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8일 토요일. 329일째 날. 네 번째 유행이 시작되고 이번 달 들어 미국에선 매일 12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얼마 전엔 미국의 covid-19 사망자가 80만 명을 넘었고, 2차 세계 대전 사망자의 두 배가 넘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영국과 독일을 비롯해 유럽도 상황이 나빠지면서 거리두기를 강화하고 있다. 뉴욕주에는 올 초 수준을 넘는 하루 2만 명 이상의 확진자가 쏟아지면서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일부 다시 취소되었다고 한다. 한 달 전 맨해튼 거리를 걸을 때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 급격하게 나빠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유행의 파고는 얼마나 높게,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까. 매일 기록적인 수치를 보이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이제는 무감각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다가온다.
이곳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조금은 특별하다. 마을 전체, 아니 도시 전체가 들떠있다. 산타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커다란 크리스마스 장식을 단 자동차를 본다. 집 지붕과 현관, 차고 문, 앞뜰의 나무에 색색의 전구가 걸리고 잔디 위엔 장식이 세워진다. 모두가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환자가 늘어날 것을 대비해 검사소가 더 많이 설치된다고 한다. 뉴스를 들으며 크리스마스 장식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를 지나는데 순간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들이 모두 현실이 아닌 환상처럼 느껴졌다. 중환자 병상의 여유 상황은 다시 나빠지고 있고, 의료진도 지쳐간다. 백신의 효과는 예전같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새로이 나타난 변이는 이제 막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진 것은 많지 않다. 거리 두기, 마스크, 그리고 백신과 부스터. 일 년 동안 줄곧 해왔던 것들이다. 마치 미지의 상대에게 가진 패를 다 읽혀버린 도박꾼이 된 기분이다. 우리는 새로운 상대를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한다. 지금 막 커튼을 걷고 나타난 상대와의 싸움도 버거운데, 커튼 뒤엔 또 다른 상대들이 숨을 죽이며 등장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막혀온다.
2천 년 전 어느 청년이 보여준 것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구원을 가져다줄 대상을 찾다 지친 사람들은 분노와 조롱을 내뱉고 돌을 던진다. 하지만 애초에 모두를 일거에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진 패를 하나하나 다시 확인하고 그저 묵묵히 지루한 싸움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사히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혼자가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했을 때 완성된 패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우리 각자는 온전한 카드 세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는 카드 낱장 무늬 하나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분노와 조롱을 멈추고 조금만 더 손을 내밀어 주길.
다시 긴 겨울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모두에게 다가온다.
귀국을 한 달 앞두고 미용실에서 일 년 동안 기른 머리를 잘랐다. 미용실에 간다는 이야기에 아내가 제일 좋아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짧아진 아빠 머리가 어색하다고 자꾸 놀린다.
12월 19일 일요일. 330일째 날. 오후에 문라이트 스테이트 비치에 다녀왔다. 해변에 가기 전, 근처의 메디테이션 가든에 들렀다. Encinitas temple에 딸린 정원으로 올해 내내 닫혀있었다가 최근에 다시 문을 열었다. 올해 여름에 문이 닫힌 걸 모르고 이곳을 찾았다가 허탕을 친 적이 있다.
서핑하기 좋은 해변으로 유명한 Swami's beach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 이 사원은 요가와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건물은 프로그램에 참여자를 위한 시설이지만 정원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무료로 둘러볼 수 있다. 아담한 정원엔 다양한 식물이 잘 가꾸어져 있다. 정원은 아래 해변과는 달리 조용하고 평화롭다. 중간 중간 벤치에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짧은 산책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광장이 있는데, 갑작스레 나타나는 탁 트인 전망에 놀라게 된다. 조용한 정원에서 벤치에 앉아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메디테이션 가든 |
문라이트 스테이트 비치는 아이들의 여름 서핑 캠프 이후로 오랜만이다. 오늘은 햇살이 따뜻해 해변에 앉아있을 만했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 아내는 책을 읽고 나와 아이들은 바닷물에 젖은 부드러운 모래 위를 뛰어다녔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만 겨울의 바닷물은 발을 오래 담그기엔 차다. 아이들은 돗자리 옆으로 돌아와 모래를 파고 경사를 만들어 미끄럼을 타며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놀았다.
문라이트 스테이트 비치의 일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