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8일 수요일

킹덤, 그리고 코로나19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킹덤 첫 시즌을 뒤늦게 보게된 건 최근 저녁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였다. 첫 시즌을 본 지 오래지 않아 마침 지난 주에 공개된 두 번째 시즌을 이어서 볼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킹덤 2를 보면서 극중 내용이 현재의 상황과 겹쳐보여 흥미롭기도,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아직 안보신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 역병의 탄생
병에 걸린 왕이 갑자기 죽는다. 왕위를 계승할 자는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세자 뿐이나 궁궐의 권력은 중전과 외척 일가에게 있다. 외척 일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전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나 왕위를 이을 수 있을 때까지 왕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들의 계략은 생사초라는 풀로 죽은 왕을 되살리는 것. 생사초로 살아난 이는 인육을 탐하는 좀비가 되지만 권력에 눈이 먼 그들에게 그건 중요치 않은 문제이다. 이후 동래 지방의 지율헌이란 의원에 모여있던 병자들이 모두 좀비가 되는 사고가 생기고 마을 전체에 역병이 퍼지면서 재앙이 시작된다.
역병 疫病. 표준국어대사전은 '대체로 급성이며 전신 증상을 나타내어 집단적으로 생기는 전염병'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전의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병은 예외없이 모두 전염병이며, 전염병은 감염(infection)에 의해 발생한다. 감염은 질병의 원인이 되는 생물이 숙주의 몸에 침입하면서 생긴다. 감염병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 가지 요소를 밝혀야 한다. 병원체, 숙주, 그리고 전파 방식이다. 킹덤에서는 인간이 좀비에게 물리면(전파 방식) 곧바로 좀비(숙주)가 된다. 처음부터 역병으로 불리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병원체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두 번째 시즌에 와서야 생사초 자체가 아니라 잎에 붙은 촌충(병원체)의 알이 역병의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첫 시즌 내내 불완전한 상태였던 역병이 진정한 의미에서 감염병의 위치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코로나19의 경우는 감염병 족보에서 형제 격인 사스, 메르스 등과 마찬가지로 세 요소가 명확하다. 환자(숙주)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병원체)가 포함된 비말 및 호흡기 분비물을 배출하고, 이 분비물에 접촉하면서(전파 방식) 호흡기나 점막을 통해 감염이 발생하고 새로운 환자가 생긴다.
- 병증의 변화
애초에 생사초를 써서 살아난 좀비(1차 감염자)에게 물린 사람(2차 감염자)은 시름시름 앓다 죽을 뿐, 좀비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은 사람(3차 감염자)들은 곧바로 전염성을 가진 좀비가 되고, 이들로 인해 환자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지율헌의 의녀인 서비는 이를 두고 '병증이 변했다'고 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변한 것은 '전파 방식'이다. 감염병의 전파 방식이 바뀌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몇 년에 한 번씩 유행해 수만 마리의 멀쩡한 닭들을 살처분 운명에 빠뜨리는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과거엔 새들 사이에서만 전염된다고 알려졌지만 1997년 인체 감염 사례가 처음 보고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류독감의 경우엔 아직까지 많은 환자가 발생하진 않았다. 조류와 사람 사이의 종간 전파는 밀접 접촉을 해야 이루어지고, 결정적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전염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다 극단적인 변화의 예는 2003년에 유행했던 사스에서 찾을 수 있다. 사스의 경우 전세계적으로 8천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774명이 사망했다. 이전에 없던 질병이 갑자기 출현했던 이유와 관련해, 많은 전문가들은 쥐나 박쥐 사이에서 오고가던 바이러스가 우연히 사람이란 숙주에 종간 전파를 일으켜 안착하게 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조류독감과 달리 사스 환자가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었던 이유는 사람과 사람간의 전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감염병의 특성을 말할 때 흔히 사람간의 전파력을 수치로 나타내어 사용한다. 한 명의 환자가 전염시킬 수 있는 숫자를 기초감염재생산수, 흔히 R0라고 부르는데, 사스의 R0 값은 2-3이다. 평균 숫자보다 훨씬 많은 이차 감염자를 만들어낸 일차 감염자를 슈퍼전파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유명해진 31번 감염자가 그 예이다. 사스 발생 초기에 중국 광저우의 한 남성 환자는 58명의 의료인을 포함해 100명 가까운 사람을 이차 감염자로 만들어 'Poison King'이란 별명을 얻었다.
사스나 메르스도, 코로나19도 애초에 숙주는 사람이 아니라 박쥐, 쥐, 낙타 등의 동물이었다. 동물만을 숙주로 삼아 옮겨다니던 바이러스에 우연히 변이가 생겼고, 새로운 능력을 획득한 바이러스가 또 우연히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환경이 파괴되고 야생 동물의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공장식 가축 사육이 늘어나면서, 동물과 인간 사이의 종간 감염이 발생할 가능성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가능성의 중심에는 인간의 행동이 있고, 이를 둘러싼 과학과 정치, 관습과 문화에 따라 감염병의 모양새가 달라질 것이다. 킹덤의 좀비에게 일차 감염이 발생한 이유가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으며 역병이 확산되고 병증이 달라진 배경에는 정치의 실패와 지율헌 병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굶주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햇볕, 온도 그리고 환경
킹덤의 좀비들은 해가 뜨면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잠을 자고 해가 진 뒤에 다시 깨서 활동한다. 처음 좀비들을 지율헌 담장 안에 가둘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특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 시즌의 엔딩에서 낮에도 활동하는 좀비가 등장하면서, 의녀 서비는 이들이 햇볕이 아니라 온도에 따라 활동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겨울이 되어 낮 기온이 내려가면서 좀비가 하루종일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감염병 유행은 온도를 비롯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바이러스는 대개 기온과 습도가 낮을수록 활발하게 활동한다. 숙주인 사람의 면역 기능이 떨어지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쉬운 조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외 활동이 줄어들면서 사람 사이의 근접 접촉이 늘어나는 것도 원인이 된다. 계절 인플루엔자가 겨울에 유행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에서이다. 반면 온도와 습도가 높아지면 바이러스를 구성하는 단백질 변성이 일어나 전염력이 약해진다고 한다. 사스의 경우에도 2003년 겨울에 시작해 여름에 잦아들었으며, 다음해 겨울에 한번 더 유행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내 전문가들이 추위가 풀리면서 코로나19의 위세가 줄어들고 여름쯤엔 소강상태에 접어들 것이라 예측하는 근거가 된다.
바이러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기온과 습도만은 아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감염자가 많이 발생했던 싱가포르나 태국의 예처럼, 기온이 높더라도 인구밀도나 생활방식 등 다른 조건에 따라 감염병에 취약해질 수 있다. 아프리카나 중동과 같은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 유행하는 에볼라나 메르스 바이러스도 있다. 여름에 사태가 종결된다 해도 어딘가에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사스의 예처럼 다음 겨울에 다시 감염이 시작될 수도 있고, 계절인플루엔자처럼 겨울마다 찾아오는 손님으로 자리를 잡을 가능성도 있다. 킹덤 두 번째 시즌의 마지막회는 역병이 유행하고 칠 년이 지난 뒤를 그린다. 모두가 역병이 사라졌다 생각하고 있을 때 세자와 의녀 서비는 생사초의 흔적을 따라 북방으로 갔다가 좀비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봄을 기다림과 동시에 바이러스의 전파를 줄이기 위한 주의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 과학자의 역할
의녀 서비는 등장인물 모두가 정치를 하고 있을 때 홀로 과학을 맡는 인물이다. 선한 마음과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경외하는 태도로 악한 인물을 살리거나 세자가 중전의 아이를 죽이지 못하게 말리는 등 극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생사초와 역병의 비밀을 밝혀낼 때 더 빛을 낸다. 그 과정에서 의문을 탐구하는 과학자적 태도와 뛰어난 관찰력이 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좀비가 밤낮의 변화가 아닌 온도의 변화에 따라 활동한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닫는 것도 서비이다. 그녀는 결국 현미경도, PCR도 없이 가장 중요한 병원체를 밝혀내는 데 성공한다.
개인적으로 손씻기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계절이 바뀌고 감염병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좋은 대안은 과학적 근거를 수집해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과학의 필요성과 지식 공유의 효용성을 코로나19 유행 과정에서 어느 때보다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월29일 NEJM에 중국 우한의 환자 425명의 특성을 분석한 첫 논문이 발표된 이래, 개별 증례 보고부터 환자 집단에 대한 보다 심도깊은 분석까지 짧은 기간동안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었다. NEJM, JAMA, LANCET 등 유수의 저널들은 연구 결과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오픈 엑세스로 신속하게 발표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질병의 특성을 이해해 적절한 방역 대책을 세우고, 나아가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활용될 것이다.
서비의 스승이 기록한 병상일지는 악인의 거짓을 증명하는 증거로 쓰이기도 하고, 역병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서비는 스승에 이어 역병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병상일지에 상세히 기록한다. 병상일지를 보며 지난 달 보았던 코로나19에 대한 증례 보고가 떠올랐다. 7년 간 역병의 비밀을 좇으며 생사초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지만 아직도 밝혀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 마음 한구석 숙연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생사초의 비밀을 알아내게 될 서비에게도, 코로나19와의 싸움을 기록하고 전하는 전 세계의 과학자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 방역에 성공할 것인가
킹덤에서 봉쇄를 통해 역병 전파를 막으려 하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봉쇄의 대상은 지율헌에서, 동래를 넘어 경상땅 전체로 넓어진다. 하지만 봉쇄의 범위가 커질수록 통제 불가능한 변수의 가능성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반면 상주 읍성의 문을 걸어잠그고 고립을 택한 사람들은 좀비가 아닌 굶주림으로 죽을 위험에 처한다.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데 십수일이 걸리고 시체를 달구지에 운반하던 시대에도 역병은 도처에 존재했다. 위생과 의학이 발달한 현대이지만, 바이러스의 종간 감염이 언제든 발생할 가능성을 품고 수백만이 사는 도시에서 완벽한 방역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일지 모른다. 우리는 킹덤이란 웰메이드 드라마가 이번 시즌을 넘어 더 오래 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다시 만나길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다른 신종 바이러스를 만나게 되겠지만, 지금보다 의연하고 익숙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데이비드 콰먼의 책에 나온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바이러스를 주시해야 하는지 알고, 외딴 곳에서 일어난 종간전파가 한 지역 전체로 번지기 전에 현장에서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지역적인 유행이 일어났을 때 전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번지지 않도록 조직화된 역량을 키우고, 새로운 바이러스의 특성을 신속히 파악하여 짧은 시간 내에 백신과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는 연구 기술과 도구를 갖추는 것이다.
(중략)
또한 우리는 오래된 질병의 재유행과 확산은 물론 새로 출현한 인수공통감염병의 유행이 보다 큰 경향의 일부이며, 그런 경향을 만든 책임은 바로 우리 인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행한 일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데이비드 콰먼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2020년 1월 28일 화요일

반짝반짝 빛나는

- 스케이트랑 달리기랑 뭐가 더 좋아?
- 스케이트!
- 스케이트랑 고양이랑 뭐가 더 좋아?
- 고양이!

집 근처 스케이트장에 가는 길이었다. 스케이트 타는 데 재미를 붙인 터라 최근 아이들은 거의 매일 스케이트장에서 한두시간 씩을 보낸다. 어제는 설 연휴 때문에 닷새만의 방문이었다.

스케이트장에 갈 땐 대개 친구와 함께이다. 함께 걷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아이의 발걸음은 조금씩 다르다. 단짝 친구와 함께일 땐 평소보다 반박자쯤 빠르고 경쾌하게. 발걸음 뿐 아니라 목소리의 형태도 바뀐다. 크기는 십데시벨쯤 커지고 말투는 진폭이 넓어진다. 주파수를 그린 선을 멀리서 본다면 매끈했던 선이 아몬드가 잔뜩 박힌 초콜릿 표면처럼 오돌토돌해졌을 것이다.

- 그럼 이번엔... 스케이트랑 너네 아빠랑 뭐가 더 좋아?
- 스케이트!

아이는 친구의 연이은 질문에 냉큼 답을 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소리가 어찌나 맑고 쨍한지, 흐리게 내려앉은 하늘 높이가 조금만 더 낮았다면 잔뜩 젖은 공기 틈새로 구멍을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짐짓 모른 척 뒤돌아보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듯이 웃음끝을 흐리며 한 마디 덧붙인다.

- 농담이야.

커다란 웃음 소리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한번 더 허공에 흩뿌려진다. 찬바람과 흥분으로 발갛게 상기된 아이의 얼굴을 보며, 휴일 아침에 단짝 친구와 나란히 걷는 아홉살 여자아이의 기분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다.

이백밀리 사이즈의 주황색 렌탈 스케이트와 노란 헬멧을 씌워 얼음판에 들여보냈다. 연휴 마지막 날이어선지 얼음판은 오전부터 붐볐다. 얼음판 밖에도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들이 많았다.

얼음판 밖이나 안이나 온도는 비슷할텐데 안과 밖 공기는 신기할 정도로 다르다. 얼음판 안은 웃음과 장난기로 가득하다. 아이들 뿐 아니라 스케이트화를 신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도,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을 때도. 반면 바깥엔 지루함과 피로의 기운이 찬바람을 타고 떠돈다. 가끔 아이들의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거나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 때 미소를 짓지만 한 순간일 뿐이다. 마치 얼음판 가장자리를 따라 투명 돔이 씌워져있고 돔 안쪽에만 웃음가스로 가득 찬 것 같다. 표정에 담긴 즐거움의 높이로만 따진다면 양재대로를 사이에 둔 신축 래미안 아파트와 판자촌 구룡마을만치나 차이가 커 보였다.

스케이트화를 신은 것은 대여섯번 쯤 되었지만 아직 아이의 자세는 신통치 않다. 비슷한 기간에 벌써 물 찬 제비마냥 씽씽 달리는 오빠와는 천지차이이고, 함께 스케이트를 타는 단짝 친구와 비교해도 서툴다. 얼음을 지친다기 보다는 종종걸음에 가깝다. 그렇게 트랙을 따라 그저 뒤뚱뒤뚱 몇 바퀴를 걷는게 전부이다. 트랙 한 바퀴를 도는 동안만도 몇 번씩 넘어지고, 그러면서도 얼굴에선 웃음기가 떠나질 않는다. 강습을 받게 해볼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온라인 신청 시간에 맞출 수가 없어 포기했다. 제대로 속도를 내질 못하니 영 재미가 없을 법도 한데, 그래도 계속 타겠다고 의욕을 보이는 게 대견하기도 하다.

밤에 나란히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아이가 문득 생각난듯 소곤거렸다. 아빠, 내일 또 탈래. 밤기운 가득한 방은 컴컴한데 웃음기 가득한 눈만 반짝인다. 그래 그렇게 하렴. 종종걸음이든 물 찬 제비이든 뭐 그리 중요할까. 얼음 위에서 걷다 보면 언젠가 스케이트 날에 몸을 싣는 법도 자연스레 깨닫게 될 것이다.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한대도 또 어떤가.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로 가득한데.


2020년 1월 7일 화요일

눈뭉치 던지기

일요일에 아이들과 눈썰매장에 갔다. 슬로프 대기 줄이 어찌나 긴지, 서울 시내 아이 있는 집은 모조리 다 출동한 것 같았다. 막상 썰매는 몇 번 타지 못하고 썰매장 한켠 다져진 눈밭에서 눈덩이를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올 겨울 아직 눈구경을 제대로 못한 아이들은 사람들 발에 밟혀 본래의 색을 구분하기 힘든 눈밭에서도 손발 시린줄 모르고 고맙게도 한참을 논다.

첫째 녀석이 조그만 눈뭉치를 던지는데 제법 멀리까지 간다. 싱긋 웃더니 나에게도 슬쩍 눈짓을 보낸다. 아빠가 어디까지 던질 수 있을지 보겠다는 눈치다. 괜한 승부욕이 발동하는 순간이다. 눈덩이를 적당히 뭉쳐 크게 팔매질을 했다. 눈뭉치는 긴 포물선을 그리며 아이의 눈덩이가 떨어졌던 지점을 훌쩍 너머 야트막한 담장을 넘어갔다. 아이는 순간 짧은 탄성을 내뱉고는 존경심을 담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답했다. 아빠의 존재감이 오래간만에 휘황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형광등도 가끔은 밝은 빛을 내고, 사그라드는 모닥불도 때로는 밝은 불똥을 튀기는 법이다. 그 빛이 오래가질 않아서 문제지만. 두어 차례 더 눈뭉치를 던져보았지만 처음처럼 우아하고 긴 포물선은 그려지지 않았다. 아이는 금새 눈뭉치 던지기에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눈밭을 파고 있었다. 팔매질을 그만둔 건 다시 담장을 넘기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른쪽 어깨에 뻐근한 통증을 느꼈던 것도 이유였다. 저녁이 되면서 통증이 더 심해져 소염진통제 한 알을 먹었다. 언젠가부터 관절이든 근육이든 여기저기 자주 문제가 생겨 소염진통제는 항상 준비해두어야 한다.

오늘 아침에도 통증은 여전했다. 어깨를 올리는 게 수월치 않아 옷을 입을 때도 평소보다 동작이 굼떠졌다. 아마 어깨 관절을 싸고있는 인대 중 하나에 탈이 났을 것이다. 지금 상태라면 다행히 소염진통제와 며칠의 시간으로 나아지겠지만, 손상이 조금 더 심했다면 오십견이 생겼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이니 오십견이 생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새삼스레 이제 눈뭉치도 살살 던져야하는 낡은 나이가 되어가는구나 싶어 실소가 나왔다. 오후부턴 비도 오는 궂은 날씨라니 퇴근 전에 미리 파스라도 붙여야 할까보다.


2019년 11월 9일 토요일

동물구충제 펜벤다졸, 그리고 면역항암제

- 60대 남성이 마른 기침으로 병원을 찾았다. 환절기 감기야 늘상 겪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한달이 넘게 기침이 계속되고 있었다. 흉부 CT 촬영 결과를 본 의사가 큰 병원 방문을 권유했을 때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병원에서 시행한 기관지내시경 결과는 소세포폐암이었다.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나빴다. 암세포는 폐 외에도 주변 림프절과 흉골, 갈비뼈, 요추, 골반뼈에 자리잡은 상태였다. 다발성 골전이가 있는 소세포폐암 환자의 기대 여명은 1년 미만이다.
환자는 곧바로 항암화학치료를 시작했다. 그는 내 먼 친척이었고, 내가 한 일은 진료 의뢰와 예약을 도운 것이 전부였지만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할 때마다 그는 매번 내게 전화해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는 듯이. 치료 초반에는 종양의 크기가 다소 줄어들었다. 하지만 첫 공격을 받고 잠시 주춤한 듯 보이던 종양은 이내 이전과 같은 기세등등한 모습을 되찾았다. 여섯 차례 치료를 마쳤을 때 종양은 처음보다 더 커져있었다. 약제를 바꾸어 세 번의 치료를 더 시행했지만 종양이 자라는 속도는 꺾이지 않았다. 치료가 끝날 때마다 듣는 전화기 건너편 그의 목소리 역시 종양이 커진만큼 힘을 잃어갔다. 기존의 치료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보였다.
종양내과에서는 마지막으로 최근에 개발된 신약 치료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기존 항암제에 반응이 없는 경우라 해도 어쩌면 새로운 약제가 조금이나마 경과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새 약제를 두 번째 투여한 한 달 뒤, 척수에 전이된 암은 그의 하지를 마비시켰다. 별다른 처치를 받지 못하고 가족의 부축을 받아 응급실을 나서며 그는 내게 다시 전화했다. 기운이 떨어져 말을 잇기도 힘든 상태였다. 내가 환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요양병원에서 호스피스 병동 전원을 기다리던 그는 며칠 뒤 사망했다. 폐암을 진단받고 십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겨우 두 달 전의 이야기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투여했던 신약의 이름은 옵디보(Opdivo, nivolumab). 2014년에 세계 최초로 개발된 PD-1 면역항암제였다.

- 의학은 업데이트가 빠른 학문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암 치료 분야는 가장 신속하게 발전하는 영역이다. 내가 의대에서 배웠던 암 치료법은 일부를 제외하곤 현재 쓰이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당시 교과서에 수록된 항암제들은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1세대 세포독성항암제였다. 의대 졸업 후 몇 년이 지나 병동 주치의로 일할 때는 책에서만 보던 항암제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 주된 치료제는 역시 세포독성항암제였지만, 당시는 백혈병의 글리벡, 폐암의 이레사와 같은 2세대 표적항암제가 막 쓰이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들 약제는 혁신적인 신약으로 조명을 받았고 관련 기사도 쏟아졌다. 매스컴은 암 정복도 머지않았다는 태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폐암 표적항암제인 이레사는 환자의 10퍼센트에서만 효과를 나타냈고, 기껏해야 생존 기간을 몇 개월 연장시킬 뿐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이만해도 대단한 성과였으나 기대만큼의 효과는 아니었다. 현실을 깨달은 언론은 금새 관심을 거두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싸늘해졌다. 벌써 십오 년쯤 전 이야기다.
얼마 전 종양내과 선생님으로부터 폐암의 최신 치료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최근 쓰이기 시작한 3세대 면역항암제 소개가 포함된 내용이었다. 짧은 강의에 많은 것을 담긴 어려웠지만 신약의 효과를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기존의 세포독성항암제와 효과를 비교한 임상연구들은 두 배 이상의 반응률과 3개월에서 1년까지 늘어난 생존률을 보고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뛰어난 효과를 보였던 개별 환자 사례들이었다. 슬라이드엔 단지 몇 차례의 치료만에 종양 크기가 확연히 줄어든 사례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흔히 기대하기 어려운 치료 결과들이었다. 이와 같이 특정 환자에서 유독 극적인 효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문제는 어느 환자가 그런 반응을 보일지 미리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약제의 타깃인 PD-L1 발현률이 높으면 더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동물구충제인 펜벤다졸을 먹고 폐암이 완치되었다는 해외 기사가 알려지면서 말기 암 환자가 자의로 해당 약을 복용하는 사례가 늘고있다. 화제가 되었던 미국의 환자는 소세포폐암이 여러 장기에 전이된 확장성 병기 상태였지만 현재는 암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병원에서 권한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펜벤다졸만 복용하면서 소셜미디어에 안타까운 투병 일기를 올리는 환자들도 있다. 사람에게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았고 효과가 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복용 자제를 권고하는 전문가, 환자 단체 성명이 발표되었지만, 논란이 확산되면서 오히려 펜벤다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해당 환자는 자신이 의사나 과학자는 아니며, 그저 스스로의 특별한 경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의 바램은 어느정도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의로 복용한 펜벤다졸에 대한 관심에 비해 이 환자가 임상시험 약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닥 주목받지 않는다. 해당 약제는 또다른 PD-1 면역항암제인 키트루다(Keytruda, pembrolizumab)로 알려졌다. 이를 고려하면 펜벤다졸이 아니라 면역항암제가 환자의 암세포를 몰아냈을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해당 임상시험 참여자 중 극적인 완치를 이룬 사람이 그 뿐이었으므로 항암제가 아닌 구충제의 효과로 봐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진행성 병기 환자가 면역항암제로 완치가 되는 사례는 그 자체로 드문 일이며 해당 임상시험에서 그가 유일한 아웃라이어(outlier) 였는지도 확실치는 않다. 중요한 것은 면역항암제가 특정 환자에선 이런 극적인 효과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에 발표된 국내 연구에서는 면역항암제 치료를 받은 폐암 환자 1181명 중 9명(0.76%)에서 완전 관해(complete remission, CR)를 보였다고 밝혔다.

- 오래 전부터 의사들은 암 환자의 극적인 호전 사례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환자와 의료진에게 기적이라고 불리곤 했지만 왜 다른 환자와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얼마 전 출간된 <암 치료의 혁신, 면역항암제가 온다 (The Breakthrough: Immunotherapy and the Race to Cure Cancer)>는 이런 사례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암 정복을 향한 길고도 고된 여정에 참여했던 수많은 연구자들의 이야기이다. 기적과 같은 현상 아래에 면역이란 기전이 숨어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그 실체를 찾기위해 고군분투했던 선구자들로 인해 항암 치료의 패러다임은 완벽하게 바뀌었다. 학계에서 옵디보와 키트루다와 같은 면역항암제 개발은 페니실린의 발견에 맞먹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책장을 넘기며 목격하는 암과의 사투는 스릴러보다 박진감이 넘치고 환자의 사례들은 어떤 드라마보다도 감동적이다. 각각의 스토리 자체도 극적이지만 그것을 전하는 작가의 필력 또한 뛰어나다. 책의 상당 지면이 항암제 작동 기전을 비롯한 전문적인 내용에 할애된 것 역시 놀랍다. 일부 내용은 의학 서적에 실리는데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의사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면역항암제 작동 기전을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려면 작가 스스로 그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저자이면서 과학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저자는 그 임무를 훌륭하게 해낸다. 그 과정에서 특히 저자가 적재적소에 사용한 비유가 큰 역할을 한다. 악셀레이터와 브레이크로 T세포 활성화 신호를 설명하고, 면역계를 피하는 암세포의 활동을 '은밀한 악수'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게 된다.
저자인 찰스 그레이버는 암에 대한 대중서 영역에서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싯다르타 무케르지에 어깨를 비벼볼만한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2010년에 출간된 무케르지의 <암. 만병의 황제의 역사>에 면역항암제에 대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음을 상기해보면, 지금 암 치료의 혁신을 이끄는 면역항암제가 주연으로 등장한 것이 얼마나 최근의 일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뉴욕의 외과의사 윌리엄 콜리가 악성 육종 환자에게 단독균을 주사해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치료를 시도한 것은 백년도 더 된 일이었다. 학계의 조롱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어둠 속의 희미한 불빛을 따라 포기하지 않고 악전고투를 벌여온 이들의 족적을 따라가다 보면 의사로서 절로 겸허해지게 된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전하라.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저자의 권유를 따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이 책의 무엇보다 큰 장점은 끝까지 과학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면역항암제는 기적의 치료제가 아니다. 승리에 대한 기록도 있지만 가슴아픈 패배도 존재한다. 저자는 섣부른 기대를 부풀려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 말미에서 그는 골드러시가 지나간 지금, 면역항암제의 위치와 한계,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담담하게 기술한다. 그리고 또다른 특별한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조심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 책이 출간된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면역항암제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제임스 앨리슨(MD앤더슨 암센터), 타스쿠 혼조(교토대) 박사였다. 물론 이들은 이 책에도 등장한다. 같은 해에 FDA 승인을 목표로 시험 중인 새로운 면역항암제는 약 940종에 이른다.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순수함의 형태

아이들 독감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단골 소아청소년과에 가는 길이었다. 가을 바람에 부드럽게 부딪히는 햇살이 눈부셨다. 아직 주사 맞을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초등 1학년 꼬맹이는 아침부터 잔뜩 긴장한 상태다. 병원 가기 싫은데... 란 말을 벌써 수십번째 하고 있었다. 반면 주사에 대한 공포를 이미 극복한 오빠는 소풍가듯 평온한 태도로 몇 걸음 앞서 걷는다. 옆에서 종종걸음을 치던 꼬맹이가 내 손을 잡았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촉촉했다.

- 근데 아빠. B형 독감에 걸렸었는데 또 주사를 맞아야 하는거야?

-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매년 조금씩 모양이 바뀌거든. 그래서 매년 다시 맞아야해.

- 근데 난 독감 걸린지 얼마 안되었잖아. 작년이 아니잖아.

어,,, 그랬었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난 겨울 독감 시즌은 유난히 길었고, 꼬맹이가 B형 독감 진단을 받은 것은 올해 4월 초였다. 독감 진단은 아이가 당장 다음날부터 학교를 못간다는 의미였지만 우리에겐 급히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당일 저녁 꼬맹이만 데리고 무안의 외갓집에 내려가 맡긴 뒤 밤기차로 다시 서울에 올라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덕분에 둘이서만 때아닌 기차여행을 했었다.

- 그랬었지. 그때 가연이가 아빠랑 할머니 댁에 가면서 오빠한테 편지 써놓고 갔잖아.

- 무슨 편지?

- 가연이 없는 동안 방에 있는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 아 맞다. 생각나.

꼬맹이는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잠시나마 긴장이 풀린 얼굴로 키득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 나 그때 할머니 집에 있을 때 아빠가 많이 보고싶었는데.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도 생각이 났어. 그냥 그랬어. 이런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했다. 대화의 맥락으로 보자면 굳이 필요치 않은 말이었지만 아이의 말투가 너무나 밝고 자연스러워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 그때 할머니 집에서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순간 직면했던 것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만약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함에 형태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잠깐 모습을 비춘 순간이었을 것이다. 달리 어떤 것이 더 있을 수 있을까.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아이의 일기장을 읽으며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문학적 문장은 '명료하면서도 저속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평범한 말과 생소한 말을 적절히 섞어 쓰는 '중용'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너무 꾸미지도 말고 너무 평범하게도 쓰지 않도록, 명료함과 고상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뜻일 것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이후 여느 아이들처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내주는 분량만큼, 일주일에 이삼일씩. 일기 숙제는 늘 있었지만 5학년이 된 올해는 다른 해와 조금 달랐다. 담임선생님께서 여러 개의 주제를 주고 매달 그 중에서 골라 중간중간 일기 대신 짧은 에세이를 쓰도록 한 것이다. '나에게 램프의 요정이 생긴다면' 같은 노멀한 것부터 '30년 후 내 자녀에게'와 같은 다소 철학적인 주제나 '똥 맛 카레가 맛있을까 카레맛 똥이 맛있을까'와 같은 엉뚱한 주제까지 다양했다. 아이들이 쓴 글에는 선생님이 깨알같은 감상평을 남겨주신다. 대부분 긍정적이고 공감을 표하는 내용이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소통하기에 유용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두어 편씩 업데이트 되는 일기장을 보는 것은 나름 쏠쏠한 재미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때도 있었고 위트있는 표현에 웃음을 짓게 될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글솜씨가 늘어가는 게 보여 흐뭇하기도 했다. 때로는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일기 쓰기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 선생님의 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날은 선생님이 제가 쓴 일기가 재미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고 으쓱해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도 짤막한 감상평을 전달하곤 했다.

근래 들어 아이의 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글의 소재나 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표현에서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읽는 이를 의식하고 쓴다 할까. 물론 아이의 일기는 애초부터 혼자만 간직할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근의 글에선 재미나고 독특하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이전보다 더 엿보였다. 꾸밈이 많아진 글은 본래의 자연스러움이 줄었고 때로는 과하게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타인에게 읽히지 않는 글은 거의 없다. 심지어 지극히 사적인 일기마저도 후대에 책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운명에 처하곤 하지 않던가. 우리가 쓰고 접하는 대부분의 글은 미래의 독자를 의식하고 쓰는 것이며, 독자를 의식하고 나아가 이해할 때 더 좋은 글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진다. 모 소설가는 글을 쓰는 것이 연애 편지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일정부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연애 편지는 내 역량을 총동원해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위한 표현을 고민한다는 면에서 가장 좋은 글쓰기가 될 수 있다.

예전 일기가 더 좋았어. 며칠 전 아이의 일기를 읽은 아내가 내게 말했다. 아내도 같은 느낌을 받았나보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중용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쓰는 글의 변화를 목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욕심을 부려 잠시 균형을 잃었을지 몰라도, 아이의 글쓰기는 또 제 나름의 균형을 찾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글들을 쓰게 될까. 그리고 그 글을 쓰는 아이는 어떻게 변화할까.

2019년 10월 30일 수요일

연수일기 1. 해외 연수 기관 정하기

내년 해외 연수가 확정되었다. 현재로선 시기는 8월, 장소는 미국 샌디에고가 될 예정이다. 연수 준비를 할 때 연수 기관을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초청장을 보내줄 외국 기관 연구자와의 친분을 이용하거나 다른 이를 통해 소개를 받는 것이 수월한 방법이다.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방문하고 싶은 기관의 연구자에게 직접 문의를 해야한다. 메일을 보내도 감감무소식인 경우도 많다. 승낙을 해주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방문을 받기 어렵다고 공손히 거절 의사를 보내주기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그래도 거절이 반복되면 기한 내에 연수 기관을 정해야 하는 입장에선 애가 탈 수밖에 없다.

연수 기관 매칭에 어려움을 겪은 분들 이야기도 들은 바 있어서, 좀 이른 시기인 지난 3월에 첫 번째 문의 메일을 보냈다. UCSD의 A선생님은 WHI, MESA 등 유명 코호트에 참여했고 지금까지 4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한 분으로, 관심을 두고있는 영양역학 연구를 함께 하기에도 적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첫 문의에 일이 쉽게 풀리랴 싶어 토요일에 CV를 첨부한 메일을 보내면서도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런데 웬걸, 하루 뒤 일요일(!)에 바로 답신이 왔다. 내년 8월까진 자리가 찼고 이후에는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1월에 연수를 시작할 수 있는 다른 곳을 찾을까도 잠시 고민했지만 더 적당한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샌디에고란 도시에 대해서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에 아내와 상의 후 다음날 바로 다시 답신을 보냈다. (할 수만 있다면 달려가 손편지를 봉투에 넣어 직접 두손으로 공손히 드리고 싶었다.)

그 뒤로 한달간 열 통이 넘는 메일을 보내고 답을 받으며 연구 주제를 상의하고, MESA 코호트 연구자 웹사이트에 접근할 권한을 얻었다. 3주 전 내년 연수 대상자 명단이 공식 발표되었고, A선생님께 다시 그 소식을 알렸다. 코호트 데이터 신청을 위한 두 개의 연구계획서를 함께 첨부했다. 내용을 본 A선생님이 휴스턴 베일러의대 W선생님을 공동연구자로 추천해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었다. W선생님은 프로필 사진만으론 나보다 나이가 십년은 적어보이지만 영양역학 논문 수만 언뜻 세어도 내 전체 논문 수를 가볍게 넘기는 훌륭한 연구자이다. 계획서를 보자마자 분석 방법 변경의 필요성에 대한 깨알같은 강의와 네 가지 질문이 담긴 장문의 메일을 보내셨다. 긴 금발의 전형적인 청순 미인이신데 랩 이름이 dark matter lab. 앞으로 발표할 논문들로 온 우주를 가득 채우실 생각인가보다.

아뭏든 그렇게 당분간 두 선생님의 지도 편달을 받으며 연구와 연수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메일을 보낼 때마다 광속으로 돌아오는 답메일에 어지럼증을 느끼곤 하는데, 샌디에고와 휴스턴을 거친 연구 계획이 남은 10개월이 지나 내년 8월이 되었을 때 어디까지 진행되어 있을지는 모르겠다.

2019년 9월 24일 화요일

일어서기에 대한 소고小考

스마트 워치를 꽤 오랫동안 사용했다. 운동할 때 활용하기 좋다고 하는데 이런 기기를 사용해 그날의 운동량을 타인과 공유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 경우 그저 이 기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운동량이 늘거나 체형이 바뀌는 기적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고 달린 거리와 경로를 보며 그저 감탄하거나 부러워할 뿐이다. 가끔 메시지 알림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일 때도 있지만 결국 나에게는 스마트 워치도 아직까진 그저 시계인 것이다.

몸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이 기기를 사용하면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다. 평일 아침에 집을 나서서 퇴근할 때까지 보통 육천보 정도를 걷는다거나, 올해 평균 걸음 수가 작년에 비해 오백보 적다거나, 하루에 걷기로 소비하는 칼로리가 겨우 밥 한공기 수준이라거나, 뭐 그런 사소한 것들 말이다. 일어서는 횟수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도 그중 하나인데, 하루 목표인 열두 번을 채우는 날이 별로 없다. 그래도 진료실도 가야하고 화장실도 가고 점심 먹으러도 움직이는데 이렇게 드물게 일어설까 싶어 하루 일상을 복기해 보았더니 실제로 그럴만했다. 배뇨와 식사. 필수적인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이동 말고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도통 움직이질 않는거다.

일어설 시간입니다! 라고 친절하게 울리는 알람의 의미는 한 시간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문득 허리가 뻐근한 것 같아 상체를 슬쩍 뒤로 젖혀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벌떡 일어서진 않는다. 그래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면에서라면 도움이 된 셈이다. 걷기, 운동하기 외에 왜 하필 '일어서기'를 활동 항목에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일어서기가 걷거나 운동하는 행위와 같은 취급을 받을만한 신체활동은 아닐텐데. 물론 운동을 하기 위해선 대개 일어서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지만.

손목에서 울리는 알람을 무시하고, 두 시간째 진득하게 앉아 강의 자료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유튜브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았다. 학생들이 교장의 강압적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서 책상에 올라섬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드러내고 키팅 선생님에게 작별을 고하는 그 장면.

'stand'란 단어는 어떤 사안에 대한 공개적인 태도나 입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어서기가 신체적인 것 뿐 아니라 사회적인 행위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떠올려보면, 난 본래도 잘 일어서지 않는 편이었다. 여러 사람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즐기지 않고 말주변도 없다. 강의나 발표를 해야 하는 직업이라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반복되면서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상황은 불편하다. 말주변이 없어서인지 머리 속의 생각이 입을 거쳐 발화될 때 본래의 빛깔을 잃는 듯 느껴질 때가 많은데, 그에 대한 두려움이 한몫했던 것 같다. 아마 소심한 성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든 대개 침묵을 선호했고, 그 역할은 주목받지는 않지만 적어도 책임을 지거나 비판을 받을 위험은 없었다.

손목에 찬 시계도 일어서기를 격려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과거보다 더 자주, 다양한 방식의 일어섬을 목격한다. 스스로는 하루 열두 번도 채 일어서지 못하지만 우리 사회엔 더 많은 일어섬이 필요하며, 모든 일어서는 행위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행위가 같은 무게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일어서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일어서기 전까지의 부동과 침묵이기 때문이다. 부동과 침묵이 드리운 그림자가 짙고 길수록 일어서는 행위의 의미는 커지고, 보편적 공감과 연대 의식을 넘어 때로는 감동까지도 만들어낸다. 반면 부동과 침묵 없이 발화된 일어섬은 번잡한 삶에 피로를 더할 뿐이다.

행위의 결과가 항상 해피 엔딩이 될 순 없다. 키팅 선생님은 결국 떠나고 아이들은 남는다. 스크린을 벗어난 현실에서, 사람들은 대개 다시 자리에 앉아 부동과 침묵의 그림자에 몸을 감춘다. 그러므로 부동과 침묵은 곳곳에 존재하며 우리는 대개 어떤 방식으로든 부동과 침묵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좀더 겸허해지고, 타인의 일어서는 행위에 대해서 보다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어서서 점심을 먹으러 가야겠다.


2019년 8월 28일 수요일

확증편향


- 등기 수령 메모 못 봤어요? 버린 것 같아서 휴지통을 뒤져도 없네.

집배원이 대문에 붙이고 간 우편물 도착 안내문을 찾는 중이었다. 맞벌이 부부가 등기 우편물을 첫 번째 배달 때 직접 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번에도 현관 눈높이에 얌전히 붙어있는 안내문을 서재 책상에 놓아 두었었다. 쪽지에는 재방문 일시와 집배원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재방문일 아침, 집배원에게 미리 연락해 아파트 보안실에 맡겨달라 부탁하려는데 안내문이 안보였다. 책상에 함께 놓아둔 다른 우편물들과 섞여 버려졌나 싶어 휴지통을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 아침에 관리비 고지서랑 같이 버렸는데, 왜요?


역시 아내가 버린 것이었다. 다시 휴지통을 뒤졌지만 몇 안되는 종이쪼가리들 틈에서 안내문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종량제 봉투를 꺼내어 뒤집었다. 봉투에 담겨있던 쓰레기와 함께 시큼한 냄새가 쏟아졌다. 다른 종이와 함께 구겨졌나 싶어 이번엔 종이 쓰레기를 하나하나 펴보았다. 아이들 방학 생활 안내문,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와 전단지들 사이에서 그제야 익숙한 우체국 마크가 눈에 띄었다. 안내문을 발견하고 나서 왜 처음에 바로 눈에 띄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안내문은 어른 손바닥 정도의 크기였는데, 나는 A4 용지만한 종이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함께 놓여있던 다른 서류들과 같은 크기라고 착각했었던 것 같다. 안내문은 반으로 접힌 채였다. 머리 속에 큰 종이를 미리 그려놓았기에 손바닥 절반만한 크기의 안내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이런 오류가 선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류의 역사만큼은 오래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카이사르도 인간은 자기가 보고싶은 현실만을 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확증편향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그 실험 결과를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우리는 가까이에서 쉽게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특정 지역에 대한 비하, 외국인 노동자나 성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답정너의 자세로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는 주말밤 TV 토론에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의견과 댓글에 대댓글 싸움으로 차고 넘치는 SNS 담벼락에서.

사람은 듣고싶은 것만 듣고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것, 나를 포함한 세상은 오류와 편향으로 가득하며 지면과 모니터를 가득 메운 말의 상찬이 부질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평론가 신형철의 글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답을 찾기 어려운 때일수록 단순하게 사실을 인지하고, 나아가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천천히.

기껏해야 10리터 크기의 종량제 봉투 안에도 깨달음은 있는 법이다.

2019년 5월 3일 금요일

구두 밑창을 갈며

길건너에 있는 구두 수선 노점에 들렀다. 구두를 자주 닦는 편은 아니다. 길가다가 문득 생각이 날 때 가까운 노점을 찾는 정도라 막상 회사 근처에 있으면서도 오랜만에 방문한 곳이었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선지 노점 안의 손님은 중년 신사 한 명 뿐이었다. 희끗희끗한 스포츠 머리에 다부진 체격의 주인이 손을 재게 놀리며 낡은 검정 구두를 닦고 있었다. 밑창과 굽을 갈아달라는 말에 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 국산으로 하면 밑창하고 굽 각각 만오천원, 수입으로 하면 각각 이만오천원입니다.

구두를 닦던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벗은 구두를 작업대 옆에 놓은 뒤 삼선슬리퍼를 신고 노점 한켠의 벤치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바닥에 열선이 깔렸는지 엉덩이가 뜨끈했다. 닦던 구두를 마무리하고 손님을 보낸 그가 밑창 샘플을 내밀었다. 좀더 두껍고 오래 간다는 수입산 제품을 선택했다. 밑창과 굽 합쳐 오만원이다. 구두를 살펴보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좋은 구두네요. 아무래도 두꺼운 게 더 나을 겁니다.

닳아버린 뒷굽을 그라인더로 갈아내 평평하게 만들고 구두 바닥에 본드를 바른다. 새 밑창과 굽에도 본드를 바르고 드라이기로 가열한 뒤 구두에 단단히 붙인다. 새로 붙인 밑창이 들뜨지 않도록 모서리 부분을 꾹꾹 누르며 힘을 줄 때마다 세월에 단련되었음직한 그의 팔뚝 근육이 꿈틀거렸다. 구두를 돌려가며 접착 상태를 확인한 뒤 끌칼로 기존 굽과 밑창에 맞춰 새 밑창을 잘라내는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거침이 없었다.

새 손님이 방문했다. 기다리는 손님이 생기자 구두를 매만지는 그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새 밑창과 굽으로 갈아신은 구두는 다시 작업대에 올랐다. 광택을 내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다. 장인의 손길이 다시 물흐르듯 움직였다. 팔뚝 길이만한 흰 천을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야무지게 두르고는 느슨해지지 않도록 엄지에 다시 돌려 감는다. 천을 두른 손가락으로 젖은 스펀지를 두드린 뒤 갈색 구두약을 발라 구두 가죽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물광을 내기 위함이다. 약통과 구두를 오가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우아했다.

뜨끈한 의자때문에 중간중간 엉덩이를 움찔거려야 했지만 삽십분 남짓한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늘 그렇지만 구두를 닦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오히려 즐겁기까지 하다. 가끔은 그 과정이 숙련된 예술가의 공연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오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을 때 나는 마치 그의 노동력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그의 행위에 대한 관람료를 지불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평이 채 안되는 공간이었으나 공연은 훌륭했고 그는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그러므로 까만 구두약 때가 잔뜩 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지폐를 받는 그를 향해 나 역시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