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문학적 문장은 '명료하면서도 저속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평범한 말과 생소한 말을 적절히 섞어 쓰는 '중용'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너무 꾸미지도 말고 너무 평범하게도 쓰지 않도록, 명료함과 고상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뜻일 것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이후 여느 아이들처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내주는 분량만큼, 일주일에 이삼일씩. 일기 숙제는 늘 있었지만 5학년이 된 올해는 다른 해와 조금 달랐다. 담임선생님께서 여러 개의 주제를 주고 매달 그 중에서 골라 중간중간 일기 대신 짧은 에세이를 쓰도록 한 것이다. '나에게 램프의 요정이 생긴다면' 같은 노멀한 것부터 '30년 후 내 자녀에게'와 같은 다소 철학적인 주제나 '똥 맛 카레가 맛있을까 카레맛 똥이 맛있을까'와 같은 엉뚱한 주제까지 다양했다. 아이들이 쓴 글에는 선생님이 깨알같은 감상평을 남겨주신다. 대부분 긍정적이고 공감을 표하는 내용이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소통하기에 유용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에 두어 편씩 업데이트 되는 일기장을 보는 것은 나름 쏠쏠한 재미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때도 있었고 위트있는 표현에 웃음을 짓게 될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글솜씨가 늘어가는 게 보여 흐뭇하기도 했다. 때로는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일기 쓰기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마 선생님의 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날은 선생님이 제가 쓴 일기가 재미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고 으쓱해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도 짤막한 감상평을 전달하곤 했다.
근래 들어 아이의 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글의 소재나 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표현에서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읽는 이를 의식하고 쓴다 할까. 물론 아이의 일기는 애초부터 혼자만 간직할 수 있는 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근의 글에선 재미나고 독특하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이전보다 더 엿보였다. 꾸밈이 많아진 글은 본래의 자연스러움이 줄었고 때로는 과하게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타인에게 읽히지 않는 글은 거의 없다. 심지어 지극히 사적인 일기마저도 후대에 책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운명에 처하곤 하지 않던가. 우리가 쓰고 접하는 대부분의 글은 미래의 독자를 의식하고 쓰는 것이며, 독자를 의식하고 나아가 이해할 때 더 좋은 글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진다. 모 소설가는 글을 쓰는 것이 연애 편지를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일정부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연애 편지는 내 역량을 총동원해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위한 표현을 고민한다는 면에서 가장 좋은 글쓰기가 될 수 있다.
예전 일기가 더 좋았어. 며칠 전 아이의 일기를 읽은 아내가 내게 말했다. 아내도 같은 느낌을 받았나보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중용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쓰는 글의 변화를 목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욕심을 부려 잠시 균형을 잃었을지 몰라도, 아이의 글쓰기는 또 제 나름의 균형을 찾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글들을 쓰게 될까. 그리고 그 글을 쓰는 아이는 어떻게 변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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