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4일 토요일

영화 '다음 소희'를 보았다.

일주일 전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모두가 한 번은 들른다는 브란덴브루크문 광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옛 동독의 영토였던 광장에서 프로이센군의 개선문이었던 브란덴브루크문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은 뒤 광장 옆의 홀로코스트 기념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식 명칭은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로, 높이가 다른 직육면체 돌들이 빽빽이 들어선 공간이다. 돌들은 마치 관이나 비석처럼 보여서 중앙의 키보다 높은 돌들 사이를 지날 때는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은 유대인 학살의 기록으로 가득한 지하 기념관을 둘러보는 내내 이어졌다. 거리로 나와 바깥 공기를 쐬고서야 답답함을 떨칠 수 있었다. 이월의 바람이 아직 찼다. 우울한 기운을 내치듯 일부러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기념관의 남쪽 경계는 한나 아렌트 거리라 이름붙은 길이다. 나치를 피해 고국인 독일을 버렸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을 통해 악인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흔히 행하는 일도 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 그는 "그런 악한 행위는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고 했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비판적 사고가 없다면 상황에 따라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평론가 신형철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썼던 다음의 문구도 비슷한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현장 실습생의 사망 사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장 최근은 2021년 여수에서 요트 바닥 청소를 하던 고등학생이 익사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기사를 찾아 연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엔 현장 실습을 둘러싼 문제를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일부 업체의 문제 정도로 생각하고 아이의 죽음을 적당히 안타까워 하며 넘겼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서야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대부분의 사고가 그렇듯, 문제는 구조적이고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현장 실습생을 저렴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회사, 실습을 보내는 데만 급급한 학교, 평가를 소홀히 한 교육부, 관리 감독을 외면한 고용노동부 모두가 가해자였다. 하지만 등장 인물 중 누구도 대단한 악인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평범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이다. 콜센터는 실적을 이유로, 교육부와 학교는 취업률을 이유로 아이들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사실 이런 건 우리 모두에게 퍽 익숙한 평가 잣대들 아니던가. 책임을 묻는다면 모두가 그저 자기 일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따져 묻는 형사에게 교육부 장학사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벽면 가득한 취업률 평가 도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적당히 좀 하십시다."

영화를 보며 소희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어른이 없었다는 점이 가슴 아팠다. 부모, 선생님, 회사 상사, 어느 누구도 소희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 회사 그만둘까, 하는 소희의 말은 부모 앞에서도 혼잣말이 될 뿐이다. 아이의 말을 들어준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꽃같은 아이의 죽음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소희의 옆엔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들만으론 부족하다. 정글같은 사회를 살아내려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 꼭 필요한 것이다.

얼마 전 김장하 선생의 다큐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반면에 나는 살면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다. 법적으로 어른이 된 지 삼십 년이 되었지만 다큐를 보는 내내 내가 어른이란 확신이 들지 않아 자괴감도 들었다. 선생의 발끝을 따라가기도 어려울 것이나, 그래도 내 입장에서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곳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어른의 역할을 조금은 할 수 있겠다는. 그리고 어른을 필요로 하는 순간과 장소를 지나치거나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겠다는. 애쓰지 않는다면 금새 잊을 것이다. 나 역시 복잡하게 나쁜,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

콜센터 근무 환경이나 현장 실습생 제도의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조금은 변화도 있었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어른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걸로 보인다. 아이들의 죽음은 해를 거르지 않고 반복된다. 그러니 소희가 일했던 콜센터가 지금도 어디에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고 일주일 전 베를린에서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 건 홀로코스트 기념관 안에 적혀있던 문구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말이 그것이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2023년 3월 2일 목요일

음식은 약이 아니다

오십대 남자 환자에게 검사 결과를 설명하던 중이었다. 혈당 수치 오른쪽에 정상 범위보다 높음을 의미하는 붉은색 화살표가 선명했다. 

“혈당이 높습니다. 작년보다 더 높아졌어요. 지금 수치는 당뇨병에 해당합니다.”  

공복 혈당 장애라 불리는 당뇨병 전 단계에 접어든 지도 벌써 몇 년 되었으니 당뇨병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되풀이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통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뇨병이 온 건 아니겠지요?”

일찍이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 감정을 차례로 겪는다고 했다. 죽음의 경우만큼 강렬하진 않겠지만 만성 질환을 처음 진단받은 환자도 비슷한 감정의 수순을 거친다. 지금은 그중 첫 번째인 부정 단계라 할 수 있다. 환자들은 대개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고 천천히 설명했다. 

“아뇨. 당뇨병이 온 겁니다. 이제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미죠.”

“제 가족 중에 당뇨병 환자도 없는데 왜 저만 당뇨병이 생겼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두 번째, 분노의 단계다.

“유전적인 원인 외에도 다른 여러 원인들이 있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내게 왜 당뇨병이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사실 지금은 왜 당뇨병에 걸렸는지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럼 이제 약을 먹어야 하나요? 당뇨병 약을 먹기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죠. 하지만 당뇨병 초기이고 심하지 않은 상태니 먼저 생활 습관을 바꿔서 조절해 봅시다. 변화가 없으면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침울한 표정을 짓던 그가 조금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뇨병을 처음 진단받은 환자 대부분은 평생 약을 먹기를 부담스러워 한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그럼 당뇨병이 생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우울과 타협 단계. 다섯 단계 감정이 반드시 순서대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중간 단계를 건너뛰기도 하고 타협을 했다가 다시 분노 단계로 돌아가기도 한다. 지금은 잠시 앓고 지나갈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 병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자연스레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이를 것이다. 그때까지는 해야할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운동은 걷기를 하고 계시니 조금 더 늘려보지요. 속보로, 숨이 차고 땀이 날 정도로 강도를 높여서 빨리 걷는 게 좋습니다. 매일, 최소한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은 해야 합니다.”

“펜을 빌릴 수 있을까요?”

모니터 옆 철제 펜꽂이에서 볼펜을 꺼내 환자에게 건넸다. 그는 혈당 검사 수치 옆에 방금 들은 말을 기록했다. 반듯한 글씨였다. 나는 그가 기록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다음은 체중 감량입니다. 한 달에 일 킬로그램씩. 석 달에 삼 킬로그램만 줄여보세요.”

그는 선생님의 강의를 요점 정리하는 학생처럼 볼펜을 부지런히 놀렸다. ‘체중 줄이기, 3킬로 / 3개월’이라 적고 앞쪽의 숫자 3에 동그라미를 두 번 그렸다. 

“마지막으로 식단입니다. 체중을 줄이려면 무엇보다 먹는 양을 줄여야 합니다. 지금 먹는 양에서 삼분의 일을 덜어내고 삼분의 이만 먹는다고 생각하세요. 단맛이 나고 당분이 많은 간식은 피하되, 무엇보다 골고루 드시는 게 중요합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설명을 멈추고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의 얼굴에 기대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다음에 이어질 질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뭘 먹으면 혈당이 내려갈까요? 당뇨병에 도움이 되는 식품 같은 게 없을까요?”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이 질문은 만성 질환 환자와의 대화 중에 주로 타협 또는 수용 단계에서 등장한다. 내게는 어렸을 적 그림책에서 보았던 전래 동화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옛날 어느 마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자가 있었다.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딸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엄동설한에 딸기가 있을 리 만무했지만, 딸기를 먹으면 병이 나을 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에 효심이 깊은 아들은 딸기를 구하기 위해 눈 덮인 산을 올랐다. 추위를 무릅쓰고 산 속을 헤매던 효자 앞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등에 태우고 딸기가 있는 곳에 데려다 주었다. 아들이 구해온 딸기를 먹은 어머니는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있어서 어떤 때는 효자가 효녀로, 호랑이가 산신령으로, 딸기가 봄나물이나 홍시로 바뀌기도 한다. 그래도 주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호랑이를 감동시킨 효심은 놀랍지만 효심에 대한 설화는 많기에 이 이야기가 특별하진 않다. 내가 이 이야기를 떠올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음식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이 흥미로워서이다. 한해 동안 병치레를 피하기 위해 대보름날에 오곡밥이나 부럼을 먹던 풍습을 보면 음식이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한다는 개념이 꽤나 오래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래 전 약도 의학 지식도 부족했던 시대엔 음식과 약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당시엔 풀뿌리를 빻거나 나무 열매를 달여서 약으로 쓰기도 하고, 관절이 아픈데 좋다는 음식을 기침이나 두통에 쓰기도 했을 것이다. 우연이든 아니든 이렇게 만든 약을 먹고 어떤 이의 병세가 좋아졌다면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거나 책으로 쓰이기도 했을 것이다.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말이 있다.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동일하다는 뜻으로, 기원전 중국 진한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의서 <황제내경>에 적힌 말이라 한다. 그러니 음식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예수의 탄생만큼이나 오래된 셈이다. 조선 선조 때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에서도 같은 말을 찾을 수 있다. 중국과 한국 등 동양 의학에선 체질과 음식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해서인지 음식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개념도 일찍부터 더 깊게 뿌리내렸던 것으로 보인다.(서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는 설도 있지만 출처가 확실치 않다.) 쑥이나 냉이, 도라지, 더덕 등의 식재료는 한약재로도 알려져 있다. 심지어 이런 약재를 넣어 담근 술도 약(藥)주라고 부른다. 

음식과 관련된 믿음은 지금도 흔하다. 가끔 가는 동네 콩나물국밥 집 벽엔 메뉴판과 함께 염증을 억제하고 대사를 촉진한다는 콩나물의 놀라운 효능에 대한 설명이 걸려있다. 어떤 질병이든 좋다는 음식이 있다. 책이나 방송은 이를 되풀이해 재생산한다. 고향을 소개하는 다큐에서도, 자연인이 등장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도 어느 병에 좋다는 음식을 만들고 먹는 모습은 빠지지 않는다. 오죽하면잘 먹고 잘 사는 법이란 이름의 프로그램도 있었을까. 요즘은 유튜브가 한몫 한다. 조회수를 위한 자극적인 제목은 필수이다. 어떤 음식은 먹으면 큰일날 것처럼, 또 어떤 음식은 안 먹으면 큰일날 것처럼 말한다. 이 과정에선 종종 식품의 종류보다 구체적인 개별 식품이 강조된다. 그냥 채소보다는 브로컬리가, 그냥 견과류보다는 브라질너트가, 그냥 가금류보다는 오리고기가 특효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는 식이다. 당뇨병을 예로 들면 여주, 돼지감자, 노니, 누에 등, 스테디셀러만 해도 여러 가지이다. 다들 각각은 흠잡을 데 없는 음식이지만 따로 찾을 만큼 병을 치료하는 특출난 효과는 없다. 하지만 음식점 벽 메뉴에서까지 음식의 효험에 대한 과장된 설명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보니 진료실에선내가 어디가 안 좋은데 뭘 먹어야 좋아지느냐는 질문도 흔히 접한다. 건강기능식품의 과도한 인기 이면에도 음식이 약이 된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음식은 건강에 중요하다. 하지만 음식으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는 없다. 당뇨병과 같은 만성 질환 관리에 있어 식이 요법은 약물 치료 못지 않게 중요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식이는 개별 음식 한두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음식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식단 전체를 의미한다. 기존의 잘못된 식단은 그냥 두고 특정 음식만 더해 먹는다고 마법같은 변화가 생기진 않는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그 음식만 과하게 먹으면 균형이 깨지거나 영양실조가 생긴다. 그러니 내 답을 기대하는 환자에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뇨병에 특효인 식품 같은 건 없습니다. 음식은 약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