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국민학교 입학 전의 일들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앨범 사진같은 몇 개의 이미지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도 80년과 82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였다.
80년은 탄광촌 마을에서 대도시인 광주로 이사를 온 해이자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그래선지 그때부터는 조금은 더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릴 수 있다. 아버지가 일하시던 가게, 흐리게 생각나는 등하교길이나, 담임선생님의 얼굴 같은 것들. 그중엔 그해 5월 어느 날인가의 기억도 있지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해에도 우리 가족은 비교적 안온한 일상을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이건 당시 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의 어렴풋한 기억일 뿐이다.
82년은 프로야구가 시작된 해다. 왜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엔 남자아이들이 모이면 으레 고무공이나 테니스공으로 주먹야구를 했고, 나도 그중 하나였기에 다른 스포츠보다 익숙해서였을 것이다.(광주에선 주먹야구를 '하루'라고 불렀는데 다른 지역에선 '짬뽕'으로 불렀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유야 뭐였던간에 아이들은 새로 출범한 프로야구와 TV에서 볼 수 있는 야구 중계에 금새 빠져들었다. 팀이 지역을 연고로 했다는 것도 인기의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 동네 야구팀이라니, 당연히 응원할 수밖에.
아이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모든 팀이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고, 해태 타이거즈 회원증은 내게 인생 첫 멤버십이었다. 어린이회원 가입 장소는 해태제과 공장이었는데, 5천원짜리 지폐를 들고 황량한 논밭길을 버스로 지나 작은 사무실을 방문했던 기억, 야구모자와 티셔츠, 사인볼과 스티커 사은품에 두근두근하던 기억이 난다.
이듬해인 83년,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을 했다. 공터에서 고무공을 치고 던지는 동네 아이들은 모두가 김봉연이었고 이상윤이었다. 한국시리즈 때는 온 도시가 들썩였다. 우승 후 겨울에 해태제과에서 광주 시내에 우승 기념 전단지를 뿌렸는데, 전단지 하나를 슈퍼에 가져가면 누가바 하나와 바꿔주었다. 부라보콘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누가바라도 어딘가. 동네 아이들과 아파트 우편함에 꽂힌 전단지를 여러 장 모아 한꺼번에 누가바 다섯 개쯤을 받기도 했다.(한꺼번에 더 많이 가져가면 슈퍼 아저씨가 눈총을 주었던 것 같다.) 마침 하늘에서 싸락눈이 펑펑 내려서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눈보라가 치는 아파트 단지 안 길을 강아지마냥 마구 뛰어다녔던 기억.
그날은 마침 휴일 아침이었을 것이다. 잔뜩 고양된 아이들은 내친김에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 사인을 받기로 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선수들이 몇 있었는데, 우리가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차영화, 김성한, 김무종 선수였나? 김성한 선수에겐 호통만 듣고 도망쳐 나왔고, 김무종 선수에겐 사인을 받았던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휴일 아침에 다짜고짜 집에 쳐들어와 사인을 내놓으라 하는 꼬마들이 선수들에겐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그럼에도 그해엔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구단이 매각되기 전 20년 동안 아홉 번 우승했다. 해마다 봄이면 집단 우울증을 앓던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잠시나마 트라우마를 잊게 해주는 프로작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경기 후반부에 울려퍼지던 응원가가 '남행열차'가 아니라 처량하기 짝이 없는 '목포의 눈물'이었다는 것, 2000년 이전까지 5월18일에 단 한 번도 홈경기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엔 모기업도 바뀌었고, 새 홈구장도 생겼고, 이제는 예전만큼 밥먹듯이 우승하던 시절도 지났다. 나도 이제는 어렸을적 무등경기장만큼 야구장에 자주 가지 못하지만, 지금도 야구장을 보면 조금은 마음이 설렌다.
한명재 캐스터의 우승콜이 화제다. 어떤 이는 그 우승콜을 듣고 뭐 그리 유난이냐고, 프로야구 출범하기도 전의 일을 왜 끄집어오냐고, 왜 야구장에서 정치질이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그 해설이 타이거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던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보편타당한 헌사로 들렸다.
"광주,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픔을 야구로 극복한 도시에서, 타이거즈는 운명이자 자랑이었습니다. 그런 KIA 타이거즈가 7년 만에 프로야구 챔피언에 오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