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3일 토요일

연수일기 41. 운전면허 실기 시험

4월 1일 목요일. 68일째 날. 운전 면허 실기 시험을 보았다. 필기 시험에 합격하면 DMV 홈페이지에서 각 시험장 별로 가능한 실기 시험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필기 시험에 합격한 3월 2일에 확인한 가장 빠른 일정이 한 달 뒤인 오늘, 클레어몬트 DMV였다. 며칠 전부터 실기 시험 관련 유튜브 클립을 찾아 살펴보았다. 주의할 점이나 DMV 별 코스에 대한 동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으므로 참고가 된다. 실제 시험 과정을 촬영한 블랙박스 영상들도 찾을 수 있다. 

실기 시험은 캘리포니아 운전 면허가 있는 사람을 동반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행히 둘째 친구 어머니께서 흔쾌히 시간을 내주어서 함께 올 수 있었다. 접수 과정에서 면허 소지자와 같이 왔는지를 물어보긴 했지만 실제 확인을 하진 않았다.(이 부분은 DMV마다 다를 수 있다고 한다.) 미국에선 자신의 차로 실기 시험을 볼 수 있다. 한국과 다른 교통 법규 때문에 운전 경력이 많은 사람도 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기에 대기 선에서 기다리는 동안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시험 대기 중


차례가 되자 감독관이 차의 상태와 헤드라이트, 브레이크, 비상등 등의 작동에 문제가 없는지, 수신호를 알고 있는지를 확인한 뒤 테스트를 시작했다. DMV 주변의 도로를 주행하고 돌아오기까지 15분 정도가 걸렸다. 결과는 다행히 합격이었다. 에러가 15개가 넘거나 크리티컬 에러를 1개라도 하면 탈락인데, 테스트가 끝난 후 기록지를 확인해보니 7개의 에러를 했다. 주로 정지선을 밟아서 생긴 문제였다.

채점표

아내는 크리티컬 에러를 해 탈락했다. 주차장에서 나오는 차가 있어 무심코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이게 교통 흐름을 방해하고 사고를 낼 수 있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차선을 바꿀 때 숄더 체크를 확실히 하지 않았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시험을 볼 때의 도로 상황도 영향을 미치고, 어느 정도는 운도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실기 시험은 총 3회까지 볼 수 있고, 세 번째 시험에 불합격하면 필기 시험부터 다시 봐야 한다. 집에 돌아와 가장 빠른 일정인 3주 뒤로 재시험 예약을 했다. 

외국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는 캘리포니아 법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이었는데, 실기 시험을 준비해보니 조금은 이해도 된다. 한국과 다른 미국의 교통 체계와 법규에 적응하려면 주의가 필요하고, 이십 년 넘게 운전을 해온 나도 아직까지 편하진 않다. 실기 시험을 준비하면서 이런 점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것 같고 이런 과정이 보다 안전한 운전을 하는 데에 도움은 되는 것 같다. 합격 후 실물 면허증이 도착할 때까지 사용하도록 종이로 된 interim license를 준다. 아내가 함께 합격했다면 이 시점에서 자동차 보험을 더 저렴한 조건으로 변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지만 그래도 이제야 정착에 필요한 숙제를 다 끝마친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4월 2일 금요일. 69일째 날. 한국에서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건어물과 양념들, 여분의 마스크, 그리고 아이들의 학용품과 간식 등이다. 우체국 택배를 이용했고,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짐을 풀고 정리하는 동안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솟았다.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 슬라임 재료와 같은 한국에서 익숙하던 놀잇감을 만난 둘째가 특히 좋아했다. 아들은 H 선생님 집에서 VR 게임을 했다. 저녁은 멕시코 음식 체인인 El Pollo Loco에서 치킨을 사다 먹었다. 이곳 치킨이 한국 치킨과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정말 굽네치킨 같은 오븐구이 치킨과 비슷했다. 내일은 그랜드 써클 여행을 떠나는 날이라 일찍 일어나야 한다. 

2021년 4월 2일 금요일

연수일기 40. Caroline's Seaside Cafe, 연구실 출근

3월 29일 월요일. 65일째 날. A 교수님 비서를 통해 연구실 열쇠를 받기로 했는데, 금요일에 화이자 백신 2차 접종을 하고 몸이 안 좋아 출근을 못한다는 연락이 왔다. 수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오전에 아내와 Caroline's Seaside Cafe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스크립스 해양 연구소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La Jolla Shores beach가 보이는 뷰맛집이다. 브런치 메뉴도 괜찮았다. UCSD ID card가 있으면 30% 할인이 된다. 

카페에서 해변으로 내려가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Ellen Browning Scripps Memorial Pier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이 다리 밑은 커플 사진을 찍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해변에 인접한 연구소 쪽으로 올라가면 결혼식을 할 수 있는 작은 홀도 있다. 

Ellen Browning Scripps Memorial Pier 교각

오후에 C 선생님의 둘째가 집에 놀러왔다. 우리 딸과 같은 나이이지만 두 아이 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 친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저녁엔 아내가 아들 머리를 잘랐다. 미용 비용이 워낙 비싸다 보니 미국에 연수를 오면 아이들 머리를 집에서 자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자 아이 미용은 쉽지 않은데 그럴 듯 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3월 30일 화요일. 66일째 날. 처음으로 아파트 gym에서 운동했다. 지금은 여섯 명 이하로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 전반적인 시설은 괜찮았다. 다양한 유산소 운동 기구에 비해 벤치프레스, 데스리프트 등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중량 운동 기구가 없어 아쉬웠다. 


3월 31일 수요일. 67일째 날. 연수 시작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연구실에 출근했다. 샌디에고 카운티의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고 나서 연구실 출근에 대해 상의했고, 당분간 일주일에 두 번 나가기로 했다. A 교수님 연구팀의 공유 연구실은 UCSD 본 캠퍼스 바깥에 있는 별채 건물인 The Campus on Villa La Jolla의 2층에 있었다. 비서에게 연구실 이용 방법을 듣고 열쇠와 주차증을 받았다. 아직은 연구실 이용 인원을 제한을 하고 있고, 재택 근무를 하는 연구원들이 많다. 덕분에 꽤 넓은 방을 혼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연구실에 앉아 일할 수 있어 좋았다. 

별관 연구실 입구

밤에는 한국의 연구진들과 진행 중인 당뇨병 약제에 대한 연구 미팅을 했다. 한국 시간으론 오후라 대개 늦은 밤에 화상 회의를 하게 된다. 한동안 진행이 더뎠는데, 데이터 분석이 마무리 단계라 앞으로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 3월 29일 월요일

연수일기 39. Covid-19 백신 접종, 미라마르 호수

3월 26일 금요일. 62일째 날. 새벽에 어제 받은 covid-19 테스트 결과가 도착했다. 딸아이도 나도 음성이었다. 행여 양성이었다면 아이들 둘 다 한동안 학교에 못 가고 가족 모두가 집에만 있어야 했을텐데,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이는 오늘은 집에서 쉬기로 했다. 


3월 27일 토요일. 63일째 날. covid-19 백신 접종을 위해 아침에 UCSD에 갔다. 접종 장소는 실내 체육관인 RIMAC arena 였다. 학교 밖에서부터 체육관까지, 접종 장소를 알리는 표지판이 줄지어 설치되어 있었다. 

접종 장소로 가는 길

아침부터 접종을 위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입구에서 약속된 일정과 신분증을 확인했다. 체육관 안에는 수십 개의 간이 데스크가 있었고, 각 데스크마다 접종을 담당하는 간호사 한 명과 보조를 하는 직원 한 명이 짝을 지어 일했다. 주사를 맞은 후 접종 카드와 2차 접종에 대한 안내를 받고 이상 반응 모니터링 장소(농구 코트)로 이동해 15분간 기다리며 문제가 생기지 않음을 확인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미라마르에 있는 Flying Leatherneck Aviation Museum을 방문했다. 2차 세계대전부터 쓰이던 각종 항공기들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다. 예산 부족으로 이번 주말까지만 운영하고 완전히 닫는다고 한다. 기념품 샵에선 박물관이 문을 닫기 전 남은 물건들을 떨이로 팔고 있었다. 문을 닫기 전 박물관의 모습을 눈에 담아주려 한 건지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이 많았다. 안내를 하는 분들이 대부분 나이 지긋한 남자였는데 대부분 참전 용사들이 아니었나 싶다. 전시된 헬기를 베트남전에서 직접 조종했던 분이 헬기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아이들도 나도 설명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었을텐데. 전쟁이나 항공기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금새 지루해 해 오래 있긴 어려웠다. 

이 근처엔 브루어리가 많다. 그중 Ballast Point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음식이 훌륭했다. 식사 후 미라마르 호수 Lake Miramar에 들렀다. 피크닉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 낚시를 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곳에서 낚시를 하려면 어른 한 명 당 8달러를 내야 했다. 언젠가 음식을 준비해 다시 와도 좋을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 호수를 돌아 레이크뷰 공원에서 차를 잠깐 멈췄다.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작은 공원이 무척 아름다웠다. 

미라마르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레이크뷰 공원


호수에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모더나나 화이자 접종의 경우 피로감, 두통이 가장 흔한 전신 부작용이다. 갑자기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두통과 약간의 어지럼증도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 한 시간 반정도 자고 나니 컨디션이 좀 나아졌다. 

2021년 3월 26일 금요일

연수일기 38. Covid-19 백신 예약과 검사

3월 24일 수요일. 60일째 날. 샌디에고의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Red tier로 완화되면서 A 교수님께 다음 주부터 연구실에 출근하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The Campus on Villa La jolla 건물에 위치한 공유 연구실은 정원의 25% 한도인 5명 미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직 재택 근무를 하는 연구원들이 많아 월요일을 제외하면 여유가 있었고, 화요일과 목요일에 연구실을 사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UCSD 캠퍼스 안에서 일하는 경우 1주일에 한 번씩 covid-19 test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2회의 백신 접종을 마친 경우 테스트는 필수 사항이 아니었다. 

Healthcare worker는 백신 접종 순서의 Phase 1A, 가장 우선 순위에 해당한다. A 교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도 백신 접종 대상이 될 것이고 빨리 맞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엄밀히 보면 나는 이곳에서 병원 안에서 일하거나 환자를 만나고 있지 않으므로 이 기준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동안 접종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다. 백신 공급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좀 더 급한 대상자들이 우선이어야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clinical laboratory worker 역시 Phase 1A에 해당하므로 연구실에 출근하게 된다면 백신을 맞아야 한다. 

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 내 백신 접종은 백신 접종 사이트에 등록된 이들에게 순차적으로 통보가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개인이 먼저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러 등록 사이트가 있는데, 내 경우엔 UCSD에서 운영하는 MyChart를 통해 예약 통보를 받는다. UCSD 구성원들에게 정기적으로 발송되는 covid-19 관련 메일에서 아직 백신을 맞지 않은 경우 담당 부서의 책임자를 통해 연락할 수 있는 메일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어제 A 교수님께 해당 방침과 메일 주소를 보냈고, 오늘 백신 접종 담당 부서에서 접종 예약 전화를 받았다.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 중에 선택이 가능했고, 이번 주 토요일에 모더나 백신 접종을 위해 방문하기로 했다. 


3월 25일 목요일. 61일째 날. C 선생님 내외를 초대해 점심을 먹었다. 요리를 잘 하는 아내가 코스트코에서 사온 돼지 등갈비를 이용한 김치찜으로 또 솜씨를 발휘했다. 중고로 구입한 인스턴트 팟을 요긴하게 쓰고 있는데, 아내는 나중 한국에 가서도 하나 구입할 생각이다. 

어제 밤부터 둘째가 목 안이 좀 불편하다고 했다. 증상이 심하지 않고 열이 없어 아침에 학교에 보냈는데 학교에서 조퇴를 시키겠다고 연락이 왔다. 오후에 Covid-19 검사를 받고 그 결과가 확인되고 증상이 좋아지면 학교에 다시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샌디에고 카운티 웹페이지에서 요일 별 무료 검사소를 확인했다. 샌디에고 대학 주차장 건물에 설치된 검사소가 오늘 가능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입구 왼쪽에는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 부스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테스트 부스들이 줄지어 있었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바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연구실에 출근하려면 백신 접종을 마칠 때까지 당분간 나도 검사 결과가 필요할 것 같아 아이와 함께 검사를 받았다. 작년 말에 한국에서 검사를 한 번 받아봤던 따님은 코 깊숙이 솔을 넣는 검사 과정 때문에 검사 전부터 울상이 되어 잔뜩 긴장했다.

스마트폰으로 웹사이트에 인적 사항을 입력하고 동의서에 사인을 한 뒤 손 소독을 하고 검체 보관용 bottle을 받은 뒤 검사 부스로 이동했다. 부스 직원에게 검체 채취용 솔을 받아 나는 직접 검체를 채취하고 딸은 부스 직원이 채취해주었다. 이곳에선 anterior nasal collection 방법을 쓰고 있어서 아이가 훨씬 편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CDC에서는 의료인 또는 환자가 채취하는 해당 방법을 사용 가능한 채취법 중의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

https://www.cdc.gov/coronavirus/2019-ncov/lab/guidelines-clinical-specimens.html

전통적인 nasopharyngeal swap 방법에 비해 oropharyngeal swap의 민감도가 떨어진다고 알고 있었다. anterior nasal collection은 아이가 편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고 의료진의 부담도 적어서 좋긴 한데, 어느 정도의 정확도가 보장된 것인지 궁금했다. PCR이라 해도 결국 물리적으로 검체의 양에 따른 영향을 받을텐데.

검사 결과는 2-4일 내에 이메일로 보내준다고 한다. 내일은 학교를 안 가고 집에서 쉬어야 할텐데,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다. 


Covid-19 무료 검사소 풍경


2021년 3월 25일 목요일

연수일기 37. 문어와 막걸리

3월 22일 월요일. 58일째 날. 시온 마켓 Zion Market에서 장을 보았다. 샌디에고에서 H마트와 자웅을 겨루는 이 한인 마트는 두 번째 방문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오늘은 시간에 여유가 있어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채소 가격이 무척 쌌다. 채소는 앞으로 여기서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쌀과 한국 라면들, 그리고 미국 마트에서 팔지 않는 조기도 샀다. 한입 크기로 잘게 썬 문어와 막걸리도 두 병 카트에 넣었다. 저녁으로 이곳에 와서 처음 생선다운 생선을 먹고, 데친 문어에 막걸리도 (맛은 좀 아쉬웠지만) 한 컵 마시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 정도면 근사한 한 상

저녁을 일찍 먹으니 식사 이후에도 시간이 많이 남는다. DST 이후로 해가 길어진 것도 이유일 것 같다. 식탁을 정리하고 딸아이와 수영장에 갔다. 아이는 저녁 시간에 자쿠지에 앉아있는 걸 좋아해 요즘은 거의 매일 저녁 수영장에 가자고 조르곤 한다. 따뜻한 자쿠지에 앉아 어둑해져 가는 하늘의 별을 보며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보니 몸이 노곤해졌다. 이것도 여기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3월 23일 화요일. 59일째 날. Jogathon day로 어제 운동장을 여섯 바퀴 달렸다던 둘째가 허벅지가 당긴다고 울상을 지으며 워터 폴로 수업에 가기 싫다고 한다. 주 4회 수업이라 어제에 이어 오늘도 수업에 가야하는 첫째도 마찬가지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서 차에 태웠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와서 둘째는 기분이 나아졌지만 아들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녁 농구 수업이 있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수업 전에 저녁을 빨리 먹어야 한다. 

아이들 운동 수업을 보내는 건 힘든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 아닌데, 아이가 얻는 즐거움은 없이 힘든 시간만 보내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되면 워터 폴로 수업을 그만두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농구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서 아들과 이야기했다. 오늘 학교에서 힌두이즘의 역사에 대해 소그룹 학습을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역사 선생님의 말씀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어 40분 동안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익숙하지 않은 주제에 대한 수업에서 더 어려움을 느끼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더 기분이 가라앉았던 것 같다. 운동 수업에 대한 아내와 내 생각도 이야기해주고 아이의 생각도 들었다. 힘들지만 지난 주보다 조금은 적응이 된 것 같다고도 한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받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떨어지지 않는지도 물었지만 그건 괜찮다고 했다.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수업을 계속 받을지는 남은 등록 기간 동안 생각해보겠다고도 했다. 수업은 언제든 그만둘 수 있으니 너무 힘들면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일러 주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아이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이곳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아들이 몸 뿐만 아니라 생각도 부쩍 자란 걸 느낀다. 아이는 꾸준히 자라고 있었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엔 그걸 느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2021년 3월 23일 화요일

연수일기 36. Julian 방문

3월 20일 토요일. 56일째 날. '사과의 도시'라고 불리는 Julian에 다녀왔다. 샌디에고에서 1시간 정도 거리의 작은 도시로, 4천피트가 넘는 고산지대라 기온이 낮다. 게다가 오전엔 구름이 잔뜩 끼고 간간이 비도 흩날려 날씨가 좋지 않았다. 날씨가 좋을 때는 LA에서도 나들이 오는 사람들이 많아 길거리가 북적거린다고 하는데 이날은 한산했다. 

브런치가 가능한 작은 카페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시내를 둘러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메인 도로 주변에 관광객이 볼 만한 기념품점과 다양한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사과 도시답게 애플파이 가게가 많았다. 가장 유명하다는 Mom's Pie House에서 애플 파이 두 개를 샀다. 지난번에 C 선생님이 사다 준 Julian Pie Company의 파이도 맛이 좋았는데, 이곳 파이도 훌륭했다. visitor center에서는 수선화 경연대회에 출품된 꽃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가을 축제 기간에는 볼 것이 더 많고 사과 농장에서 사과를 따는 체험도 할 수 있다고 하니 날씨가 더 따뜻해지면 다시 파이를 사러 와도 좋겠다. 

Mom's Pie House

돌아오는 길엔 79번 국도를 타고 쿠야마카 호수 Lake Cuyamaca를 지나쳐 갔다. 호수를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도로를 따라 보이는 풍경도 충분히 멋졌다. 기름을 넣기 위해 코스트코에 들렀는데, 아내가 고기를 사러 매장에 잠깐 들어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직원의 도움으로 사무실에 보관된 지갑을 찾을 수 있었다. 지갑 안에 들어있던 현금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은행 카드와 신분증 등을 잃어버렸다면 한동안 골치가 아팠을거라 그나마 곧바로 찾은 것이 다행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미라메사의 베트남 음식점 Pho Cow Cali에 들러 쌀국수를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국물 음식이 좋았다.


3월 21일 일요일. 연수 57일째 날. 어제 짧은 여행에 몸이 좀 피곤했나 보다. 아이들도 늦잠을 잤고 아내와 나도 몸이 무거워 오전에 장을 보러 나간 것 말고는 종일 집에서 쉬었다. 

2021년 3월 19일 금요일

연수일기 35-1. Gabe's diary: 영어 연습, 따로 해야 되니?

이제 학교에 가기 시작한지 거의 3주가 넘었다. 그동안 꽤 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왔고 이제 학교 생활엔 조금 적응한 터이다. 하지만 영어 실력이 늘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영어 실력이 늘어야 학교 생활이 더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 그동안엔 딱히 재미있는 일은 없었다. 그놈의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도 해야할텐데 정말 하기가 싫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거란 생각에 더 하기 싫은 것 같기도 하다. 이건 아빠의 말인데, 두 달 정도만 지나면 나아질 거라 하셨다. 내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이란 걸 알지만 (사실 아빠의 말은 가끔씩 믿음이 안 간다) 이 말이 어느새 내 머리 속에 뿌리를 내려 굳이 영어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일기를 쓰는 지금도 아빠 말이 맞기를 빌면서 여전히 영어 연습은 안하고 있다.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연습이 된다고는 하지만 벌써 3주가 다되도록 변화가 없는 게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요즘은 이전보단 알아듣는 말이 많아지긴 했으니까. 

자꾸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학교에서 적응을 잘 하려면 연습을 해야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누가 시켜도 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나도 동생처럼 미국에 오래 산 학교 친구가 있다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요즘은 한국의 B와 마크를 자주 한다. B는 미국에 살다 와서 나보다 영어를 잘 하니까 정보도 얻을 겸 영어로 대화를 해볼까 생각 중이다. 주입식 연습보단 재밌고 사소한 방식으로 연습을 해보면 나을 것 같다. 엄마 아빠가 적응을 빨리 하라고 보낸 워터폴로는 도움은 되지만 너무 힘들어 금새 에너지가 바닥난다. 

요즘 사회 시간엔 세계사를 공부한다. 처음 전학왔을 때는 고대 이집트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인도에 대해 배우고 있다. 지리적 특징이나 종교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용도 어려운데 해석도 안되니 당연한 거란 생각은 들지만, 대답을 꼬박꼬박 하는 친구들을 보면 열등감이 든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자니 귀찮기도 하다. 이럴 땐 그냥 가만히 있는데, 약간 당황한 티를 내는 것이 좋다. 그럼 친구들이 옆에서 도와주기 때문에. 

아직 1년이란 시간이 있다. 그정도면 사회 과목 정도는 배울 수 있겠지. 불교에 대해 배울 때쯤엔 친구들 답을 베껴 쓰진 않고 절반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믿고 싶다.) 누군가 무능력과 귀찮음에 지배당한 나를 구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역시 내가 노력을 해야하는 거겠지. 

연수일기 35. 아이들 문제

3월 18일 목요일. 54일째 날. 아침에 아내와 조깅 후 수영을 했다. 아직 조금은 쌀쌀한 날씨지만 햇살은 항상 따뜻해서 날씨가 흐리지 않고 바람이 없으면 수영도 할 만 했다. 문을 연 gym 안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딸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미술 수업 사진을 보내주셨다. 처음 학교에 구경을 왔을 때, 아이들 수업을 하는 자리에 놓인 이젤과 미술 도구들이 인상깊었는데, 날씨가 좋은 날엔 미술 수업을 종종 야외에서 진행하는 것 같다. 

2학년 아이들의 미술 수업 모습

오늘도 아이들 워터 폴로 수업이 있었고, 정식 수업 세 번째인 아들은 오늘부턴 12세 반에서 10세 반으로 옮겨 수영 연습을 좀더 하기로 했다. 코치가 12세 반에 머물지 아님 반을 옮길지를 물어봤는데, 10세 반으로 옮기는 건 자존심에 상처가 날 것 같아 고민이 되었지만 너무 힘들어 그냥 옮기겠다고 했단다. 부담이 적어서인지 수업이 끝나고 표정도 조금 더 편안해 보였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변할지 여전히 확신이 없었지만, 스스로의 선택 한 가지가 더해졌으니 여유를 가지고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한국에선 의사 협회 회장 선거가 진행 중이다. 해외에서도 인터넷을 통한 투표가 가능해 마지막 날인 오늘 참여했다. 어떤 분이 당선되든 전문가 단체로서 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행보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3월 19일 금요일. 55일째 날. 오늘 연구 미팅에선 아리조나 대학 정신과 교수의 'CVD Outcomes in the Latinx Population: Paradoxes, Presumptions, and Pathways forward' 란 제목의 발표가 있었다. 라틴계 미국인들은 백인에 비해 소득과 교육 수준이 낮고 비만도가 높지만 심혈관 질환 위험은 낮고 기대 수명도 높은데, 그 이유를 사회적 관계와 지지에서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UCSD를 포함한 여러 연구 기관에서 The Hispanic Community Health Study / Study of Latinos (HCHS/SOL) 이라는 이름의 라틴계 미국인 코호트를 이용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나도 연수를 계획할 때 해당 코호트 자료 이용을 고려하기도 했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연구도 더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사흘 전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연쇄 총격으로 한국인 네 명을 포함해 여덟 명이 사망했고, 최근 며칠간 뉴스에서 관련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트럼프 정부 아래에서 인종 차별이 심해지고 특히 covid-19 판데믹 이후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늘었다고 하는데, 미국 내 아시아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딸이 친구 J와 집에서 놀다가 다툼이 생겨 울었다. 아이들이 놀면서 다툼이야 늘 있겠지만, 짧은 기간 동안 벌써 두 번째다. 성격이 다른 아이들이니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고, 한국이라면 한 친구와의 관계에서 부족한 부분을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다른 친구들이 없어 난감하다. 아이를 야단치며 아내와 나도 좀 흥분을 했는데 상황을 가라앉히는데 첫째가 옆에서 도움을 주었다. 같은 반에 한국인 친구가 있는 것이 처음 학교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덕분에 외로움을 덜 느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친구들과 섞이지 않는 것이 적응을 더디게 할 것 같기도 하다. 친구에 의존하고 있는 아이가 영어로 이야기할 필요를 덜 느낄 거라는 점도 적응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지나친 욕심이고 조급함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어려움이 많지만 아이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주는 것만 해도 고맙고 다행스러울 따름인데. 아이들 기분을 풀 겸 공원에 산책을 다녀왔다. 저녁엔 아내와 맥주를 마시며 오랫동안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루하루 아이들은 성장해가는데 오히려 부모인 우리는 그만큼 발맞춰주지 못하는 것 같다. 

2021년 3월 18일 목요일

연수일기 34. 퍼플티어에서 레드티어로, 성 패트릭의 날

3월 17일 수요일. 연수 53일째. 어제 샌디에고 카운티의 covid-19 관련 tier가 가장 높은 단계인 퍼플(widespread)에서 한 단계 낮은 레드(substantial)로 바뀌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각 카운티의 환자 수를 기준으로 네 단계의 tier로 나누고 그에 따라 거리두기 정도를 조정한다. 백신 접종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아래와 같이 접종 수에 따라 tier 기준을 변경하기로 했는데, 지난 3월 12일에 캘리포니아 주의 백신 접종자가 2백만명을 넘어서면서 변경된 기준이 적용되었다. 작년 말에 하루 4000명을 넘어가던 환자 수는 3월 들어와 400명 대를 유지하고 있다. 어제 샌디에고 카운티의 새 환자 수는 10만명당 6.8명으로 변경 전 기준을 적용해도 레드 티어에 해당한다. 레드 티어에서는 레스토랑과 스포츠 시설의 실내 영업이 제한 허용된다.   

출처: https://www.cdph.ca.gov/Programs/CID/DCDC/Pages/COVID-19/COVID19CountyMonitoringOverview.aspx

근처 쇼핑몰의 식당들에서도 실내에서 음식을 먹는 손님을 볼 수 있었다. 피트니스 센터도 문을 열고 영업을 할 준비를 했다. 아파트 gym도 문을 연다는 공지가 있었다. gym 앞에 가보니 그동안 밖에 내어두었던 실내사이클과 스텝퍼 등의 운동 기구를 실내로 옮기고 있었다. 

오늘은 성 패트릭의 날이다. 아일랜드의 수호 성인인 성 파트리치오를 기념하는 날로, 아일랜드에서는 국경일로 정해 며칠 동안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아일랜드 계 미국인들이 초록색 모자나 옷을 입고 축제와 퍼레이드를 한다는데, 판데믹 상태인 올해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집 근처 공원에서는 초록색 모자를 쓴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대문 앞에 초록색 깃발을 걸어놓은 집들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어제 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요정인 레프러콘 Leprechaun 집 만들기를 했다고 한다. 

종이 상자로 요정 집을 만드는 모습

수업이 끝나고 나온 딸아이는 초록색 목걸이를 하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금화와 초록색 동전들을 한 줌 가득 들고 나타났다. 학교에서 했던 행사가 재미있었는지 차를 타고 오면서도 신이 나서 한참을 이야기한다. 

"엄마, 근데 미국은 학교에서 재밌는 걸 하는 특별한 날이 많은 것 같아요."

"한국에만 있는 특별한 날들도 있는걸. 개천절이나 광복절, 어린이날 같은."

"근데 그런 날은 학교에서 재미있는 행사를 하진 않잖아요. 여기서 학교에 다닌지 두 달도 안되었는데 지난 번에 발렌타인 데이 파티도 있었고."

그렇긴 하다. 한국의 특별한 날은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일이 없다. 설날이나 추석에 세뱃돈을 받거나 어린이날에 선물을 받는 것 말고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곳 사회가 아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이것도 그런 문화의 일면일지 모르겠다. 

2021년 3월 17일 수요일

연수일기 33. water polo

3월 16일 화요일. 52일째 날. 아이들이 water polo 수업에 가는 날이다. 지난 세 번의 수업은 free trial이었고, 오늘부턴 정식으로 등록한 spring camp 수업이다. 둘째는 정식 클래스가 아닌, 어린 아이들을 위한 splash 반에 계속 참여할거라 큰 부담이 없다. 아들은 이제 12세 반 수업을 듣게 될텐데 훈련 강도가 어떨지 모르겠다. 아이는 벌써부터 걱정이다. 수업 시작 전에 코치를 통해 새 반을 확인했다. 12세 반 아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코치는 그중 less experienced group을 추천했다. 우리가 생각해도 그 그룹이 나을 것 같았다. 수영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꾸준히 클럽 활동을 해온 아이들의 운동량을 따라가긴 힘들 것 같았다. 

미국의 생활 스포츠 인프라에 대해선 익히 들어왔지만, 막상 와서 직접 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어느 동네든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 내에 공원이 있고, 언제든 공원에 나가면 미식축구나 축구, 농구 등 단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중학교에선 영어, 수학, 과학, 역사와 함께 체육 수업이 필수 과목이다. 이곳에서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이사 온 며칠 뒤 산책을 하다 이웃한 고등학교 캠퍼스의 규모를 보고 놀랐는데, 학교 안에 정식 규격의 육상 트랙과 미식축구장, 두 개의 야구장, 여덟 개의 테니스 코트, 여섯 개의 농구 코트가 있었다. 더 놀란 것은 다른 고등학교들도 비슷한 정도의 체육 시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하키 스틱과, 테니스 라켓, 야구 배트와 글러브를 들고 유니폼을 입은 고등학생들을 연이어 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정규 수업 이외에도 independent study physical educ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아마추어 스포츠 클럽 활동을 장려하는데, 이러한 클럽에 속한 아이들일 것이다. 입시 위주 교육 환경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한국의 체육 수업이 생각나 입맛이 썼다. 운동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봐도 학생들의 수준이 꽤 높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스포츠 클럽은 팀웍과 협동심, 배려를 우선적인 덕목으로 내세우지만, 그에 못지 않게 경쟁과 노력도 강조한다. 강도 높은 훈련과 경쟁을 통해 기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다 보니 종목 별로 다양한 아마추어 대회가 있고, 많은 스포츠 클럽이 이러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water polo 클럽에서도 각종 리그와 토너먼트 참가를 독려했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USA Water Polo에 선수 등록을 해야 한다. 

USA Water Polo 웹페이지의 배너. 포스가 느껴진다......

각종 유니폼을 입고 포스를 뿜뿜 내보이며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생존 수영 수준의 아이가 오늘 연습을 따라갈 수 있었을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고 물에 젖은 타월을 몸에 둘둘 감은 아이들이 하나둘 계단을 올라오는데, 차에 타는 아들 얼굴빛이 파리한게 힘들었나 보다. 기운이 다 빠졌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기존 아이들 수영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함께 공을 다루는 연습을 하지 못하고 나중엔 혼자 따로 수영 연습만 했단다. 

집에 와서도 침울해 보이던 아이는 저녁을 먹고서야 다시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괜히 워터 폴로 수업에 보냈다고 후회하는 아내를 다독이며 이제 막 시작했으니 좀더 지켜보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하루 사이에 얼굴 살이 쪽 빠진 아이를 보니 나도 마음이 짠했다. 학교 생활도, 농구 수업도, 워터 폴로 수업도 모두 초보 입장이니 자존감이 낮아질 상황의 연속인데, 운동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 적응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정말 아이에게 득이 더 될지에 대해 확신이 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