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9일 수요일

연수일기 65. 미국 수돗물은 건강에 안 좋을까?

5월 18일 화요일. 115일째 날. 

미국의 수돗물(tap water)은 석회가 많은 센물(hard water)이라 개수대나 세면대에 물이 마른 뒤 남아있는 석회 자국을 쉽게 볼 수 있다. 설겆이를 해도 그릇에 남은 허연 얼룩이 지저분해 보인다. 석회가 섞인 물이라니, 마치 걸러지지 않은 흙탕물을 먹는 것 같아 꺼림칙할 수도 있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그리 신경쓰진 않는 것 같다. 한국인들 중엔 건강을 걱정해 생수를 사 먹거나 연수 기능이 있는 정수기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석회가 섞인 물이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근거는 빈약하다. Hard water 관련 연구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질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도 있다. 심혈관 질환에 대한 것인데, 이에 대해선 꽤 많은 연구를 찾을 수 있다. 주된 가설은 hard water에 많이 포함된 마그네슘이 심혈관 질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WHO의 보고서에서도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연구들 사이에서도 결과가 일치하지 않아 명확한 결론을 내리긴 어렵다. 

WHO 보고서에서는 hard water가 심혈관 질환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습진이나 아토피 피부염과 같은 피부 질환은 악화시킬 수 있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이 역시 근거는 확실치 않다. 설사 관련성이 있다 해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물 때문인지, 아님 비누나 샴푸 등의 사용 환경 변화(거품이 잘 나지 않아 비누를 더 많이 쓰게 되고, 비누가 잘 씻겨나가지도 않는다)나 옷 세탁 후 섬유에 남은 미네랄 성분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미국에 와서 푸석해진 머리결이나 피부 트러블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론 물 성분의 변화가 이런 문제엔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든다. 

건강과 관련해 좀 더 광범위한 내용은 이 리뷰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연구에서는 심혈관 질환 외에도 암, 뇌졸중, 신경계 질환 등 다양한 문제와의 관련성에 대해 기존의 과학적 근거를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질환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엔 근거가 부족함을 확인할 수 있다. 

Hard water는 칼슘과 마그네슘이 주 성분이다. 탄산칼슘(CaCO3)으로 물 1리터당 120mg 이상은 hard, 180mg 이상은 very hard로 구분한다. 아래 지도에서 아리조나, 유타, 뉴멕시코, 콜로라도, 텍사스 등이 very hard water 지역에 속한다. 샌디에고가 포함된 캘리포니아 남부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하루 2리터의 물을 마시는 A씨가 한국에서 샌디에고로 이사를 했다면, 이곳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 식수를 통해 하루에 대략 탄산칼슘 400mg을 더 먹게 되는 것이다. 

Hard water의 나라

한국 성인의 칼슘 권장 섭취량은 700mg 이상이며, 골다공증이 있는 경우엔 1000-1200mg 섭취를 권한다. 하지만 한국인의 실제 평균 섭취량은 500mg 정도에 불과하다. 칼슘은 한국인에게 가장 부족한 영양소 중 하나이다. 여기서의 칼슘 양은 칼슘 원소(elemental calcium)를 말하는 것으로, 칼슘의 형태에 따라 포함된 칼슘 원소의 양이 다르다. 

탄산칼슘에 포함된 칼슘 원소의 양은 40%이다. 앞에서 들은 A씨의 예와 같이 식수를 통해 하루 400mg의 탄산칼슘을 먹는다면, 이를 통해 실제 섭취하는 칼슘 원소의 양은 160mg가 된다. 결국 한국인 평균인 500mg의 칼슘을 섭취하는 경우 샌디에고의 수돗물만 마셔도 하루 권장 섭취량인 700mg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칼슘 섭취가 부족한 한국인의 경우엔 미국 수돗물을 마시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건강기능식품인 칼슘 보충제에는 보통 이보다 훨씬 많은 1000mg 이상의 탄산칼슘이 포함되어 있다. 

마그네슘의 권장 섭취량은 300-400mg이다. WHO 보고서에 따르면 하루 2리터의 물을 마시는 경우 이를 통해 soft water는 2.3mg, hard water는 52.1mg의 마그네슘을 섭취하게 된다고 한다. 마그네슘 보충제 역시 함량이 이보다 훨씬 높은, 100mg이 넘는 제품을 흔히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우리가 마시는 수돗물은 이런 보충제를 쪼개서 녹인 물이라고 생각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칼슘 또는 마그네슘 보충제도 과하면 건강에 해가 될 수 있지만, 물에 포함된 해당 미네랄 성분의 양은 일반적인 보충제 함량보다 낮다. 샌디에고 시에서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수돗물 조사 보고서에서는 기타 중금속 등의 유해 성분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샌디에고 수돗물 1L엔 이 칼슘보충제 1/3알이 들어있다.

그러니 미국의 수돗물을 마시며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저 입맛에 맞는 물을 마시면 되지 않을까. 우리 집의 경우 수돗물의 맛 때문에 그냥 마시진 않고 끓여서 보리차를 우러내 마시는데, 식탁에 항상 함께 올라오는 생수 병은 보리차를 좋아하지 않는 둘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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