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9일 토요일

동물구충제 펜벤다졸, 그리고 면역항암제

- 60대 남성이 마른 기침으로 병원을 찾았다. 환절기 감기야 늘상 겪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한달이 넘게 기침이 계속되고 있었다. 흉부 CT 촬영 결과를 본 의사가 큰 병원 방문을 권유했을 때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병원에서 시행한 기관지내시경 결과는 소세포폐암이었다.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나빴다. 암세포는 폐 외에도 주변 림프절과 흉골, 갈비뼈, 요추, 골반뼈에 자리잡은 상태였다. 다발성 골전이가 있는 소세포폐암 환자의 기대 여명은 1년 미만이다.
환자는 곧바로 항암화학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내 먼 친척이었고, 내가 한 일은 진료 의뢰와 예약을 도운 것이 전부였지만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할 때마다 그는 매번 내게 전화해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는 듯이. 치료 초반에는 종양의 크기가 다소 줄어들었다. 하지만 첫 공격을 받고 잠시 주춤한 듯 보이던 종양은 이내 이전과 같은 기세등등한 모습을 되찾았다. 여섯 차례 치료를 마쳤을 때 종양은 처음보다 더 커져있었다. 약제를 바꾸어 세 번의 치료를 더 시행했지만 종양이 자라는 속도는 꺾이지 않았다. 치료가 끝날 때마다 듣는 전화기 건너편 그의 목소리 역시 종양이 커진만큼 힘을 잃어갔다. 기존의 치료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보였다.
종양내과에서는 마지막으로 최근에 개발된 신약 치료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기존 항암제에 반응이 없는 경우라 해도 어쩌면 새로운 약제가 조금이나마 경과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새 약제를 두 번째 투여한 한 달 뒤, 척수에 전이된 암은 그의 하지를 마비시켰다. 별다른 처치를 받지 못하고 가족의 부축을 받아 응급실을 나서며 그는 내게 다시 전화했다. 기운이 떨어져 말을 잇기도 힘든 상태였다. 내가 환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요양병원에서 호스피스 병동 전원을 기다리던 그는 며칠 뒤 사망했다. 폐암을 진단받고 십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겨우 두 달 전의 이야기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투여했던 신약의 이름은 옵디보(Opdivo, nivolumab). 2014년에 세계 최초로 개발된 PD-1 면역항암제였다.

- 의학은 업데이트가 빠른 학문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암 치료 분야는 가장 신속하게 발전하는 영역이다. 내가 의대에서 배웠던 암 치료법은 일부를 제외하곤 현재 쓰이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당시 교과서에 수록된 항암제들은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1세대 세포독성항암제였다. 의대 졸업 후 몇 년이 지나 병동 주치의로 일할 때는 책에서만 보던 항암제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 주된 치료제는 역시 세포독성항암제였지만, 당시는 백혈병의 글리벡, 폐암의 이레사와 같은 2세대 표적항암제가 막 쓰이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 약제는 혁신적인 신약으로 조명을 받았고 관련 기사도 쏟아졌다. 매스컴은 암 정복도 머지않았다는 태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폐암 표적항암제인 이레사는 환자의 10퍼센트에서만 효과를 나타냈고, 기껏해야 생존 기간을 몇 개월 연장시킬 뿐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이만해도 대단한 성과였으나 기대만큼의 효과는 아니었다. 현실을 깨달은 언론은 금새 관심을 거두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싸늘해졌다. 벌써 십오 년쯤 전 이야기다.
얼마 전 종양내과 선생님으로부터 폐암의 최신 치료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최근 쓰이기 시작한 3세대 면역항암제 소개가 포함된 내용이었다. 짧은 강의에 많은 것을 담긴 어려웠지만 신약의 효과를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기존의 세포독성항암제와 효과를 비교한 임상연구들은 두 배 이상의 반응률과 3개월에서 1년까지 늘어난 생존률을 보고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뛰어난 효과를 보였던 개별 환자 사례들이었다. 슬라이드엔 단지 몇 차례의 치료만에 종양 크기가 확연히 줄어든 사례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흔히 기대하기 어려운 치료 결과들이었다. 이와 같이 특정 환자에서 유독 극적인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문제는 어느 환자가 그런 반응을 보일지 미리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약제의 타깃인 PD-L1 발현률이 높으면 더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동물구충제인 펜벤다졸을 먹고 폐암이 완치되었다는 해외 기사가 알려지면서 말기 암 환자가 자의로 해당 약을 복용하는 사례가 늘고있다. 화제가 되었던 미국의 환자는 소세포폐암이 여러 장기에 전이된 확장성 병기 상태였지만 현재는 암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병원에서 권한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펜벤다졸만 복용하면서 소셜미디어에 안타까운 투병 일기를 올리는 환자들도 있다. 사람에게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았고 효과가 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복용 자제를 권고하는 전문가, 환자 단체 성명이 발표되었지만, 논란이 확산되면서 오히려 펜벤다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해당 환자는 자신이 의사나 과학자는 아니며, 그저 스스로의 특별한 경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의 바램은 어느정도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의로 복용한 펜벤다졸에 대한 관심에 비해 이 환자가 임상시험 약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닥 주목받지 않는다. 해당 약제는 또다른 PD-1 면역항암제인 키트루다(Keytruda, pembrolizumab)로 알려졌다. 이를 고려하면 펜벤다졸이 아니라 면역항암제가 환자의 암세포를 몰아냈을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해당 임상시험 참여자 중 극적인 완치를 이룬 사람이 그 뿐이었으므로 항암제가 아닌 구충제의 효과로 봐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진행성 병기 환자가 면역항암제로 완치가 되는 사례는 그 자체로 드문 일이며 해당 임상시험에서 그가 유일한 아웃라이어(outlier) 였는지도 확실치는 않다. 중요한 것은 면역항암제가 특정 환자에선 이런 극적인 효과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에 발표된 국내 연구에서는 면역항암제 치료를 받은 폐암 환자 1181명 중 9명(0.76%)에서 완전 관해(complete remission, CR)를 보였다고 밝혔다.

- 오래 전부터 의사들은 암 환자의 극적인 호전 사례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환자와 의료진에게 기적이라고 불리곤 했지만 왜 다른 환자와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출간된 <암 치료의 혁신, 면역항암제가 온다 (The Breakthrough: Immunotherapy and the Race to Cure Cancer)>는 이런 사례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암 정복을 향한 길고도 고된 여정에 참여했던 수많은 연구자들의 이야기이다. 기적과 같은 현상 아래에 면역이란 기전이 숨어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그 실체를 찾기위해 고군분투했던 선구자들로 인해 항암 치료의 패러다임은 완벽하게 바뀌었다. 학계에서 옵디보와 키트루다와 같은 면역항암제 개발은 페니실린의 발견에 맞먹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책장을 넘기며 목격하는 암과의 사투는 스릴러보다 박진감이 넘치고 환자의 사례들은 어떤 드라마보다도 감동적이다. 각각의 스토리 자체도 극적이지만 그것을 전하는 작가의 필력 또한 뛰어나다. 책의 상당 지면이 항암제 작동 기전을 비롯한 전문적인 내용에 할애된 것 역시 놀랍다. 일부 내용은 의학 서적에 실리는데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의사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면역항암제 작동 기전을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려면 작가 스스로 그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저자이면서 과학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저자는 그 임무를 훌륭하게 해낸다. 그 과정에서 특히 저자가 적재적소에 사용한 비유가 큰 역할을 한다. 악셀레이터와 브레이크로 T세포 활성화 신호를 설명하고, 면역계를 피하는 암세포의 활동을 '은밀한 악수'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게 된다.
저자인 찰스 그레이버는 암에 대한 대중서 영역에서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싯다르타 무케르지에 어깨를 비벼볼만한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2010년에 출간된 무케르지의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에 면역항암제에 대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음을 상기해보면, 지금 암 치료의 혁신을 이끄는 면역항암제가 주연으로 등장한 것이 얼마나 최근의 일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뉴욕의 외과의사 윌리엄 콜리가 악성 육종 환자에게 단독균을 주사해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치료를 시도한 것은 백년도 더 된 일이었다. 학계의 조롱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어둠 속의 희미한 불빛을 따라 포기하지 않고 악전고투를 벌여온 이들의 족적을 따라가다 보면 의사로서 절로 겸허해지게 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전하라.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저자의 권유를 따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이 책의 무엇보다 큰 장점은 끝까지 과학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면역항암제는 기적의 치료제가 아니다. 승리에 대한 기록도 있지만 가슴아픈 패배도 존재한다. 저자는 섣부른 기대를 부풀려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 말미에서 그는 골드러시가 지나간 지금, 면역항암제의 위치와 한계,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담담하게 기술한다. 그리고 또다른 특별한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조심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 책이 출간된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면역항암제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제임스 앨리슨(MD앤더슨 암센터), 타스쿠 혼조(교토대) 박사였다. 물론 이들은 이 책에도 등장한다. 같은 해에 FDA 승인을 목표로 시험 중인 새로운 면역항암제는 약 940종에 이른다.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순수함의 형태

아이들 독감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단골 소아청소년과에 가는 길이었다. 가을 바람에 부드럽게 부딪히는 햇살이 눈부셨다. 아직 주사 맞을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초등 1학년 꼬맹이는 아침부터 잔뜩 긴장한 상태다. 병원 가기 싫은데... 란 말을 벌써 수십번째 하고 있었다. 반면 주사에 대한 공포를 이미 극복한 오빠는 소풍가듯 평온한 태도로 몇 걸음 앞서 걷는다. 옆에서 종종걸음을 치던 꼬맹이가 내 손을 잡았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촉촉했다.

- 근데 아빠. B형 독감에 걸렸었는데 또 주사를 맞아야 하는거야?

-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매년 조금씩 모양이 바뀌거든. 그래서 매년 다시 맞아야해.

- 근데 난 독감 걸린지 얼마 안되었잖아. 작년이 아니잖아.

어,,, 그랬었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난 겨울 독감 시즌은 유난히 길었고, 꼬맹이가 B형 독감 진단을 받은 것은 올해 4월 초였다. 독감 진단은 아이가 당장 다음날부터 학교를 못간다는 의미였지만 우리에겐 급히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당일 저녁 꼬맹이만 데리고 무안의 외갓집에 내려가 맡긴 뒤 밤기차로 다시 서울에 올라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덕분에 둘이서만 때아닌 기차여행을 했었다.

- 그랬었지. 그때 가연이가 아빠랑 할머니 댁에 가면서 오빠한테 편지 써놓고 갔잖아.

- 무슨 편지?

- 가연이 없는 동안 방에 있는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 아 맞다. 생각나.

꼬맹이는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잠시나마 긴장이 풀린 얼굴로 키득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 나 그때 할머니 집에 있을 때 아빠가 많이 보고싶었는데.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도 생각이 났어. 그냥 그랬어. 이런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했다. 대화의 맥락으로 보자면 굳이 필요치 않은 말이었지만 아이의 말투가 너무나 밝고 자연스러워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 그때 할머니 집에서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순간 직면했던 것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만약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함에 형태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잠깐 모습을 비춘 순간이었을 것이다. 달리 어떤 것이 더 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