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한판 쏟아진 뒤였기에 무더위는 약간 사그러들었지만 공기는 눅진했다. 지방 출장 때문에 새벽 일찍 하루를 시작한 날이었고, 오후가 되어 서울에 돌아와 다시 인천행 지하철을 탔을 때는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출장과 연구 미팅을 같은 날 잡는게 아니었는데. 이럴 때면 무뎌진 몸의 속도는 느릿해지지만 날카로워진 신경은 몸과 같이 느릿하게 반응하다가도 갑작스레 제멋대로 폭주하게 마련이다.
평일 오후 인천행 1호선 전철은 한산했다.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참으로 다양한 각종 소음이었다. 구일역을 지나 모기 퇴치제를 파는 잡상인이 가방을 끌고 홍보를 시작했다. 복식 호흡을 배웠는지 그의 목소리는 지하철 칸 전체를 울릴만큼 충분히 우렁찼다. 이 약이 효과가 없으믄요, 이런 큰 제약회사 이름을 걸고 팔겠습니까. OO 제약. 그의 말투는 걸음걸이와 박자를 맞추어 그만큼 느렸지만, 제약회사의 이름과 같이 중요한 단어를 말할 때는 두 배쯤 빨라졌다. 하지만 큰 제약회사에서 만든 모기 퇴치제가 왜 평일 오후 지하철 안에서 팔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몇 개의 모기 퇴치제를 판매하는데 성공한 잡상인의 소음이 옆 칸으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곧바로 휴대폰에서 울리는 음악 소리가 대신했다. 헬로 헬로 나의 친구 카봇.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추임새를 넣고 있는 건 다섯 살쯤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각선 방향에 앉은 그 꼬마를 째려봤지만 다른 승객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통화를 하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꼬마의 옆에 할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작은 목소리로 훈계를 했지만 그 태도는 단호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얼굴은 오히려 아이가 사랑스러워 못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카봇 주제가가 세 번째 반복되었다. 건너편으로 달려가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순간 전철 문이 열리고 카봇 꼬마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전철을 빠져나갔다. 온수역을 지나 부평역이었던가? 몇 개의 역을 지나치는 동안 휴대폰의 벨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울려댔다. 옆자리의 중년 여성은 지난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친구-그녀는 이 대화 안에서 여러 번 미친X이 되었다-에 대해 이야기했고, 노약자석에 앉은 남성은 잘못된 주문을 넣어 계약을 망친 회사 직원을 두들겨팼고, 건너편의 여대생은 앳된 콧소리로 애인과 사랑을 속삭였다. 미친X이 된 동창 친구와 계약을 망친 부하 직원과 사랑 고백을 듣는 애인 옆에서, 나는 월요일 아침 출근길 2호선 안에서 만큼이나 호흡 곤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동인천역까진 몇 정거장 남지 않았다. 객실 내엔 열 명 남짓 뿐이었다. 다시 열차 문이 열렸다. 노란색 등산복에 배낭을 맨 노인 남성이 활기찬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와 함께 입장한 것은 쿵짝 쿵짝 이박자의 트럼펫 반주와 악단의 연주였다. 음악은 그가 들고있는 파란색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다. 전주가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사계절 모두 봄봄봄 웃음꽃이 피니까. 등산복 노인은 이 구성진 노래야말로 자신 뿐 아니라 전철의 모든 승객들이 감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어쩌면 음악을 함께 감상할 승객의 숫자가 얼마되지 않음에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전철 안을 가득 채운 트로트 가락에도 승객들은 동요하지 않고 꿋꿋하게 졸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통화를 했다. 강적들 같으니라고. 그런데 저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였더라. 아, 문희옥.
두 번째 노래가 시작되었다. 젠장. 이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데. 그렇게 난 인천행 1호선 전철 안에서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듣고싶지 않은 트로트의 제목과 가수가 누구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세 번째 노래가 끝날 때쯤 전철의 문이 다시 열렸고 노란색 등산복의 노인과 악단이 모든 관객들과 함께 퇴장했다. 갑작스레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마치 노인이 퇴장하면서 주변의 모든 소음을 휩쓸어 가버린 것 같았다. 다시 승강장의 열기와 소음 속에 토해내질 때까지 남은 것은 한 정거장. 평화로운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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