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4일 월요일

내 환자이자 스승인 그녀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유, 뭐 그냥...... 애기 잘 크지요? 일전에 핸드폰에 보내주신 사진 본께 많이 컸던디요."
"네, 요즘은 고집이 세져서 엄마 아빠 말을 잘 안들으려고 하네요."
"고 나이 애들이 다 그렇지요. 시골에서 개가 새끼를 낳았는디 엄청 귀여워서. 가져다 키우시믄 애기가 좋아할 것 같은디....." 
"아이구, 애기 엄마가 질색이에요. 바깥 분은 좀 어떠세요?"
"고만고만혀요. 선생님은 지난 번에 뵐 때보다 얼굴이 나으시네."

두어달에 한번씩 만나는 그녀와의 진료실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의학적인 내용보다 일상에 대한 것이 더 많고, 때로는 내 가족의 근황을 이야기하느라 짧은 진료시간을 써버리기도 한다. 덕분에 막상 증상에 대한 이야기는 늘 함께 오시는 따님과 따로 통화를 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지금은 다른 환자를 만날 때도 종종 있는 일이지만, 애초부터 환자와 편안하게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의과대학 교과서는 증상의 원인을 진단하고 검사 결과를 해석하는 법으로 가득하지만, 환자와 교감을 나누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의사로서 첫걸음을 뗀 뒤 환자와 그 가족의 감정을 직접 마주하는 순간에는 막상 어쩔 줄 몰라하다 오히려 한걸음 뒤로 물러나버리기도 한다. 초보 의사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맡았던 환자의 사망이 주는 상실감과 무력감은 마음을 많이 나누었던 환자였을수록 더 컸고, 몇 차례의 그런 경험은 환자와 가까워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경계하게 만들었다. 혹시나 내 마음에 상처가 생길까 두려워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그녀를 만난 것은 그렇게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만큼의 거리를 두면서 환자를 대하는데 익숙해져 가던 전공의 시절이었다. 60대의 나이에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을 앓고있던 할머님은 오래 전부터 지속된 요통과 다리로의 방사통을 호소했다. 근래에 들어 부쩍 심해진 통증은 일상 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을 주고 있었다. 오래된 통증이었지만 그녀와 가족들은 정확한 원인을 알고 싶어했고, 입원 후 여러가지 검사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밀 검사로도 심한 척추신경절병증 상태라는 것 이외에 근본적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그녀는 결국 통증만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약을 처방받고 퇴원했다. 워낙 지병이 많은 환자였기에 통합적인 관리가 필요했고, 입원 당시 담당 의사였던 나는 퇴원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녀를 치료하는데 있어 교과서적인 접근법의 한계를 깨달은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워낙 질병이 많아 각각에 맞는 처방약만 해도 매일 먹기 힘든 정도의 양이었고, 이전부터 있던 위장 장애가 약을 먹을 때마다 구토를 할 정도로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두세달에 한번씩 그녀를 만날 때마다 한 번에 한 움큼씩 되는 처방약을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해 매번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봐야 했다. 진료 전날이면 조금이라도 더 통증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했다. 통증이 일반 진통제로 조절이 안되는 상황이 되자 나는 가족들과 상의해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했고, 다행히 이 처방은 그녀가 휠체어보다 지팡이를 좀더 자주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후덕한 생김새에 수줍음을 많이 타는 할머님은 스스로 마음에 들어한 의사가 아니면 아무리 유명한 의사라도 더이상 찾아가지 않는, 아주 고집스런 분이었다. 그녀와 가족들은 늘 내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수줍은 웃음을 짓곤 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하루종일 통증에 시달리는 그녀를 잠시나마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날이 되면 늘 잊어버리곤 했고, 2년 후 나는 전임의 과정을 마치고 다른 대학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녀는 내가 병원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려준 몇 안되는 환자들 중 하나였고, 이후엔 훨씬 먼 길이었음에도 내 진료실을 찾았다.

어느 날 늘 할머님을 모시고 오는 따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머님이 갑작스런 질출혈로 부인과 진료를 받았는데, 자궁내막암인 것 같으니 정밀검사를 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연락을 한 것이었다. MRI 검사는 악성자궁내막암, 그중에서도 예후가 좋지 않은 종류의 암종이 의심되는 결과였다. 수술을 통해 자궁을 적출해 확진과 치료를 동시에 하는 방법이 최선이었지만, 오랜 통증으로 지쳐있던 그녀는 수술을 받고싶어 하지 않았다. 주치의로서 건강 관리를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 같아 자책감이 들었고, 무엇보다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녀에게 또 너무 큰 짐이 지워진 것이 안쓰럽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큰 수술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하는 그녀와 가족들을 설득해 수술을 받도록 하고 일정을 주선했다. 

"선생님께서 수술을 받으라고 하시니 받지요."

그 와중에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진단과 수술 모두 내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지라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난처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수술 후 최종 병리 결과는 악성종양이 아니었다. 방사선치료를 비롯한 힘든 치료들을 추가로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수술 후에 기력이 부쩍 떨어지고 수술로 인한 새로운 통증이 생긴 그녀의 상태를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은 수술을 받기로 한 결정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해야 했다. 원래 예약된 날짜가 훌쩍 지나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에 들어오는 쇠약해진 그녀를 보면서, 나 역시 당시로선 최선이라 생각했던 그 결정이 결과적으로는 그녀를 더 힘들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통증이 심해져 힘들어하면서도 꿋꿋하게 내 진료실을 찾았지만, 약해진 그녀의 몸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의 진료 후 다음 예약 날 그녀는 방문하지 못했다. 이후 한동안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가끔 따님과 통화를 했고, 여전히 기력이 좋지 않으며 최근 생긴 치주염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그녀의 상태를 전해들었을 뿐이었다. 그녀를 보지 못하는 동안, 함께 식사하고 싶다는 그녀와 가족들의 바램에 응하지 못한게 늘 마음에 걸렸다. 혹시 앞으로는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는게 아닐까, 너무 늦어버린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진즉 시간을 내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오랜만에 그녀가 방문했다. 그동안 잇몸 치료를 받느라 다른 병원에 다녔고 이제는 좋아져서 다시 이 병원으로 다닐 거라며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지으신다. 이전보다 핼쓱해진 얼굴에 수술받은 부위가 여전히 불편하고 다리 통증도 여전하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기뻤던 건 휠체어가 아닌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들어오는 모습 때문이었다. 일단 부족한 약들을 처방하고 한달 뒤에 간단한 검사 후 처방을 조정해드리로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전 진료를 끝내고 세미나에 참석해 졸음을 참고 앉아있는데 따님에게서 문자메세지가 왔다. 

'선생님. 오랜만에 뵈서 반가웠습니다. 선생님께서 살도 빠지고 피곤해보이신다고 어머님이 걱정을 하시네요. 늘 건강하세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스로의 몸을 가누기도 힘겨워하는 그녀가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가족들은 늘 내게 고마움을 표시했지만,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받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는 교과서적인 치료에 대한 관심이 전부였던 때에 환자의 삶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고, 주치의로서 환자와 가족들과 진실된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 이후로 또 몇 년이 지났다. 여전히 통증과 이런저런 문제들에 힘들어하는 그녀는 아직도 내게 어렵고 고민스런 환자이지만, 이젠 종종 전화로 안부를 묻고 휴대폰으로 사진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문득 지금보다 훨씬 겁 많고 유약한 초보 의사였던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 환자와 가족들의 감정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어루만질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지금, 내 환자이자 소중한 스승이었던 그녀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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