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순수함의 형태

아이들 독감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단골 소아청소년과에 가는 길이었다. 가을 바람에 부드럽게 부딪히는 햇살이 눈부셨다. 아직 주사 맞을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초등 1학년 꼬맹이는 아침부터 잔뜩 긴장한 상태다. 병원 가기 싫은데... 란 말을 벌써 수십번째 하고 있었다. 반면 주사에 대한 공포를 이미 극복한 오빠는 소풍가듯 평온한 태도로 몇 걸음 앞서 걷는다. 옆에서 종종걸음을 치던 꼬맹이가 내 손을 잡았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촉촉했다.

- 근데 아빠. B형 독감에 걸렸었는데 또 주사를 맞아야 하는거야?

-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매년 조금씩 모양이 바뀌거든. 그래서 매년 다시 맞아야해.

- 근데 난 독감 걸린지 얼마 안되었잖아. 작년이 아니잖아.

어,,, 그랬었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난 겨울 독감 시즌은 유난히 길었고, 꼬맹이가 B형 독감 진단을 받은 것은 올해 4월 초였다. 독감 진단은 아이가 당장 다음날부터 학교를 못간다는 의미였지만 우리에겐 급히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당일 저녁 꼬맹이만 데리고 무안의 외갓집에 내려가 맡긴 뒤 밤기차로 다시 서울에 올라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덕분에 둘이서만 때아닌 기차여행을 했었다.

- 그랬었지. 그때 가연이가 아빠랑 할머니 댁에 가면서 오빠한테 편지 써놓고 갔잖아.

- 무슨 편지?

- 가연이 없는 동안 방에 있는 물건 건드리지 말라고.

- 아 맞다. 생각나.

꼬맹이는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잠시나마 긴장이 풀린 얼굴로 키득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 나 그때 할머니 집에 있을 때 아빠가 많이 보고싶었는데.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도 생각이 났어. 그냥 그랬어. 이런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했다. 대화의 맥락으로 보자면 굳이 필요치 않은 말이었지만 아이의 말투가 너무나 밝고 자연스러워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 그때 할머니 집에서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순간 직면했던 것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만약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함에 형태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잠깐 모습을 비춘 순간이었을 것이다. 달리 어떤 것이 더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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