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밤 열 시경에 은마아파트 앞 사거리를 지나는 경험을 처음 한다면 아마 눈앞의 풍경에 놀랄 것이다. 밤 늦은 시간임에도 도로의 정체는 퇴근길 러시아워를 방불케 한다. 왕복 8차선 도로와 인도는 차량과 사람으로 가득하다. 보행 신호등이 켜질 때면 백 명은 족히 될 듯한 수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빽빽하게 채운채 길을 건너는 진풍경도 볼 수 있다.
술집 하나 없는 밤거리가 차량과 인파로 가득한 걸 보고 느끼는 놀라움은 뒤이어 의아함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편도 네 개의 차선 중 인도와 접한 차선은 불법 주정차 차량으로 메워져 있고 나머지 세 개의 차선엔 차량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락션 소리는 뜸하기 때문이다. 옆 차선에서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량에도 대개 선뜻 양보를 한다. 몇 블럭 건너 테헤란로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클락션은 물론이고 욕설이 난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교통 정리를 하는 모범운전자들의 호각 소리가 들릴 뿐이다.
길을 걷는 이들은 대부분 앳된 얼굴의 십대들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모두가 큰 백팩을 매고 있다. 아이들의 옷차림새도 비슷하다. 무채색 계열의 겉옷을 입은 아이들은 사거리를 둘러싼 건물들에서 쏟아져나와 거리를 바삐 걷다가 정차된 승용차로, 버스 안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삼십 분쯤 시간이 지나면 군중과 차량은 썰물처럼 사거리를 빠져 나가고 거리도 한산해진다.
몇 달 전부터 일주일에 두어 번씩 아들을 데리러 이곳에 간다. 밤 열 시에 이 거리를 지나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나도 주변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처음 몇 번은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뒷골목을 뱅뱅 돌아야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어느 골목에 빈 자리가 있는지를 대략 파악하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는 게 좋다. 대개는 간식으로 아들이 좋아하는 초코빵 같은 걸 가져가지만, 준비해가지 못하는 날엔 편의점에서 먹을 거리를 사야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편의점 최애 간식은 스팸마요 삼각김밥이다. 그런데 학원에서 몰려나온 아이들로 북적이는 열시 십분 쯤 편의점 매대 삼각김밥 코너는 대개 텅 비어있다. 삼각김밥을 사지 못한 날은 아쉬운대로 핫도그를 산다. 계산을 하며 편의점 안을 둘러본다. 테이블은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의 차지다. 자주 가다 보니 이제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처음엔 밤늦은 시간에 편의점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이 좀 안돼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금 이 시간이 아이들에겐 나름 위안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비어있는 배를 채우든 마음을 채우든, 채울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옆에 선 아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든말든 아이들은 그저 컵라면과 삼각김밥, 닭꼬치와 핫도그를 꾸역꾸역 바쁘게 입에 넣는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내가 '대치동 라이딩'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사교육에 열심인 편이 아닌데다 대치동이 상징하는 사교육 시스템의 꼭짓점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엔 아이들이 커가면서 대치동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은 살고 싶은 동네라기 보다는 유익한 동네였고, 유익함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는 컸다. 어떤 이는 대출을 받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멀쩡히 살던 자기 집을 두고 낡고 좁은 아파트 전세로 가기도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속으로 혀를 차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대치동을 통해 드러나는 날선 욕망을 은근히 폄하했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그저 고고한 척 하는 선비처럼. 하지만 아들이 중학교에 가고, 입시 현실에 대해 좀더 알게 되면서 그런 생각도 좀 줄어든 것 같다.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진 않았지만 라이딩을 하고 있으니 서투른 고고함도 절반쯤은 내려놓은 셈인가. 정지 신호에 줄지어 멈춰선 차량의 후미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거리 정지 신호로 서행하는 차선에서 검은 세단이 갑자기 앞으로 끼어들어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한 차선을 더 건너가 비상등을 켜고 선 세단 옆으로 회색 후드티에 백팩을 맨 여학생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냉큼 올라탄다. 막히는 거리에서 클락션 소음이 뜸한 건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뚤어진 것은 사회와 시스템이지 사람들이 아니다.
수학 수업은 일주일에 세 번이다. 아들은 학원에 갈 때는 버스를 탄다. 밤엔 회의나 모임이 있는 날이 아니면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내가 데리러 간다. 셈을 해보니 그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라이딩을 했던 것 같다. 집에서 은마아파트 사거리까진 이십 분 정도 걸리니 아주 먼 거리는 아니다. 라이딩이 힘들어 대치동으로 이사간다는 말도 있는데 내겐 그리 힘들지 않다.(물론 매일 라이딩을 해야 한다면 상황이 다를 것이다.) 오히려 조금은 즐겁고 설레기도 하다. 집에 오는 동안은 온전히 아들과 둘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차 안에선 평소에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새로 전학을 온 친구나 얼마 전 시작한 동아리 활동에 대해 들은 것도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어떤 날은 돌아오는 내내 별다른 대화 없이 아들이 선곡한 음악만 듣기도 하는데 그것도 좋다. 요즘은 학원 앞에서 함께 탕후루를 하나씩 사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일 년 동안 학교 기숙사에 있었다. 통학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그때는 원하는 3학년을 대상으로 기숙사를 운영하는 지방의 고등학교들이 꽤 있었다. 요즘 학교 기숙사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공부에 집중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주중엔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토요일에 빨랫감을 싸들고 집에 갔다. 기숙사에 있는 다른 친구들은 주말이 되어야 부모님을 만났지만, 나는 매일 어머니를 만났다. 오후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기 때문이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매일 같은 시간에 맞춰 어머니를 만나러 나갔다. 어머니는 항상 먼저 와 약속 장소인 운동장 구석에서 나를 반기셨다. 여름엔 토마토를 갈아 만든 쥬스를, 다른 계절엔 곰국을 보온병에 담아 오셨고 나는 화단을 둘러싼 큰 돌에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보온병에 담긴 내용물을 홀짝였다. 기껏해야 쉬는 시간 십여 분이 전부였지만, 어머니는 그 시간을 위해 매일 택시를 타셨다. 집에 자가용이 없던 때라 택시를 이용했고 혼자 왕복했다는 게 다를 뿐, 내 어머니도 수험생 아들을 위해 매일 라이딩을 하신 셈이다.
얼마 전 아들과 집에 오는 길에 할머니의 라이딩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일 년 동안 매일 택시를 타고 학교에 왔다 가셨다고 하니 아들이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대?"
"그냥. 그게 할머니의 마음이셨던 거지."
잠깐동안 말이 없던 아들이 한마디 했다.
"조금 감동이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좋아하는 뉴진스의 신곡을 실시간으로 함께 들었다. 라이딩을 하다 보면 이런 소소한 즐거움도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반복해 노래를 들으며 아들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들은 곧 잊어버리겠지만, 내게 둘이서 처음으로 이 노래를 함께 들었던 기억은 오래 갈 것이다.
삼십 년 전 무덥던 여름날, 보온병을 안고 에어컨도 시원치 않은 작은 택시를 타고 오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땐 몰랐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때 운동장 구석에서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역시 특별한 이야긴 아니었으리라. 행여 수험 생활로 쌓인 짜증을 괜히 어머니께 쏟아놓거나 심통을 내진 않았을까. 그것도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어머니와 함께 했던 찰나의 시간들이 어머니에게도 설렘과 즐거움, 그리고 오래 되새길 수 있는 기억을 남겨드렸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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