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8일 화요일. 339일째 날. 호텔 근처의 Porto's Bakery and Cafe에서 아침을 먹었다. 쿠바 출신의 제빵사가 운영하는 베이커리 체인으로 LA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판다고 알려진 곳이다. 아침인데도 빵집 안엔 손님으로 가득했고 계산대 앞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침거리와 함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치즈롤 두 박스를 샀다.
얼마 전 LA로 연수를 온 아내의 후배 집을 방문했다. 아내가 결혼 전 함께 미국 의사 시험 공부를 했던 후배로 신혼 초에 우리 집에 한 번 온 적이 있다. 십 몇 년 만에 오랜 친구를 만난 아내는 옛 추억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살림이 갖춰지지 않은 집을 보니 올해 초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났다. 우리가 출국하기 전에 샌디에고에 오라고 초대를 했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다.
산타모니카 피어를 잠깐 구경하고 게티 뮤지엄으로 이동했다. 정식 이름은 더 게티 The Getty. LA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손꼽히지만 어쩌다 보니 이제야 와보게 되었다. 지난 여름에 갔던 게티 빌라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이곳도 기대가 되었다. 입구에서 트램을 타고 언덕을 올라가 메인 건물에 도착했다. 미국의 유명 미술관은 건물과 외관 자체가 예술품인 경우가 많은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름다웠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리차드 마이어가 설계한 건물은 중후하면서도 주변의 공간과 어우러져 기하학적 미학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고흐와 뭉크, 르노아르,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의 작품이 있었지만 소장한 미술품이 다소 빈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건물과 공간이 주는 압도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뉘엿뉘엿 저무는 햇볕을 받아 건물의 외벽이 우아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리차드 마이어는 건물의 내외부를 흰색으로 마감하는 것을 선호해서 백색의 건축가로 불린다. 게티 센터 건물 외벽은 순수한 백색은 아니지만 역시 백색에 가까운 밝은 아이보리 색이다. 백색 외벽은 자연광의 밝기에 따라 매번 달라보이는데, 실제 해가 지는 시간에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왜 그가 백색을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주변이 온통 노을빛에 휩싸인 공간의 압도적인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몇 년 전 미투 운동이 활발했을 때 과거 80년대에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여성들의 폭로가 있었고, 이후 그는 실제 설계 업무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넘어 고결함까지 느껴지는 예술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의 성품은 재능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긴 그런 유명인이 한둘이던가.
유니버셜 스튜디오 앞에서 오랜 이웃인 Y 가족을 만났다. 교환 학생으로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다 귀국을 앞둔 딸을 만나러 왔다가 샌디에고에서 며칠 머물 예정이다. 우리가 한국을 떠날 때 공항까지 배웅을 해준 고마운 이들이다. 1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아이들 모두가 그동안 부쩍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