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8일 수요일

킹덤, 그리고 코로나19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킹덤 첫 시즌을 뒤늦게 보게된 건 최근 저녁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였다. 첫 시즌을 본 지 오래지 않아 마침 지난 주에 공개된 두 번째 시즌을 이어서 볼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킹덤 2를 보면서 극중 내용이 현재의 상황과 겹쳐보여 흥미롭기도,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아직 안보신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 역병의 탄생
병에 걸린 왕이 갑자기 죽는다. 왕위를 계승할 자는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세자 뿐이나 궁궐의 권력은 중전과 외척 일가에게 있다. 외척 일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전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나 왕위를 이을 수 있을 때까지 왕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들의 계략은 생사초라는 풀로 죽은 왕을 되살리는 것. 생사초로 살아난 이는 인육을 탐하는 좀비가 되지만 권력에 눈이 먼 그들에게 그건 중요치 않은 문제이다. 이후 동래 지방의 지율헌이란 의원에 모여있던 병자들이 모두 좀비가 되는 사고가 생기고 마을 전체에 역병이 퍼지면서 재앙이 시작된다.
역병 疫病. 표준국어대사전은 '대체로 급성이며 전신 증상을 나타내어 집단적으로 생기는 전염병'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전의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병은 예외없이 모두 전염병이며, 전염병은 감염(infection)에 의해 발생한다. 감염은 질병의 원인이 되는 생물이 숙주의 몸에 침입하면서 생긴다. 감염병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 가지 요소를 밝혀야 한다. 병원체, 숙주, 그리고 전파 방식이다. 킹덤에서는 인간이 좀비에게 물리면(전파 방식) 곧바로 좀비(숙주)가 된다. 처음부터 역병으로 불리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병원체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두 번째 시즌에 와서야 생사초 자체가 아니라 잎에 붙은 촌충(병원체)의 알이 역병의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첫 시즌 내내 불완전한 상태였던 역병이 진정한 의미에서 감염병의 위치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코로나19의 경우는 감염병 족보에서 형제 격인 사스, 메르스 등과 마찬가지로 세 요소가 명확하다. 환자(숙주)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병원체)가 포함된 비말 및 호흡기 분비물을 배출하고, 이 분비물에 접촉하면서(전파 방식) 호흡기나 점막을 통해 감염이 발생하고 새로운 환자가 생긴다.
- 병증의 변화
애초에 생사초를 써서 살아난 좀비(1차 감염자)에게 물린 사람(2차 감염자)은 시름시름 앓다 죽을 뿐, 좀비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은 사람(3차 감염자)들은 곧바로 전염성을 가진 좀비가 되고, 이들로 인해 환자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난다.
지율헌의 의녀인 서비는 이를 두고 '병증이 변했다'고 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변한 것은 '전파 방식'이다. 감염병의 전파 방식이 바뀌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몇 년에 한 번씩 유행해 수만 마리의 멀쩡한 닭들을 살처분 운명에 빠뜨리는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과거엔 새들 사이에서만 전염된다고 알려졌지만 1997년 인체 감염 사례가 처음 보고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류독감의 경우엔 아직까지 많은 환자가 발생하진 않았다. 조류와 사람 사이의 종간 전파는 밀접 접촉을 해야 이루어지고, 결정적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전염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다 극단적인 변화의 예는 2003년에 유행했던 사스에서 찾을 수 있다. 사스의 경우 전세계적으로 8천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774명이 사망했다. 이전에 없던 질병이 갑자기 출현했던 이유와 관련해, 많은 전문가들은 쥐나 박쥐 사이에서 오고가던 바이러스가 우연히 사람이란 숙주에 종간 전파를 일으켜 안착하게 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조류독감과 달리 사스 환자가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었던 이유는 사람과 사람간의 전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감염병의 특성을 말할 때 흔히 사람간의 전파력을 수치로 나타내어 사용한다. 한 명의 환자가 전염시킬 수 있는 숫자를 기초감염재생산수, 흔히 R0라고 부르는데, 사스의 R0 값은 2-3이다. 평균 숫자보다 훨씬 많은 이차 감염자를 만들어낸 일차 감염자를 슈퍼전파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유명해진 31번 감염자가 그 예이다. 사스 발생 초기에 중국 광저우의 한 남성 환자는 58명의 의료인을 포함해 100명 가까운 사람을 이차 감염자로 만들어 'Poison King'이란 별명을 얻었다.
사스나 메르스도, 코로나19도 애초에 숙주는 사람이 아니라 박쥐, 쥐, 낙타 등의 동물이었다. 동물만을 숙주로 삼아 옮겨다니던 바이러스에 우연히 변이가 생겼고, 새로운 능력을 획득한 바이러스가 또 우연히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환경이 파괴되고 야생 동물의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공장식 가축 사육이 늘어나면서, 동물과 인간 사이의 종간 감염이 발생할 가능성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가능성의 중심에는 인간의 행동이 있고, 이를 둘러싼 과학과 정치, 관습과 문화에 따라 감염병의 모양새가 달라질 것이다. 킹덤의 좀비에게 일차 감염이 발생한 이유가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으며 역병이 확산되고 병증이 달라진 배경에는 정치의 실패와 지율헌 병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굶주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햇볕, 온도 그리고 환경
킹덤의 좀비들은 해가 뜨면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잠을 자고 해가 진 뒤에 다시 깨서 활동한다. 처음 좀비들을 지율헌 담장 안에 가둘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특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 시즌의 엔딩에서 낮에도 활동하는 좀비가 등장하면서, 의녀 서비는 이들이 햇볕이 아니라 온도에 따라 활동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겨울이 되어 낮 기온이 내려가면서 좀비가 하루종일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감염병 유행은 온도를 비롯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바이러스는 대개 기온과 습도가 낮을수록 활발하게 활동한다. 숙주인 사람의 면역 기능이 떨어지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쉬운 조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외 활동이 줄어들면서 사람 사이의 근접 접촉이 늘어나는 것도 원인이 된다. 계절 인플루엔자가 겨울에 유행하는 것은 이런 이유들에서이다. 반면 온도와 습도가 높아지면 바이러스를 구성하는 단백질 변성이 일어나 전염력이 약해진다고 한다. 사스의 경우에도 2003년 겨울에 시작해 여름에 잦아들었으며, 다음해 겨울에 한번 더 유행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내 전문가들이 추위가 풀리면서 코로나19의 위세가 줄어들고 여름쯤엔 소강상태에 접어들 것이라 예측하는 근거가 된다.
바이러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기온과 습도만은 아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감염자가 많이 발생했던 싱가포르나 태국의 예처럼, 기온이 높더라도 인구밀도나 생활방식 등 다른 조건에 따라 감염병에 취약해질 수 있다. 아프리카나 중동과 같은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 유행하는 에볼라나 메르스 바이러스도 있다. 여름에 사태가 종결된다 해도 어딘가에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사스의 예처럼 다음 겨울에 다시 감염이 시작될 수도 있고, 계절인플루엔자처럼 겨울마다 찾아오는 손님으로 자리를 잡을 가능성도 있다. 킹덤 두 번째 시즌의 마지막회는 역병이 유행하고 칠 년이 지난 뒤를 그린다. 모두가 역병이 사라졌다 생각하고 있을 때 세자와 의녀 서비는 생사초의 흔적을 따라 북방으로 갔다가 좀비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봄을 기다림과 동시에 바이러스의 전파를 줄이기 위한 주의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 과학자의 역할
의녀 서비는 등장인물 모두가 정치를 하고 있을 때 홀로 과학을 맡는 인물이다. 선한 마음과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경외하는 태도로 악한 인물을 살리거나 세자가 중전의 아이를 죽이지 못하게 말리는 등 극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생사초와 역병의 비밀을 밝혀낼 때 더 빛을 낸다. 그 과정에서 의문을 탐구하는 과학자적 태도와 뛰어난 관찰력이 특히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좀비가 밤낮의 변화가 아닌 온도의 변화에 따라 활동한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닫는 것도 서비이다. 그녀는 결국 현미경도, PCR도 없이 가장 중요한 병원체를 밝혀내는 데 성공한다.
개인적으로 손씻기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계절이 바뀌고 감염병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좋은 대안은 과학적 근거를 수집해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전 세계의 과학자들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과학의 필요성과 지식 공유의 효용성을 코로나19 유행 과정에서 어느 때보다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월29일 NEJM에 중국 우한의 환자 425명의 특성을 분석한 첫 논문이 발표된 이래, 개별 증례 보고부터 환자 집단에 대한 보다 심도깊은 분석까지 짧은 기간동안 수많은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었다. NEJM, JAMA, LANCET 등 유수의 저널들은 연구 결과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오픈 엑세스로 신속하게 발표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질병의 특성을 이해해 적절한 방역 대책을 세우고, 나아가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활용될 것이다.
서비의 스승이 기록한 병상일지는 악인의 거짓을 증명하는 증거로 쓰이기도 하고, 역병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서비는 스승에 이어 역병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병상일지에 상세히 기록한다. 병상일지를 보며 지난 달 보았던 코로나19에 대한 증례 보고가 떠올랐다. 7년 간 역병의 비밀을 좇으며 생사초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지만 아직도 밝혀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 마음 한구석 숙연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생사초의 비밀을 알아내게 될 서비에게도, 코로나19와의 싸움을 기록하고 전하는 전 세계의 과학자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 방역에 성공할 것인가
킹덤에서 봉쇄를 통해 역병 전파를 막으려 하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봉쇄의 대상은 지율헌에서, 동래를 넘어 경상땅 전체로 넓어진다. 하지만 봉쇄의 범위가 커질수록 통제 불가능한 변수의 가능성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반면 상주 읍성의 문을 걸어잠그고 고립을 택한 사람들은 좀비가 아닌 굶주림으로 죽을 위험에 처한다.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데 십수일이 걸리고 시체를 달구지에 운반하던 시대에도 역병은 도처에 존재했다. 위생과 의학이 발달한 현대이지만, 바이러스의 종간 감염이 언제든 발생할 가능성을 품고 수백만이 사는 도시에서 완벽한 방역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일지 모른다. 우리는 킹덤이란 웰메이드 드라마가 이번 시즌을 넘어 더 오래 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다시 만나길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다른 신종 바이러스를 만나게 되겠지만, 지금보다 의연하고 익숙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데이비드 콰먼의 책에 나온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바이러스를 주시해야 하는지 알고, 외딴 곳에서 일어난 종간전파가 한 지역 전체로 번지기 전에 현장에서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지역적인 유행이 일어났을 때 전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번지지 않도록 조직화된 역량을 키우고, 새로운 바이러스의 특성을 신속히 파악하여 짧은 시간 내에 백신과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는 연구 기술과 도구를 갖추는 것이다.
(중략)
또한 우리는 오래된 질병의 재유행과 확산은 물론 새로 출현한 인수공통감염병의 유행이 보다 큰 경향의 일부이며, 그런 경향을 만든 책임은 바로 우리 인류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행한 일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데이비드 콰먼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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