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7일 화요일

어떤 단어를 처음 배운 날

아이들이 깨어있을 때 귀가하는 날은 잠들기 전에 함께 누워 책을 읽어준다. 잠자리 책 후보는 우선 그날의 내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데, 대개 피곤함의 정도와 책의 글자 수가 반비례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몇 가지 옵션을 제시할 뿐이고 결국 최종 선택권은 아이에게 있다. 첫째가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선택을 하는 것은 둘째의 몫이 되었다. 가끔 내 기대와는 달리 두꺼운 책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날이면-매우 잦은 일이다- 졸음을 참으며 책을 읽다가 읽고 있는 대목을 놓쳐서 아이들의 타박을 받기 일쑤이다. 

첫째의 경우 글밥이 적은 책부터 시작해 나이에 맞게 서서히 책의 두께를 늘렸지만, 이제 겨우 만 네 살이 된 둘째는 일찍부터 오빠가 읽는 책들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요즘엔 초등학생 대상의 만화책들을 선택하곤 한다. 오빠가 읽은 책의 내용을 다 소화해내고 말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스스로 먼저 그만두겠다는 경우는 없는데, 읽다보면 과연 내용을 얼마나 이해할지 궁금해지곤 한다. 문제는 줄곧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선택하는 이 아이가 원체 오빠보다 질문이 많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질문은 때를 가리지않고 튀어나온다. 요즘 읽는 책은 모바일 게임 캐릭터인 쿠키들이 등장하는 학습 만화이다. 그 질문을 만난 것은 각종 쿠키들이 바다를 탐험하는 과정에서였다.

"근데 해구가 뭐야?"

졸음때문에 머리가 멍한 상태여서인지 해구(海溝)라는 단어의 뜻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바다 밑바닥의 튀어나온 곳이었던가? 아님 움푹 들어간 골짜기를 말하는 단어였던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당황스러울 때는 수없이 많은데,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그런 순간이다. 밤 열시가 넘었지만 졸음이라고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우선 튀어나온 곳일지 움푹 들어간 곳일지 선택을 해야했고, 어떤 단어를 써서 설명을 할지도 신중히 결정해야 했다. 

- 바다 밑바닥은 평평하지 않거든. 높은 산도 있고 깊은 골짜기도 있어. 거기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 거야. 
- 골짜기가 뭔데? (도대체 골짜기라는 단어의 급수는 몇급쯤 될까.)

- 바다 밑바닥에 있는 깊은 우물같은거야. 
- 응. 근데 우물은 뭐야? 

- 바다 밑바닥은 평평하지 않고 올라간 곳도 있고 들어간 곳도 있는데...
- 왜 평평하지 않은데?

섣불리 대답을 했다간 이런 사태가 생기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그러나저러나 좀더 멋지고 능숙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걸까. 이럴 때면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에 이골이 났을 선생님들의 자문을 구하고 싶다. 그들은 뭔가 좀 다를 것 같다. 매순간 당황하지 않고 프로페셔널하게, 가장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지 않을까. 

대개 이러한 장면은 아이들에게 첫 번째 순간이고, 그 의미는 이런 것이다. 해구나 골짜기라는 단어부터 '곤죽이 되다'라거나 '쌍수를 든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바다 밑바닥이 왜 평평하지 않은지와 바다 색깔이 왜 시시각각 바뀌는지에 대해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이야기해 주는 이가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을 매일 하고있다 생각하면 일종의 성직자가 된 듯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그때문에 긴장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의미 가득하고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다 밑바닥에 있는 아주 깊은 구멍 같은 걸 말하는 거야."

해구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딸아이는 설명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했지만 다른 질문을 하진 않았다. 아마 나름의 방식으로 머릿 속에 그림을 그리고 어느 구석에 이 괴상한 단어를 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이 단어를 다시 만날 때면 이 순간의 설명이 떠오를 것이다. 그다지 멋진 설명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그걸로 족하다. 오늘 이 단어의 의미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수준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신심 충만한 신부나 목사의 말씀을 주일마다 듣는 와중에서도 기껏해야 열 개인 신의 계명조차 늘상 잊어버리곤 하지 않던가. 

2016년 10월 17일 월요일

똥통과 방역복

P의료원은 읍내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다. 8월의 토요일이었다. 시골 분들은 새벽녘에 일어나 선선한 아침에 일을 하고 기온이 높아진 낮에는 집에서 쉬거나 낮잠을 잔다. 때문에 무더운 여름 한낮엔 환자도 적은 편이다.
도립 의료원 응급실엔 대학병원에서 보기 어려운 환자들이 많았다. 광견병이 의심되는 개에 물려 온 환자들도 종종 있었고, 가을철 진드기에 물려 생기는 쯔쯔가무시 병 환자를 처음 만난 곳도 여기였다. 상처에 된장을 바르고 오는 환자를 만나는 것은 일상이었다. 낫질을 하다가 팔에 열상이 생겼는데 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비닐로 밀봉을 하고 며칠을 둬 상처가 곪고 썩어가는 상태로 온 환자도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자살 시도를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십중팔구 농약 음독이었다.
파견 인턴들은 의료원 건물 뒤편의 직원 기숙사 일부를 당직 숙소로 썼다. 기숙사 건물에서 병원 본관 건물까지는 1분도 안되는 거리였으므로, 정규 업무가 끝난 당직 시간에는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응급실 당직인 경우 환자가 많은 시간이 아니라면 숙소에 있다가 콜을 받고 나가곤 했다. 응급실에서 전화가 온 것은 토요일 오전 정규 업무를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식당 점심 메뉴가 뭘까 궁금해하고있을 때였다.

"똥통에 빠진 환자가 온대요. 얼른 오셔야겠어요."
파견 근무가 어느덧 세 달째였지만 이런 콜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저수지나 불어난 계곡물에 빠진 환자야 종종 보았지만 똥통이라니. 응급실 담당 간호사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상황이 뭐 그리 나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환자는 젊은 엄마와 서너살쯤 되어보이는 아이였다. 응급실 앞 복도는 아수라장이었다. 이동용 베드 주변은 똥투성이였고, 응급실 간호사들은 똥범벅에 허연 구더기가 기어다니는 아이의 몸을 부산하게 물걸레로 닦고 있었다. 그 주말 응급실 당직은 현진건의 소설 속 B사감을 연상시키는 내과 과장이었는데, 엄마의 상태를 확인해야할 이분은 복도 저만치 끝에 서서 반복해 소리만 질러대고 있었다. "아이만 닦지 말고 우리 환자도 좀 닦아줘욧!" 엄마와 아이 모두 의식이 없었으나 아이의 안색이 더 나빠보였다. 퇴근차 병원을 나가다 급히 불려온 소아과 과장의 지시로 아이에겐 곧바로 비강 프롱을 통해 산소가 투여되었다.
엄마는 아이를 업은 상태로 재래식 화장실에 갔다고 했다.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조그만 아이가 똥통에 빠진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똥통에 뛰어든 엄마는 아이가 똥에 잠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함께 가스에 질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의 산소포화도는 다행히 회복되는 추세였다. 아이와 엄마의 활력 징후는 안정을 찾았지만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곧바로 이웃한 E시 종합병원으로의 이송이 결정되었다. 그날의 당직 인턴은 나였으므로 함께 앰블런스에 타야했다. 아이의 아빠가 도착한 것은 앰블런스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얼굴은 땀 범벅이었고, 일을 하다 달려왔는지 작업복 바지 여기저기엔 황토흙이 묻어있었다.
환자의 이송이 시급했으므로 보호자에게 환자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은 앰블런스 안에서 초보 인턴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아이와 엄마가 똥통에 빠졌고,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아이의 호흡이 약했지만 산소와 수액 투여 후에 일단 안정이 된 상태이다. 가스에 의한 중독이 해결되려면 큰 병원에서의 집중치료가 필요하다. 넋이 나간 채 아이의 손을 꽉 잡고있던 아빠는 내가 띄엄띄엄 말을 잇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E시로 통하는 국도는 꽉 막혀있었다. 토요일 오후엔 늘 그렇기 마련이다. 보통 30분이면 갈 거리였지만 이런 상황에선 1시간이 넘어 걸릴지 모른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외에 환자들의 상태는 안정적이었으나, 문제는 좁은 앰블런스 내부를 가득 채운 냄새였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족을 다 잃을지도 모르는 남자 옆에서 겨우 똥냄새를 피하려 하는 티를 낼 수 있겠는가. 나는 최대한 무거운 표정과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후각은 피로함을 가장 빠르게 느끼는 기관이라는데 망할 후각 신경은 왜 이 과도한 자극에도 기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건지. 위중한 환자들과 슬퍼하는 보호자 앞에서 겨우 이런 실존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나는 과연 의사를 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이 괴로움은 냄새 때문인지 내 앞에 있는 환자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보호자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목적지인 병원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 내가 앰블런스가 채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쳐나간 것은 오로지 신속한 환자 인계를 위함이었음을 밝혀둔다. 사전에 전화로 연락을 취해놓았기 때문인지 의료진이 대기 상태였다. 여느 응급실 복장과는 달랐는데, 의사와 간호사 모두 수술용 모자, 마스크와 글러브를 착용하고 가운 위에 두꺼운 앞치마를 덧입고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선 완벽한 준비였다. 의사는 아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인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쪽 의료진의 복장은 영화에서나 보는 전문 의료진을 연상시켰고, 겨우 비닐장갑 하나만 끼고 있던 내 처지에서 보기에 무척이나 믿음직해 보였다.
작년 여름도 십수년 전과 같이 심한 무더위였다. 병원 바깥은 역병으로 뜨거웠지만 전쟁터가 되었던 몇몇 곳 외엔 많은 병원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한산했다. 뉴스에선 응급실 감염 관리 시스템의 문제를 파헤치는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갑작스레 감염병 전문가가 되었고 응급실은 서둘러 이번 사태의 원흉이 되었다. 안면보호구가 딸려있어야 했지만 사안에 맞는 방역복을 입지 않았던 것이 의료진 감염의 원인이었다고도 했다. 덕분에 레벨 A부터 D까지 종류도 다양한 방역복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방역복을 입은 의료진의 사진을 본 순간, 나는 엉뚱하게도 오래 전 똥통에 빠진 모자를 인계하던 그 때를 떠올렸다. 예나 그때나 응급실은 그대로 쉼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2016년 10월 6일 목요일

메타분석 범람의 시대

꽤 많은 메타분석연구와 논문에 참여하면서, 나 역시 아래 칼럼과 같은 생각을 한 바 있다.

[바이오토픽] 생의학 분야의 리뷰 논문, 너무 많아서 탈!

Pubmed에서 메타분석[타이틀] 키워드를 넣어보면, 1996년에 250편이었던 것이 급격히 늘어 2006년 1021편, 2016년 현재 9400편이 검색된다. 최근 10여년만 봐도 10배 정도로 불어난 것이다. 칼럼에서는 중국 저자들의 유전적 연관분석연구(genetic association study)가 특히 많이 늘었으며, 2014년에 발표된 메타분석의 63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실제 검색을 해보면 유전 관련 이외의 영역에서도 중국 연구자들의 논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칼럼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몇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저비용 고효율

연구자가 직접 data를 모아 진행하는 역학 연구나 임상 시험은 규모에 따라 수백만-수억원의 연구비가 들지만, 메타분석의 경우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기존 발표 논문을 검토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므로 막말로 연구 시작부터 끝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끝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분석 논문은 상대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그 성과란 저명한 저널에 출판을 하고, 해당 논문의 피인용지수가 높아지는 것이다.) 메타분석 논문이 공장에서 찍어나오는 것처럼 양산되는 요즘엔 사정이 좀 다르지만, 메타분석 방법론의 역사가 짧아 새로운 논문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주된 이유이다. 개인적으론 저널에서 메타분석 논문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려왔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본다.

Review

체계적 고찰과 메타분석은 연구 방법 면에서 근거수준이 가장 높기 때문에 많은 저널에서 환대를 받아왔다. 연구자 입장에선 본인 논문이 출판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 수 있는데다 비용도 안들기 때문에 해볼만한 일이다. 그로 인해 메타분석 논문은 급격히 늘었지만 메타분석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진 리뷰어는 그만큼 늘지 않았다. 또한 체계적 문헌 고찰과 메타분석 논문을 검토하려면 개별 논문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리뷰어는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결함이 있는 논문이 리뷰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고 출판되는 일도 잦아지게 된다.

Garbage in, Garbage out

메타분석이라는 방법론 자체는 유용하지만 그 방법을 원칙에 따라 적용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떤 방법론의 연구이든, 연구에 쓰인 raw data나 data를 모으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면 좋은 결과물을 내긴 어렵다. 체계적 문헌 고찰은 대개 수백, 수천편의 논문을 검토해야 하는, 노가다에 가까운 힘든 과정이다. 연구자는 검토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되도록 줄이려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누락되는 연구들이 생길 위험이 크다. 또한 개별 연구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으면 포함되지 않아야 할 연구들이 포함될 수 있다.
환자대조군 연구나 코호트 연구라 가정하면 연구대상자의 포함/제외 기준이 잘못된 것인데, 이렇게 시작부터 잘못된 연구가 좋은 연구가 될리 만무하다. 이러한 문제를 줄이려면 칼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검색과 선정 과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도록 해야하고, 현재는 많은 저널에서 이것을 요구하는 추세이다.

근거수준 피라미드

특정 연구 방법이 연구의 질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전통적 연구 방법이든 메타분석이든, 함량 미달 논문은 늘 존재한다. 연구 방법마다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주제에 맞는 방법으로 잘 수행된 연구라면 어떤 것이든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체계적 문헌고찰과 메타분석은 가장 높은 근거수준을 가진 연구 방법이지만 근거수준이 높다는 것이 곧 우월한 방법이라는 의미는 아니며, 메타분석으로 보고된 결과를 무작정 신뢰해서도 안된다. 제대로 수행되지 않은 메타분석은 증례보고만도 못한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우리에겐 더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

출근길에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데 문득 구두를 보니 앞코가 뿌옇다. 며칠 전부터 닦아야지 생각했는데 일이 많은 연말이라 영 시간이 나지 않던 참이었다. 근처에 보이는 구두 닦이 노점에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손님을 맞는다. 구두를 건네고 삼선슬리퍼를 신고 구석에 앉았다. 쌀쌀한 날씨지만 전기 난로가 피워진 노점 안은 훈훈하다.

닳아빠진 뒷굽을 갈 때도 된 듯해 수선을 부탁했다. 아저씨가 돋보기 안경을 걸쳐 쓰고 구두의 상태를 확인하는데 오른짝 가죽과 밑창 이음새가 떨어져 구멍이 나있다. 저 상태로 잘도 신고 다녔구나. 아저씨는 혀를 쯧쯧 차고는 연장통에서 순간접착제를 꺼내 익숙한 손길로 떨어진 이음새에 꼼꼼이 칠하기 시작했다. 접착제가 마를 때쯤 손가락에 헝겊 조각을 야무지개 감고 구두약을 묻혀 문지르니 금새 광이 난다.

구멍난 이음새가 접착제만으로 수선이 될까 싶었는데, 손질이 끝난 구두를 살펴보니 그럭저럭 신을 만했다. 노점을 나와 다시 바삐 걷는데 어째 좀 처량한 생각이 든다. 구두 닦을 여유도 없이 구멍이 난줄도 모르고 한참을 신고 다녔다니. 참 정신 없이 바쁘게도 일했다.

- 구두를 닦았는데 한 짝 옆이 터져 있어서 접착제로 붙였어요. 굽을 간 김에 아까워 좀더 신는데 오래는 못 갈 것 같아요.

점심 시간에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고, 바로 아내의 답신이 왔다.

- 이런... 구두 하나 당장 사야겠어요. 진즉 샀어야 했는데.

아내에게 문자를 보낸 건 내 처량한 심정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었다. 이런 유치한 바램을 넌지시 표현할 상대로 아내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업무가 늘어나 심신이 지쳐가는 중에, 짧게 오고간 문자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구두야 뭐 좀 있다 사도 되지.

위로라는게 그런 것 아니겠는가. 내가 힘들 때 누군가 그걸 알아준다는 것. 위로의 출발점은 바로 그 지점부터이다. 더 좋은 해결책을 찾아준다거나 건설적인 조언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굳이 그렇지 않아도 된다. 내 힘듦을 그가 알고있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

- 그 영화 아주 잘 만들었다더라.

주말에 올라오신 장인께서 식사 중에 갑작스레 언급하신 건 관객 수 천만을 훌쩍 넘겼다는 그 영화였다. 이런 말씀은 영화를 보고싶다는 속내를 에둘러 표현하신 것이다. 아내도 나도 보지 않은 영화라 잘됐다 싶어 식사를 마치고 다같이 iptv를 볼 수 있는 작은 방에 둘러앉았다.

고향이 이북인 장인은 46년생이시니 전쟁이 벌어진 해에 다섯 살이셨다. 흥남 부두의 철수를 직접 겪진 않으셨지만 전쟁 이후 부산에서 주욱 사셨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하셨으니 영화 속에서 그려진 시대를 고스란히 지내오신 셈이다. 워낙 화제가 되었던 영화라 대략 내용은 알고 있었기에 장인께서 보고싶어하시는 것도 이해가 갔다.


훌륭한 영화는 아니었다. 몇몇 배우들의 호연이 있었지만, 캐릭터는 전형적이고 플롯은 엉성했다. 그래도 두 시간동안 지루함을 느끼진 못했고 이산가족 상봉 방송 장면에선 눈물도 났다. 하긴 50년 이후 이 나라의 현대사 자체가 숨이 찰만큼 극적인 드라마인데 그 가운데 굵직굵직한 사건을 주욱 되짚기만 해도 지루할 틈이 있겠는가.

장인은 영화를 보는 중에 종종 탄식 비슷한 소리를 내셨다. 어허,,, 그 참, 어허,,, 그 참. 말은 안하셨지만 당신이 젊었을 적 풍경이 재현된 화면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나셨으리라. 영화와 장인의 반응을 함께 경험하며 이 영화가 왜 화제가 되었는지, 왜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든 몇 안되는 영화에 꼽히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중의 취향과 흐름을 저격하는 감독의 재능은 역시 뛰어났다.

'Ode to My Father'인 영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아버지 세대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만든 영화라고 했다. 감독의 의도대로 이 영화가 아버지들을 위로해주었을까.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하고 울먹이는 덕수를 위로한 사람은 아버지의 환영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 이야기를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익숙치 않았던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영화를 보며 조금은 위로를 받았을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퍽퍽했던 시대에 온 몸으로 가족을 지탱해 온 우리의 평범한 부모들이 그동안 제대로 된 위로를 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이 영화를 향한 대중의 이상(異常)적 열광은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음에 대한 자기 고백이 아닐었을까 싶다.

2015년 12월 13일 일요일

햄, 베이컨, 소시지… 가공육 먹어도 되나요?

최근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베이컨과 소시지 등 가공육을 1군 발암물질로 규정해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 이후 이 내용을 보도한 기사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가공육이 담배나 석면만큼 위험한 발암물질로 분류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WHO가 발암물질로 구분한 식품에는 햄과 베이컨, 소시지와 함께 핫도그, 햄버거 등도 포함되었습니다. 햄이나 소시지는 아이들의 도시락 반찬으로도 흔히 쓰이는 식품입니다. 물론 가공육이 건강에 이로운 식품은 아니라는 것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과연 소시지를 먹는 것이 담배를 피우는 것만큼 암 발생 위험을 높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1군 발암물질에는 담배, 석면, 벤젠과 같은 전통적인 위해 물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가공육이 이들 물질과 같은 군에 포함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1군에 포함된 물질들이 모두 같은 정도의 위험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영국 암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모든 암의 19%가 흡연으로 인해 발생하는 반면, 가공육 섭취로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분율은 3%라고 합니다.

모든 영국인이 담배를 끊으면 64,500례의 암 발생을 줄일 수 있으며, 가공육을 끊으면 8,800례를 줄일 수 있습니다.(Cancer Research UK의 그래픽) 


WHO는 발암물질을 1군부터 4군까지로 나누고 있는데, 그 기준은 발암물질과 암의 관련성이 얼마나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입니다. 기존 역학 연구들을 검토했을 때 사람에서 암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경우에 1군에 포함됩니다. 또한 충분한 근거는 없지만 암과의 관련성을 의심할만한 근거가 있는 경우는 2, 위험성이 약한 경우는 3군 이하로 분류합니다. WHO의 발표에 대해 일부 언론들은 가공육을 ‘1(group)’이 아닌 ‘1(grade)’ 발암물질로 보도했는데 이러한 부주의한 보도가 논란을 키운 면이 있습니다. 관련성이 확실하다는 의미의 발표가 위험의 정도가 크다는 의미로 해석된 것입니다.

가공육 제조 과정 중 형성되는 N-nitroso compound, polycyclic aromatic hydrocarbon 등의 화학 물질로 인해 암 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기전은 잘 모릅니다. 많은 국내 전문가들은 가공육을 과다 섭취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지나친 육류 섭취가 심혈관질환, 암 등의 질병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며, 가공육에 대한 이번 1군 발암물질 분류에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WHO의 이번 발표에 따르면 가공육 50g을 매일 먹는 것이 대장암 위험을 18% 높인다고 합니다. 50g은 핫도그형 소시지 1, 비엔나 소시지 5, 슬라이스 햄 5장 정도입니다. 하지만 국민건강영양조사(2010~2012)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1일 가공육 섭취량은 6g 정도에 불과한다고 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참고로 섭취량 상위 5% 이내에 든 사람은 하루 14g, 1% 이내인 사람은 151g을 섭취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많이 먹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참고: http://www.who.int/features/qa/cancer-red-meat/en/

2015년 9월 19일 토요일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요일 오후처럼 짧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요일 오후처럼 짧습니다.

어렸을 적에 살던 주공아파트 단지엔 여느 아파트 단지가 그렇듯 군데군데 작은 놀이터가 있었어요. 모래 바닥에 미끄럼틀과 시소, 그네, 뺑뺑이가 있는 평범한 놀이터였지요. 요즘이야 놀이 기구들도 알록달록 예쁘고 모양도 다양하지만 그땐 다 생긴게 뭉툭하니 비슷했어요. 철제로 된 미끄럼틀은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있었고 아이들의 손이 닿는 곳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이 났죠.

일요일 저녁, 동네 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해가 뉘엿뉘엿 아파트 옥상에 가까워지고 주변 풍경이 노랗게 물들 때. 아마 저녁 여섯시쯤 될거에요. 그 시간이면 늘 아파트 단지 안 교회에서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익숙한 찬송가였는데 무슨 노래였는지 지금은 생각나질 않네요. 혼자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아파트 사이로 멀리 보이는 밭두렁 길을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들으면 이제 일요일이 다 가버렸다는게 실감나면서 괜히 서글퍼지곤 했습니다. 열서넛 나이의 사춘기 소년이 품을만한 고민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시험이라거나 친구라거나, 또 미래라거나 뭐 그런 것들이었겠지요. 아쉬움과 불안함이 섞인 감정이 밀물처럼 차오릅니다.

몸을 부르르 떤 건 때마침 불어온 서늘한 저녁 바람 때문일 겁니다. 해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그 변화가 어찌나 빠른지. 다른 생각에 빠졌다가도 문득 주변을 돌아볼때면 매번 흠칫 놀라게 됩니다. 짙어지는 그림자와 차가워지는 공기와 깊어지는 교회 차임벨의 울림은 마음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고즈넉한 주변 풍경은 슬로우 비디오로 보이지만 이 시간이면 이상하게도 나를 둘러싼 공기와 시간만이 두 배 빨리 보기 속도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초능력을 간절히 바라곤 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지금. 일요일 오후 어둠이 깔리는 놀이터에서의 시간, 열서넛 소년의 기분을 다시 느낍니다. 우리를 둘러싼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흐릅니다. 당신도 느끼나요? 이런 기분을 나만 느낀다면 못견디게 억울해질 거에요.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딸아이와의 전쟁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은 이제 혼자서도 이를 닦지만 네살 딸은 아직 이를 닦아줘야 한다. 이닦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욕실에 들어가 칫솔을 물게 하려면 여러 차례 실랑이를 해야한다. 이를 닦으라고만 하면 도망을 가서 종종 번쩍 안아다 억지로 세면대 앞에 세우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엔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이닦기가 시작된다.

잠들기 전엔 꼭 책을 두세 권씩 읽어주어야 하는데, 이를 닦기 전에 책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리곤 한다. 밤에 아이들 옆에 누워 책을 읽어줄 때쯤이면 대개는 녹초가 된 상태로 책을 읽어주며 졸다 깨다 하는 적도 많다. 그럴 땐 다시 일어나 이를 닦이는게 또 힘든 일이라 이를 먼저 닦지 않겠다고 하는 딸에게 짜증을 낼 때도 있다. 어제 밤의 문제도 이를 먼저 닦느냐 책을 먼저 읽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책을 먼저 읽어달라는 딸에게 오늘은 이부터 닦는거라 선포를 했다. 역시 여느 때처럼 아이는 책을 먼저 읽겠다 고집을 부렸고, 책을 읽어주지 않자 울음을 터뜨렸다. 최근엔 떼를 쓰다가도 잘 타이르고 달래면 말을 듣곤 했지만 어제 밤엔 영 막무가내였다. 졸음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은 졸리면 괜한 떼를 더 쓰게 마련이다.

딸은 네 살 터울 오빠보다 훨씬 고집이 세고 떼도 많았다. 제 뜻대로 안되면 떼를 쓰는 버릇을 이번에야말로 고치고 말리라. 어른답게 차분하고 단호하게. 왜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때부터 아이와의 대화는 같은 말의 무한 반복이었다.

"책 읽고 이 닦을래."
"안돼. 이 먼저 닦고 책 읽는거야."

아이는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왜, 왜, 왜 이 먼저 닦아야 하는데. 늘 책 먼저 읽어줬잖아. 사실 왜 이를 먼저 닦아야하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차분하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던 마음가짐은 5분도 되지 않아 무너졌고, 어느새 나도 아이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어른답게 대했다면 아이가 이렇게 심하게 떼를 쓰진 않았을까.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아랫집과 층간 소음으로 말썽이 있던 터라 아이 울음 소리에 또 민원이 접수될 수도 있었다. 아이가 떼를 쓰며 발을 동동 구르지 못하도록 꼭 끌어안았다. 숨이 넘어갈듯 소리를 지르는 아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기도 했다. 평소와 다른 아빠의 모습에 놀랐는지 딸은 더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을 쳤다. 나는 내 감정을 조절하는데 완벽하게 실패한 상태였고, 내 아이를 향한 스스로의 폭력적인 행동에 당혹해하고 있었다. 그만두어야 하나. 아니, 여기서 물러서면 버릇이 더 나빠질지도 몰라. 제발, 이제 아빠 말좀 들어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30분이 넘는 혼돈의 상황을 끝낸 것은 울먹거리느라 알아듣기도 힘든 아이의 말이었다.
아빠, 말대로, 이, 닦고, 책, 읽을께.
아이도 나도 땀 범벅이었다. 드디어 고집을 꺾었다는 안도감은 개뿔, 후회와 자책감이 엄청나게 밀려왔다. 혼자서 이도 잘 못닦는 네살짜리 딸을 데리고 뭐하는 짓인가. 이를 먼저 닦든 책을 먼저 읽든 그게 뭐그리 문제인가. 나는 제대로 된 아빠인가.

이를 닦아주는데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내 행동이 상처가 되어 오래 남진 않을까. 당분간 아빠를 본체만체 하면 어떡하나. 이를 닦는 동안 딸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 많이 화내서 미안해. 아빠 말 들어줘서 고마워. 내 사과를 받아주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란히 누워 책을 읽을 때엔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졸음이 쏟아지는지 눈을 깜빡깜빡하며 비비는 아이에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아까 화내서 미안해.

아이는 씩 웃으며 한 마디 하고 이내 잠이 들었다.

나 아빠 말대로 이 먼저 닦고 책 읽었어. 오늘은.



2015년 7월 22일 수요일

남딘과 서울의 아이들

하노이 공항에서 밤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아침, 둘째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부모 참여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부모 참여 수업은 아내보다 스케줄을 조정하기 수월한 내가 참석하는 편이었다. 다행히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라 미리 휴가를 내둔 상태였다. 참여 수업 날이 출장 기간과 겹쳤다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아야할 뻔 했다.

푸른반 아이들은 이십여명. 엄마 아빠와 함께 옹기종기 모여 간식을 먹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시범에 맞춰 노래와 율동을 했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잤다지만 충분했을리 없었기에 중간중간 하품이 나왔다. 딸이 이름표가 붙어있는 자기 자리와 뒤편에 앉아있던 아빠 무릎 위를 수시로 왔다갔다 하지 않았다면 잠시 졸았을지도 모른다. 손씻기에 대한 선생님들의 짧은 연극이 끝나고 아이들은 절반으로 나뉘어 손세정제 만들기와 유리드믹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물론 엄마 아빠들도 함께.

베트남에서의 학생 봉사는 주로 유치원에서의 교육 활동 참여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3세 이상의 취학 전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연습했다. 스스로 만들고 연습해온 것들이었기에 학생들은 각각의 프로그램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제안한 프로그램의 반응에 따라 신나하거나 풀이 죽어 있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론 자석 낚시나 바구니에 공 던져넣기, 기차 놀이 등을, 좀더 큰 아이들을 대상으론 그림 그리기나 카드 맞추기 등을 진행한다. 중간 중간 음악을 듣고 베트남 동요를 함께 부르며 율동을 했다. 아이 둘을 키우는 아빠 입장에선 아주 익숙한 내용들이었다. 내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의 놀이 방식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노래를 들려주거나 함께 부르며 춤을 추고 몸을 부딪히며 장난을 치는 것은 유리드믹스라는 좀더 거창한 이름의 프로그램과 그리 다를게 없었다.

어쩌다보니 베트남과 한국에서 연이어 아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경험했다. 남딘의 유치원은 건물도, 놀이기구도, 아이들의 물품도 모두 낡았고 청결 상태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의 유치원은 어른들이 생활하는 여느 건물과 시설보단 훨씬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그곳 사람들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시설은 차이가 많았지만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과 해맑은 웃음에 있어선 남딘과 서울이 다르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든 아이들은 모두 즐겁고 행복해보였다.

유엔의 world happiness report에 따르면 조사 대상 158개국 중 한국의 행복 지수는 47위, 베트남은 75위이다. 물론 행복감을 평가해 비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과거 다양한 행복 지수 조사의 결과가 제각각인 이유는 주관적 지표 위주였기 때문인데, 이 조사는 GDP, 기대 수명 등 행복과 관련된 보다 객관적인 지표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10년 뒤, 이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2015년 7월 19일 일요일

어느 오후

소나기가 한판 쏟아진 뒤였기에 무더위는 약간 사그러들었지만 공기는 눅진했다. 지방 출장 때문에 새벽 일찍 하루를 시작한 날이었고, 오후가 되어 서울에 돌아와 다시 인천행 지하철을 탔을 때는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출장과 연구 미팅을 같은 날 잡는게 아니었는데. 이럴 때면 무뎌진 몸의 속도는 느릿해지지만 날카로워진 신경은 몸과 같이 느릿하게 반응하다가도 갑작스레 제멋대로 폭주하게 마련이다.

평일 오후 인천행 1호선 전철은 한산했다.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참으로 다양한 각종 소음이었다. 구일역을 지나 모기 퇴치제를 파는 잡상인이 가방을 끌고 홍보를 시작했다. 복식 호흡을 배웠는지 그의 목소리는 지하철 칸 전체를 울릴만큼 충분히 우렁찼다. 이 약이 효과가 없으믄요, 이런 큰 제약회사 이름을 걸고 팔겠습니까. OO 제약. 그의 말투는 걸음걸이와 박자를 맞추어 그만큼 느렸지만, 제약회사의 이름과 같이 중요한 단어를 말할 때는 두 배쯤 빨라졌다. 하지만 큰 제약회사에서 만든 모기 퇴치제가 왜 평일 오후 지하철 안에서 팔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몇 개의 모기 퇴치제를 판매하는데 성공한 잡상인의 소음이 옆 칸으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곧바로 휴대폰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대신했다. 헬로 헬로 나의 친구 카봇.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추임새를 넣고 있는 건 다섯 살쯤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각선 방향에 앉은 그 꼬마를 째려봤지만 다른 승객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통화를 하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꼬마의 옆에 할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작은 목소리로 훈계를 했지만 그 태도는 단호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얼굴은 오히려 아이가 사랑스러워 못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카봇 주제가가 세 번째 반복되었다. 건너편으로 달려가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순간 전철 문이 열리고 카봇 꼬마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전철을 빠져나갔다. 온수역을 지나 부평역이었던가? 몇 개의 역을 지나치는 동안 휴대폰의 벨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울려댔다. 옆자리의 중년 여성은 지난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친구-그녀는 이 대화 안에서 여러 번 미친X이 되었다-에 대해 이야기했고, 노약자석에 앉은 남성은 잘못된 주문을 넣어 계약을 망친 회사 직원을 두들겨팼고, 건너편의 여대생은 앳된 콧소리로 애인과 사랑을 속삭였다. 미친X이 된 동창 친구와 계약을 망친 부하 직원과 사랑 고백을 듣는 애인 옆에서, 나는 월요일 아침 출근길 2호선 안에서 만큼이나 호흡 곤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동인천역까진 몇 정거장 남지 않았다. 객실 내엔 열 명 남짓 뿐이었다. 다시 열차 문이 열렸다. 노란색 등산복에 배낭을 맨 노인 남성이 활기찬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와 함께 입장한 것은 쿵짝 쿵짝 이박자의 트럼펫 반주와 악단의 연주였다. 음악은 그가 들고있는 파란색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다. 전주가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사계절 모두 봄봄봄 웃음꽃이 피니까. 등산복 노인은 이 구성진 노래야말로 자신 뿐 아니라 전철의 모든 승객들이 감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어쩌면 음악을 함께 감상할 승객의 숫자가 얼마되지 않음에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전철 안을 가득 채운 트로트 가락에도 승객들은 동요하지 않고 꿋꿋하게 졸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통화를 했다. 강적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저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였더라. 아, 문희옥.

두 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 젠장. 이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데. 그렇게 난 인천행 1호선 전철 안에서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듣고싶지 않은 트로트의 제목과 가수가 누구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세 번째 노래가 끝날 때쯤 전철의 문이 다시 열렸고 노란색 등산복의 노인과 악단이 모든 관객들과 함께 퇴장했다. 갑작스레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마치 노인이 퇴장하면서 주변의 모든 소음을 휩쓸어 가버린 것 같았다. 다시 승강장의 열기와 소음 속에 토해내질 때까지 남은 것은 한 정거장. 평화로운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2015년 6월 17일 수요일

자전거 배우기

아이는 한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페달 옆에 파워레인저가 그려진 빨간색 안장의 자전거는 3년 전 외할아버지가 사주신 것이었다. 18인치 휠이라 처음엔 안장 높이를 가장 낮추고도 페달에 올린 발이 조금은 버거워보였지만, 오래지 않아 맞춤인 높이가 되었다. 아이들은 빠르게 큰다. 아이의 키에 맞춰 빨간색 안장도 조금씩 높아져갔다.

자전거를 타는 횟수가 뜸해진 건 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부터였다. 친구들은 어느새 보조 바퀴가 없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축구장에서 딱 한 번 보조 바퀴를 떼고 연습을 시킨게 서너달 전이었는데, 그날은 영 균형을 잡지 못했다.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아직 때가 아닌가 싶어 그 이후로 연습은 미뤄두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아직 저만 보조 바퀴를 떼지 못한게 자전거를 잘 안타는 이유인가 싶기도 했다.

얼마전 파란색 새 자전거가 갖고 싶다고 엄마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갖고있는 자전거도 아직은 충분히 탈만 할 것 같아서 보조 바퀴를 떼고 스탠드를 달기 위해 동네 자전거 매장에 들렀다. 자전거를 손보던 직원은 아이를 안장에 앉혀보더니, 두 발 연습이 끝나면 22인치 휠의 자전거를 사는게 좋겠다고 했다. 아빠가 새 자전거를 사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실망한 표정이었던 녀석은 직원의 말을 듣곤 금새 얼굴이 밝아졌다.

- 거봐, 저 아저씨도 새로 사야한다고 하잖아.

보조 바퀴를 뗀 자전거는 거추장스런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내친김에 자전거를 아파트 단지 안 학교 운동장에 가지고 갔다. 연습을 하기엔 바닥이 평평한 농구 코트가 좋을 것 같았다.

하나 둘 셋, 신호에 맞춰 페달을 밟는다. 몇 달 전 연습 때완 다르게 제법 균형을 잡고 페달을 굴렸다. 뒤에서 안장을 잡고 따라가는데 금방 숨이 찼다. 코트를 서너 바퀴 돌았을까, 안장을 잡은 손에서 힘을 빼고 손가락만 받쳐주어도 무리없이 잘 간다. 손을 살짝 뗐다.

- 아빠 방금 손 뗐다.

- 진~짜?

녀석 눈이 동그래졌다. 자전거를 따라 뛰면서 안장에서 손을 떼 등을 두드려주니 씩 웃는다.

- 진짜네~

아이는 그날 오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니 정말 자전거가 작아보인다. 페달을 밟는데 곧 무릎이 핸들에 닿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곧 파란색 새 자전거를 사주어야 할 것 같다.

언제 또 이렇게 커버렸나.

2015. 6. 14
여덟살 지환군 처음 두 바퀴 자전거 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