대 세포독성항암제였다. 의대 졸업 후 몇 년이 지나 병동 주치의로 일할 때는 책에서만 보던 항암제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 주된 치료제는 역시 세포독성항암제였지만, 당시는 백혈병의 글리벡, 폐암의 이레사와 같은 2세대 표적항암제가 막 쓰이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 약제는 혁신적인 신약으로 조명을 받았고 관련 기사도 쏟아졌다. 매스컴은 암 정복도 머지않았다는 태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폐암 표적항암제인 이레사는 환자의 10퍼센트에서만 효과를 나타냈고, 기껏해야 생존 기간을 몇 개월 연장시킬 뿐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이만해도 대단한 성과였으나 기대만큼의 효과는 아니었다. 현실을 깨달은 언론은 금새 관심을 거두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싸늘해졌다. 벌써 십오 년쯤 전 이야기다.
얼마 전 종양내과 선생님으로부터 폐암의 최신 치료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최근 쓰이기 시작한 3세대 면역항암제 소개가 포함된 내용이었다. 짧은 강의에 많은 것을 담긴 어려웠지만 신약의 효과를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기존의 세포독성항암제와 효과를 비교한 임상연구들은 두 배 이상의 반응률과 3개월에서 1년까지 늘어난 생존률을 보고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뛰어난 효과를 보였던 개별 환자 사례들이었다. 슬라이드엔 단지 몇 차례의 치료만에 종양 크기가 확연히 줄어든 사례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흔히 기대하기 어려운 치료 결과들이었다. 이와 같이 특정 환자에서 유독 극적인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문제는 어느 환자가 그런 반응을 보일지 미리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약제의 타깃인 PD-L1 발현률이 높으면 더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동물구충제인 펜벤다졸을 먹고 폐암이 완치되었다는 해외 기사가 알려지면서 말기 암 환자가 자의로 해당 약을 복용하는 사례가 늘고있다. 화제가 되었던 미국의 환자는 소세포폐암이 여러 장기에 전이된 확장성 병기 상태였지만 현재는 암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병원에서 권한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펜벤다졸만 복용하면서 소셜미디어에 안타까운 투병 일기를 올리는 환자들도 있다. 사람에게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았고 효과가 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복용 자제를 권고하는 전문가, 환자 단체 성명이 발표되었지만, 논란이 확산되면서 오히려 펜벤다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해당 환자는 자신이 의사나 과학자는 아니며, 그저 스스로의 특별한 경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의 바램은 어느정도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의로 복용한 펜벤다졸에 대한 관심에 비해 이 환자가 임상시험 약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닥 주목받지 않는다. 해당 약제는 또다른 PD-1 면역항암제인 키트루다(Keytruda, pembrolizumab)로 알려졌다. 이를 고려하면 펜벤다졸이 아니라 면역항암제가 환자의 암세포를 몰아냈을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해당 임상시험 참여자 중 극적인 완치를 이룬 사람이 그 뿐이었으므로 항암제가 아닌 구충제의 효과로 봐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진행성 병기 환자가 면역항암제로 완치가 되는 사례는 그 자체로 드문 일이며 해당 임상시험에서 그가 유일한 아웃라이어(outlier) 였는지도 확실치는 않다. 중요한 것은 면역항암제가 특정 환자에선 이런 극적인 효과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에 발표된 국내 연구에서는 면역항암제 치료를 받은 폐암 환자 1181명 중 9명(0.76%)에서 완전 관해(complete remission, CR)를 보였다고 밝혔다.

- 오래 전부터 의사들은 암 환자의 극적인 호전 사례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환자와 의료진에게 기적이라고 불리곤 했지만 왜 다른 환자와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출간된 <암 치료의 혁신, 면역항암제가 온다 (The Breakthrough: Immunotherapy and the Race to Cure Cancer)>는 이런 사례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암 정복을 향한 길고도 고된 여정에 참여했던 수많은 연구자들의 이야기이다. 기적과 같은 현상 아래에 면역이란 기전이 숨어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그 실체를 찾기위해 고군분투했던 선구자들로 인해 항암 치료의 패러다임은 완벽하게 바뀌었다. 학계에서 옵디보와 키트루다와 같은 면역항암제 개발은 페니실린의 발견에 맞먹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책장을 넘기며 목격하는 암과의 사투는 스릴러보다 박진감이 넘치고 환자의 사례들은 어떤 드라마보다도 감동적이다. 각각의 스토리 자체도 극적이지만 그것을 전하는 작가의 필력 또한 뛰어나다. 책의 상당 지면이 항암제 작동 기전을 비롯한 전문적인 내용에 할애된 것 역시 놀랍다. 일부 내용은 의학 서적에 실리는데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의사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면역항암제 작동 기전을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려면 작가 스스로 그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저자이면서 과학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저자는 그 임무를 훌륭하게 해낸다. 그 과정에서 특히 저자가 적재적소에 사용한 비유가 큰 역할을 한다. 악셀레이터와 브레이크로 T세포 활성화 신호를 설명하고, 면역계를 피하는 암세포의 활동을 '은밀한 악수'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게 된다.
저자인 찰스 그레이버는 암에 대한 대중서 영역에서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싯다르타 무케르지에 어깨를 비벼볼만한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2010년에 출간된 무케르지의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에 면역항암제에 대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음을 상기해보면, 지금 암 치료의 혁신을 이끄는 면역항암제가 주연으로 등장한 것이 얼마나 최근의 일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뉴욕의 외과의사 윌리엄 콜리가 악성 육종 환자에게 단독균을 주사해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치료를 시도한 것은 백년도 더 된 일이었다. 학계의 조롱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어둠 속의 희미한 불빛을 따라 포기하지 않고 악전고투를 벌여온 이들의 족적을 따라가다 보면 의사로서 절로 겸허해지게 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전하라.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저자의 권유를 따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이 책의 무엇보다 큰 장점은 끝까지 과학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면역항암제는 기적의 치료제가 아니다. 승리에 대한 기록도 있지만 가슴아픈 패배도 존재한다. 저자는 섣부른 기대를 부풀려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 말미에서 그는 골드러시가 지나간 지금, 면역항암제의 위치와 한계,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담담하게 기술한다. 그리고 또다른 특별한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조심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 책이 출간된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면역항암제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제임스 앨리슨(MD앤더슨 암센터), 타스쿠 혼조(교토대) 박사였다. 물론 이들은 이 책에도 등장한다. 같은 해에 FDA 승인을 목표로 시험 중인 새로운 면역항암제는 약 940종에 이른다.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순수함의 형태

아이들 독감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단골 소아청소년과에 가는 길이었다. 가을 바람에 부드럽게 부딪히는 햇살이 눈부셨다. 아직 주사 맞을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초등 1학년 꼬맹이는 아침부터 잔뜩 긴장한 상태다. 병원 가기 싫은데... 란 말을 벌써 수십번째 하고 있었다. 반면 주사에 대한 공포를 이미 극복한 오빠는 소풍가듯 평온한 태도로 몇 걸음 앞서 걷는다. 옆에서 종종걸음을 치던 꼬맹이가 내 손을 잡았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촉촉했다.

- 근데 아빠. B형 독감에 걸렸었는데 또 주사를 맞아야 하는거야?

-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매년 조금씩 모양이 바뀌거든. 그래서 매년 다시 맞아야해.

- 근데 난 독감 걸린지 얼마 안되었잖아. 작년이 아니잖아.

어,,, 그랬었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난 겨울 독감 시즌은 유난히 길었고, 꼬맹이가 B형 독감 진단을 받은 것은 올해 4월 초였다. 독감 진단은 아이가 당장 다음날부터 학교를 못간다는 의미였지만 우리에겐 급히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당일 저녁 꼬맹이만 데리고 무안의 외갓집에 내려가 맡긴 뒤 밤기차로 다시 서울에 올라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덕분에 둘이서만 때아닌 기차여행을 했었다.

- 그랬었지. 그때 가연이가 아빠랑 할머니 댁에 가면서 오빠한테 편지 써놓고 갔잖아.

- 무슨 편지?

- 가연이 없는 동안 방에 있는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 아 맞다. 생각나.

꼬맹이는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잠시나마 긴장이 풀린 얼굴로 키득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 나 그때 할머니 집에 있을 때 아빠가 많이 보고싶었는데.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도 생각이 났어. 그냥 그랬어. 이런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했다. 대화의 맥락으로 보자면 굳이 필요치 않은 말이었지만 아이의 말투가 너무나 밝고 자연스러워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 그때 할머니 집에서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순간 직면했던 것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만약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함에 형태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잠깐 모습을 비춘 순간이었을 것이다. 달리 어떤 것이 더 있을 수 있을까.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아이의 일기장을 읽으며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문학적 문장은 '명료하면서도 저속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평범한 말과 생소한 말을 적절히 섞어 쓰는 '중용'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너무 꾸미지도 말고 너무 평범하게도 쓰지 않도록, 명료함과 고상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뜻일 것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이후 여느 아이들처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내주는 분량만큼, 일주일에 이삼일씩. 일기 숙제는 늘 있었지만 5학년이 된 올해는 다른 해와 조금 달랐다. 담임선생님께서 여러 개의 주제를 주고 매달 그 중에서 골라 중간중간 일기 대신 짧은 에세이를 쓰도록 한 것이다. '나에게 램프의 요정이 생긴다면' 같은 노멀한 것부터 '30년 후 내 자녀에게'와 같은 다소 철학적인 주제나 '똥 맛 카레가 맛있을까 카레맛 똥이 맛있을까'와 같은 엉뚱한 주제까지 다양했다. 아이들이 쓴 글에는 선생님이 깨알같은 감상평을 남겨주신다. 대부분 긍정적이고 공감을 표하는 내용이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소통하기에 유용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두어 편씩 업데이트 되는 일기장을 보는 것은 나름 쏠쏠한 재미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때도 있었고 위트있는 표현에 웃음을 짓게 될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글솜씨가 늘어가는 게 보여 흐뭇하기도 했다. 때로는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일기 쓰기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 선생님의 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날은 선생님이 제가 쓴 일기가 재미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고 으쓱해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도 짤막한 감상평을 전달하곤 했다.

근래 들어 아이의 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글의 소재나 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표현에서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읽는 이를 의식하고 쓴다 할까. 물론 아이의 일기는 애초부터 혼자만 간직할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근의 글에선 재미나고 독특하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이전보다 더 엿보였다. 꾸밈이 많아진 글은 본래의 자연스러움이 줄었고 때로는 과하게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타인에게 읽히지 않는 글은 거의 없다. 심지어 지극히 사적인 일기마저도 후대에 책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운명에 처하곤 하지 않던가. 우리가 쓰고 접하는 대부분의 글은 미래의 독자를 의식하고 쓰는 것이며, 독자를 의식하고 나아가 이해할 때 더 좋은 글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진다. 모 소설가는 글을 쓰는 것이 연애 편지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일정부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연애 편지는 내 역량을 총동원해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위한 표현을 고민한다는 면에서 가장 좋은 글쓰기가 될 수 있다.

예전 일기가 더 좋았어. 며칠 전 아이의 일기를 읽은 아내가 내게 말했다. 아내도 같은 느낌을 받았나보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중용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쓰는 글의 변화를 목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욕심을 부려 잠시 균형을 잃었을지 몰라도, 아이의 글쓰기는 또 제 나름의 균형을 찾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글들을 쓰게 될까. 그리고 그 글을 쓰는 아이는 어떻게 변화할까.

2019년 10월 30일 수요일

연수일기 1. 해외 연수 기관 정하기

내년 해외 연수가 확정되었다. 현재로선 시기는 8월, 장소는 미국 샌디에고가 될 예정이다. 연수 준비를 할 때 연수 기관을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초청장을 보내줄 외국 기관 연구자와의 친분을 이용하거나 다른 이를 통해 소개를 받는 것이 수월한 방법이다.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방문하고 싶은 기관의 연구자에게 직접 문의를 해야한다. 메일을 보내도 감감무소식인 경우도 많다. 승낙을 해주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방문을 받기 어렵다고 공손히 거절 의사를 보내주기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그래도 거절이 반복되면 기한 내에 연수 기관을 정해야 하는 입장에선 애가 탈 수밖에 없다.

연수 기관 매칭에 어려움을 겪은 분들 이야기도 들은 바 있어서, 좀 이른 시기인 지난 3월에 첫 번째 문의 메일을 보냈다. UCSD의 A선생님은 WHI, MESA 등 유명 코호트에 참여했고 지금까지 4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 분으로, 관심을 두고있는 영양역학 연구를 함께 하기에도 적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첫 문의에 일이 쉽게 풀리랴 싶어 토요일에 CV를 첨부한 메일을 보내면서도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런데 웬걸, 하루 뒤 일요일(!)에 바로 답신이 왔다. 내년 8월까진 자리가 찼고 이후에는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1월에 연수를 시작할 수 있는 다른 곳을 찾을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더 적당한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샌디에고란 도시에 대해서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에 아내와 상의 후 다음날 바로 다시 답신을 보냈다. (할 수만 있다면 달려가 손편지를 봉투에 넣어 직접 두손으로 공손히 드리고 싶었다.)

그 뒤로 한달간 열 통이 넘는 메일을 보내고 답을 받으며 연구 주제를 상의하고, MESA 코호트 연구자 웹사이트에 접근할 권한을 얻었다. 3주 전 내년 연수 대상자 명단이 공식 발표되었고, A선생님께 다시 그 소식을 알렸다. 코호트 데이터 신청을 위한 두 개의 연구계획서를 함께 첨부했다. 내용을 본 A선생님이 휴스턴 베일러의대 W선생님을 공동연구자로 추천해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었다. W선생님은 프로필 사진만으론 나보다 나이가 십년은 적어보이지만 영양역학 논문 수만 언뜻 세어도 내 전체 논문 수를 가볍게 넘기는 훌륭한 연구자이다. 계획서를 보자마자 분석 방법 변경의 필요성에 대한 깨알같은 강의와 네 가지 질문이 담긴 장문의 메일을 보내셨다. 긴 금발의 전형적인 청순 미인이신데 랩 이름이 dark matter lab. 앞으로 발표할 논문들로 온 우주를 가득 채우실 생각인가보다.

아뭏든 그렇게 당분간 두 선생님의 지도 편달을 받으며 연구와 연수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메일을 보낼 때마다 광속으로 돌아오는 답메일에 어지럼증을 느끼곤 하는데, 샌디에고와 휴스턴을 거친 연구 계획이 남은 10개월이 지나 내년 8월이 되었을 때 어디까지 진행되어 있을지는 모르겠다.

2019년 9월 24일 화요일

일어서기에 대한 소고小考

스마트 워치를 꽤 오랫동안 사용했다. 운동할 때 활용하기 좋다고 하는데 이런 기기를 사용해 그날의 운동량을 타인과 공유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 경우 그저 이 기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운동량이 늘거나 체형이 바뀌는 기적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고 달린 거리와 경로를 보며 그저 감탄하거나 부러워할 뿐이다. 가끔 메시지 알림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일 때도 있지만 결국 나에게는 스마트 워치도 아직까진 그저 시계인 것이다.

몸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이 기기를 사용하면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다. 평일 아침에 집을 나서서 퇴근할 때까지 보통 육천보 정도를 걷는다거나, 올해 평균 걸음 수가 작년에 비해 오백보 적다거나, 하루에 걷기로 소비하는 칼로리가 겨우 밥 한공기 수준이라거나, 뭐 그런 사소한 것들 말이다. 일어서는 횟수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도 그중 하나인데, 하루 목표인 열두 번을 채우는 날이 별로 없다. 그래도 진료실도 가야하고 화장실도 가고 점심 먹으러도 움직이는데 이렇게 드물게 일어설까 싶어 하루 일상을 복기해 보았더니 실제로 그럴만했다. 배뇨와 식사. 필수적인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이동 말고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도통 움직이질 않는거다.

일어설 시간입니다! 라고 친절하게 울리는 알람의 의미는 한 시간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문득 허리가 뻐근한 것 같아 상체를 슬쩍 뒤로 젖혀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벌떡 일어서진 않는다. 그래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면에서라면 도움이 된 셈이다. 걷기, 운동하기 외에 왜 하필 '일어서기'를 활동 항목에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어서기가 걷거나 운동하는 행위와 같은 취급을 받을만한 신체활동은 아닐텐데. 물론 운동을 하기 위해선 대개 일어서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지만.

손목에서 울리는 알람을 무시하고, 두 시간째 진득하게 앉아 강의 자료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유튜브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았다. 학생들이 교장의 강압적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서 책상에 올라섬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드러내고 키팅 선생님에게 작별을 고하는 그 장면.

'stand'란 단어는 어떤 사안에 대한 공개적인 태도나 입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어서기가 신체적인 것 뿐 아니라 사회적인 행위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떠올려보면, 난 본래도 잘 일어서지 않는 편이었다. 여러 사람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즐기지 않고 말주변도 없다. 강의나 발표를 해야 하는 직업이라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반복되면서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상황은 불편하다.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머리 속의 생각이 입을 거쳐 발화될 때 본래의 빛깔을 잃는 듯 느껴질 때가 많은데, 그에 대한 두려움이 한몫했던 것 같다. 아마 소심한 성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든 대개 침묵을 선호했고, 그 역할은 주목받지는 않지만 적어도 책임을 지거나 비판을 받을 위험은 없었다.

손목에 찬 시계도 일어서기를 격려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과거보다 더 자주, 다양한 방식의 일어섬을 목격한다. 스스로는 하루 열두 번도 채 일어서지 못하지만 우리 사회엔 더 많은 일어섬이 필요하며, 모든 일어서는 행위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행위가 같은 무게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일어서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일어서기 전까지의 부동과 침묵이기 때문이다. 부동과 침묵이 드리운 그림자가 짙고 길수록 일어서는 행위의 의미는 커지고, 보편적 공감과 연대 의식을 넘어 때로는 감동까지도 만들어낸다. 반면 부동과 침묵 없이 발화된 일어섬은 번잡한 삶에 피로를 더할 뿐이다.

행위의 결과가 항상 해피 엔딩이 될 순 없다. 키팅 선생님은 결국 떠나고 아이들은 남는다. 스크린을 벗어난 현실에서, 사람들은 대개 다시 자리에 앉아 부동과 침묵의 그림자에 몸을 감춘다. 그러므로 부동과 침묵은 곳곳에 존재하며 우리는 대개 어떤 방식으로든 부동과 침묵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좀더 겸허해지고, 타인의 일어서는 행위에 대해서 보다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어서서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다.


2019년 8월 28일 수요일

확증편향


- 등기 수령 메모 못 봤어요? 버린 것 같아서 휴지통을 뒤져도 없네.

집배원이 대문에 붙이고 간 우편물 도착 안내문을 찾는 중이었다. 맞벌이 부부가 등기 우편물을 첫 번째 배달 때 직접 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번에도 현관 눈높이에 얌전히 붙어있는 안내문을 서재 책상에 놓아 두었었다. 쪽지에는 재방문 일시와 집배원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재방문일 아침, 집배원에게 미리 연락해 아파트 보안실에 맡겨달라 부탁하려는데 안내문이 안보였다. 책상에 함께 놓아둔 다른 우편물들과 섞여 버려졌나 싶어 휴지통을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 아침에 관리비 고지서랑 같이 버렸는데, 왜요?


역시 아내가 버린 것이었다. 다시 휴지통을 뒤졌지만 몇 안되는 종이쪼가리들 틈에서 안내문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종량제 봉투를 꺼내어 뒤집었다. 봉투에 담겨있던 쓰레기와 함께 시큼한 냄새가 쏟아졌다. 다른 종이와 함께 구겨졌나 싶어 이번엔 종이 쓰레기를 하나하나 펴보았다. 아이들 방학 생활 안내문,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와 전단지들 사이에서 그제야 익숙한 우체국 마크가 눈에 띄었다. 안내문을 발견하고 나서 왜 처음에 바로 눈에 띄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안내문은 어른 손바닥 정도의 크기였는데, 나는 A4 용지만한 종이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함께 놓여있던 다른 서류들과 같은 크기라고 착각했었던 것 같다. 안내문은 반으로 접힌 채였다. 머리 속에 큰 종이를 미리 그려놓았기에 손바닥 절반만한 크기의 안내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이런 오류가 선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류의 역사만큼은 오래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카이사르도 인간은 자기가 보고싶은 현실만을 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확증편향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그 실험 결과를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우리는 가까이에서 쉽게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특정 지역에 대한 비하, 외국인 노동자나 성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답정너의 자세로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는 주말밤 TV 토론에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의견과 댓글에 대댓글 싸움으로 차고 넘치는 SNS 담벼락에서.

사람은 듣고싶은 것만 듣고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것, 나를 포함한 세상은 오류와 편향으로 가득하며 지면과 모니터를 가득 메운 말의 상찬이 부질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평론가 신형철의 글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답을 찾기 어려운 때일수록 단순하게 사실을 인지하고, 나아가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천천히.

기껏해야 10리터 크기의 종량제 봉투 안에도 깨달음은 있는 법이다.

2019년 5월 3일 금요일

구두 밑창을 갈며

길건너에 있는 구두 수선 노점에 들렀다. 구두를 자주 닦는 편은 아니다. 길가다가 문득 생각이 날 때 가까운 노점을 찾는 정도라 막상 회사 근처에 있으면서도 오랜만에 방문한 곳이었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선지 노점 안의 손님은 중년 신사 한 명 뿐이었다. 희끗희끗한 스포츠 머리에 다부진 체격의 주인이 손을 재게 놀리며 낡은 검정 구두를 닦고 있었다. 밑창과 굽을 갈아달라는 말에 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 국산으로 하면 밑창하고 굽 각각 만오천원, 수입으로 하면 각각 이만오천원입니다.

구두를 닦던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벗은 구두를 작업대 옆에 놓은 뒤 삼선슬리퍼를 신고 노점 한켠의 벤치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바닥에 열선이 깔렸는지 엉덩이가 뜨끈했다. 닦던 구두를 마무리하고 손님을 보낸 그가 밑창 샘플을 내밀었다. 좀더 두껍고 오래 간다는 수입산 제품을 선택했다. 밑창과 굽 합쳐 오만원이다. 구두를 살펴보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좋은 구두네요. 아무래도 두꺼운 게 더 나을 겁니다.

닳아버린 뒷굽을 그라인더로 갈아내 평평하게 만들고 구두 바닥에 본드를 바른다. 새 밑창과 굽에도 본드를 바르고 드라이기로 가열한 뒤 구두에 단단히 붙인다. 새로 붙인 밑창이 들뜨지 않도록 모서리 부분을 꾹꾹 누르며 힘을 줄 때마다 세월에 단련되었음직한 그의 팔뚝 근육이 꿈틀거렸다. 구두를 돌려가며 접착 상태를 확인한 뒤 끌칼로 기존 굽과 밑창에 맞춰 새 밑창을 잘라내는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거침이 없었다.

새 손님이 방문했다. 기다리는 손님이 생기자 구두를 매만지는 그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새 밑창과 굽으로 갈아신은 구두는 다시 작업대에 올랐다. 광택을 내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다. 장인의 손길이 다시 물흐르듯 움직였다. 팔뚝 길이만한 흰 천을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야무지게 두르고는 느슨해지지 않도록 엄지에 다시 돌려 감는다. 천을 두른 손가락으로 젖은 스펀지를 두드린 뒤 갈색 구두약을 발라 구두 가죽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물광을 내기 위함이다. 약통과 구두를 오가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우아했다.

뜨끈한 의자때문에 중간중간 엉덩이를 움찔거려야 했지만 삽십분 남짓한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늘 그렇지만 구두를 닦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오히려 즐겁기까지 하다. 가끔은 그 과정이 숙련된 예술가의 공연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오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을 때 나는 마치 그의 노동력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그의 행위에 대한 관람료를 지불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평이 채 안되는 공간이었으나 공연은 훌륭했고 그는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그러므로 까만 구두약 때가 잔뜩 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지폐를 받는 그를 향해 나 역시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9년 3월 18일 월요일

확실과 불확실

아이에게 수학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이 삼각형을 포함하는 삼각형이라는 건, 이 작은 삼각형을 품고있는 큰 삼각형을 말하는 거야."
"아니, 근데 포함하는 거면 이 삼각형도 되고 다른 삼각형도 되는 거잖아."
"그러러면 이 삼각형을 포함해서라고 되어 있었어야지."
"그러니까, 이 삼각형도 넣어서 세어야 한다는 거잖아."
같은 대화가 몇 번 더 오고가면서 결국 언성이 높아져버렸다.
"포함해서가 아니고 포함하는이라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나서 아차 싶었다. 아이가 억울한 표정으로 한참 문제집을 내려보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휙 제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부모 역할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은 여전히 불쑥 찾아온다. 팽팽해진 고무줄이 툭 끊어지는 것처럼. 또 그러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아이에게 사과를 한 뒤에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포함하는'과 '포함해서'의 차이를 설명할 그럴싸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선생님들은 이런 차이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는 걸까.) 그렇지만 역시 어미가 다른 이 두 단어가 같은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수학 문제에서라면. 아름다운 수학 문제라면 문제의 모든 단어는 하나의 답을 향해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기 마련이다. 일단 답이 정해진 수학 문제에서 '포함하는'과 '포함해서'의 차이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만큼이나 명확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접하는 일들이란 수학 문제처럼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삶은 불확실함으로 가득하다. 오늘 내가 보고 들었던 것 중에 진실은 얼마나 있었을까. 짧은 말과 행동과 사건의 이면엔 대개 그 몇 배의 맥락이 있고 그 흐름 어느쯤에 발을 담구었느냐에 따라 그 일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진실이란 알기보다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이 확실함을 가장해 내뱉는 말은 공허한 푸념이 되거나 실제 그 흐름 가운데에 있었던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이다.
쉽게 판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선 그 전에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를 반복해 되묻는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의학자로 살면서 배인 태도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의학이란 불확실 투성이의 학문이다. 이십여년 전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 중 지금까지 쓸만한 것은 많지 않다. 그때 찬란한 진리로 우러렀던 교과서는 지금은 쓸 수 없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시골집 창고처럼 활용할 수 없는 지식을 담고 먼지가 쌓인 채 책장 구석에 박혀있다. 그러니 오랫동안 진리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고 남아있는 의학적 발견이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낮추는 것이 좋다.'라는 단순한 명제와 같은 것들. 물론 어디서부터가 고혈압인가, 또는 혈압을 얼마만큼 낮추어야 하는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새로운 논란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의학이란 불확실 투성이라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적당히' 낮추면 뇌졸중과 심근경색과 같은, 살면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병들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진 흔들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약을 써야 하는가란 문제로 가면 역시 불확실성의 힘이 강해진다. 진료실에서 낯선 처방전을 조심스럽게 내미는 환자들을 종종 만난다. 복용 중인 약이 괜찮은지 확인해달라는 것인데, 고혈압 약도 그 중 하나이다. 고혈압 약은 성분명 만으로도 수십 종류가 있지만 대개는 어떤 종류를 선택해도 무방하다. 환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피해야 할 약도 있지만, 그럴만한 문제가 없는 환자의 경우 선택의 기준은 기껏해야 경험적인 선호일 뿐인 것이다. 그런 경우 그가 복용하는 약은 선택이 가능한 수십 가지 약들 중 하나이며, 그보다 더 나은 최적의 약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할 일은 처방전에 인쇄된 약 이름을 주의깊은 태도로 살펴보고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아주 좋은 약입니다. 선생님께서 처방을 잘 해주셨네요.'
편안한 얼굴로 돌아서는 환자를 보며 생각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도 때로는 일부러 확실함을 가장한 태도를 보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태도가 지나쳐 강요가 되진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아이에게 수학 문제를 가르칠 때와 같은 상황에서는.


최근 화제가 되었던 스카이캐슬을 보진 않았지만, 김서형 씨의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란 대사는 인상적이었다. 대사와 말투, 표정 모두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와 같은 이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와는 다르겠지만, 말들로 가득찬 드라마에서 그녀의 대사가 남겨진 것은 불확실로 가득한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확실함을 대하는 기분을 선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2019년 1월 5일 토요일

올리버 색스의 유작을 읽고.

올리버 색스의 유작(고맙습니다. Gratitude)을 읽었다. 어려서부터 숫자와 주기율표를 친구로 삼았던 이 특이한 학자가 생일을 맞이하는 방식은 나이에 해당하는 번호의 원소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열한 번째 생일은 나트륨, 일흔아홉 번째는 금,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네 개의 에세이 중 첫 번째는 그가 여든 번째 생일을 앞두고 쓴 '수은'이란 제목의 글이다. 새해에 처음 읽은 글이 삶에 대한 통찰과 애정으로 가득한 것이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주기율표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수소H의 시기에서 생을 시작한 두 명의 아이들은 이제 열 번째 네온Ne과 여섯 번째 탄소C의 시기가 되었다. 화학에 대해선 까막눈인 내게 두 원소는 금속이 아니라는 것 말고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두 아이는 네온과 탄소의 거리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르다. 순한 성격인 오빠와 달리 둘째는 까탈스럽고 고집이 세다. 식습관도 달라서 간식을 따로 준비해주곤 한다. 첫째는 단맛을 좋아하지만 둘째는 그렇지 않다. 달걀 프라이도 첫째는 완숙, 둘째는 반숙이다.

십년 뒤쯤의 아이들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쉽게 그려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율표 상단의 오른쪽 끄트머리, 네온의 위치를 보며 생각한다. 눈부신 빛은 오래 바라보기 어렵다. 눈이 부실만큼 밝진 않아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주홍빛 네온 조명처럼 온기를 전달해주는 존재로 성장하길. 그리고 탄소. 탄소가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탄소에서 출발한 변주에 불과하지 않던가. 탄소는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부드러운 흑연부터 가장 강한 물질인 다이아몬드까지. 지금 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생기를 불어넣는 이 존재는 시간이 지나 무엇이 될까.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아이의 미래는 그저 바램일 뿐, 역시 나는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 알지 못한다.

처음 만났던 열몇 해 전에 나와 아내는 갈륨Ga과 니켈Ni이었고,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루테늄Ru과 나이오븀Nb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둘 다 지구상엔 지극히 적은 금속이라고 한다. 갈륨과 루테늄의 사이를 지나는 동안 큰 풍랑은 없었던 것 같다. 비교적 평온한 항해를 했던 것에 대해 감사해야 마땅하지만, 요즘엔 무채색의 세상 한가운데서 그저 꾸역꾸역 판에 찍어낸 듯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불안한 마음이 문득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그런 순간, 지구상에 드문 존재인 이 금속의 이름을 되뇌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다.

지난 연말, 오랜만에 컴퓨터에 저장해둔 사진을 살펴보았다. 마우스 스크롤을 길게 당길 때마다, 겨우 몇 년 사이의 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찍었던 사진임은 분명한데 이곳에 갔었던가 싶은 풍경도 있었다. 장소가 어딘지 헷갈릴 때는 사진에 숨겨진 지오태깅을 확인했다. 기록을 남겨두지 않은 기억은 잊는다. 잊혀지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억을 붙잡아두고 싶어진다. 언젠가부터 익숙하지 않은 곳을 지나칠 때 사진을 더 찍어두려 하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이다.

루테늄은 백금 원소이고 하드디스크를 만드는 데 쓰인다. 디스크 밀도를 높여 안정적으로 저장 용량을 늘리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역할을 하는 것은 겨우 원자 세 개 두께의 루테늄 층이다.(물론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Pixie Dust(요정의 먼지)'라 부른다고 한다. 팅커벨이 막대를 흔들 때 나오는 반짝이는 가루 말이다. 오늘도 건망증 때문에 치매를 걱정하는 환자에게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그리고 주기율표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이제 조금은 친숙해진 느낌이 드는 원소 이름을 보며 부질없이 생각했다. 해가 갈수록 휘발성이 강해지는 기억 장치를 위해 루테늄의 시기가 끝나기 전 내 머리 위에서도 요정이 막대를 한 번 흔들어 주었으면.

2019년 1월 2일 수요일

의사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에게

의대 진학이 목표라는 네 명의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멀리 대구에서부터 찾아왔다. 앳된 얼굴이지만 뽀얀 피부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비슷한 색깔의 틴트를 바른 입술이 요즘 학생들다웠다.

내가 할 일은 학생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 뿐이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질문은 다양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 뭘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의대 졸업 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문제점이나 의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한계 등 쉽게 답하기 어려운 것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눈높이에 맞지 않는, 너무 주관적이고 지엽적인 내용만 꼰대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의사가 되길 준비하면서 읽었으면 싶은 책 리스트를 뒤늦게 문자로 보내주었다. 아이들은 오늘 처음 만난 의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이내 잊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문답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 대학 생활을 하면서, 수련을 받으면서 꼭 해야할 활동이 있나요?

- 구체적인 활동을 추천하긴 어렵지만 의사가 될 분들이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어요. 학교와 병원에서 배우고 공부할 것들이 많아 힘들거에요. 그래도 학교와 병원 밖에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서 관심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의사가 된 다음,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좌절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병원과 의료계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더 많은 부조리와 문제들이 있고, 내 문제만큼이나 타인의 문제도 중요하다는 걸 잊으면 안됩니다. 적절한 균형 감각이 필요해요. 
지금 의사를 둘러싼 여러 문제는 저를 포함한 의사들이 나와 타인의 문제 인식에 있어 균형 감각을 잊은 채 살아온 것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내 문제야 나만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는 그렇지 않을테니,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금새 균형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책을 읽어도 좋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도 좋아요. 어떤 방식이든 외부에 대한 관심의 끈, 그걸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