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화요일. 304일째 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규모가 크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단 1층 앞쪽에 있는 이집트관과 그리스, 로마관 전시물 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이다. 아들은 미이라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미이라가 있는 박물관은 많지만 이렇게 많은 미이라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 같다. 이집트관 하나만 해도 작은 박물관 하나 정도 크기인데, 심지어는 신전을 통째로 뜯어다 놓은 방도 있었다.
이집트 신전이 있는 방 |
아메리카관의 카페에서 카페인을 충전하고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상을 비롯해 중세 유럽 조각품들을 구경했다. 아프리카 오세아니아관은 과감히 스킵. 맨 안쪽에 있는 Robert Lehman Collection에서부터 그림 전시실이 시작된다. 점묘법 화풍으로 유명한 폴 시냑, 마티스, 고갱을 거쳐 2층의 갤러리로 이동해 르누아르와 드가를 만났다.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르누아르의 대표작을 볼 수 있는 미술관도 드물 것 같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아내와 나는 특히 'Woman in White'가 마음에 들었다.)도 있었고, 클림트와 모네, 세잔, 반 고흐의 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미술관을 나와 우버를 타고 첼시 마켓으로 이동했다. 오늘과 내일은 기온이 뚝 떨어졌고 바람도 차다. 아이들과 걷는 거리를 최대한 줄이려 하는데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다. 첼시 마켓의 김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와서 보니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구글 맵의 영업 시간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게 잘못이다. 마켓 안엔 사람이 많고 웬만한 레스토랑 앞엔 대기 줄이 있었는데, 다행히 타이 음식점 한 곳은 레스토랑 안 공간도 넓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지쳤던 아이들도 기운을 차렸다.
첼시 마켓에서 나와 리틀 아일랜드에 들렀다. 올해 개장한 작은 수상 공원으로, 영국의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이 설계했다. 허드슨 야드의 유명한 건물인 베슬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첼시 구역에선 하이 라인이 가장 유명하지만, 개성으로 따지자면 베슬과 리틀 아일랜드의 명성이 더 높아질 지도 모르겠다. 하이힐 뒤축을 닮은 거대한 콘크리트 화분들은 제각각 높낮이가 달라 묘한 느낌을 주는데, 그 화분들 위에 나무와 잔디, 산책길로 공원을 조성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원형 극장도 있어 날씨가 좋은 계절엔 공연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리틀 아일랜드(왼쪽)로 들어가는 입구 |
공원을 나와 하이 라인에 올랐다. 휘트니 미술관부터 허드슨 야드까지 이어진 1.5마일 정도의 고가 산책로이자 공원이다. 버려진 화물 철로를 공원으로 만들어 뉴욕에서도 가장 획기적이고 매력적인 장소로 탈바꿈시킨 아이디어는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가을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단풍 나무와 갈대까지, 다양한 종류의 풀과 나무가 있어 공원이란 이름이 어색하지 않았다. 뉴욕의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건물들을 다른 눈높이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곳을 모티브로 한 서울로 7017도 개장 초기엔 보잘 것 없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지역 명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하이 라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길로 자리매김 하길.
빌딩 숲 사이를 걷는 기분 |
기온이 내려가고 허드슨 강의 바람이 세서 걷기 쉽지 않았지만 공원의 끝인 허드슨 야드 쇼핑몰에 도착했다. 쇼핑몰 안에서 커피로 잠시 추위를 녹인 뒤 베슬 Vessel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벌집 모양의 독특한 외관으로 2009년 개장 후 단숨에 관광 명소로 떠올랐고 포토 스팟으로 유명해졌지만, 최근 투신 자살 사건이 잇따르면서 현재는 폐쇄된 상태였다. 올 7월에 네 번째 사고 이후 영구 폐쇄도 검토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건물 밖에서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벌집 핏자가 생각나는 외관 |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Becco는 파스타를 리필해 먹을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마침 같은 시기에 여행을 온 우리 아파트 이웃인 C, Y, L 선생님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 뉴욕의 거리에서 만난 이웃과의 저녁 식사는 따뜻하고 즐거웠다. 하루 종일 추운데서 걷느라 피곤에 지친 아이들도 친구들을 만나니 금새 기운을 차리고 재잘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