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스테롤이 높아 진료를 받아오던 60대 여성 환자. 항상 다소곳한 태도로 조용히 다녀가시던 분이었는데 오늘은 진료실을 나가기 전에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린다.
“저… 제가 뇌 MRI 검사를 해야할까 싶어서요.”
노년의 환자 스스로 먼저 이런 말씀을 할 때는 대개 치매에 대한 걱정이 이유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실제 검사가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다. 잘 알던 사람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물건을 둔 곳을 잊고 한참을 찾아 헤맸다는 등의 비슷비슷한 에피소드를 잘 들어주고 나이에 따른 건망증이니 치매 걱정은 덜으셔도 된다고 안심시키면 환자는 밝은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간다. 그럼 상황 끝.
“어떤 문제가 있으세요?”
“가족들이 검사를 해보라고 하네요.”
본인이 아닌, 가족이나 지인이 검사를 권하는 경우는 주의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환자의 기억력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 대기 리스트를 보니 시간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좀더 대화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검사를 권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이전과 달라져서인 것 같아요. 예전엔 가족들 돌보면서도 집안 대소사를 다 챙겼는데. 이전보다 기억력도 떨어지고, 행동도 굼떠지고…”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면 자기들은 더한다고 그래요. 나이 들면서 그 정도 변화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친구들 사이에선 지금도 제가 참 적극적인 편이고 모이면 즐거운데, 가족들에겐 미안하기도 하고 자꾸 위축이 되요.”
가족에 대해 좀더 물어보았다. 남편은 모 회사의 중역이였고, 30대의 두 딸은 둘 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미혼이었지만 부모와 따로 살고 있다 했다.
“딸들이 엄마가 뒤쳐지는 게 싫다고 그래요. 예전엔 그렇게 똑똑했던 엄마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잘 다루지 못하고…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새로 배우는 거 참 잘했거든요.”
“남편분은 뭐라 하세요?”
“남편은 나이 들수록 더 머리를 쓰고 노력해야 하는데 왜 노력을 안하냐고 그래요. 남편이나 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들을 나왔고, 젊어서는 제가 남편보다 더 머리도 좋고 계산도 잘 했어요. 남편은 지금도 회사 경영을 하고 있는데 저는 집안일만 하다 보니 저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네요. 책도 읽고 이런저런 공부도 해보려 하는데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힘들어요.
사실 제가 가족들 몰래 보건소에서 치매 검사를 받았어요. 거기 선생님이 결과가 좋다고, 치매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해서 기분좋게 집에 돌아갔지요. 딸들에게 슬쩍 이야기했더니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요. 그런 반응을 보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더라구요. 애들은 다들 독립해있지만 막상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직도 엄마가 도와주길 바라면서…”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과 딸들에게 서운함을 말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기억력과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감을 떨어뜨린 것은 자신의 기억력이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이었다.
진료실에서 지키는 내 사소한 원칙 중의 하나는 가능한 한 환자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물론 항상 환자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입장을 공감하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격려해준다는 의미이다. 내 역할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환자를 돕는 것이기에. 이 환자의 경우엔 그런 원칙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마주앉아 한시간쯤 신나게 남편과 딸들을 함께 씹어주고 싶어졌다.
MRI 검사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하니 가족들 이야기를 하며 어두워졌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럼 선생님 말씀 믿고 갈께요.”
진료실을 나가는 그녀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남편분 밥 차려주지 마시구요. 따님들은 혹시 결혼한다 하면 혼수는 본인들이 알아서 장만하라고 하세요.”
“아유 참 선생님도.” 환한 표정으로 킥킥거리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쑥 세우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진료 끝나고 어머니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제가 뇌 MRI 검사를 해야할까 싶어서요.”
노년의 환자 스스로 먼저 이런 말씀을 할 때는 대개 치매에 대한 걱정이 이유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실제 검사가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다. 잘 알던 사람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물건을 둔 곳을 잊고 한참을 찾아 헤맸다는 등의 비슷비슷한 에피소드를 잘 들어주고 나이에 따른 건망증이니 치매 걱정은 덜으셔도 된다고 안심시키면 환자는 밝은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간다. 그럼 상황 끝.
“어떤 문제가 있으세요?”
“가족들이 검사를 해보라고 하네요.”
본인이 아닌, 가족이나 지인이 검사를 권하는 경우는 주의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환자의 기억력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 대기 리스트를 보니 시간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좀더 대화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검사를 권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이전과 달라져서인 것 같아요. 예전엔 가족들 돌보면서도 집안 대소사를 다 챙겼는데. 이전보다 기억력도 떨어지고, 행동도 굼떠지고…”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면 자기들은 더한다고 그래요. 나이 들면서 그 정도 변화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친구들 사이에선 지금도 제가 참 적극적인 편이고 모이면 즐거운데, 가족들에겐 미안하기도 하고 자꾸 위축이 되요.”
가족에 대해 좀더 물어보았다. 남편은 모 회사의 중역이였고, 30대의 두 딸은 둘 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미혼이었지만 부모와 따로 살고 있다 했다.
“딸들이 엄마가 뒤쳐지는 게 싫다고 그래요. 예전엔 그렇게 똑똑했던 엄마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잘 다루지 못하고…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새로 배우는 거 참 잘했거든요.”
“남편분은 뭐라 하세요?”
“남편은 나이 들수록 더 머리를 쓰고 노력해야 하는데 왜 노력을 안하냐고 그래요. 남편이나 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들을 나왔고, 젊어서는 제가 남편보다 더 머리도 좋고 계산도 잘 했어요. 남편은 지금도 회사 경영을 하고 있는데 저는 집안일만 하다 보니 저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네요. 책도 읽고 이런저런 공부도 해보려 하는데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힘들어요.
사실 제가 가족들 몰래 보건소에서 치매 검사를 받았어요. 거기 선생님이 결과가 좋다고, 치매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해서 기분좋게 집에 돌아갔지요. 딸들에게 슬쩍 이야기했더니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요. 그런 반응을 보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더라구요. 애들은 다들 독립해있지만 막상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직도 엄마가 도와주길 바라면서…”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과 딸들에게 서운함을 말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기억력과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감을 떨어뜨린 것은 자신의 기억력이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이었다.
진료실에서 지키는 내 사소한 원칙 중의 하나는 가능한 한 환자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물론 항상 환자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입장을 공감하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격려해준다는 의미이다. 내 역할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환자를 돕는 것이기에. 이 환자의 경우엔 그런 원칙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마주앉아 한시간쯤 신나게 남편과 딸들을 함께 씹어주고 싶어졌다.
MRI 검사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하니 가족들 이야기를 하며 어두워졌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럼 선생님 말씀 믿고 갈께요.”
진료실을 나가는 그녀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남편분 밥 차려주지 마시구요. 따님들은 혹시 결혼한다 하면 혼수는 본인들이 알아서 장만하라고 하세요.”
“아유 참 선생님도.” 환한 표정으로 킥킥거리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쑥 세우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진료 끝나고 어머니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