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25일 일요일

연수일기 51. 기타 구입, 올드타운 마켓

4월 22일 목요일. 89일째 날. 오늘도 오전 내내 비가 왔고 오후에도 하늘이 흐렸다. C 선생님, L 선생님과 점심을 먹었다. 세 명 다 같은 시기에 UCSD로 연수를 왔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어쩌다보니 이제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세 집 다 두 명의 아이들이 있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런데 입국 초기 아이들의 학교를 정하는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은 가장 가까운 학교를 배정받았지만 이후에 정원이 차서 다른 두 집의 아이들은 각각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다. 다른 학교라 해도 자동차로 가면 기껏해야 5분 정도 차이가 날 뿐이지만. 조만간 아파트 바베큐장에서 다시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4월 23일 금요일. 90일째 날. 어쿠스틱 기타를 샀다. 기타에서 아예 손을 뗀지 십여 년은 되었다. 연수를 가면 꼭 기타를 사서 다시 연습해보겠다 생각했고, 연수를 떠나기 전 두세 달 동안 집 근처 기타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구입이 좀 늦었다. 기타를 산 건 거의 이십 년 만이다. 요즘 기타 브랜드나 모델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악기점 직원의 권유에 맞춰 Eastman PCH1-D 모델을 선택했다. 한국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모델이지만 이곳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 입문용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이제 연습만 하면 된다...

저녁을 먹기 전 올드타운에 들렀다. 이곳이 예전엔 멕시코 영토였음을 상기할 수 있을만한 곳이다. 고작 200년 전만 해도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미국 서남부 전체가 멕시코 땅이었다는 것과 그 땅이 미국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옛날 서부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 한 분위기의 건물들과 남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멕시코 고유 명절인 망자의 날을 기념하는 해골 마그넷을 샀다. 영화 코코 때문인지 해골을 소재로 한 기념품이 많았다. 

저녁은 필즈 BBQ에서 먹었다. 한국인들 사이에선 샌디에고 맛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거리두기로 좌석을 줄여서 운영하는 듯 했다. 평소에도 대기를 해야 입장 가능한 경우가 많다고 들어서 더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닐지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듣던대로 기본 메뉴인 폭립과 사이드 메뉴의 양이 하나같이 많았다. 양념이 좀 과하긴 했지만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고 아이들도 잘 먹었다. 


2021년 4월 22일 목요일

연수일기 50. 중학교 선택 과목과 시험 등록

4월 19일 월요일. 86일째 날. 아침에 공원에서 러닝 후 아파트 풀 사이드의 캐노피에서 글을 썼다. 거리두기 단계가 낮아지면서 아파트 클럽하우스도 문을 열었다. 내부를 돌아보는데 어느 한국 분이 작년에 이사 온 이후로 클럽하우스가 계속 닫혀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 처음 들어와 본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가족은 아직 3개월이 채 안되었으니 사정이 나은 편이라 해야 하나. 오후엔 딸아이와 친구들이 클럽하우스에서 놀았다. 포켓볼 당구대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가끔 이곳에서 일을 해도 좋을 것 같다. 


4월 20일 화요일. 87일째 날. 아들의 중학교 수학 과정을 정하기 위한 시험을 등록했다. 학군에 따라 6학년부터 중학교 과정에 들어가는 곳도 있고, 여기와 같이 7학년부터 중학교 과정인 곳도 있다. 입학에 필요한 서류는 한 달 전에 보냈었다. 7학년은 총 여섯 과목의 수업을 듣는다. 수학, 영어, 세계사, 과학, 체육의 다섯 과목이 필수이고, 이 학교의 경우 미술, 보컬 트레이닝, 밴드, 오케스트라, 리더쉽, 교지 편집, STEM, 스페인어 중 한 과목을 추가로 선택할 수 있다. 선택 과목들 중 우선 순위를 정하는데 아이가 한국에서 첼로를 배웠던 경험이 있어서 오케스트라를 첫 번째 순위로 선택했다.

7학년 과목 선택 서류
 

중학교 영어와 수학은 학생의 수준에 따라 적절한 단계를 선택하도록 한다. 수학 과정은 Integrated Math A와 B로 나뉘어지고, 각 level은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자신에게 적합한 과정을 선택하는데, 7학년은 기본적으로 Math A 과정 세 단계(A Essentials - A - A Honors)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중학교 학군 교육청에서 시행하는 수학 진단 능력 평가 결과를 참고해 결정할 수 있다. 나중에 우편으로 도착한 테스트 결과를 보니 Math A Honors 단계에 해당하는 점수였다. 이 결과에 따라 추후 입학 전에 단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준다. 

Mathematics Diagnostic Testing Project Score
 

7학년이지만 8학년 과정인 Integrated Math B Honors를 들을 수도 있다. 대신 이를 선택하려면 Integrated Math B Honors Readiness Test (IMBHRT) 점수가 70% 이상이어야 한다. 이 테스트는 신청한 학생들 만을 대상으로 따로 시행하며, 5월에 온라인으로 예정되어 있다. 학교에서 받은 예시 문제가 담긴 자료를 살펴보니 8학년 과정도 괜찮을 것 같아 테스트에 등록해보기로 했다. 결국 7학년 수학 한 과목만 해도 학생의 수준에 따라 네 단계로 나누어 배우게 되는 것이다. 교과목 선택 과정을 전반적으로 경험해보니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맞춤식 교육을 제공하는 체계가 잘 잡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테스트는 교육의 결과가 아닌, 적절한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한국에선 이런 방식의 시험을 보지 않는다.  

아파트 근처 쇼핑몰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 쇼핑몰에도 식당이 몇 개 있는데 지난 달에 브런치를 먹었던 곳 외에 두 번째 식당이다. 화요일 저녁은 피자 데이라 피자 하나를 시키면 같은 피자를 하나 더 받을 수 있다. 나이 지긋한 중년 직원의 서빙이 마음에 들었고, 음식 맛도 괜찮았다. 앞으로 종종 방문해도 좋을 것 같다. 식사 후 아들이 농구 수업에 참여하는 동안 딸아이와 공원 놀이터에서 놀았다. 저녁 날씨가 꽤 쌀쌀했다.


4월 21일 수요일. 88일째 날. 오전에 비가 와서 Gym에서 운동했다. 4월 말인데 흐린 날엔 아직도 쌀쌀하다. 그동안엔 서울보다 이곳 기온이 줄곧 높았지만 이제 서울 기온이 더 따뜻한 날도 있다. 서울은 벌써 초여름 날씨라고 한다.

다음 주 아내의 운전면허 실기 시험을 대비해 아내가 운전을 해 클레어몬트 DMV 근처를 돌아보았다. 아내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난 번엔 처음이라 긴장한 티를 너무 많이 냈었던 것 같다. 시험을 보았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길 들어보면 감독관에 따라 규칙을 깐깐하게 적용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여기서도 운전은 주로 내가 맡아왔지만, 시험 전까지는 되도록 아내가 운전을 하기로 했다. 이번 시험은 큰 실수 없이 잘 보았으면 좋겠다.

2021년 4월 21일 수요일

연수일기 49. 안자보레고 여행

4월 16일 금요일. 83일째 날.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 곧바로 출발했다. 이번 여행 숙소인 안자보레고의 RV 파크까지는 80마일,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짧은 주말 여행이지만 그랜드캐년에 다녀온지 일주일도 안되어 여행을 또 가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주부터는 사막의 날씨가 너무 더워지고 선인장 꽃들도 져버릴 것 같았다. 일주일 뒤면 달이 밝을 때라 밤에 별을 보기 어렵다는 것도 이유였다. 

78번 도로를 따라 줄리안 마을까지 가는 길은 이전에도 한번 왔었지만 그땐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많이 끼었었다. 이번엔 날씨가 화창해 느낌이 전혀 달랐다. 산맥을 넘어가야 해 고도가 높고 꼬불꼬불한 길이지만 흐린 날씨에 보이지 않았던 주변 풍경이 좋아 운전이 즐겁다. 줄리안을 지나니 초록색 가득했던 풍경이 황량한 사막 지형으로 거짓말처럼 바뀐다. 

팜 스프링스 남쪽에서 시작하여 멕시코 근처까지 뻗어있는 안자보레고 사막은 대부분 샌디에고 카운티에 속하지만 리버사이드, 임페리얼 카운티에도 일부 포함이 된다. 안자보레고 사막 주립공원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주립공원이라고 한다. 워낙 넓은 지역이라 하루 이틀에 모든 곳을 다 보기는 어렵다. 숙소가 있는 오코틸로 웰스로 가는 길에 캑투스 루프 트레일 Cactus Loop Trail에 들렀다. 키가 큰 오코틸로 ocotillo를 포함한 다양한 선인장 사이로 걸을 수 있는 짧은 트레일이다. 이곳 사막의 선인장 꽃은 초봄에 피는데, 이전 해의 강수량과 날씨에 따라 꽃이 피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올해는 개화의 정도가 적은 편이라 하니 꽃이 많을 때에는 더 걷기 좋았을 것 같다.  

꽃이 핀 오코틸로

5시 반 쯤 Leapin' Lizard RV Ranch에 도착했다. 휴대폰 전파가 안 잡히고 와이파이도 안되는 곳이다. Dennis와 Lucy란 이름의 대여용 RV를 운영하고 있어서 RV가 없어도 숙박이 가능하다. 우리는 4인용 RV를 예약했다. 1956년에 만들어진 RV라 내부의 집기들은 낡았지만 침실과 욕실, 주방까지 모두 깔끔했고, 세탁된 수건과 린넨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차량 앞에 피크닉 테이블과 바베큐 그릴, 가스를 사용하는 파이어링이 설치되어 있어서 캠핑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제 코스트코에서 사서 준비해둔 소고기를 구워먹었다. 트레일러 안에서 아이들과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4월 17일 토요일. 84일째 날. 느지막히 일어나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처음 갈 곳은 숙소에서 1시간 거리의 샌드힐 지역 Hugh T. Osborne Park 이다. 사막이라 해도 제대로 된 샌드힐을 보긴 어려운데, 이곳은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 모래로 가득했다. 데스밸리의 샌드힐은 물론이고 작년에 갔었던 호주의 포트스테판보다도 훨씬 넓어보였다. 썰매가 있다면 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래 바람이 심해 오래 있긴 어려웠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모래 사막 걷기


브롤리 시내의 작은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Slab city로 이동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군사 기지가 있던 지역으로, 군사 시설이 없어진 뒤 남은 건물터 주변에 트레일러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폐허와 같은 지역에 주류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Squatters’ Paradise', 'America's last free places'로 불린다고도 한다. 이 마을의 입구에선 모래 언덕에 페인트를 칠해 만든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Salvation mountain이라 불리는 이 작은 동산을 Leonard Knight라는 사람이 혼자서 30년간 만들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동산 곳곳에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노래한 글귀가 가득한데, 다양한 종교의 교리를 찾던 그가 결국 'God is Love'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고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과 색칠을 좋아하는 딸아이가 특히 마음에 들어해 이곳에 한동안 머물렀다.

Salvation Mountain


East Jesus도 들러볼만 한 곳이었다. 설치 예술 작품이 가득한 일종의 갤러리인데, 작품들이 하나같이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다. 이곳은 아들이 마음에 들어했고, 딸아이는 분위기가 무서웠는지 구경하는 내내 빨리 나가자고 손을 잡아 끌었다. 도서관에도 들렀다. 폐허와 같은 마을에도 도서관이 있다는 게 이채로웠다. 입구에는 닭장이 있었고, 헌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 안에선 주인 여자와 이웃 몇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벌거벗은 인형과 팔다리로 장식한 자동차


마을을 나와 봄베이 비치로 향했다. 솔턴호 Salton sea 의 북동쪽에 있는 비치이다. 일몰을 보기에 좋다는 이야기만 듣고 간 곳이었다. 호수 기슭에 '비치'란 이름을 붙인 게 이상했는데, 애초에 호수 이름에 Sea가 붙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에 걸맞게 이 호수의 물은 태평양 바닷물보다 염도가 높다고 했다. 낭만적인 이름과는 달리 비치의 풍경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의 마을에는 빈 것으로 보이는 집들이 듬성듬성 있었고,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에 가까이 다가가자 썩은 시궁창 냄새가 풍겨왔다. 이곳에 50여 년 전까진 리조트가 있었고, 유명인들을 비롯해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이 휴가를 즐기러 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주변의 농장에서 유입된 폐수로 인해 솔턴호의 오염이 심각한 상태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호수의 물이 줄어들고 바닥의 오염물질이 드러나면서 발생한 미세먼지가 주변 도시의 건강을 위협하는 등 문제가 커지자 캘리포니아 주에서 호수를 살리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봄베이 해변의 예술 작품들

돌아오는 길에 국경수비대의 검문을 받았다. 멕시코 국경과는 꽤 거리가 있지만, 안자보레고 사막이 워낙 넓고 멕시코까지 걸쳐있다 보니 이 길까지 밀입국을 막기 위한 검문소를 설치한 것 같다. 캘리포니아 운전 면허증을 제시하고 바로 통과할 수 있었는데, 샌디에고 외곽으로 나갈 때는 면허증이나 여권 또는 비자 관련 서류는 항상 준비해두는 것이 좋겠다. 브롤리 시내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 도착하니 여섯시가 넘었다. 오늘 BBQ 메뉴는 돼지 목살. 마트에서 사온 소시지를 함께 구웠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풀에서 수영을 했다. 풀장엔 우리 가족 뿐이었는데, 널찍한 공간에 메인풀 외 온수풀까지 있었고 샤워장도 깨끗했다. 웬만한 호텔 수준은 될 것 같다. 렌탈 RV를 보고도 느꼈지만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영을 하고 돌아와 아이들은 파이어링 모닥불에 마시멜로를 구워먹었다. 어제 많이 불던 바람이 오늘 밤엔 잠잠해져서 바깥에 휴대용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를 보았다. 


4월 18일 일요일. 85일째 날. 슬롯캐년 트레일을 걸었다. 숙소에서 78번 도로를 타고 30분 정도 서쪽으로 되돌아오면 슬롯캐년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비포장길을 만날 수 있다. 예상보다 규모가 큰 협곡이었다. 좁은 바위 틈 사이에서 몸을 비틀어가며 걷는 길이 재미가 있는지 아이들도 즐거워하며 걷는다. 지난 주에 안탈로프캐년에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좁은 협곡을 걷는 재미가 있다.

보레고 스프링스에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는 길에 줄리안 근처에 있는 Dudley’s Bakery에서 빵을 샀다. 1963년에 문을 연 이 빵집은 샌디에고 인근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빵은 맛있었지만 가격이 꽤나 비쌌다.  

2021년 4월 17일 토요일

연수일기 48. 짜장면과 짬뽕, 아내의 백신 접종

4월 13일 화요일. 80일째 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연구실에 출근했다. 한국에서보다 훨씬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다보니 연구실에서 혼자 집중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 

오후에는 여느 때처럼 딸아이를 워터 폴로 수업에 데려다주었다. 그래도 이제 아들이 워터 폴로를 그만두어 오늘은 둘째만 다시 데리러 가면 되었다. 이전까진 둘이 끝나는 시간이 달라서 애들을 데리러 갈 때 두 번을 왔다갔다 해야 했다. 화요일과 목요일의 경우 학교 등하교와 워터 폴로, 아들의 농구 수업까지, 하루에 일곱 번 애들을 실어날라야 했는데 한 번이 줄어든 것이다. 

워터 폴로 수업의 경우 한 달 동안 수업 내용엔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네 번 수업에 운동량이 너무 많아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이곳 아이들만큼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괜찮겠지만, 한 달을 지켜본 결과 1년간 이 수업을 계속 받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여러 차례 상의를 했고, 결국 워터 폴로 수업은 추가 등록을 하지 않기로 했다. 농구 수업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번 달부터 코치가 한국인으로 바뀌었고, 함께 수업을 받는 아이들 중에도 한국 아이가 있다고 한다. 오늘은 그 아이와 이야기를 꽤 했는지 수업이 끝난 뒤 밝은 표정으로 수다를 떤다. 집에서 혼자 드리블 연습을 하는 걸 보니 벌써 내 수준은 넘어선 것 같다.


4월 14일 수요일. 81일째 날. 아침에 공원 러닝을 했다. 연구실에 나가지 않는 날 아침엔 되도록 운동을 하려 한다. 지난 주에 샌디에고 카운티의 거리두기 티어가 오렌지로 한 단계 낮아지면서 아파트 클럽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클럽하우스 안에 포켓볼 당구대가 있어서 가끔 지환이와 쳐봐도 될 것 같다. 

시온마켓 안에는 홍콩반점 샌디에고점이 있다. 이곳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장을 보았다. 쟁반짜장, 짬뽕, 탕수육을 시켰다. 한국식 짜장면과 짬뽕은 정말 오랜만이라 짬뽕 국물까지 남기지 않고 다 비웠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역시 이곳에서도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이다. 


4월 15일 목요일. 82일째 날. 오늘부터 샌디에고 카운티에선 16세 이상의 일반 성인 Covid-19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아내의 스케줄도 UCSD 접종 장소로 어제 예약을 해두었고, 오늘 아침에 모더나 백신 접종을 했다.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기숙사 근처를 둘러보았다. 블라인드가 올려진 창문으로 학생들이 사는 방이 보였다. 내부는 한국의 대학교 기숙사와 비슷한 것 같다. 기숙사 식당에서 커피를 샀다. 아내는 오후까지 주사 맞은 팔이 아픈 것 말고 다른 증상은 없었는데 큰 불편 없이 수월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기숙사 식당 앞의 뜰

오후엔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았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로만 14kg. 평생 가장 많은 육류를 사 본 것 같다. 내일 안자보레고 사막에 가서 주말을 보내기로 해서 먹을 음식도 준비해야 한다. RV랜치에서 운영하는 렌탈 캠핑카에서 머물기로 했는데, 미국에서의 캠핑은 처음이라 기대가 된다. 음식과 BBQ에 필요한 석쇠, 모닥불용 토치도 함께 구입했다. 

2021년 4월 13일 화요일

연수일기 47. 여행을 마치고, 썸머 캠프 등록

4월 11일 일요일. 78일째 날. 일주일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쌓인 피로로 몸은 무겁지만 가족 모두에게 서로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두 달 반 동안 쌓였던 눅눅한 감정들이 사그라든 걸 느낀다. 2000마일을 운전했고, 그 길 위에서 내내 네 가족이 함께 했다. 한국에서도 아이들과 여행을 자주 한 편이지만 이 정도의 로드트립은 처음이었다. 차 안에서 보낸 시간은 운전을 했던 나와 아내에게, 뒷자리의 아이들에게도 지루하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웃고 떠들고 때로는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면서 느낀 즐거움이 훨씬 많았다. 끝말잇기와 스무고개는 또 얼마나 많이 했는지.

이곳에서 두 달이 넘게 살면서도 아직까지 여행지에 온 듯한 느낌이 남아있었나 보다. 일주일 만에 돌아오니 이제야 이곳이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이곳에서, 마음 속 기댈 수 있는 너비도 몇 뼘쯤은 넓어진 것 같다. 겨우 일주일인데 집 앞 나무들이 꽃을 피웠다. 찌는 듯한 무더위도 시릴 듯한 추위도 없는 날씨도 조금씩 조금씩, 뭉근하게 변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쩌면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도시의 날씨도 더 마음에 들게 되었다.

우편함에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이 도착해 있었다. '정착'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이곳에서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을 산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신기루같은 것 아닐까. 하지만 일단 숙제가 다 끝난 것 같아 홀가분하다. 돌아오기 이틀 전, 거리를 가득 메운 네온사인을 보며 처음으로 이 집이 그리웠다. 이곳에 있는 동안 여행을 좀 더 많이 하고 싶다.

집 앞의 나무에 꽃이 피었다.


4월 12일 월요일. 79일째 날. 아이들 썸머 캠프를 등록했다. 이곳 아이들은 긴 여름 방학 중 일부는 캠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들었다. Covid-19 상황이 나아지면서 뉴스에서도 올해 썸머 캠프는 수요가 더 많아질거라 일찍부터 예약이 필요할거라 이야기했다. 6월에 시작하는 여름방학은 총 9주이다. 방학 시작 후 1주일은 세콰이어 국립공원의 롯지에서 머물기로 예약한 상태이고, 그 다음 주말엔 요세미티에 가기로 했다. 남은 기간 중 3주 정도를 캠프에 보낼 계획을 잡고 그동안 적당한 캠프를 찾아보았다. 둘째는 Boys & Girls 캠프 프로그램 중 두 개에 등록했고, 첫째는 지금 하고있는 농구 클럽의 캠프에 등록해두었다. 오늘은 추가로 보낼 캠프를 검색하다가 YMCA 캠프를 발견했다. Boys & Girls도 그렇지만 YMCA 캠프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프로그램도 어느정도 검증이 되어있어 인기가 많다고 들었기에 두 아이 모두 등록했다. 임페리얼 비치라 집에서 거리가 멀긴 했지만 둘이 함께이고 일주일 정도라면 해볼만 할 것 같았다. 

둘째는 3주 캠프 프로그램이 다 채워졌고, 첫째는 1주일이 비어있다. 1주일은 써핑 캠프를 생각해두었는데 눈여겨봐 둔 미션베이의 캠프가 등록 첫날 오전에 마감되는 바람에 예약 대기만 걸어둔 상태이다. 적당한 다른 써핑 캠프를 찾아봐야 할 것 같다.

2021년 4월 12일 월요일

연수일기 46. 그랜드 써클 여행- 후버댐, 팜스프링스 케이블카, 데저트힐 프리미엄 아울렛

4월 9일 금요일. 76일째 날. 느지막히 호텔에서 일어나 아내와 카지노에 들렀다. 아내는 라스베가스가 처음이었는데, 여기 왔다면 카지노는 한 번 체험해봐야 할 것이다. 3년 전 학회로 이곳에 왔을 때 함께 왔던 동료가 잭팟을 터뜨려 몇백 불을 벌었는데, 이번엔 그런 행운은 없었다. 그래도 슬롯머신에서 30불 정도는 따고 그만두었으니 간식값 정도는 번 셈이다.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3년 전에 갔었던 프랑스 레스토랑에 들렀는데 대기가 1시간 이상이었다. 메인 도로의 다른 레스토랑들도 비슷한 상황인 듯 했다. 오전인데도 거리엔 사람들이 많았고, 아이들은 배고파하기 시작했다. 

외곽으로 나가면 좀더 수월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심가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한인 식당을 찾아 감자탕과 보쌈을 시켰다. 둘 다 미국에 와서 처음 먹는 메뉴였고, 아이들이 감자탕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맛있게 먹었다. 식당을 나와 후버댐으로 향했다. 시내에서 1시간 정도 거리이다. 댐은 높이가 200미터가 넘는 거대한 규모로, 이 댐이 건설되면서 생긴 미드호 Lake Mead의 길이가 180km에 달한다고 하니 어마어마하다. 1936년에 이런 규모의 댐을 5년만에 건설할 수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댐을 건설하다 112명이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리조나와 네바다의 경계에 위치한 댐 양쪽에 아리조나 시간과 네바다 시간에 맞춘 시계탑이 있다. 썸머 타임을 시행하지 않는 겨울에는 댐을 경계로 1시간 차이가 나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네바다주가 썸머 타임을 시행하고 있어서 양쪽 시간이 같았다. 댐 앞쪽 계곡 위로 93번 도로와 11번 고속도로를 잇는 긴 다리를 볼 수 있다. 이 다리가 건설되면서 댐 위의 도로는 관광용으로만 쓰인다고 한다.

댐 위에서 바라본 Mike O'Callaghan-Pat Tillman Memorial Bridge


카페에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쉰 뒤 다시 차를 타고 4시간 반을 달려 늦은 저녁에 팜스프링스의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은 300마일을 운전했다.  


4월 10일 토요일. 77일째 날. 케이블카 예약 시간인 아침 8시에 맞추어 매표소에 도착했다. 팜스프링스의 명물인 Palm Springs Aerial Tramway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전 케이블카이다. Covid-19로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최근 다시 개장했고, 현재는 예약제로만 운영한다. 케이블카 정상은 해발 2596m에 달한다. 정상인 San Jacinto 산 꼭대기는 트레일과 캠핑을 할 수 있는 숲이 있다. 실제 텐트와 매트를 짊어진 사람들이 여럿 케이블카에 함께 타고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니 산 아래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카페가 있었다. 스프와 빵을 사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함께 올라온 사람들 중에선 맥주를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케이블카 탑승장 근처에선 사슴을, 정상에선 청설모 여러 마리를 만나 아이들이 좋아했다.

산 아래에서 바라본 케이블카

정상에서 1시간 정도를 머물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마지막 목적지인 
데저트힐프리미엄 아울렛에 들러 아내가 쇼핑을 하는 동안 아이들과 푸드트럭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과 내가 신을 운동화와 백팩도 샀다. 이곳에서 집까진 2시간 30분 거리이다. 오늘은 140마일을 운전했다. 

2021년 4월 9일 금요일

연수일기 45. 그랜드 써클 여행- 브라이스 캐년, 지온 캐년, 라스베가스

4월 7일 수요일. 74일째 날. 아침 7시에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숙소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 출발했다. 여행을 하면서 숙소를 떠나기 전 매번 가족 사진을 찍었다. 스마트밴드의 휴대폰 연동 촬영 기능을 유용하게 쓰고 있다. 오늘은 브라이스 캐년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89번 도로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그랜드 캐년과 달리 비지터 센터가 닫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입장 인원을 제한해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국립공원 스탬프를 찍고 마그넷을 샀다. 


입구에서 63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중간중간 여러 뷰포인트를 만난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차에서 내려 여유를 즐기면 된다. 도로 끝은 레인보우 포인트로 해발 9115피트(2778m), 백두산보다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 짧은 트레일(Bristlecone Loop Trail)도 즐길 수 있다. 고지대라 기온이 선선해 아이들과 걷기 딱 좋았다. 아직 곳곳에 눈이 쌓여있었다. 


해발 9천피트에서 즐기는 트레일

'Canyon'은 흐르는 강물에 의해서 깎여 만들어진 골짜기 지형을 일컫는 단어로, 그랜드 캐년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브라이스 캐년은 산등성이를 따라 줄지어 서있는 붉은색 기둥이 특징인데, 이를 Hoodoo라고 부른다. Hoodoo는 석회암을 녹이고 스며든 산성의 빗물이 빗물이 밤에 얼고 낮에 녹으면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해 바위에 균열이 생기고 깨지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른 캐년과는 만들어지는 과정이 달랐지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지형은 결국 다른 캐년과 비슷해 캐년이라고 부른다. 브라이스 캐년은 그랜드 캐년과 전혀 달랐다. 그랜드 캐년이 고집 세고 완고한 노인과 같은 묵직한 느낌이었다면 브라이스 캐년은 좀더 젊고 훤칠한 청년을 대하는 것 같았다. 레인보우 포인트에서 본 붉은 기둥들과 전나무 사이로 펼쳐진 눈쌓인 작은 길을 걷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레인보우 포인트에서 보이는 전경

원래 계획으론 오후에 지온 캐년을 들렀다 갈까 생각도 했었지만 브라이스 캐년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좀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더 여유가 있었다면 다른 트레일도 걸어봤을 것이다. 싸온 음식들로 점심은 간단히 차 안에서 해결했다. 브라이스 캐년을 떠난 건 오후 네시가 다 되서였다. 두 시간 정도 달려 오늘 숙소가 있는 도시인 허리케인에 도착했다. 오늘은 320마일을 운전했다. Lin’s에서 장을 보고 숙소로 향했다. 잔디가 깔린 정원이 있는 전원주택 풍의 숙소가 마음에 들었다. 마트에서 산 돼지 목살을 구워 저녁을 먹었다.


4월 8일 목요일. 75일째 날. 오늘은 지온 캐년을 둘러보고 라스베가스로 가는 일정이다. 9시가 조금 넘어 비지터 센터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비어있는 자리가 없었다. 간간이 나가는 차가 있긴 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들어오는 차들이 많아져 여간해선 주차가 힘들 것 같았다. 캐년 안쪽의 도로는 셔틀 버스 외에 일반 승용차의 통행은 막혀있는 상태였다. 1시간 가까이 주차 자리를 찾다가 안쪽의 박물관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박물관은 문을 닫은 상태라 그 앞의 주차장엔 여유가 있었다. 평소 도로를 어디까지 개방하는지 모르겠지만, 차량 수에 비해 주차장은 턱없이 부족해 보이니 비지터 센터 주차장을 이용할 생각이라면 아침에 좀더 일찍 도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박물관과 가까운 파러스 트레일 Pa'rus Trail 을 걸었다. 길 옆으로 계곡이 흐르고 전체적으로 평탄한 길이라 아이들도 쉽게 걸을 수 있다. 중간에 아들이 배가 아파 쉬어야 했다.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비지터 센터로 내려와 기념품을 샀다. 지도에서 가까워보이는 브루잉펍에서 점심을 머을까 했는데, 매표소 바깥에 있어서 갈 수 없었다. (차에 두었던 애뉴얼 패스를 가지고 나가면 가능했을 것 같기도 하다.) 햇살이 강해져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째가 힘들어했다. 셔틀버스 정류장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이들과 함께이고 아직은 많은 사람들과 버스를 타기 꺼려져 그냥 지나쳤지만 다음에 다시 오면 버스로 캐년 안쪽의 트레일 코스까지 가보고 싶다. 


파러스 트레일에서 


그랜드, 브라이스 캐년과 함께 그랜드 써클의 대표적인 캐년으로 꼽히는 지온 캐년은 다른 캐년과 또 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앞의 두 캐년의 모습은 현실에서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처럼 이채로웠고, 그에 비해 지온 캐년에서는 조금은 친숙한 느낌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보지 못한 게 아쉬워 다음 번에 브라이스 캐년과 함께 꼭 다시 와보자고 아내와 이야기했다. 


오후 2시에 지온 캐년 입구 스프링데일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라스베가스를 향해 출발했다. 숙소인 코스모폴리탄 호텔까지 3시간이 걸렸다. 호텔 방에 짐을 풀고 벨라지오 분수 쇼를 보고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거리두기가 무색할 정도로 거리엔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화려한 불빛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에 아이들은 좀 놀란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돌과 흙만 보다가 갑자기 휘황찬란한 곳에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호텔에서 보이던 야경

판다 익스프레스를 들렀다가 호텔로 돌아와 창밖으로 분수 쇼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200마일을 운전했다. 판데믹 상황이 더 좋아진 뒤 올 가을쯤 쇼를 보기 위해 다시 와도 괜찮을 것 같다.  그땐 브라이스와 지온 캐년도 함께 다시 들러볼 생각이다. 

2021년 4월 6일 화요일

연수일기 44. 그랜드 써클 여행- 나바호 브릿지, 홀스슈밴드

4월 6일 화요일. 73일째 날. 아침에 숙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출발했다. 플래그스태프를 떠나기 전 자동세차장과 주유소를 들렀다. 나바호 브리지를 거쳐 페이지까지 가는 일정이다. 보통 홀스슈밴드와 앤터로프 캐년을 보기 위해 페이지를 찾는데, 현재 앤터로프 캐년은 닫혀있는 상태라 볼 수 없다. 일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앤터로프 캐년이 있는 지역이 나바호 원주민의 자치 지역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앤터로프 캐년 외에도 자치 지역 내의 모뉴먼트 밸리 역시 닫힌 상태이다.

오늘 첫 목적지인 나바호 브리지까진 2시간 정도 걸린다. 89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중간 갈래길에서 89A번을 타면 나바호 브리지에 닿는다.  89A번 도로는 세도나에서 플래그스태프를 오는 동안 거쳐왔던 길이기도 하다. 오크강 계곡을 따라 흐르던 도로도 멋졌지만 나바호 브리지로 가는 길도 주변 풍광이 훌륭했다. 아리조나 주는 캘리포니아보다 1시간이 빠르지만, 캘리포니아와는 달리 DST를 적용하지 않으므로 현재는 시간대가 같다. 하지만 나바호 자치 지역은 DST를 적용한다. 그랜드써클 여행을 할 때 지역마다 다른 시간대 때문에 시간을 착각해 당황스러운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고 한다. 나바호 브리지로 가는 동안 휴대폰의 시간대가 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 비지터센터 주차장에 도착했다.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있는데, 1928년 건설된 구 나바호 브리지는 도보로만 건널 수 있다. 다리 위에서 서쪽의 마블 캐년과 그 아래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볼 수 있었다. 강물은 에메랄드 빛깔이었다. 허공에는 멸종 위기 동물인 콘도르들이 원을 그리며 날았고 가끔은 다리 아래 철제 구조물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주변 풍경에 시큰둥하던 아들은 콘도르를 보고 활기를 되찾았다.

다리 건너편으로 마블 캐년, 허공을 나는 콘도르

비지터센터에서 기념품을 산 뒤 리스 페리로 향했다. 콜로라도 강 기슭의 선착장으로 강물을 가까이서 보고 만질 수 있는 곳이다. 나바호 브리지가 건설되기 전에는 강을 건너려면 이곳을 거쳐야 해 꽤나 번성했지만 지금은 주로 래프팅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강물이 맑았다. 잠시 강가에 앉아 사진도 찍고 아이들과 물수제비를 뜨며 놀았다. 

리스 페리에서 가까운 곳에 Lonely Dell Ranch가 있다. 1900년대 초반 페리 선착장 운영자가 살던 농장으로 당시에 세운 오래된 오두막과 수레 등의 집기가 아직 남아있는 곳이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붉은 흙길을 따라 들어가니 초록 잎 가득한 나무들이 단정하게 심어진 뜰이 펼쳐졌다. 오두막 앞뜰 커다란 나무 아래 벤치엔 서너 명의 여행객들이 앉아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앞뜰은 사과, 자두, 살구, 아몬드 나무 등이 심어진 과수원이다. 황량한 붉은빛 사막과 계곡 지형에 둘러싸인 초록빛 과일나무들이라니. 마치 앨리스가 빠진 토끼굴을 거쳐 나온 것 같았다. 수확철에는 과일을 따 가져갈 수도 있다고 한다. 

파릇파릇한 과일 나무들

페이지 시내에 있는 Bird house에서 치킨과 그랜드캐년 맥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 집 치킨은 한국식 치킨과 비슷해 내 입맛에도 맞았고 아이들도 잘 먹었다. 식사 후 홀스슈밴드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10불의 입장료를 받았다. 밴드 지형을 보려면 주차장에서 15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다. 툭 튀어나온 암벽 절벽을 감싸고 도는 콜로라도 강줄기가 말굽 모양을 닮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지형인데, 한국이었다면 한반도 지형이란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사람들도 많았고 사진도 찍을 만 했지만 아주 큰 감흥은 없었다. 해가 질 때 오면 더 좋다고 한다. 

애리조나의 한반도 지형

오늘은 200마일을 운전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페이지 시내의 숙소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누군가 먼저 들어와 짐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호스트에게 연락을 취했고, 다행히 곧바로 청소 담당자가 와서 다른 여행객의 짐을 수거하고 집을 다시 정리해주었다. 다른 날짜에 오기로 한 여행객이 날짜를 오늘로 착각해 체크인을 했다고 한다. 에어비앤비의 경우 예전과 달리 호스트를 직접 만나지 않고 셀프 체크인을 하는 곳이 많아서 이런 해프닝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어렵지않게 해결되었지만, 날짜를 착각한 여행객들은 호스트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연수일기 43. 그랜드 써클 여행- 그랜드 캐년

4월 5일 월요일. 72일째 날. 8시에 플래그스태프 숙소를 출발해 1시간 30분이 걸려 그랜드 캐년 비지터센터에 도착했다. 국립공원 내의 숙소라면 가장 편하겠지만 대부분 가격이 높고 예약이 어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소도시에 숙소를 잡는다. 현재는 그랜드 캐년 동쪽 입구가 닫혀있어서 다음 일정인 페이지로 가려면 플래그스태프까지 내려와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우리는 플래그스태프에 숙소를 잡았지만, 그랜드 캐년 사우스림에 더 가까운 곳을 원한다면 투사얀에 숙소를 잡아도 좋을 것이다. 

Covid-19로 비지터 센터는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매점에서 국립공원 패스에 붙일 스탬프를 받을 수 있었다. 커피를 한 잔 사서 손에 들고 가장 가까운 마더 포인트로 향했다. 그랜드 캐년이 미국 땅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때부터, 티비에서, 잡지에서, 신문에서, 인터넷 블로그와 SNS에서 숱하게 보고 들었던 이곳. 살면서 한 번쯤은 가봐야 하는 곳이라 생각했던 곳. 그 풍경을 이제야 직접 보게 된다는 사실에 조금은 흥분되기도 했다. 

마더 포인트에 올라서자 끝이 안보일 정도로 겹겹이 펼쳐진 협곡이 우리를 맞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장대했지만, 그것이 주는 느낌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너무 비현실적인 풍경이라 어색해 오히려 특별한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그림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야바파이 포인트까지 림트레일의 일부가 이어진다. 포장된 길이라 풍경을 조망하며 아이들과 천천히 걷기 좋았다. 한 시간 남짓 걸으면서 처음의 어색했던 느낌이 가라앉고 차분히 캐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땐 무뚝뚝하고 투박하게 보였던 절벽이 조금은 친숙하게 느껴졌다. 지금 보이는 골짜기들은 수천만 년에 걸쳐 솟아오르고 깎이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절벽면들은 검버섯이 내려앉아 주름지고 거친 손등처럼, 겹겹이 쌓인 퇴적층은 마치 그동안의 고된 세월을 말해주는 나이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바파이 포인트 근처에서

64번 도로를 따라 덕온어락뷰 포인트(멀리 보이는 바위가 오리 모양이라 이렇게 이름 붙었다고 한다), 그랜드뷰 포인트, 데저트뷰 와치타워까지 구경했다. 포인트마다 캐년의 모습이 조금씩 달랐다. 이곳이 사우스림의 동쪽 입구인데, 캐머런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현재는 이곳에서 막힌 상태라 더 가볼 수는 없었다. 오후 3시이니 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비지터 센터로 돌아오는 길에 사슴 몇 마리를 만났다. 비지터 센터에서 서쪽으로 난 Hermit road는 셔틀을 타고 볼 수 있었지만, 아이들도 좀 지친 상태라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플래그스태프 시내로 돌아와 다운타운의 타이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타이 요리는 오랜만이라 좋았고, 음식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흰 쌀밥을 곁들인 고기 요리를 아이들이 잘 먹었다. 오늘은 200마일을 운전했다. 이번 여행 중 이틀을 묵는 것은 이곳 숙소 뿐인데, 100년 된 주택의 2층을 개조한 아파트로 아이들과 머물기 적당했다. 저녁에 플래그스태프 맥주를 마시며 아이들과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 

2021년 4월 5일 월요일

연수일기 42. 그랜드 써클 여행- 세도나, 플래그스태프

4월 3일 토요일. 70일째 날. 오늘부터 아이들 학교는 부활절 방학이다. 그랜드 써클 여행을 시작하는 날이다. 그랜드 써클은 애리조나, 유타, 뉴멕시코와 콜로라도, 이렇게 네 개의 주에 걸쳐 있지만 이 중 절반 정도의 루트만 계획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직접 운전을 해 일주일 만에 다 둘러보긴 어렵기도 하고, 아무리 멋진 풍경이라도 아이들 입장에선 다 좋지도 않을 것이다. 직접 들어가는 건 그랜드, 브라이스, 지온 캐년으로 하고 나머지 일정 중에 세도나와 라스베이거스, 팜스프링스를 추가했다. 

아침 6시에 집에서 출발해 다섯 시간을 달려 피닉스에 도착했다. 인앤아웃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위도는 비슷한데 샌디에고보다 기온이 훨씬 높아 햇살 아래 앉아있기가 어려울 정도다. 점심을 먹고 다시 두 시간을 더 달려 Bell Rock에 도착했다. 세도나가 가까워지면서 산과 바위들은 모두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주립공원 이름도 Red rock state park이다. 세도나는 인구 1만명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매년 5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철분 함량이 높아 붉은 색을 띤 사암에서 전자기파가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전 세계에서 기가 가장 센 곳으로 손꼽힌다. 이곳에서는 볼텍스라고 부르는 이 에너지를 받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운동 선수나 유명인들도 많다고 한다. 지친 심신을 치료하는 데 전자기파가 실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누구든 이곳의 독특한 풍경은 마음에 들어할 것 같다. 

다음 목적지는 세도나에서 꼭 들러야 할 명소 중 하나라고 하는 성십자예배당 Chapel of the Holy Cross이었다. 붉은 바위 산 위에 세워진 예배당으로, 기껏해야 오십여명 정도가 예배를 드릴 수 있을만큼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니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예배당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전면의 유리 벽을 배경으로 한 커다란 십자가와 예수상이 소박하고 작은 공간을 넘치게 채우고 있었다. 잠시만 바라보았음에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시내로 내려와 Rowe Fine Art Gallery에 들렀다.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갤러리가 모인 곳이다. 세도나는 영적인 분위기와 치유력을 믿는 예술가들이 모인 곳으로도 유명하다. 거리 곳곳에서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고, 이러한 작품들이 풍경과 어우러져 이 도시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갤러리를 나와 저녁을 먹었다. 비빔밥과 불고기덮밥, 두 가지 메뉴만 파는 푸드트럭이었다. 푸드트럭 치고 가격이 비싼 편이었지만 양도 많고 맛도 괜찮아 아이들이 잘 먹었다. 식사 후 세도나 공항으로 향했다. 해가 지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항 주차장 앞에 있는 뷰포인트 Sedona Airport Scenic Lookout 에서 일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주차장 입구에서 3달러를 받았다. 일몰을 볼 수 있는 공터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공터 옆의 언덕에서 해가 지는 풍경을 보았다. 붉은 암벽 산에 둘러싸인 세도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첫날 숙소는 세도나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콘빌이란 마을의 농장이다. 숙소에 가는 길에 홀푸드 마켓에서 저녁거리와 맥주를 샀다. 저녁 여덟 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했다. 호스트 내외분의 인사가 따뜻하다. 오늘은 500마일을 운전했다. 

4월 4일 일요일. 71일째 날.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과 농장의 소들을 구경하고 건초를 먹였다. 별채 형식의 독립된 숙소라 편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위한 간단한 체험을 할 수 있어 더 좋았다. 어제 사온 과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주유를 한 뒤 세도나로 출발했다. 오전에 세도나 시내를 좀더 보기로 했다.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샵 등이 늘어선 거리는 모든 건물과 길이 붉은색으로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조성되어 있어서 거리를 걷기만 해도 눈이 즐거웠다. 기념품을 사고, 탁트인 전망의 카페에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작은 광장에서 동물들을 만지는 체험을 했다. 뱀, 커다란 도마뱀, 토끼, 햄스터 등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시달리는 동물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마냥 좋아했다. 아이들에겐 이곳 풍경보다 동물들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동물들과 더 놀지 못해 아쉬워하는 딸아이를 달래 플래그스태프로 출발했다. 플래그스태프로 가는 89A번 도로는 오크강을 따라간다. 계곡을 따라 중간중간 피크닉을 할 수 있는 장소가 꽤 있었다. 피크닉 준비를 하진 않았지만, 그중 한 군데에 멈춰 계곡에 내려가 보았다. 테이블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 로드트립을 하기 전에 야외에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캠핑 장비들을 사두면 좋을 것 같다. 플래그스태프에 가까워지면서 높은 고도 때문인지 길가 곳곳에 쌓여있는 눈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눈을 본 아이들이 신나해서 잠시 차를 멈추고 아이들과 눈을 밟으며 놀았다. 

플래그스태프에 도착해 Oregano's에서 피자와 스파게티, 샐러드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비지터 센터에 들러 기념품을 산 뒤 윌리엄스 Williams 로 향했다. 30분 정도 거리로, 루트66을 타고 갈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를 잇는 루트66은 현재는 그저 작은 도로이지만 처음 만들어진 대륙 횡단 고속도로라는 역사적 의미 때문에 일부러 찾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1920년대에 정식 고속도로가 되었으니 겨우 백 년이 된 도로이지만, 개척 시대의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는 역사적 의미를 붙이고 보존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미를 알리 없는 아이들은 뭐하러 또 차를 타고 가냐고 아우성이다. 윌리엄스의 메인 거리는 오래된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법한 전형적인 미국 소도시의 모습이었다. 


윌리엄스 거리를 구경하고 해가 지기 전에 플래그스태프 숙소로 돌아왔다. 플래그스태프는 노던아리조나 대학도 있는 도시이지만 그랜드캐년 여행자를 위한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것 외에 특별히 볼만한 건 없었다. 근처의 Bashas에서 간단히 장을 보았다. 오늘은 120마일을 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