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8일 토요일

연수일기 181. 플로리다 여행: 플로리다 키

1월 7일 금요일. 349일째 날. 오늘은 종일 플로리다 키에서 머물 예정이다. 숙소 근처의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로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다. 샌디에고의 패스트푸드점 직원 중엔 멕시코인이 많다. 패스트푸드 브랜드에 따라 차이는 있는데 인앤아웃이나 스타벅스엔 백인도 제법 있지만 판다 익스프레스나 서브웨이엔 멕시코인이 대부분이다. 이곳 마이애미와 남부 플로리다의 패스트푸드점 직원은 브랜드에 상관 없이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해 주변 국가 출신 사람들과 흑인들이 대부분으로 보인다. 

키 라르고로 가는 길에 아이들과 놀 만한 비치를 찾았는데 근처의 파운더스 파크 비치 Founders Park Beach가 적당해 보였다. 야구장과 축구를 할 수 있는 잔디 운동장, 수영장, 테니스장, 야외 공연장이 있는 꽤 큰 공원이다. 캘리포니아의 공원과 비슷한 시설이지만 캘리포니아엔 스케이트 보드장과 펌프 트랙이, 이곳엔 물놀이 해변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이슬라모라다 섬에 투숙을 하면 공원의 차량 입장료는 면제이다. 해변 피크닉 테이블에 짐을 펼치고 아이들과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곳 해변 역시 물이 맑고 얕아 물놀이 하기에 적당했다. 한 시간쯤 놀다 물 밖으로 나와 샌드위치를 먹고 욘 페네캠프 코랄 리프 주립 공원으로 출발했다. 

파운더스 파크 비치

이곳 공원에서는 카약과 카누, 보트 투어, 배 낚시, 스쿠버 다이빙, 스노클링 등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미리 스노클링 투어를 예약해두었다. 필요한 장비는 이곳 렌탈 샵에서 모두 빌릴 수 있다.  미리 준비해 간 아이들의 wetsuite 외에 다른 장비를 빌렸다. 코로나 때문인지 튜브의 경우엔 렌탈은 어렵고 구입을 해야 한다. 배를 타고 삼십 분 가량 바다로 나가면 스노클링을 하기 좋은 산호 군락 Grecian Rocks 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한시간 반 동안 스노클링을 한다. 

산호 군락 옆에 배를 세우자 사람들은 차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파도가 심하진 않지만 배가 서있는 곳은 좀 깊은 곳이라 수면이 제법 일렁거린다. 먼 바다 스노클링이 처음인 아이들은 잔뜩 긴장을 했다. 먼저 아들을 데리고 물에 들어갔다. 사실 나보다 아들이 수영을 훨씬 잘 한다. 처음엔 물결에 몸이 흔들리고 마스크와 튜브가 익숙치 않아 조금 당황해하는 것 같더니 이내 적응이 되었는지 표정이 편안해졌다. 반면 딸은 생각보다 물이 깊고 파도가 있어 겁이 덜컥 났나 보다. 한참을 망설이다 물에 들어왔는데, 튜브로 바닷물이 들어오니 겁이 더 났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아이를 다시 배로 올려 보냈다. 딸이 이런 스노클링을 하려면 조금 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물고기 관찰 중

산호 군락이 있는 곳은 깊이가 얕고 물결도 더 잔잔하다. 아들과 나란히 산호초 위를 헤엄쳤다.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 수많은 열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눈 앞을 지나다닌다. 작은 물고기들이 많지만 바라쿠다와 같은 제법 큰 물고기도 보였다. 배 가까운 깊은 곳을 지날 때 신기하게 생긴 큰 물고기를 보았다. 눈이 튀어나오고 입술이 두꺼운 놈이었는데, 그게 그루퍼라는 물고기란 걸 나중에 알았다. 나는 먼 바다 스노클링 경험이 한두 번 있지만 아들은 생전 처음이다. 새로운 물고기가 지나갈 때마다 손짓을 하며 오리발을 재게 놀린다. 그렇지 않아도 물고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다. 마스크와 튜브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없고 표정도 볼 수 없지만 아이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들은 한 시간 반 동안 줄곧 물에서 나오지 않았다. 배로 올라와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눈을 빛내며 수다를 떤다. 아빠, 그 물고기 봤어요?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배에서 눈으로만 오빠의 움직임을 쫓던 딸은 못내 아쉬운 눈치이다. 오늘이 아들에겐 최고의 하루가 되었으리라. 바다에서 아들과 함께한 한 시간 반 만으로도 이번 여행을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지 않았다. 

기슭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공원 안 해변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저녁은 근처 식당에서 생선과 새우 요리, 오징어 튀김 등을 먹었다. 관광지이지만 이곳 식당들은 전반적으로 맛이 괜찮고 가격도 (캘리포니아에 비해) 착하다. 

2022년 1월 7일 금요일

연수일기 180. 플로리다 여행: 키웨스트

1월 6일 목요일. 348일째 날. 오늘은 플로리다 키를 따라 키 웨스트까지 다녀오는 일정이다. 

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에 접어든다. 여기서부터 플로리다 남단에 길게 이어진 섬들을 연결해 주는 Overseas highway가 시작된다. 홈스테드(Homestead) 키웨스트(Key West) 잇는 128마일 도로로 미국 1 국도 가장 남쪽 구간이다

다리로 이어진 첫 번째 섬은 키 라르고. 이름처럼 이곳 섬들 중엔 큰 편이다. 내일 이 섬의 욘 페네캠프 주립 공원에 다시 올 예정이다. 몇 개의 섬과 다리를 지나친 뒤 Overseas heritage trail이라 이름 붙여진 길에 차를 잠시 세웠다. 다리의 오른쪽은 멕시코만, 왼쪽은 쿠바와 카리브해이다. 바다는 푸른색과 에메랄드색이 섞여 다채롭게 빛난다. 플로리다 키에는 지구 상에서 세 번째로 산호 군락이 많다고 한다. 물 아래 산호초의 분포에 따라 물 색깔이 달라진다.  

중간중간 섬엔 액티비티를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다양한 해양 스포츠 외에 물고기 먹이 주기 같은 소소한 것도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조금 특별한 액티비티를 찾는다면 마라톤 섬에 있는 투르틀 병원에 멈춰도 좋겠다. 이 병원의 환자는 사람이 아니라 거북이다. 일반인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시간 반 길이의 유료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오리엔테이션 형식의 짧은 강의와 치료 중인 거북이를 관찰하고 먹이를 주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침 시간이 맞아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기로 했다. 

1986년에 오픈한 이 병원은 지금까지 천오백마리 이상의 거북이를 치료하고 바다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강의를 들은 후 야외의 풀과 수조(병동과 병실에 해당한다)로 이동하는 길에 치료실과 수술실도 구경할 수 있었다. 갖추어진 장비가 사람 대상의 병원 못지 않았다. 야외 병동은 상태가 좋지 않은 거북이를 위한 개인 수조(중환자실과 1인실)와, 상태가 좋아진 거북이들이 좀더 자유로이 헤엄을 칠 수 있는 넓은 풀(일반 병동, 다인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풀에 있는 거북이들에겐 먹이를 줄 수 있었다. 

강의 듣는 중

먹이를 먹으러 모인 거북이들

이곳의 환자는 대개 플라스틱과 쓰레기를 먹고 장이 막히고 버린 밧줄에 걸려 부상을 입은 거북이들이다. 배의 프로펠러에 부딪히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등껍질에 손상을 받고 변형이 생긴 거북이도 많은데, 손상을 받은 부위가 부풀어올라 bubble butt syndrome이라 불리는 이 질환이 생기면 물 속으로 잠수를 할 수 없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fibropapilloma가 거북이에게 흔하고, 종종 수술로 제거해주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병원 홈페이지 링크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turtlehospital.org/sea-turtle-injuries/

병원을 나와 다시 다음 섬으로 출발했다. 섬을 이어주는 다리는 모두 42개나 되는데 중에서는 '세븐 마일 브릿지(Seven Mile Bridge)' 가장 유명하다. 오리지널 철교는 1912년에 완공되었다. 1982년에 새 다리 개통 후엔 보행자를 위한 길과 낚시터로 쓰인다고 한다. 현재는 보수 중으로 올드 브릿지를 걸어서 건널 수는 없다. (물론 7마일을 걸어 건너는 사람도 없겠지만) 다리의 끝 부분인 리틀 덕 키에 주차를 하고 콘크리트로 덮인 다리의 끝 부분을 잠시 걸었다. 건너편의 베테랑 기념 공원 Veterans memorial park으로 건너가니 한적한 작은 해변이 있었다. 나무로 된 피크닉 테이블 몇 개와 간이 화장실이 시설의 전부였지만 물이 맑고 얕으며 잔 모래가 깔려 아이들과 놀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해변을 원한다면 딱맞는 장소일 것이다. 물놀이도 가능했지만 오늘은 참기로. 바다에 발을 담그고 간식을 먹으며 여유를 즐겼다. 

천국같은 작은 해변

1시간 남짓 더 달리면 미국 최남단 섬인 키웨스트에 도착한다. 쿠바 음식을 파는 El Siboney restraurant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헤밍웨이 집으로 이동했다. 입장료는 성인 17불, 아이 7불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현금으로만 받는다. 유명한 관광지라 해도 남이 살던 집에 큰 흥미는 없었는데, 집안 곳곳에 남겨진 헤밍웨이의 흔적과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헤밍웨이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 역시 집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고양이를 좋아하는 딸은 집 안과 마당 곳곳을 돌아다니는 많은 고양이들 때문에 신이 났다. 아들에겐 헤밍웨이가 누군지와 그의 대표작이자 퓰리처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인물은 노인 한 명이며, 그 노인이 청새치를 잡는 이야기가 소설의 전부라고 하니 아들은 어떻게 그 이야기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냐고 한다. 한국에 돌아가면 책을 사주어야겠다. 

정원 구석의 고양이 cemetery

집과 정원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고양이와 놀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집에서 나와 가까운 Southernmost Point에 들렀다. 미국 최남단이란 상징성 때문에 언제 가든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선다는 곳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줄은 서지 않고 조형물을 배경으로 옆에서만 사진을 찍었다. 

오늘 숙소는 overseas highway 중간쯤에 있는 아일라모라다의 호텔이다. 여기까지만도 두 시간이 걸린다. 마이애미에서 키웨스트를 당일 치기로 다녀오는 이들이 많은데, 그렇게 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키웨스트 뿐 아니라 중간중간 섬들에 멋진 곳이 많다. 이곳 섬들이야 말로 남부 플로리다만의 여유와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끼기에 제격인 것 같다. 유명 관광지 한두군데만 보고 급히 육지로 돌아가는 것보단 식당, 바, 거리에서 플로리다 키만의 분위기에 잠시 취해보아도 좋지 않을까. 그래서 플로리다 키스 브루잉 맥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로 마무리. 바이브는 샌디에고보다 마이애미지만 맥주는 역시 샌디에고가 훨씬 낫다. 

2022년 1월 6일 목요일

연수일기 179. 플로리다 여행: 에버글레이즈 국립 공원- 보트 투어

1월 5일 수요일. 347일째 날. 오늘은 에버글레이즈 국립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정이다. 플로리다는 캘리포니아보다 세 시간이 빨라 아이들은 아직 아침에 잠을 깨기 힘들어한다. 숙소에서 체크 아웃을 하니 벌써 열 시가 넘었다. 근처 작은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었다. 에그 베네딕트와 오믈렛 맛이 괜찮았다. 

그제는 샤크 밸리 비지터 센터 쪽으로 들어가 공원의 북쪽을 구경했다. 오늘은 공원의 남쪽 길을 따라 끝까지 들어가는 코스이다. 마이애미 시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한 시간쯤 달리니 한적한 시골길이 나타난다. 처음 방문한 곳은 어니스트 F. 코 비지터 센터이다. 이곳은 국립 공원 게이트 바깥에 있어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방문할 수 있다. 에버글레이즈에서 방문했던 세 곳의 비지터 센터 중에서 가장 크고 내부 시설도 잘 되어 있다. 국립 공원의 특징에 대한 정보도 많은데, 첫날 샤크 밸리 투어 때 들었던, 엘리게이터와 크로커다일의 차이점도 정리되어 있었다. 비지터 센터 뒤엔 작은 연못이 있었다. 물이 맑아 안이 다 비쳐 보였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유유히 헤엄을 쳤다. 비지터 센터와 연결된 정자에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늘 일정을 헤아리며 부산했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Alligator vs. Crocodile

투어가 예약된 세 시 전까진 플라밍고 비지터 센터에 도착해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국립 공원에 왔다면 트레일은 필수. 공원 게이트에서 삼십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마호가니 해먹 트레일을 선택했다. 코스가 짧고 데크가 깔려 있어 아이들과 걷기에도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도 이십 분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다. 전체 트레일 코스를 도는 동안 다른 사람을 서너 번 마주쳤을까. 사람보다 새가 더 많은 곳이다. 늪지 사이로 이어진 데크 길 주변엔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특별함은 없지만, 소박함과 고요함이 좋았다. 이번 에버글레이즈는 미국에서 방문한 열한 번째 국립 공원이다. 그동안 방문했던 열 곳의 국립 공원은 모두가 제각각 개성이 있었다. 이곳 역시 그랜드 캐년의 장대함이나 옐로 스톤의 다채로움 같은 건 없지만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밀림 속을 걷는 듯한, 데크가 깔린 트레일

두시 반쯤 플라밍고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남쪽으론 차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의 끝에 있는 센터이다. 식당, 롯지, 캠프장이 있고 남쪽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긴 트레일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카누와 카약도 타기 좋은 곳이다. 우리는 오늘 보트 투어를 예약했다. 선착장에 딸린 작은 스토어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보트에 올랐다.

자그마한 보트는 생각보다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탑승객은 우리 가족 넷을 포함해 여섯 명. 선장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긴 갈색 곱슬머리를 나풀거리는 백인 청년이었다. 선착장을 출발한 보트는 수로를 따라 북쪽으로 천천히 전진했다. 좁은 수로에서 카약을 탄 이들이 가까이 올 때마다 선장은 속도를 줄여 물결이 낮아지도록 배려한다. 수로 양쪽엔 맹그로브 숲이 빽빽히 이어져 있고, 목이 기다란 새들이 나무 위를 옮겨다니며 물고기를 사냥한다. 

맹그로브 숲이 우거진 수로를 따라

이틀 전 트램 투어 가이드는 두 시간 내내 한시도 입을 쉬지 않고 설명을 했는데, 이 보트 투어 가이드는 무척 과묵한 편이라 투어 내내 침묵을 지켰다. 간간이 새들과 악어, 나무에 대해 짧은 설명을 해주었다. 맹그로브 나무가 자라는 습지는 민물 반, 바닷물 반인 곳이라 염분이 많다. 맹그로브는 염분이 많은 물에서도 잘 사는데 뿌리로 빨아들인 염분 대부분은 잎을 통해 배출한다고 한다. 그래서 잎 뒷면에 소금 결정이 맺힌 걸 볼 수도 있다고. 염분을 품은 오래된 잎은 노랗게 변색되어 떨어지고, 덕분에 남은 잎과 줄기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이런 잎들을 'sacrificial leaves'라고 한다.

수로를 지나 쿳 만, 다시 수로를 지나 화이트 워터 만으로 나가니 사방이 탁 트여 이곳이 호수인지 바다인지 헷갈린다. 습지와 바다가 섞인 곳이지만 이곳은 바다에 가까울 것이다. 카누들은 이곳까지 멀리 나오진 않는다. 장애물이 없는 곳에서 보트는 바다 위를 시원하게 달린다. 바람을 좋아하는 아들은 연신 싱글벙글.

저녁 식사는 플로리다 시티 숙소 근처의 타이 음식점. 지금까지 가본 어느 타이 음식점보다 맛이 형편없는 식당을 이곳에서 만났다. 호텔에 가기 전 플로리다 케이스 아울렛을 들렀다. 규모가 작고 상품도 빈약해 오래 머물지 않고 나왔다. 아이들 운동화라도 살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나이키 스토어의 운동화 종류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가짓수도 적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2022년 1월 5일 수요일

연수일기 178. 플로리다 여행: 마이애미

1월 4일 화요일. 346일째 날. 느지막이 일어나 컵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호텔을 나섰다. 마이애미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역시 해변 아닐까. 그래서 오전엔 사우스 비치와 아르데코 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이 구역의 명칭은 Art Deco Historic District이다. 1900년대 초반 서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으로 밝은 파스텔 톤의 색이 특징이다. 마이애미에는 800여 개의 아르데코 스타일 건물이 있는데 대부분 1920-40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노랑, 하늘, 분홍, 연두, 보라. 흰색을 배경으로 창틀이나 간판, 지붕 등에 쓰인 파스텔 색깔이 강렬한 한낮의 햇살과 어우러져 거리 전체를 밝게 만든다. 삼사 층 높이의 아담한 건물들은 대부분 레스토랑이나 호텔로, 하나하나는 평범하고 특색이 없어 보이지만 수십 개의 비슷한 건물이 모이니 개성 가득한 거리가 되었다. 아르데코 건물들과 사우스 비치 사잇길은 차가 다니지 않도록 해두어 자전거를 타거나 걸으며 햇살과 바닷바람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끝이 안보일 정도로 길게 이어진 백사장은 고운 모래로 되어 걷거나 일광욕을 즐기기에 좋았다. 유명 해수욕장에서 볼 수 있는 파라솔과 비치 의자들이 줄을 서 있었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모래사장에 철퍼덕 앉았다. 아이들은 금새 모래놀이를 시작. 캘리포니아 해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다른 건 바다 모습이었다. 파도는 얕고 색은 에메랄드 빛으로 투명하다. 서핑을 즐기긴 어렵겠지만 물놀이를 하기엔 훨씬 더 좋다. 제주의 김녕이나 금능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에메랄드 빛 바다

마이애미 로컬 커피숍인 Panther coffee의 아메리카노(커피숍이 있는 호텔 건물도 아르데코 스타일. 커피는 자연스레 아이스로 주문했다)를 홀짝이며 베이 프론트 공원으로 이동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공원 한켠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이 있었다. 미국인이 자랑스럽게 여겨온 탐험가이지만 원주민을 학살한 행위로 근래엔 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캘리포니아를 포함해 콜럼버스 데이를 공휴일에서 제외한 주도 있다. 그와 관련된 기념물을 없애려는 움직임도 많은데 이곳 베이프론트 공원의 동상도 올 여름 붉은 색 스프레이 칠을 당했다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마이애미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인 리버 워크가 시작된다. 고층 건물과 고급 레스토랑이 많아 보였다. 우리는 반대편인 베이사이드 마켓 플레이스를 향해 걸었다. 아이들과 점심을 먹기엔 더 적당할 것 같았다. 쇼핑몰엔 식당과 바가 모여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마이애미 바닷가에서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라니. 그래도 아이들 입맛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마이애미에선 세계 모든 대륙의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한끼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요트들이 정박한 부두를 바라보며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중, 아이들이 바닷물에서 흐느적거리는 동물을 발견했다. 처음엔 거북이인 줄 알았지만 아들이 찍은 동영상을 보니 전혀 다른 동물이었다. 군소와 비슷한 생김새인데 날개를 펄럭이며 우아하게, 물 속을 날듯이 헤엄쳤다.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구글 검색을 해보고 이 동물이 Aplysia fasciata라는 걸 알았다. 대서양 바다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윈우드 지역으로 이동했다. 벽화와 그래피티가 많기로 유명하고, 최근 마이애미에서 가장 힙한 동네라고 한다. 듣던 대로 관광객이 많았다. 하나같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사진들 일부는 인스타그램에 바로 올라갈 것이다. 그래피티 작품 전시 공간인 윈우드 월스는 오늘 문을 닫아서 들어가볼 수 없었지만, 전시장을 둘러싸고 두세 개 블럭이 그래피티로 가득해서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거리 예술이 주는 독특한 느낌을 흠씬 느낄 수 있었다. 

동네 벽화 클라스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는 리틀 하바나. 쿠바 출신 이민자들의 동네이다. 샌디에고에도 리틀 이태리가 있지만 나라 이름 앞에 리틀이란 단어를 붙여 만든 동네 치고 볼 만한 곳은 별로 없다. 대개 그 나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과 카페 몇 개를 모아놓은 것이 전부이며 그 나라 사람보단 관광객만 북적거리는 국적 불명의 공간이 되기 마련이다. 허나 이곳은 쿠바보다 더 쿠바같은 동네라고 하는데, 쿠바를 가서 직접 보고 비교할 수 없으니 그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곳에 쿠바와 그 주변 국가 출신의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긴 하다. 

작은 식당과 카페, 바, 극장이 늘어선 거리는 이국적인 느낌으로 가득하다. 중간중간 쿠바산 시가를 파는 가게도 있었다. 플로리다 헤리티지 표식이 있는 도미노 공원 안에선 사각 테이블에 마주 앉아 체스와 도미노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공원 바로 옆에 영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 멋스런 인테리어의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아이들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빈 테이블에 앉았을 것이다. 

Old's Havana Cuban Bar & Cocina

대신 가까운 커피숍에서 아내와 쿠바 커피를 한 잔씩 하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주인이 추천한 커피를, 아이들은 파인애플과 망고 주스를 선택했다. 처음 마셔본 쿠바식 커피는 쓰고 부드럽고 달았다. 믹스 커피보다 설탕이 더 많이 들어간 듯 입 안에 텁텁한 뒷맛이 많이 남아서 입맛에 썩 맞진 않았다. 아내는 나보다 약한 커피를 시켰는데도 밤에 잠을 못잘 것 같다며 절반을 남겼다. 카페인에 둔감한 나는 더블샷을 선택했는데 커피 자체가 보통의 에스프레소보다 더 진한 것 같았다.(아니나다를까, 결국 이날 밤 생전 처음으로 커피로 인한 불면을 경험했다.)

저녁으론 쿠바 식당인 El Mago De Las Fritas에서 Frita를 사서 호텔로 들어가기로 했다. 쿠바식 햄버거로 패티와 함께 잘게 채를 썬 감자튀김이 들어간 게 특징적이다. 아주 작고 소박한 가게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좋아했던 맛집이라고 하는데, 식당 벽에 그와 식당 주인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2022년 1월 4일 화요일

연수일기 177. 플로리다 여행: 에버글레이즈 국립 공원- 샤크 밸리 트램 투어

1월 3일 월요일. 345일째 날. 밤 10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네시간 반 만에 마이애미 포트로더데일 공항에 도착했다. 캘리포니아 시간으론 한밤중인 2시 반, 플로리다 시간으론 5시 반이다. 깜박잠을 두시간이나 잤을까?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렌트카를 받아 공항을 나서서 호텔로 가는 동안 동이 텄다. 올해 들어 새벽에 뜨는 해를 처음 보는 순간이 마이애미의 도로 한가운데가 될 줄은 몰랐다. 

얼리 체크인 옵션이 있는 호텔을 골랐지만 당일 상황이 안되면 어쩌나 걱정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데다 새벽에 도착해 아이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어제 밤 공항에서 출발 전에 호텔에 문의했고 아침에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답을 들었다. 전날 확인한 게 다행이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체크인이 안된다고 했지만 어제 미리 확인을 한 덕분인지 예약자 이름 확인 후엔 가능하다고 했다. 졸음으로 멍한 상태였기에 데스크 직원의 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짐을 풀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세 시간을 죽은듯이 잤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뒤 아이들도 힘들게 깨워 호텔을 나섰다. 가까운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에버글레이즈 국립 공원으로 향했다. 

예약한 샤크밸리 트램 투어는 오후 두시였다. 이십 분 전에 국립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샤크밸리 비지터 센터는 입구 바로 안쪽에 있다. 그런데 비지터 센터 주차장이 만차라 입구의 차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곳 비지터 센터엔 주차 슬롯이 많지 않았다. 차례를 기다리다간 투어 시작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차를 돌려 공원으로 들어오기 전 큰길까지 나가 길 옆 풀숲에 차를 세웠다. 게이트에서 비지터 센터까지 거리가 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비지터 센터까지 뛰다시피 해 투어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립 공원 게이트를 걸어서 통과하는 색다른 경험도 하게 되었다. 

게이트를 걸어 나오면서 사진도 여유 있게 찍었다.

가이드의 사전 설명 후 트램에 올랐다. 샤크밸리 트램 투어는 국립 공원의 관광 프로그램이다. 그래서인지 투어는 길을 따라 전망탑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조금은 심심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서행하는 트램 버스에서 주변의 풍경과 동물(주로 새와 악어)들을 볼 뿐이다. 그래도 국립 공원의 역사와 동물들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Heron과 egret, stork, 그리고 앨리게이터와 크로커다일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되었다. 전망탑에선 이 구역에 딱 한 마리 있다는 크로커다일도 만날 수 있었다. 

투어 전 가이드 설명

두 시간의 투어가 끝나고 비지터 센터에서 스탬프를 찍고 공원을 나왔다. 트램 앞자리의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앨리게이터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라 알려준 오아시스 비지터 센터에 들러보기로 했다. 비지터 센터는 문을 닫을 시간이었지만, 들었던 것처럼 센터 앞 수로에서 악어들을 볼 수 있었다. 야생 악어를 본 것도, 이렇게 많은 악어들을 한 자리에서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악어가 가득한 수로

오늘은 트램 투어 외에 다른 일정이 없었음에도 돌아갈 때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아이들도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간단히 장을 보고 판다 익스프레스에서 저녁을 사 호텔로 돌아왔다. 

2022년 1월 3일 월요일

연수일기 176. 플로리다 여행: 출발

1월 2일 일요일. 344일째 날. 며칠 동안 집에 머물렀던 손님들은 아침 일찍 세도나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도 오늘 마이애미행 비행기를 탄다. 그동안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하는 여행에선 LA 공항을 이용했지만 이번엔 샌디에고 공항에서 출발하는 일정이다. 최근 covid-19 환자 폭증으로 인한 승무원 부족과 악천후로 취소되는 항공편이 많다고 해 조금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예약한 항공편은 제시간에 출발하는 걸 확인했다. 

오늘 공항까지는 우버를 이용해 가기로 했다. 공항 주차장의 요금은 하루 30불이 넘는다. LA 까지라면 우버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샌디에고 공항이라면 50불 정도에 갈 수 있다. 저녁 비행기라 드라이버를 연결하는 데에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저녁 비행기이고 공항까진 20분이면 갈 수 있으므로 천천히 짐을 싸고 집에서 쉬다 출발할 수 있었다. 샌디에고에 살지만 공항 터미널은 처음이다. 터미널 규모는 아주 작았다. 그래도 LA 공항보다 깔끔하고 번잡스러움도 덜했다. 

미국 전역에 걸쳐 코로나 환자가 폭증했고, 그중에서도 플로리다는 상황이 안좋은 편이라 떠나기 전까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고 최대한 조심해가며 여행하려고 한다. 샌디에고 시간으로 한밤중에 도착하는 일정이라 아이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았는데 다행히 내일 묵을 호텔에서 아침에 얼리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전엔 호텔에서 잠을 좀더 자고 점심 이후에 일정을 시작하려 한다.

2022년 1월 2일 일요일

연수일기 175. 연말 그리고 새해

12월 29일 수요일. 340일째 날. 한국으로부터 긴 비행 후 어제 유니버셜 스튜디오까지 다녀온 Y의 가족은 늦잠을 잤다.

라호야 코브의 더 메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라 발렌시아 호텔 레스토랑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뷰가 좋은 곳이다. 월요일부터 내내 날씨가 흐리고 간간이 비도 흩뿌려서 테라스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식사 후 부머 비치에서 물개와 바다사자를 보았다. 몇 번을 와서 봐도 신기하고 재밌는 광경인데, 오늘은 특히 물개와 바다사자가 많았다. 대충 헤아려도 이백 마리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서울에서 온 아이들은 신이 나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Y 딸의 아이폰을 사러 베스트바이에 들렀다가 언락 폰을 팔지 않는다고 해 허탕을 쳤다. 올 초에 아들의 언락 아이폰은 베스트바이 매장에서 샀는데 그사이 상황이 바뀌었나 보다. 결국 UTC 몰의 애플스토어에서 구입했다. 

해외 입국자에 대한 자가격리 면제 제외가 몇 주 전 전체 국가로 확대되었었는데, 이후로 4주를 더 연장하는 방침이 오늘 발표되었다. 2월 3일 입국자까지 해당되며, 백신 접종 여부와 상관없이 열흘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2월 1일 한국에 도착하는 우리 가족도 꼼짝없이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다. 귀국 후 계획을 다 바꿔야할 것 같다.


12월 30일 목요일. 341일째 날. 오전엔 Y의 가족과 씨월드를 방문했다. 두 번째임에도 돌고래, 오르카, 바다사자 쇼는 신기하고 재미있다. 

오후엔 다운타운의 투나 하버 공원에서 키스 동상을 보고 씨포트 빌리지까지 걸었다. 오늘도 날씨가 썩 좋지 않았지만 해질 무렵이 되자 하늘이 예쁘게 물들었다. 캘리포니아 바다의 낙조를 처음 본 Y의 가족들은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저녁엔 집에서 바베큐. 바베큐장에서 고기를 굽는 것도 실력이 나날이 느는데, 그래서 가장 맛있는 고기는 항상 오늘 구운 고기이다. 코스트코 소고기와 와인을 곁들인 근사한 저녁 후 아이들은 수영장으로 직행했다. 어제 저녁에도 수영장에서 한참을 놀았는데, 아이들은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매일 수영장에 갈 기세이다. 항상 따끈하게 몸을 뎁힐 수 있는 자쿠지가 있어 쌀쌀한 날씨에도 수영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12월 31일 금요일. 342일째 날. 아침을 먹고 Y 부부와 버드락 카페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파랗게 개인 하늘이 좋았다.

오후엔 인앤아웃에서 점심을 먹고 샌디에고 주 사파리를 방문. 애뉴얼 패스 혜택인 50퍼센트 할인 티켓 네 장을 Y의 가족을 위해 알뜰하게 썼다. 지난 3월에 가보지 못한 사파리 구역부터 보기로 했다. 아프리카 트램을 타고 사파리 구역을 한 바퀴 돌게 된다. 생각보다 면적이 넓었다. 하지만 쌀쌀한 날씨 탓인지 아프리카 초원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다른 동물원 구역에도 동물을 많이 볼 수 없었다. 딸은 지난 번에 보지 못했던 오리너구리를 보고싶어 했는데, 이번엔 안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오리너구리가 굴 속에 숨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한국은 벌써 새해가 되었다. 가족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보내고 영상 통화를 했다. 감사를 드려야 할 지인들에게도 인사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오늘을 위해 아껴두었던 샴페인을 꺼냈다. 올해가 시작될 때는 한해를 온전히 바이러스와 함께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모두가 아직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올해의 마지막 날을 아끼는 사람들과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1월 1일 토요일. 343일째 날. 샌디에고에도 솔레다드 산과 같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지만,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 정도로 새해 첫 해에 의미를 두진 않는다. 그래도 산과 바다를 보기에 새해 첫 날만큼 어울리는 날이 또 있을까.

오전 느지막히 토리 파인즈 트레일을 찾았다. 연초에 오고 십개월만이다. 샌디에고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 코스가 아닐까. 아내가 샌디에고를 떠나기 전 꼭 한 번 다시 와보고 싶어했는데 그럴 수 있어 다행이다. 산보다는 언덕에 가깝지만, 주말에 새해 첫 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해 걷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비치 트레일을 따라 해변의 플랫락까지 내려와  바위에 올랐다. 지난 번에 왔을 땐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막혀있어 트레일 코스로 돌아가야 했었다. 이번엔 해변을 따라 주차장까지 걸었다. 

이곳은 샌디에고의 많은 해변 중 맨 처음으로 왔던 곳이다. 도착 후 나흘째였다. 몽돌 해변에 쓸리는 파도 소리와 선선한 바닷 바람이 첫 며칠 동안 지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파도 소리와 바람은 그대로이다. 모래 위에 군데군데 조약돌로 만든, 새해를 뜻하는 숫자 2022가 보였다. 우리 가족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올해는 모두가 조금 더 평안을 느낄 수 있길.

델 마르 플라자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Y 부부의 렌트카를 받기 위해 공항 렌트카 센터에 다녀왔다. 새해 첫 날 휴일이라 그런지 공항 외의 렌트카 사무실은 운영을 하지 않는다. 

내일 Y 가족은 세도나를 거쳐 그랜드 캐년으로, 우리는 마이애미로 여행을 떠난다.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지만 오늘은 여행을 앞두고 조금 일찍  자리를 정리했다. 

2021년 12월 29일 수요일

연수일기 174. LA: 더 게티

12월 28일 화요일. 339일째 날. 호텔 근처의 Porto's Bakery and Cafe에서 아침을 먹었다. 쿠바 출신의 제빵사가 운영하는 베이커리 체인으로 LA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판다고 알려진 곳이다. 아침인데도 빵집 안엔 손님으로 가득했고 계산대 앞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침거리와 함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치즈롤 두 박스를 샀다. 

얼마 전 LA로 연수를 온 아내의 후배 집을 방문했다. 아내가 결혼 전 함께 미국 의사 시험 공부를 했던 후배로 신혼 초에 우리 집에 한 번 온 적이 있다. 십 몇 년 만에 오랜 친구를 만난 아내는 옛 추억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살림이 갖춰지지 않은 집을 보니 올해 초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났다. 우리가 출국하기 전에 샌디에고에 오라고 초대를 했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다. 

산타모니카 피어를 잠깐 구경하고 게티 뮤지엄으로 이동했다. 정식 이름은 더 게티 The Getty. LA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손꼽히지만 어쩌다 보니 이제야 와보게 되었다. 지난 여름에 갔던 게티 빌라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이곳도 기대가 되었다. 입구에서 트램을 타고 언덕을 올라가 메인 건물에 도착했다. 미국의 유명 미술관은 건물과 외관 자체가 예술품인 경우가 많은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름다웠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리차드 마이어가 설계한 건물은 중후하면서도 주변의 공간과 어우러져 기하학적 미학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고흐와 뭉크, 르노아르,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의 작품이 있었지만 소장한 미술품이 다소 빈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건물과 공간이 주는 압도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뉘엿뉘엿 저무는 햇볕을 받아 건물의 외벽이 우아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리차드 마이어는 건물의 내외부를 흰색으로 마감하는 것을 선호해서 백색의 건축가로 불린다. 게티 센터 건물 외벽은 순수한 백색은 아니지만 역시 백색에 가까운 밝은 아이보리 색이다. 백색 외벽은 자연광의 밝기에 따라 매번 달라보이는데, 실제 해가 지는 시간에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왜 그가 백색을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주변이 온통 노을빛에 휩싸인 공간의 압도적인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몇 년 전 미투 운동이 활발했을 때 과거 80년대에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여성들의 폭로가 있었고, 이후 그는 실제 설계 업무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넘어 고결함까지 느껴지는 예술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의 성품은 재능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긴 그런 유명인이 한둘이던가.

유니버셜 스튜디오 앞에서 오랜 이웃인 Y 가족을 만났다. 교환 학생으로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다 귀국을 앞둔 딸을 만나러 왔다가 샌디에고에서 며칠 머물 예정이다. 우리가 한국을 떠날 때 공항까지 배웅을 해준 고마운 이들이다. 1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아이들 모두가 그동안 부쩍 자랐다.

2021년 12월 28일 화요일

연수일기 173. LA: 웨이퍼러스 채플,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투어

12월 27일 월요일. 338일째 날. LA를 거쳐 샌디에고에 올 지인을 마중하러 LA에 다녀오기로 했다. 오늘과 내일 LA에 머물면서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둘러보려 한다. 

아침에 백신 카드를 잊고 나와 다시 집에 돌아갔다 오는 바람에 웨이퍼러스 채플에 도착했을 땐 오전 열 시가 되었다. 웨이퍼러스 채플은 LA 남쪽의 부촌인 랜초 팔로스 베르드, 그곳에서도 아바론 비치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있다. 백 명도 수용하기 어려운 작은 채플을 굳이 찾아가 볼 것까지 있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채플을 설계한 건축가가 로이드 라이트 주니어(구겐하임 미술관과 낙수장을 설계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아들)이며 이 건물이 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로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예배당 내부

제단이 있는 전면부를 비롯해 천정과 벽면 대부분이 유리로 된 건물 안에 서면 탄성을 내뱉게 된다. 특별한 결혼식을 치르고 싶은 커플에게 예식 장소로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직접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은 아마 그 기억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도 여러 차례 쓰였다고 한다. 

예배당 건물 앞의 아담한 정원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정원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 같다. 건물, 정원, 그리고 주변 풍경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로이드 라이트는 특정한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주변의 자연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설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스타일은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채플이 위치한 도로인 Palos Verdes Drive South 길은 LA에서 드라이브를 즐기기 가장 좋은 코스일 것이다. LA 도심의 칙칙한 분위기와 전혀 다른, 캘리포니아 만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근처의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었다. 평범한 동네 몰이지만 바다를 보며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다. 이웃한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경치를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아마 전 세계 서브웨이와 스타벅스 지점 중 경치로는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점심을 먹고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투어를 위해 노스 할리우드로 이동했다. 스튜디오에 도착할 때쯤 오전에 맑았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끼더니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투어 중에 실외 세트를 볼 때는 차량을 타고 이동하므로 비가 와도 큰 문제는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미국 마을 거리와 뉴욕의 몇 번가를 지났다. 뉴욕 거리를 재현한 곳은 실제 스파이더 맨의 물구나무 키스 씬을 찍었던 뒷골목도 있다. 

엘렌 쇼, 올 아메리칸, 프렌즈와 빅뱅 이론 세트장 내부를 구경했다. 프렌즈와 빅뱅 이론 세트장에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우리도 프렌즈 소파에 앉아 포즈를 취해 보았다. 프렌즈의 Central Perk는 투어 중간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실제 카페로 쓰인다. 영화 제작 과정과 기법을 설명하는 코너에선 특수 효과와 사운드를 입히는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서 볼 수 있는 원근법을 이용한 거인과 꼬마가 식탁에 마주 앉은 장면도 재현해보았다. 

프렌즈 오프닝 음악이 들릴 듯한 곳

투어의 마지막은 해리 포터와 히어로를 테마로 꾸민 곳이다. 해리 포터 구역에선 마법 물약을 만들고 호그와트 초대장을 받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 호그와트에서 반 배정을 받는 체험도 한다. 말하는 모자 아래 앉으면 모자가 반을 알려주는데, 우리 가족은 모두가 다른 반이 나왔다. 

코리아 타운에서 감자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원래 계획은 그리피스 천문대에 들러 야경을 보는 것이었는데, 저녁까지 줄곧 비가 내려 그냥 호텔로 일찍 돌아가려 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멈춰 잠깐 천문대에 들러보기로 했다. 비가 오고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사람이 적었다. LA 도심을 바라보는 야경은 아름다웠다. 그동안 LA에 올 때마다 천사들의 도시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날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무수히 많은 불빛들을 보며 처음으로 그 이름이 어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야경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얼마 전 뉴욕 맨해튼의 야경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에 젖은 그리피스 천문대

2021년 12월 27일 월요일

연수일기 172.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

12월 23일 목요일. 334일째 날. 아이들은 올해 마지막 등교 날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모두 단축 수업을 해 12시 30분에 하교했다. 딸은 선생님에게 드릴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갔다. 학교에서 나올 땐 선생님께 받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네 달 동안 받았던 딸의 미술 수업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애초엔 수업을 받으며 미술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기회가 늘 거라고 기대했지만 실제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조용히 스케치만 했다. 그래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은 수업에 가는 걸 좋아했다. 한 시간 반 동안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쉽지는 않을텐데. 딸은 한국에 돌아가서도 미술 수업을 계속 받고 싶다고 한다. 

저녁엔 후배인 S 선생 집에서 포트럭 파티를 했다. 다섯 가족이 모여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S 선생의 아내는 요리를 잘 하고 손도 크다. 성격이 활달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걸 즐겨서 덕분에 그동안 우리도 즐거운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있었다.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따로 시간을 내어 우리 딸과 시간을 보내주었는데, 그것도 벌써 세 달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작은 기프트 카드를 준비했다. 


12월 24일 금요일. 335일째 날. 크리스마스 이브엔 항상 가까운 친구 가족들과 함께 모여 시간을 보냈었다. 올해는 이곳에 떨어져 있어 늘 보던 이들을 만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여럿이 모여야 제맛. 이곳에서 오늘같은 날을 조용히 보낸다면 좀 우울해질 것 같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아파트 이웃들을 집에 초대해 포트럭 파티를 하기로 했다. 오후엔 초대한 아이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포장하고 김밥을 준비했다. 나도 아이들 도시락으로 종종 싸주는 스팸 무스비를 만들었다. 

Y 선생님은 어묵꼬치를, L 선생님은 아스파라거스 베이컨 말이를, 다른 L 선생님은 직접 튀긴 치킨을 가져오셨다. 각자 가져온 와인과 맥주까지 곁들이니 넘치도록 풍성한 크리스마스 파티 식탁이 차려졌다. 웃고 떠들다 보니 자정이 훌쩍 넘어버렸다. 이곳에서 좋은 이웃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12월 25일 토요일. 336일째 날. 느지막히 일어나 아이들은 산타의 선물을 개봉했다. 크리스마스인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서 영화를 보며 빈둥거릴 예정. 요즘 아이들과 집에서 보는 영상은 스타워즈이다. 조만간 디즈니랜드 파크에 갈 예정이라 미리 예습도 할 겸, 맨 처음 만들어진 네 번째 에피소드부터 보기 시작해 그동안 세 편을 보았다. 4편이 1977년에 만들어졌으니 40년이 넘었다. 사실 난 스타워즈의 광팬은 아니었다. 단순한 스토리 구조 때문에 어렸을 적 처음 보았을 때도 아주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우주선과 외계인, 광선검, 전투 장면을 보며 어색하다고 느끼진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 한껏 눈높이가 올라간 아이들 눈은 40년 전 아이들과 다를 것이다. 지금 보면 조악한 특수 효과와 유치한 대사가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어김없이 오글거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늘은 에피소드 1, 2를 보았다. 이 영화들도 벌써 이십 년이 되었지만, 만듦새는 앞선 에피소드 세 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하다. 홈시어터를 테스트하는 레퍼런스 타이틀로 꼽히던 에피소드 1의 DVD를 반복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 포드 레이싱 경주 장면은 지금 다시 봐도 흥미진진했다. 디즈니랜드 파크에 가기 전에 남은 에피소드를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12월 26일 일요일. 337일째 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했던 이웃들과 오후에 스파이더 맨 노웨이 홈을 보았다. 미국에서 극장은 두 번째이다. 지난 번에 갔던 시네폴리스는 객석에서 음식 주문이 가능하고 서빙도 받을 수 있었다. 럭셔리를 표방하는 극장이라 좌석 수가 적어서  열한 명의 티켓을 함께 예약하기 어려웠다. 이번엔 UCSD 근처의 AMC에서 보기로 했다. 이곳은 시네폴리스에 비해 좀더 최신 멀티플렉스 분위기였다. 일반 극장이지만 전동식 의자는 시네폴리스 못지 않게 편했다. 

영화관 로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마블 캐릭터 중 아이언 맨과 스파이더 맨을 가장 좋아한다. 아이언 맨은 사라졌고 스파이더 맨만 남았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몇 번을 반복해 보았다. 이전 스파이더 맨 시리즈들의 후속편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항상 아쉬웠기에 세 명의 스파이더 맨이 나온다는 사실은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일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한 화면에서 셋을 보니 뭉클했다. 다른 우주로 건너온 두 명의 스파이더 맨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한에 젖기도 하고, 그때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매듭짓거나 구하지 못했던 사람 대신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이를 구하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소환은 그들에게도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선물같은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거미줄을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자유롭게 보였다. 중년이 된 토비 맥과이어는 약간은 짠해 보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연휴를 이 영화로 마무리하길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