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8일 월요일

2014년 설 명절의 기억.

어머니가 잠깐 외출하신 사이 주방에서 일을 하던 아내가 밥통의 물받이를 빼내 씻기 시작했다. 한동안 물받이 청소가 안되었는지 곰팡이가 파랗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주변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일을 못하는 성격인데, 어려서부터 깔끔한 성격의 어머니가 주변을 정리하시는 모습을 보고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니는 늘 집안의 먼지 하나도 그냥 두고 넘기지 못하셨다. 헌데 몇 년 전부터는 가끔 본가에 머물 때면 잘 안쓰는 가구에 엷게 앉은 먼지를 발견하곤 했다. 어머니가 이전처럼 청소를 하기가 힘에 부치시나보다 생각하면서 그 먼지를 볼 때면, 왠지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기도 하고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했다.

이전만큼 집안일에 힘을 못쓰신다 해도 매일 만지는 밥통의 물받이가 저지경이 되도록 두실 분은 아닐텐데. 요즘 성당 사목회 일에 참 바쁘셨나보다 생각하고 넘겼지만 영 마음이 찜찜했다. 아내는 밥통 청소를 마치고 이번엔 가스레인지의 묵은 때를 씻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면 예전엔 가스레인지도 반짝반짝 광이 났는데 지금은 아니다. 칠순을 앞둔 연세에 하루하루를 너무 고단하게 보내시는 건 아닌지. 눈이 많이 어두워지신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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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날 오후엔 외갓집에 인사드리러 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명절이면 외가 식구들은 늘 이 집에 모인다. 군 제대를 앞두고 당한 교통사고로 지능이 유아 수준으로 퇴행해버린 막내 외삼촌은 이 집이 아니면 길을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집엔 여전히 막내 외삼촌이 살고있다.

오래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외할머니는 막내 아들을 돌보며 이 집을 지키셨다. 어린애가 되어버린 아들을 수십년간 지켜보는 당신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하지만 할머니는 슬퍼하거나 원망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이지 않으셨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갑작스레 건강이 나빠져 입원한 병실에서 눈을 감은 채 짧게 말씀하셨단다. '이젠 고만 두련다...' 큰아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이제 어머니가 진짜 돌아가시겠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명절이라 네가 가족들과 함께 오니까 참 좋구나."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시던 첫째 외삼촌이 나를 보고 허허 웃으며 말씀하신다. 첫째 외삼촌은 지금도 주말이면 아이가 되어버린 막내 동생을 데리고 목욕탕도 가고, 차를 태워 교외에 바람도 씌워준다. 외조부모님이 살아계실 땐 두 분께 더할나위 없이 지극한 효자였고, 두분이 돌아가신 지금엔 누님인 우리 어머니를 당신 어머니인 외할머니 대하듯 살뜰하게 챙기는, 그런 정많은 분이시다.

외할머니가 안계신 명절에도 사촌동생들이 같은 모양새로 모여앉아 전을 부친다. 집안 가득 고소한 기름 냄새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꼈을 때, 비로소 명절임을 확인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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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오후를 처가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 처가 동생들과 읍내의 목욕탕에 갔다. 시골 읍내 목욕탕이니 조그맣겠거니 생각했다가 제법 큰 규모에 놀라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더 놀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빠들이 특히 많았다. 두 개의 온탕은 얼굴이 벌개진 사람들로 가득차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성인이 된 다음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은 일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한 일인데, 산좋고 물좋은 관광지가 아닌 동네 목욕탕에 간 것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냉탕을 뛰어다니는 꼬마녀석들과 아이의 등을 밀어주는 아빠의 흐뭇한 표정을 보며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일요일마다 다니던 목욕탕 건물의 굴뚝이 기억났다. 탈의실의 싸구려 남성화장품 냄새와 수건에서 풍기는 덜마른 빨래냄새, 탕 안에서 울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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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은 유난히 따뜻했다. 남들보다 하루 늦은 귀경길 도로에서 계기판의 외기는 오십킬로미터마다 일도씩 떨어졌다. 그곳에선 봄냄새 가득한 바람이었지만 서울에 도착하니 삭풍이었다. 내일은 입춘 한파라니, 잔뜩 추스리고 나서야할 것 같다.

201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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