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금요일. 83일째 날.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 곧바로 출발했다. 이번 여행 숙소인 안자보레고의 RV 파크까지는 80마일,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짧은 주말 여행이지만 그랜드캐년에 다녀온지 일주일도 안되어 여행을 또 가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주부터는 사막의 날씨가 너무 더워지고 선인장 꽃들도 져버릴 것 같았다. 일주일 뒤면 달이 밝을 때라 밤에 별을 보기 어렵다는 것도 이유였다.
78번 도로를 따라 줄리안 마을까지 가는 길은 이전에도 한번 왔었지만 그땐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많이 끼었었다. 이번엔 날씨가 화창해 느낌이 전혀 달랐다. 산맥을 넘어가야 해 고도가 높고 꼬불꼬불한 길이지만 흐린 날씨에 보이지 않았던 주변 풍경이 좋아 운전이 즐겁다. 줄리안을 지나니 초록색 가득했던 풍경이 황량한 사막 지형으로 거짓말처럼 바뀐다.
팜 스프링스 남쪽에서 시작하여 멕시코 근처까지 뻗어있는 안자보레고 사막은 대부분 샌디에고 카운티에 속하지만 리버사이드, 임페리얼 카운티에도 일부 포함이 된다. 안자보레고 사막 주립공원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주립공원이라고 한다. 워낙 넓은 지역이라 하루 이틀에 모든 곳을 다 보기는 어렵다. 숙소가 있는 오코틸로 웰스로 가는 길에 캑투스 루프 트레일 Cactus Loop Trail에 들렀다. 키가 큰 오코틸로 ocotillo를 포함한 다양한 선인장 사이로 걸을 수 있는 짧은 트레일이다. 이곳 사막의 선인장 꽃은 초봄에 피는데, 이전 해의 강수량과 날씨에 따라 꽃이 피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올해는 개화의 정도가 적은 편이라 하니 꽃이 많을 때에는 더 걷기 좋았을 것 같다.
꽃이 핀 오코틸로 |
5시 반 쯤 Leapin' Lizard RV Ranch에 도착했다. 휴대폰 전파가 안 잡히고 와이파이도 안되는 곳이다. Dennis와 Lucy란 이름의 대여용 RV를 운영하고 있어서 RV가 없어도 숙박이 가능하다. 우리는 4인용 RV를 예약했다. 1956년에 만들어진 RV라 내부의 집기들은 낡았지만 침실과 욕실, 주방까지 모두 깔끔했고, 세탁된 수건과 린넨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차량 앞에 피크닉 테이블과 바베큐 그릴, 가스를 사용하는 파이어링이 설치되어 있어서 캠핑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제 코스트코에서 사서 준비해둔 소고기를 구워먹었다. 트레일러 안에서 아이들과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4월 17일 토요일. 84일째 날. 느지막히 일어나 라면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처음 갈 곳은 숙소에서 1시간 거리의 샌드힐 지역 Hugh T. Osborne Park 이다. 사막이라 해도 제대로 된 샌드힐을 보긴 어려운데, 이곳은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 모래로 가득했다. 데스밸리의 샌드힐은 물론이고 작년에 갔었던 호주의 포트스테판보다도 훨씬 넓어보였다. 썰매가 있다면 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래 바람이 심해 오래 있긴 어려웠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모래 사막 걷기 |
브롤리 시내의 작은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Slab city로 이동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군사 기지가 있던 지역으로, 군사 시설이 없어진 뒤 남은 건물터 주변에 트레일러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폐허와 같은 지역에 주류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Squatters’ Paradise', 'America's last free places'로 불린다고도 한다. 이 마을의 입구에선 모래 언덕에 페인트를 칠해 만든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Salvation mountain이라 불리는 이 작은 동산을 Leonard Knight라는 사람이 혼자서 30년간 만들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동산 곳곳에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노래한 글귀가 가득한데, 다양한 종교의 교리를 찾던 그가 결국 'God is Love'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고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과 색칠을 좋아하는 딸아이가 특히 마음에 들어해 이곳에 한동안 머물렀다.
Salvation Mountain |
East Jesus도 들러볼만 한 곳이었다. 설치 예술 작품이 가득한 일종의 갤러리인데, 작품들이 하나같이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다. 이곳은 아들이 마음에 들어했고, 딸아이는 분위기가 무서웠는지 구경하는 내내 빨리 나가자고 손을 잡아 끌었다. 도서관에도 들렀다. 폐허와 같은 마을에도 도서관이 있다는 게 이채로웠다. 입구에는 닭장이 있었고, 헌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 안에선 주인 여자와 이웃 몇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벌거벗은 인형과 팔다리로 장식한 자동차 |
마을을 나와 봄베이 비치로 향했다. 솔턴호 Salton sea 의 북동쪽에 있는 비치이다. 일몰을 보기에 좋다는 이야기만 듣고 간 곳이었다. 호수 기슭에 '비치'란 이름을 붙인 게 이상했는데, 애초에 호수 이름에 Sea가 붙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에 걸맞게 이 호수의 물은 태평양 바닷물보다 염도가 높다고 했다. 낭만적인 이름과는 달리 비치의 풍경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의 마을에는 빈 것으로 보이는 집들이 듬성듬성 있었고,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에 가까이 다가가자 썩은 시궁창 냄새가 풍겨왔다. 이곳에 50여 년 전까진 리조트가 있었고, 유명인들을 비롯해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이 휴가를 즐기러 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주변의 농장에서 유입된 폐수로 인해 솔턴호의 오염이 심각한 상태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호수의 물이 줄어들고 바닥의 오염물질이 드러나면서 발생한 미세먼지가 주변 도시의 건강을 위협하는 등 문제가 커지자 캘리포니아 주에서 호수를 살리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봄베이 해변의 예술 작품들 |
돌아오는 길에 국경수비대의 검문을 받았다. 멕시코 국경과는 꽤 거리가 있지만, 안자보레고 사막이 워낙 넓고 멕시코까지 걸쳐있다 보니 이 길까지 밀입국을 막기 위한 검문소를 설치한 것 같다. 캘리포니아 운전 면허증을 제시하고 바로 통과할 수 있었는데, 샌디에고 외곽으로 나갈 때는 면허증이나 여권 또는 비자 관련 서류는 항상 준비해두는 것이 좋겠다. 브롤리 시내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 도착하니 여섯시가 넘었다. 오늘 BBQ 메뉴는 돼지 목살. 마트에서 사온 소시지를 함께 구웠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풀에서 수영을 했다. 풀장엔 우리 가족 뿐이었는데, 널찍한 공간에 메인풀 외 온수풀까지 있었고 샤워장도 깨끗했다. 웬만한 호텔 수준은 될 것 같다. 렌탈 RV를 보고도 느꼈지만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영을 하고 돌아와 아이들은 파이어링 모닥불에 마시멜로를 구워먹었다. 어제 많이 불던 바람이 오늘 밤엔 잠잠해져서 바깥에 휴대용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화를 보았다.
4월 18일 일요일. 85일째 날. 슬롯캐년 트레일을 걸었다. 숙소에서 78번 도로를 타고 30분 정도 서쪽으로 되돌아오면 슬롯캐년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비포장길을 만날 수 있다. 예상보다 규모가 큰 협곡이었다. 좁은 바위 틈 사이에서 몸을 비틀어가며 걷는 길이 재미가 있는지 아이들도 즐거워하며 걷는다. 지난 주에 안탈로프캐년에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좁은 협곡을 걷는 재미가 있다. |
보레고 스프링스에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는 길에 줄리안 근처에 있는 Dudley’s Bakery에서 빵을 샀다. 1963년에 문을 연 이 빵집은 샌디에고 인근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빵은 맛있었지만 가격이 꽤나 비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