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이창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이창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3년 12월 26일 화요일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정아은 작가의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만큼 솔직한 글쓰기 책은 없다는 카피가 어울리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솔직함과 자기 비하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 좋았다. 읽으면서 여러 번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다. 글쓰기 경험에선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내 입장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인상깊었던 몇 가지 내용을 적어본다. 기억에만 의존한 내용이라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책의 첫머리에서는 잘 써야 한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나아가 '잘 쓰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 써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히면 초고 자체도 아예 쓰지 못할 수 있다. 나도 머릿 속의 생각이 내 손을 거쳐 활자화 되는 순간에 그 문장의 조악함과 유치함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종종 한다. 머릿 속을 맴도는 아이디어는 왜 그대로 멋지게 옮겨지지 않는 걸까 괴로워하다 보면 어찌어찌 써냈던 몇 줄의 문장도 그냥 깔끔하게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나을 거란 유혹에 무릎을 꿇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고를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방점은 '초고'보다 '완성'에 찍힌다. 유치함과 설익음, 비문 투성이의 글이라 해도 일단 초고를 끝까지 써야 한다는 것.

- 퇴고는 초고의 완성보다 더 중요하다. 내가 쓰고 나서 괜찮다 생각했던 글이 다음날 다시 읽어보면 눈뜨고 못봐줄 글이 되어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 경우 여러 번 퇴고를 거친 뒤라 해도 그 글을 한 번 더 봤을 때 퇴고가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퇴고는 여러 번 할 수록 좋다. (그러려면 초고를 빠르게 완성해야겠지...)

- 글을 쓰는 이유는 인정욕구이다. 일단 깊게 동감하고. 내 경우엔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실재하던 생각이 글을 쓰다보면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고, 내가 이래서 그렇게 느꼈구나 하고 이유를 알게 되기도 한다. 내게 글쓰기란, 갖추어진 생각을 단순히 글로 바꾸는 과정이 아니고, 뒤죽박죽 정리가 안 된 상자 한 구석을 뒤져 꺼낸 찰흙덩어리를 요모조모 살펴보며 그 안에 숨겨진 본래 모양을 깎아내는 작업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 작업은 대개 힘들고 수고롭지만 내 생각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다시 무언가를 쓰게 된다.

- 칼럼, 에세이, 논픽션, 소설을 집필하는 자세와 방식의 차이. 글의 형태와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작업 방식이 흥미로웠다. 내 경우에도 논문이나 교과서와 같은 학술 원고와 에세이는 차이가 크다. 이과생의 글쓰기와 문과생의 글쓰기라고나 할까. 양쪽의 모드를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쉽게 바꿀 수 있다면 좋을텐데 딱딱한 글쓰기 모드에서 말랑말랑한 글쓰기 모드로 바꾸는 게 쉽지 않다. 내게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을 어떤 이들은 너무나 쉽게 해내는 듯 보인다. 분명 의학을 다룬 책임에도 유려한 문체와 문학적 향기로 감탄과 질투를 자아내는 글도 있다. (이런 문장으로 채워진 책은 보통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퓰리처상을 받는다.)

- 작가를 둘러싼 사람들, 그중에서도 편집자에 대한 글에서도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책 두 권을 쓰면서 네 명의 편집자를 만났는데, 모두가 예의바르고 성실한 분들이었다. 겨우 네 명의 편집자를 만나면서도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편집자의 세계는 지금 내가 알게 된 것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되었다. 마음 한 구석이 뜨끔거리기도 했다. 나는 그들에게 괜찮은 저자였던가? 출판의 세계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내 글의 주인이라는 생각에 은근슬쩍 자만과 허영을 내비치지는 않았던가?

- 정아은 작가님의 책은 오래 전 읽었던 '잠실동 사람들'이 전부였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고, 작가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내가 살고있는 동네라 슬쩍 호기심이 들어 빌려왔었고, 잠실이라는 동네에 사는 인간군상을 꽤나 사실적으로 그렸구나 하고 생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주말에 들렀던 서점에서 그의 다른 책 한 권을 더 샀다.

2023년 3월 4일 토요일

영화 '다음 소희'를 보았다.

일주일 전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모두가 한 번은 들른다는 브란덴브루크문 광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옛 동독의 영토였던 광장에서 프로이센군의 개선문이었던 브란덴브루크문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은 뒤 광장 옆의 홀로코스트 기념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식 명칭은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로, 높이가 다른 직육면체 돌들이 빽빽이 들어선 공간이다. 돌들은 마치 관이나 비석처럼 보여서 중앙의 키보다 높은 돌들 사이를 지날 때는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은 유대인 학살의 기록으로 가득한 지하 기념관을 둘러보는 내내 이어졌다. 거리로 나와 바깥 공기를 쐬고서야 답답함을 떨칠 수 있었다. 이월의 바람이 아직 찼다. 우울한 기운을 내치듯 일부러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기념관의 남쪽 경계는 한나 아렌트 거리라 이름붙은 길이다. 나치를 피해 고국인 독일을 버렸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을 통해 악인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흔히 행하는 일도 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 그는 "그런 악한 행위는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고 했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비판적 사고가 없다면 상황에 따라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평론가 신형철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썼던 다음의 문구도 비슷한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현장 실습생의 사망 사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장 최근은 2021년 여수에서 요트 바닥 청소를 하던 고등학생이 익사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기사를 찾아 연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엔 현장 실습을 둘러싼 문제를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저 일부 업체의 문제 정도로 생각하고 아이의 죽음을 적당히 안타까워 하며 넘겼을 뿐이다. 영화를 보고서야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대부분의 사고가 그렇듯, 문제는 구조적이고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현장 실습생을 저렴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회사, 실습을 보내는 데만 급급한 학교, 평가를 소홀히 한 교육부, 관리 감독을 외면한 고용노동부 모두가 가해자였다. 하지만 등장 인물 중 누구도 대단한 악인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평범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이다. 콜센터는 실적을 이유로, 교육부와 학교는 취업률을 이유로 아이들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사실 이런 건 우리 모두에게 퍽 익숙한 평가 잣대들 아니던가. 책임을 묻는다면 모두가 그저 자기 일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따져 묻는 형사에게 교육부 장학사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벽면 가득한 취업률 평가 도표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적당히 좀 하십시다."

영화를 보며 소희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어른이 없었다는 점이 가슴 아팠다. 부모, 선생님, 회사 상사, 어느 누구도 소희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 회사 그만둘까, 하는 소희의 말은 부모 앞에서도 혼잣말이 될 뿐이다. 아이의 말을 들어준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꽃같은 아이의 죽음은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소희의 옆엔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들만으론 부족하다. 정글같은 사회를 살아내려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 꼭 필요한 것이다.

얼마 전 김장하 선생의 다큐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반면에 나는 살면서 무엇을 했는가 하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다. 법적으로 어른이 된 지 삼십 년이 되었지만 다큐를 보는 내내 내가 어른이란 확신이 들지 않아 자괴감도 들었다. 선생의 발끝을 따라가기도 어려울 것이나, 그래도 내 입장에서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곳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어른의 역할을 조금은 할 수 있겠다는. 그리고 어른을 필요로 하는 순간과 장소를 지나치거나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겠다는. 애쓰지 않는다면 금새 잊을 것이다. 나 역시 복잡하게 나쁜,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

콜센터 근무 환경이나 현장 실습생 제도의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조금은 변화도 있었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려는 어른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걸로 보인다. 아이들의 죽음은 해를 거르지 않고 반복된다. 그러니 소희가 일했던 콜센터가 지금도 어디에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고 일주일 전 베를린에서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 건 홀로코스트 기념관 안에 적혀있던 문구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말이 그것이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2020년 3월 18일 수요일

킹덤, 그리고 코로나19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킹덤 첫 시즌을 뒤늦게 보게된 건 최근 저녁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였다. 첫 시즌을 본 지 오래지 않아 마침 지난 주에 공개된 두 번째 시즌을 이어서 볼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킹덤 2를 보면서 극중 내용이 현재의 상황과 겹쳐보여 흥미롭기도,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아직 안보신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 역병의 탄생
병에 걸린 왕이 갑자기 죽는다. 왕위를 계승할 자는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세자 뿐이나 궁궐의 권력은 중전과 외척 일가에게 있다. 외척 일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전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나 왕위를 이을 수 있을 때까지 왕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들의 계략은 생사초라는 풀로 죽은 왕을 되살리는 것. 생사초로 살아난 이는 인육을 탐하는 좀비가 되지만 권력에 눈이 먼 그들에게 그건 중요치 않은 문제이다. 이후 동래 지방의 지율헌이란 의원에 모여있던 병자들이 모두 좀비가 되는 사고가 생기고 마을 전체에 역병이 퍼지면서 재앙이 시작된다.
역병 疫病. 표준국어대사전은 '대체로 급성이며 전신 증상을 나타내어 집단적으로 생기는 전염병'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전의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병은 예외없이 모두 전염병이며, 전염병은 감염(infection)에 의해 발생한다. 감염은 질병의 원인이 되는 생물이 숙주의 몸에 침입하면서 생긴다. 감염병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 가지 요소를 밝혀야 한다. 병원체, 숙주, 그리고 전파 방식이다. 킹덤에서는 인간이 좀비에게 물리면(전파 방식) 곧바로 좀비(숙주)가 된다. 처음부터 역병으로 불리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병원체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두 번째 시즌에 와서야 생사초 자체가 아니라 잎에 붙은 촌충(병원체)의 알이 역병의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첫 시즌 내내 불완전한 상태였던 역병이 진정한 의미에서 감염병의 위치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코로나19의 경우는 감염병 족보에서 형제 격인 사스, 메르스 등과 마찬가지로 세 요소가 명확하다. 환자(숙주)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병원체)가 포함된 비말 및 호흡기 분비물을 배출하고, 이 분비물에 접촉하면서(전파 방식) 호흡기나 점막을 통해 감염이 발생하고 새로운 환자가 생긴다.
- 병증의 변화
애초에 생사초를 써서 살아난 좀비(1차 감염자)에게 물린 사람(2차 감염자)은 시름시름 앓다 죽을 뿐, 좀비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은 사람(3차 감염자)들은 곧바로 전염성을 가진 좀비가 되고, 이들로 인해 환자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지율헌의 의녀인 서비는 이를 두고 '병증이 변했다'고 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변한 것은 '전파 방식'이다. 감염병의 전파 방식이 바뀌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몇 년에 한 번씩 유행해 수만 마리의 멀쩡한 닭들을 살처분 운명에 빠뜨리는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과거엔 새들 사이에서만 전염된다고 알려졌지만 1997년 인체 감염 사례가 처음 보고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류독감의 경우엔 아직까지 많은 환자가 발생하진 않았다. 조류와 사람 사이의 종간 전파는 밀접 접촉을 해야 이루어지고, 결정적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전염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다 극단적인 변화의 예는 2003년에 유행했던 사스에서 찾을 수 있다. 사스의 경우 전세계적으로 8천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774명이 사망했다. 이전에 없던 질병이 갑자기 출현했던 이유와 관련해, 많은 전문가들은 쥐나 박쥐 사이에서 오고가던 바이러스가 우연히 사람이란 숙주에 종간 전파를 일으켜 안착하게 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조류독감과 달리 사스 환자가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었던 이유는 사람과 사람간의 전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감염병의 특성을 말할 때 흔히 사람간의 전파력을 수치로 나타내어 사용한다. 한 명의 환자가 전염시킬 수 있는 숫자를 기초감염재생산수, 흔히 R0라고 부르는데, 사스의 R0 값은 2-3이다. 평균 숫자보다 훨씬 많은 이차 감염자를 만들어낸 일차 감염자를 슈퍼전파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유명해진 31번 감염자가 그 예이다. 사스 발생 초기에 중국 광저우의 한 남성 환자는 58명의 의료인을 포함해 100명 가까운 사람을 이차 감염자로 만들어 'Poison King'이란 별명을 얻었다.
사스나 메르스도, 코로나19도 애초에 숙주는 사람이 아니라 박쥐, 쥐, 낙타 등의 동물이었다. 동물만을 숙주로 삼아 옮겨다니던 바이러스에 우연히 변이가 생겼고, 새로운 능력을 획득한 바이러스가 또 우연히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환경이 파괴되고 야생 동물의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공장식 가축 사육이 늘어나면서, 동물과 인간 사이의 종간 감염이 발생할 가능성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가능성의 중심에는 인간의 행동이 있고, 이를 둘러싼 과학과 정치, 관습과 문화에 따라 감염병의 모양새가 달라질 것이다. 킹덤의 좀비에게 일차 감염이 발생한 이유가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으며 역병이 확산되고 병증이 달라진 배경에는 정치의 실패와 지율헌 병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굶주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햇볕, 온도 그리고 환경
킹덤의 좀비들은 해가 뜨면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잠을 자고 해가 진 뒤에 다시 깨서 활동한다. 처음 좀비들을 지율헌 담장 안에 가둘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특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 시즌의 엔딩에서 낮에도 활동하는 좀비가 등장하면서, 의녀 서비는 이들이 햇볕이 아니라 온도에 따라 활동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겨울이 되어 낮 기온이 내려가면서 좀비가 하루종일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감염병 유행은 온도를 비롯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바이러스는 대개 기온과 습도가 낮을수록 활발하게 활동한다. 숙주인 사람의 면역 기능이 떨어지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쉬운 조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외 활동이 줄어들면서 사람 사이의 근접 접촉이 늘어나는 것도 원인이 된다. 계절 인플루엔자가 겨울에 유행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에서이다. 반면 온도와 습도가 높아지면 바이러스를 구성하는 단백질 변성이 일어나 전염력이 약해진다고 한다. 사스의 경우에도 2003년 겨울에 시작해 여름에 잦아들었으며, 다음해 겨울에 한번 더 유행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내 전문가들이 추위가 풀리면서 코로나19의 위세가 줄어들고 여름쯤엔 소강상태에 접어들 것이라 예측하는 근거가 된다.
바이러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기온과 습도만은 아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감염자가 많이 발생했던 싱가포르나 태국의 예처럼, 기온이 높더라도 인구밀도나 생활방식 등 다른 조건에 따라 감염병에 취약해질 수 있다. 아프리카나 중동과 같은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 유행하는 에볼라나 메르스 바이러스도 있다. 여름에 사태가 종결된다 해도 어딘가에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사스의 예처럼 다음 겨울에 다시 감염이 시작될 수도 있고, 계절인플루엔자처럼 겨울마다 찾아오는 손님으로 자리를 잡을 가능성도 있다. 킹덤 두 번째 시즌의 마지막회는 역병이 유행하고 칠 년이 지난 뒤를 그린다. 모두가 역병이 사라졌다 생각하고 있을 때 세자와 의녀 서비는 생사초의 흔적을 따라 북방으로 갔다가 좀비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봄을 기다림과 동시에 바이러스의 전파를 줄이기 위한 주의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 과학자의 역할
의녀 서비는 등장인물 모두가 정치를 하고 있을 때 홀로 과학을 맡는 인물이다. 선한 마음과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경외하는 태도로 악한 인물을 살리거나 세자가 중전의 아이를 죽이지 못하게 말리는 등 극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생사초와 역병의 비밀을 밝혀낼 때 더 빛을 낸다. 그 과정에서 의문을 탐구하는 과학자적 태도와 뛰어난 관찰력이 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좀비가 밤낮의 변화가 아닌 온도의 변화에 따라 활동한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닫는 것도 서비이다. 그녀는 결국 현미경도, PCR도 없이 가장 중요한 병원체를 밝혀내는 데 성공한다.
개인적으로 손씻기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계절이 바뀌고 감염병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좋은 대안은 과학적 근거를 수집해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과학의 필요성과 지식 공유의 효용성을 코로나19 유행 과정에서 어느 때보다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월29일 NEJM에 중국 우한의 환자 425명의 특성을 분석한 첫 논문이 발표된 이래, 개별 증례 보고부터 환자 집단에 대한 보다 심도깊은 분석까지 짧은 기간동안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었다. NEJM, JAMA, LANCET 등 유수의 저널들은 연구 결과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오픈 엑세스로 신속하게 발표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질병의 특성을 이해해 적절한 방역 대책을 세우고, 나아가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활용될 것이다.
서비의 스승이 기록한 병상일지는 악인의 거짓을 증명하는 증거로 쓰이기도 하고, 역병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서비는 스승에 이어 역병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병상일지에 상세히 기록한다. 병상일지를 보며 지난 달 보았던 코로나19에 대한 증례 보고가 떠올랐다. 7년 간 역병의 비밀을 좇으며 생사초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지만 아직도 밝혀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 마음 한구석 숙연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생사초의 비밀을 알아내게 될 서비에게도, 코로나19와의 싸움을 기록하고 전하는 전 세계의 과학자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 방역에 성공할 것인가
킹덤에서 봉쇄를 통해 역병 전파를 막으려 하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봉쇄의 대상은 지율헌에서, 동래를 넘어 경상땅 전체로 넓어진다. 하지만 봉쇄의 범위가 커질수록 통제 불가능한 변수의 가능성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반면 상주 읍성의 문을 걸어잠그고 고립을 택한 사람들은 좀비가 아닌 굶주림으로 죽을 위험에 처한다.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데 십수일이 걸리고 시체를 달구지에 운반하던 시대에도 역병은 도처에 존재했다. 위생과 의학이 발달한 현대이지만, 바이러스의 종간 감염이 언제든 발생할 가능성을 품고 수백만이 사는 도시에서 완벽한 방역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일지 모른다. 우리는 킹덤이란 웰메이드 드라마가 이번 시즌을 넘어 더 오래 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다시 만나길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다른 신종 바이러스를 만나게 되겠지만, 지금보다 의연하고 익숙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데이비드 콰먼의 책에 나온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바이러스를 주시해야 하는지 알고, 외딴 곳에서 일어난 종간전파가 한 지역 전체로 번지기 전에 현장에서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지역적인 유행이 일어났을 때 전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번지지 않도록 조직화된 역량을 키우고, 새로운 바이러스의 특성을 신속히 파악하여 짧은 시간 내에 백신과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는 연구 기술과 도구를 갖추는 것이다.
(중략)
또한 우리는 오래된 질병의 재유행과 확산은 물론 새로 출현한 인수공통감염병의 유행이 보다 큰 경향의 일부이며, 그런 경향을 만든 책임은 바로 우리 인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행한 일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데이비드 콰먼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2017년 3월 21일 화요일

TV, 그리고 Back to the Future

3년 전 쯤 거실의 평면TV가 고장난 뒤 TV를 새로 사지 않았다. 사실 난 TV 보는 걸 좋아한다. 그냥 좋아한다가 아니라 매우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없이 살기로 한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학령 전 아이들에게 TV가 유익한 물건이 아니라는 증거는 도처에 널려있다. 
2년 전 현재 사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생각했다. TV는 못 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모니터는 있어야겠다. 내친김에 결혼 전 혼자 살 때 그랬던 것처럼 프로젝터를 이용한 홈씨어터 시스템을 꾸미기로 했다.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달고 2인용 소파를 구입했다. 그렇게 해 서재는 작은 영화감상실이 되었다. 
하지만 이 그럴듯한 영상 기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생각해 TV를 없앴지만 지금도 아이들은 거의 매일 TV를 본다. 서재의 프로젝터에 물려둔 IPTV 때문이다. 그래도 리모컨 버튼을 한 번 누르는 단순한 행동에 비해 스크린을 내리고 프로젝터와 앰프와 셋톱박스의 전원을 각각 켜는 작업은 꽤 수고로운 일이고, 이러한 수고로움은 시청에 제한을 두는데도 도움이 된다. 평일은 20분짜리 만화 2개, 토요일은 3개, 일요일은 4개씩. 어렸을 적 평일 저녁이면 개구리 왕눈이나 모래요정 바람돌이를, 일요일 아침이면 은하철도999나 천년여왕을 봤던걸 생각하면 그때보다 스크린 앞에 노출되는 시간은 더 길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규칙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훨씬 복잡한 세상이고 바야흐로 조기 교육이 대세인 시대 아닌가. 
주말에 내키면 극장용 만화를 보기도 했다. 디즈니와 픽사, 드림웍스 스튜디오와 미야자키하야오를 비롯해 웬만한 개봉 애니메이션은 다 섭렵했다. 언젠가부턴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주말이면 오늘은 뭘 볼까 뒤적이는게 일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를 고를 때 부딪히는 문제는 더빙이 된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IPTV에 더빙판이 있는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오래된 작품의 경우 종종 더빙판이 없고 아예 작품 자체를 찾을 수 없을 때도 많다. 이럴 때면 어둠의 경로를 따라 뒤지기도 하는데, 요즘은 그나마도 아이템이 동났다. 그런데도 아들 녀석은 으레 주말 저녁이면 영화를 볼 수 있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번 일요일에도 묻는다. 
"아빠, 오늘 저녁엔 뭐 볼까?" 
최근엔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영화를 선택하기도 했는데, 해리포터는 시리즈가 진행되며 성인이 되어가는 주인공들과 부활해가는 볼드모트의 어두운 기운을 따라가기 버거웠던지 당분간 거부한 상태이고 최근에 본 드래곤이 나오는 영화는 심심한 스토리와 구성에 영 반응이 좋지 않았던 터다. 다른 적당한 영화가 없을까 DVD 목록을 살펴보다가 갑작스레 떠오른 것이 백투더퓨쳐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이야기라 소개하니 아들도 솔깃해하는 눈치이다. 

이 영화는 내 유년을 지배했던 영화들 중 하나였다. 영화가 개봉한 것이 1987년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본게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가장 많이 되풀이해 본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첫머리에서 커다란 스피커를 앞에 두고 기타를 멘 마티를 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마티가 드로리안을 타고 30년을 거슬러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난 그만큼의 시간을 거슬러 가 있게 될 것임을.
막상 영화는 시작되었지만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깨알같은 복선은 둘째치고 영화의 스토리만이라도 이해할까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이내 영화에 빠져들어 꼼짝도 않는다. 브라운 박사가 죽는 장면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왜 나타난 것인지를 헷갈려 묻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쟤는 왜 저런 것 같아? 하고 물어보는데, 대부분 맥락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플루토늄이 아닌 쓰레기와 고철을 연료로 간지나게 떠올라 날아가는 드로리안의 섬광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니 30년 전의 엄마가 마티에게 들이대는 장면을 보며 혼란스럽진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이 내용이 문제가 되어 국내 개봉이 2년 늦어졌다고 한다.) 1987년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고, 그때의 나는 마티와 30년 전 엄마의 관계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지만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은 다르지 않을까. 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한데. 
침대에 함께 누워 슬쩍 질문을 했다. 영화 재미있었어? 하니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나도 타임머신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이 영화를 본 뒤의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겠다.
"있으면 뭐 하고 싶은데?"
눈을 반짝이며 하는 대답을 듣고 그만 실소를 짓고 말았다. 
"어제로 돌아가서 주말동안 텔레비젼 실컷 볼래." 
그래. 아쉽지만 토요일은 20분짜리 세 개란다 아들아. 그래도 영화의 내용을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이상 묻는걸 그만두었다. 2편이 있다고 했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음주에 당장 보겠다고 조른다. 그나저나 더빙이 된 2편은 또 어디서 구하나.

꼬리. 예나 지금이나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마티가 아이들이 타고있던 나무판으로 보드를 만들어 거리를 질주하는 추격씬, 그리고 이 장면이였다.


2017년 1월 24일 화요일

유혹하는 글쓰기







그는 단문을 즐겨쓴다. 짧게 끊어치는 듯한 문장은 그의 소설의 특징인 빠른 속도감을 유지하는데 주된 역할을 한다. 반면에 어떤 부분에서의 묘사는 구체적이고 세밀하다. 작가가 만든 리듬에 따라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 그 와중에서도 군데군데 유머를 섞어 심각한 상황에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위는 이전에 내가 알고있던 그가 쓴 글의 특징이다. 스티븐 킹은 50여 편의 장편과 200여 편의 단편을 발표했지만 그의 명성에 비해 그의 작품 중에서 막상 읽은 책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사실 책보다 영화를 통해 접한 작품이 더 많다-. 그럼에도 그의 문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개성이 그만큼 강해서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그 특징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며 그 의도가 독자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절반이 자서전이고 나머지 절반은 작문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을 느낄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설사 글쓰기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다 해도 따분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가 현존하는 지구 최고의 썰쟁이 중 하나 아닌가.

예컨대 그는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이 직설적인 발언에 대해 딴지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외에도 쉬운 단어를 쓰라거나-여기서 그의 태도는 어줍잖은 내공으로 어렵고 화려한 단어를 남발하는 행위를 조롱하는 것에 가깝다-, 수동태를 쓰지 말라, 부사를 남발하지 말라 등의 지침은 익숙한 내용이다. 문장이 아닌 문단이 글쓰기의 기본 단위라거나 '수정본 = 초고 - 10%'의 공식 역시 새겨두어야 할 조언이다. 이외에도 킹이 알려주는 괜찮은 작가가 되기 위한 팁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소설의 요소에 대한 언급이었다.

'소설은 장편이든 단편이든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쳐 마침내 Z지점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는 서술, 독자에게 생생한 현실감을 주는 묘사,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말을 통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대화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플롯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대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이보시요 작가양반. 플롯이 없다니. 일찌기 교과서에서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 문체이고 구성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라 배웠다. 반면 그가 말하는 3요소는 서술, 묘사, 대화라 할 수 있겠다. 사실적인 묘사와 대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글을 읽고 쓸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주제나 구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패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들을 첫 번째로 꼽기는 어려울 것이다.

'플롯보다 직관에 의존하며, 소설이란 땅 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다. (중략) 상황이 제일 먼저 나온다. 등장 인물은 그 다음이다. 마음 속에서 그런 것들이 정해지면 비로소 서술하기 시작한다. 종종 결말이 어렴풋이 보일 때도 있지만 등장 인물들에게 내 방식대로 움직이라고 요구한 적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기를 바란다.'

여기까지 읽으면 앞의 세 가지 요소 이전에 상황과 인물이란 요소를 더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그는 우선 갈등이 생길만한 어떤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 몇몇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전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서술하고 묘사하며 인물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 곧 그의 소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글을 읽다가 마치 자신을 관찰자와 같이 이야기하는 이 부분에서 허탈해지고 말았다.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올렸을 뿐이라는 수상 소감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워드프로세서가 인공지능을 장착한 것도 아닐텐데 등장인물들이 알아서 움직이다니. 정신만 차리고 써 나아가면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는 건가. 직관과 본능이 이끄는대로 키보드를 두드리라는 뜻이고 그 결과가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라면 역시 그는 천재이고 평범한 작가 지망생들이 따라할 수 없는 초식을 구사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에게는 킹과 같이 매일 2천 단어 이상씩의 분량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닥치고 글을 써보라는 유혹의 기술이 워낙 훌륭해서, 이 책을 읽으면 괜찮은 글을 쓰고싶고 제법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물론 그 글을 다시 읽고 이불킥을 하고픈 충동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고로 그가 처음으로 출판을 위한 소설을 썼던 것은 13세 때였고 <캐리>가 출판된 것은 1974년으로 그의 나이 27세 때였으며 이 작품의 보급판 판권은 40만달러였다.

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우리에겐 더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

출근길에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데 문득 구두를 보니 앞코가 뿌옇다. 며칠 전부터 닦아야지 생각했는데 일이 많은 연말이라 영 시간이 나지 않던 참이었다. 근처에 보이는 구두 닦이 노점에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손님을 맞는다. 구두를 건네고 삼선슬리퍼를 신고 구석에 앉았다. 쌀쌀한 날씨지만 전기 난로가 피워진 노점 안은 훈훈하다.

닳아빠진 뒷굽을 갈 때도 된 듯해 수선을 부탁했다. 아저씨가 돋보기 안경을 걸쳐 쓰고 구두의 상태를 확인하는데 오른짝 가죽과 밑창 이음새가 떨어져 구멍이 나있다. 저 상태로 잘도 신고 다녔구나. 아저씨는 혀를 쯧쯧 차고는 연장통에서 순간접착제를 꺼내 익숙한 손길로 떨어진 이음새에 꼼꼼이 칠하기 시작했다. 접착제가 마를 때쯤 손가락에 헝겊 조각을 야무지개 감고 구두약을 묻혀 문지르니 금새 광이 난다.

구멍난 이음새가 접착제만으로 수선이 될까 싶었는데, 손질이 끝난 구두를 살펴보니 그럭저럭 신을 만했다. 노점을 나와 다시 바삐 걷는데 어째 좀 처량한 생각이 든다. 구두 닦을 여유도 없이 구멍이 난줄도 모르고 한참을 신고 다녔다니. 참 정신 없이 바쁘게도 일했다.

- 구두를 닦았는데 한 짝 옆이 터져 있어서 접착제로 붙였어요. 굽을 간 김에 아까워 좀더 신는데 오래는 못 갈 것 같아요.

점심 시간에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고, 바로 아내의 답신이 왔다.

- 이런... 구두 하나 당장 사야겠어요. 진즉 샀어야 했는데.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 건 내 처량한 심정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다. 이런 유치한 바램을 넌지시 표현할 상대로 아내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업무가 늘어나 심신이 지쳐가는 중에, 짧게 오고간 문자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구두야 뭐 좀 있다 사도 되지.

위로라는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힘들 때 누군가 그걸 알아준다는 것. 위로의 출발점은 바로 그 지점부터이다. 더 좋은 해결책을 찾아준다거나 건설적인 조언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굳이 그렇지 않아도 된다. 내 힘듦을 그가 알고있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

- 그 영화 아주 잘 만들었다더라.

주말에 올라오신 장인께서 식사 중에 갑작스레 언급하신 건 관객 수 천만을 훌쩍 넘겼다는 그 영화였다. 이런 말씀은 영화를 보고싶다는 속내를 에둘러 표현하신 것이다. 아내도 나도 보지 않은 영화라 잘됐다 싶어 식사를 마치고 다같이 iptv를 볼 수 있는 작은 방에 둘러앉았다.

고향이 이북인 장인은 46년생이시니 전쟁이 벌어진 해에 다섯 살이셨다. 흥남 부두의 철수를 직접 겪진 않으셨지만 전쟁 이후 부산에서 주욱 사셨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하셨으니 영화 속에서 그려진 시대를 고스란히 지내오신 셈이다. 워낙 화제가 되었던 영화라 대략 내용은 알고 있었기에 장인께서 보고싶어하시는 것도 이해가 갔다.


훌륭한 영화는 아니었다. 몇몇 배우들의 호연이 있었지만,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플롯은 엉성했다. 그래도 두 시간동안 지루함을 느끼진 못했고 이산가족 상봉 방송 장면에선 눈물도 났다. 하긴 50년 이후 이 나라의 현대사 자체가 숨이 찰만큼 극적인 드라마인데 그 가운데 굵직굵직한 사건을 주욱 되짚기만 해도 지루할 틈이 있겠는가.

장인은 영화를 보는 중에 종종 탄식 비슷한 소리를 내셨다. 어허,,, 그 참, 어허,,, 그 참. 말은 안하셨지만 당신이 젊었을 적 풍경이 재현된 화면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나셨으리라. 영화와 장인의 반응을 함께 경험하며 이 영화가 왜 화제가 되었는지, 왜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든 몇 안되는 영화에 꼽히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중의 취향과 흐름을 저격하는 감독의 재능은 역시 뛰어났다.

'Ode to My Father'인 영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아버지 세대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만든 영화라고 했다. 감독의 의도대로 이 영화가 아버지들을 위로해주었을까.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하고 울먹이는 덕수를 위로한 사람은 아버지의 환영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 이야기를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익숙치 않았던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영화를 보며 조금은 위로를 받았을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퍽퍽했던 시대에 온 몸으로 가족을 지탱해 온 우리의 평범한 부모들이 그동안 제대로 된 위로를 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이 영화를 향한 대중의 이상(異常)적 열광은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음에 대한 자기 고백이 아닐었을까 싶다.

2014년 7월 27일 일요일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과 팔레스타인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은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이 실시한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한 실험이다.
밀그램은 광고를 통해 기억력에 대한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피실험자들에게는 4달러가 제공되었고, 이들을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사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배우였다.
실험자는 교사 역할의 피실험자에게는 학생에게 테스트할 문제를, 학생 역할의 배우에게는 암기할 단어를 제시했다. 그리고 교사에게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볼트부터 시작하여 450볼트까지 한번에 15볼트 씩 높여가며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실험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전압을 올릴지 말지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실험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전압을 올릴 것을 강요했다. 밀그램이 주시했던 것은 교사들이 전압을 높여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였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 밀그램은 0.1% 정도의 사람들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65%의 피실험자가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실험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밀그램의 실험은 사람들이 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가 성격보다 상황에 있고, 매우 설득력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가학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용 출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이미지: EBS 지식채널e

*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공습 자체보다도 가자 지구 폭격을 언덕 위에서 관전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들을 악마라 욕하기는 참으로 쉽다. 개인적으로 든 의문은, 이들도 상식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일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전까지 그저 어렴풋하게 알고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복잡한 문제를 좀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이 책.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855214&start=slayer

어떤 이는 이 책마저도 지나치게 팔레스타인인 입장에서 쓰여졌다 할지도 모른다. 물론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사 작가의 시각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해도 이미 반대쪽으로 편향된 시각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그나마 균형을 유지하는데 충분히 보탬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는동안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내 무지가 몹시 부끄러웠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적으로 소수자였던 팔레스타인 국민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술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민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힌다는데 있다. 팔레스타인 국민의 아픔에 공감하며 순간순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감정이 격해질 때도 있었지만 책을 덮을 때쯤엔 스데롯 언덕에서 박수를 치며 폭격을 관전하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하고 예민한 소재를 만화를 통해 담아내기로 한 작가의 선택은 탁월하다.

*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은 권위 앞에서 개인의 도덕이나 믿음이 얼마나 유약한 것인지를 증명했다. 실험 안에서 권위는 흰 가운과 엄숙한 명령이었다. 현실에서의 권위는 상관이나 독재자와 같은 구체적인 개인일수도 있고, 집단이나 사회가 담고있는 가치와 같은 보다 간접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이 절대선이 되고 그에 반하는 것이 절대악이 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보편적인 도덕률은 그 설 자리를 잃었다. 밀그램은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에게 행한 홀로코스트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유를 탐구하고자 했지만 그의 실험은 현재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하는 집단 살육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단순히 그들의 도덕과 인간성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80년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을 두고 홍어 말린다 조롱하는 이가 내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임을 우리 역시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현상은 항상 단순하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은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자 지구의 사진과 외신을 접하고 조금이라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면 이 책을 꼭 읽기를 권한다. 

2014년 5월 26일 월요일

더러운 손의 의사들 'On the Take - How Medicine's Complicity with Big Business Can Endanger Your Health'

철모르던 전공의 시절에, 저녁에 전공의실에 남아있으면 가끔 모 외국계 제약회사 직원분이 살짝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조심스레 "선생님, 저녁 안드셨으면 저희 도시락이 좀 남아있는데 드시겠어요?" 하고 묻곤 했다.

도시락도 급수가 있는데, 그 직원분이 가져다주는 도시락은 매우 상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활짝 웃으며 공손하게 말을 건네는 그 여직원이 건네주던 도시락은 힘든 하루에 저녁도 못먹고 퍼져있던 나를 비롯한 여러 전공의들에게 비타민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늘상 피곤에 쩔어있는 전공의나 전임의들을 대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영업을 하는), 비용 대비 효율이 좋은 방법은 역시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 제약회사와 그 직원이 담당하던 약품에 대한 인상이 덩달아 좋아지기도 했다. 도시락을 먹은 다음날 새로 해당 계통의 약을 처방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회사의 약을 좀더 처방하기도 했던 것 같다. 비슷한 효과에 가격도 별 차이가 없다면 내게 따뜻한 도시락을 주었던 직원의 약을 써주는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 약은 대개 장기적으로 복용을 하고 때론 평생 먹기도 하므로 아마 그때 내게서 처방을 받고 지금까지 먹고있는 환자분들도 계실 것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처방했던 그 약은 현재도 세계적으로 판매량이 매우 많은 약이고 나 스스로도 자주 처방하고 있지만 지금 처방하는 이유는 그 직원이 주었던 도시락 때문은 아니다. 임상 경험이 쌓이고, 내 환자에 대해 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넓이가 커지면서 제약회사의 도시락이나 판촉물은 내가 약제를 선택하는데 훨씬 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의바른 제약회사 직원분들이 제공하는 도시락이나 식사를 먹는 일은 지금도 종종 있는 일이다.

문득 오래 전의 도시락을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읽었던 이 책 때문이다. NEJM의 편집장이었던 제롬 캐시러가 집필한 이 책에서 저자는 기업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환자보다 스스로와 기업의 이익을 우선 순위에 놓고있는 일부 의사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책 말미에 그는 의료계에 만연한 탐욕을 없애기 위한 로드맵을 제안하는데, 그 첫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203913


1. 기업으로부터의 모든 선물을 배제한다. 의사가 진료하고 교육하는 데 유용한 것일지라도 선물은 받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의사들은 기업이 후원하는 대변인 부서에 참여하지 않는다.


2013.11.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 (Wherever I wind up)




어렸을 적엔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가 참 많았다. 이상무 화백의 만화에서 주인공 독고탁은 뱀처럼 에스자로 휘어 들어가는 드라이브 볼이란 마구를 던지는데, 그 만화를 읽던 당시에는 자고 일어나면 내일이라도 당장 이런 공을 던지는 투수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물리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공이지만 그때는 드라이브 볼을 던지겠다고 독고탁과 같은 폼으로 쓰러지며 테니스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곤 했다. 이제 그런 볼은 실제 경기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현재도 변화가 심한 공을 일컬어 마구(魔球)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실제 구종 중 마구에 가까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너클볼이 될 것이다.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배트에 맞은 공이 쭉 뻗어나갈 때의 청량감,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호수비가 주는 카타르시스, 역전 홈런의 짜릿함... 야구가 주는 매력은 다양하지만, 95마일(시속 152.9km)이 넘는 공을 포수 미트에 꽂아대며 타자를 윽박지르는 투수야말로 그중 제일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느리게 춤을 추는 너클볼은 애초부터 이런 호쾌한 속도의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공이다. 이 책은 메이저리그에서 그저 그런 선수 생활을 하다 30세가 넘어 너클볼 투수로 변신을 하고, 마침내 최고의 영예인 사이영상까지 받게 된 한 투수의 이야기이다. 그의 인생은 변화무쌍한 너클볼처럼 굴곡이 심했고 옛날 야구 만화의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했다.

# 2013년 4월 2일 6.0이닝 4실점 패전: 2012년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새로 계약한 팀에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개막전에 등판한 그의 첫 경기 성적 

R.A. 디키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이혼을 했고, 양육권을 가졌던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시작하는 가정이라면 아이의 인생은 여간해서 잘 풀리기 어려운 법이지만, 고교 시절 야구 팀의 주전이 된 이후 그의 삶은 야구 선수라는 확고한 정체성 아래 비교적 순탄했다. 야구 선수로서 그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어서 대학 진학 이후에는 미국 대표 선수로 애틀랜타 올림픽에까지 출전하는 영예를 얻게 되며, 이후 1996년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에 1순위로 드래프트 된다. 하지만 신체 검사 과정에서 우측 팔꿈치 측부인대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애초의 81만 달러가 아닌 7만 5천 달러에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 2013년 4월 18일 6.0이닝 7탈삼진 2안타 무실점 (2승) / 5월 4일 6.0이닝 3피홈런 7실점 (5패)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하면서 고교 친구의 여동생이자 첫사랑과 결혼을 한다. 착실히 마이너리그 경력을 쌓던 중 다섯 시즌만에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지만 18일 동안 네 경기, 12이닝을 던지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강등된다. 골프장의 악어가 사는 연못에 빠진 골프공을 몰래 수거해 팔고, 물리치료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야구 외 일을 병행하며 생계를 꾸리기도 한다.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30세가 되던 2005년까지 아홉 시즌 동안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거둔 성적은 15승 17패, 평균자책점 5.48이었다.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그곳에서 성공적인 성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수치이다. 

# 2013년 5월 14일 6.0이닝 10탈삼진 3실점 (3승) / 5월 30일 6.0이닝 11안타 6실점 (7패)

그저 그런 선수로 끝날 가능성이 많았던 그의 선수 생활에서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은, 코치진의 권유에 따라 너클볼 투수로 변신을 택했을 때였다. 고된 연습 끝에 너클볼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2006년 드디어 메이저리그 선발진에 합류하지만 첫 경기에서 홈런 여섯 방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고 곧바로 마이너리그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숨겨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이로 인해 별거를 하는 등 가정과 일 모두에서 힘든 시간이 계속된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미주리 강을 수영으로 건너는 충동적인 도전을 하며 익사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 2013년 6월 10일 5.0이닝 10안타 7실점 (8패) / 6월 26일 9이닝 2안타 무실점 완봉 (7승)

생사를 넘나든 경험 이후 그의 투구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지만 팀에서 그의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한국 프로야구 팀으로부터의 계약 제의를 고민 끝에 뿌리치고 난 이후에도 두 개의 팀을 더 거쳐 2010년에 와서야 뉴욕 메츠에 정착하지만 기쁨도 잠시, 35세 노장 투수는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먼저 마이너리그로 강등된다. 실망 끝에 야구 선수가 아닌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도 하지만, 1안타 완봉승을 거둔 이후 다시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는다. 이후 두 시즌 동안 선발로서 안정적인 성적을 올리고, 마침내 2012년에는 20승 6패 평균자책점 2.73의 성적으로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한다. 

투수도 자신이 던진 공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이 너클볼이다. 그는 너클볼 투수가 되길 결심한 뒤 겪은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공을 천천히 던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시속 140킬로미터 중반을 넘는 공 수천 개를 평생 던져온 내가 이제 거의 시속 100킬로미터짜리 공을 던지고 있다. 마치 스포츠카를 팔고 세발자전거를 산 느낌이다." (240p)

"똑같은 동작으로 똑같은 지점에서 공을 놓아도 각각의 너클볼은 모두 다르게 날아간다... 너클볼 투수는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이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너클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투수는 자신도 예측하지 못하는 공에 당황하고 만다."(257p)

완봉승을 거둔 바로 다음 게임에서 홈런을 서너개씩 맞고 패전 투수가 되는 경험을 흔히 해야하는 너클볼 투수의 숙명은 마치 굴곡진 우리네 인생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너클볼 투수끼리의 유대감은 팀 동료 이상이라고 한다. 너클볼로 통산 200승을 거둔 팀 웨이크필드의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필 니크로, 조 니크로, 찰리 허프, 톰 캔디오티 등 선배 너클볼 투수에게 감사를 전하며 R.A. 디키를 너클볼의 명맥을 이어갈 선수로 언급한다. 

다큐멘터리 'Knuckleball!' 시사회에서의 전, 현직 너클볼 투수들. 
Charlie Hough, R.A. Dickey, Tim Wakefield, Jim Bouton
(Photo by Craig Barritt/Getty Images)

좋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란, 팔꿈치 인대가 없는 야구 선수가 수많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과 종교, 그리고 인생의 갈림길마다 지침이 되어 준 멘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야구 선수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해준 프레드 포핸드 감독, 자신의 어릴적 상처와 아내와의 불화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상담사 스티븐 제임스, 그리고 선배 너클볼 투수 찰리 허프와 필 니크로가 그들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373승을 거뒀으며 명예의 전당 첫 멤버로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You can learn a little from victory. You can learn everything from defeat. (승리를 통해서는 조금 배울 수 있지만, 패배로부터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빛나는 승리보다 패배가 훨씬 많았고, 마이너리그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이 명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간결한 문장과 흥미로운 구성은 공동 집필자인 웨인 코피의 도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이 던지는 공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이 책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회고하는 기간의 절반 이상이 흑역사에 가깝지만 그는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삶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한 사람에게 감동을 느낄 것이고, 야구를 모르는 독자라도 R.A. 디키의 팬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그의 인생을 엿보고 난 지금,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 그가 최선을 다할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의 메이저리그 통산 승수는 올해 8월까지 71승으로, 필 니크로의 318승은 물론 팀 웨이크필드의 200승을 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야구 팬으로서, 유일하게 남은 너클볼 투수인 그의 투구를 오랫동안 보고 싶다. R.A. 디키는 올 시즌 8월 마지막 경기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6.1이닝 2실점으로 10승째를 거둬 2년 연속 10승 투수가 되는 소중한 기록을 세웠다. 이번 시즌 그의 성적은 현재까지 10승 12패로 여전히 승보다는 패가 더 많다.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Before Sunset

수많은 인상적인 대사들과 아름다운 장면들로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비포 선라이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그들을 담아내던 순간이 아니었다. 영화의 마지막, 두 사람이 반나절동안 지나쳤던 장소를 하나하나 다시 짚어가는 카메라는 그 짧은 시간동안 그들이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냈는지를 수십마디 대사보다 더 끝내주게 이야기 해 준다. 그 순간만큼은 영화 밖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제시와 셀린느는 한명은 버스에서, 한명은 기차에서 창 밖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감성은 특별하다. 짧게 이야기하면 하룻밤동안의 원나잇 스탠드 정도로 정리될 수도 있을만한 이야기. 먼 곳으로의 여행은 늘 사람을 어느정도는 들뜨게 하니까. 하지만 그는 독특한 대사의 리듬과 내용, 그들의 미묘한 감정선들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면서 그들의 하룻밤 사랑을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인생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경험으로 만드는 솜씨를 보여준다.  

아뭏든, 제시와 셀린느가 그렇게 9년만에 다시 만났다. 9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들의 만남을 위해 별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다. 그저 그녀가 그를 보려고 찾아왔을 뿐. 두 사람이 만나기 전의 짧은 시간동안 카메라는 앞으로 두사람이 한시간여 동안 지나치게 될 곳들을 슬쩍 미리 거꾸로 되짚어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작은 서점으로 이동한다.



9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만회하리라 마음먹기라도 한 듯, 그들은 9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를 짧은 순간동안 멀미 날 정도로 쏟아낸다. 9년 전에 비해 산만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 긴 시간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 소비한 시간은 지나칠 정도로 짧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만나서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9년 전의 하루가 그들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또 어떤 것들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한다. 제시는 자신의 의미없는 결혼생활에 대해 탄식하며 약속한 날에 나타나지 않았던 그녀를 원망하고, 셀린느는 그를 만난 이후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더이상 로맨틱한 사랑을 찾을 수 없었다며 투정을 부린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어차피 더 나아가봐야 불륜... 각각 자신의 방식대로 그 두사람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를 두 사람의 아내와 남편에 대한 배려는 두 사람이 회포 풀기에도 바쁜 시간동안 끼어들 틈 전혀 없이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줄곧 결국 서로를 찾아 헤메던 시간들을 설명해주기 위한 양념처럼 곁들여져 있을 뿐이다.


그래. 그래도 그럴 수 있다. 날마다 이어지는 의미없는 일상,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나타난 멋진 옛 사랑. 영화같은 로맨틱한 하룻밤을 보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마음 한구석 동요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참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 아름답기만 한 기억이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와 오랜 시간동안 되풀이해 반복되었다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이들을 이해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불편해질 법도 한데. 역시 그런 불편함을 잊게 해주는 건 보일 듯 말듯 잠깐 잠깐 내비치는 그들의 감정을 놓치지 않고 찰나의 느낌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외면하기 힘든 달콤한 선물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느끼며 셀린느의 집 계단을 오르고,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쓸데없는 기대따윈 버리라고 쏘아붙이던 그녀는 그를 위해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르며 그를 살살 유혹한다. 게다가 재즈 싱어 흉내를 내고 춤을 추며 떠는 귀염까지. 그녀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일지라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만한 행동인데, 하물며 제시야. 
영화는 이 지점에서, 두 사람은 6개월 뒤에 다시 만나게 될까, 아닐까를 묻는 것 자체를 그다지 의미없게 만들었던 전작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근데, 너... 이러다가 비행기 놓치는 거 아냐?"
"나도 알아." 

아마 제시는 떠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그 사실을 셀린느도 충분히 알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 다음은... 글쎄...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9년이나 지난 지금, 나만큼이나 나이를 먹어버린 두사람. 애초부터 이전처럼 쿨한 결말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지점에서 영화는 빛을 잃고 현실로 내려앉는다.

이제는 좀 나이들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을 다시 한 곳에서 본다는 것만으로 반가운, 그들의 재회에 대한 소고는 여기까지.


2005.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