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화요일. 129일째 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시야가 핑 돌았다. 방 천장이 반원의 원주를 따라 돌았다가 다시 곧바로 되돌아오는 식으로 계속 돈다. 몸을 일으켰다가 침대에서 내려올 수가 없어 다시 누웠다. 최근 며칠간 아침 기상 시에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는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어지럼증 외에 다른 특별한 증상은 없었다. 빙빙 도는 시야 때문에 울렁거림이 생겨 눈을 감고 어지럼증의 원인이 뭘지 생각했다. 아무래도 양성발작성두위현훈(Benign Paroxysmal Positional Vertigo, BPPV)이 생긴 것 같았다.
BPPV는 어지럼증의 흔한 원인 중 하나이다. 이석증이라고도 불리는데, 내이의 이석기관에서 떨어져 나온 이석이 반고리관을 자극해 어지럼증이 생긴다. 주로 아침 기상 시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 생기는 경우가 많다. 가만히 있을 때는 괜찮지만 머리의 위치를 변화시키면 어지럼증이 유발되고,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면 대개 1분 이내에 가라앉는다. 어지럼증과 함께 특징적인 안진(nystagmus)이 발생한다. 내 증상은 아주 전형적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출근도 해야 하니 그래도 일어나보려 했다. 화장실로 가는데 가라앉았던 어지럼증이 다시 확 밀려와 화장실 앞에서 주저앉았다. 기어가다시피 욕조로 가 구토를 했다. 오늘 집에서 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아이들은 아내가 데려다 주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오늘 연구실에는 나가지 못하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BPPV의 치료는 빠져나온 이석을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이석 정복술'이다. 대개는 의사가 환자에게 머리 방향을 지시하고 동작을 도와 시행하지만 방법을 잘 안다면 환자 스스로도 시행할 수 있다. 내친 김에 시도해 보기로 했다. 우선 Dix Hallpike 유발 검사를 통해 어지럼증과 안진이 발생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앉은 자세에서 뒤로 누우면서 머리를 45도 정도 옆으로 돌려 침대 아래로 떨어뜨리고 증상 여부를 확인한다. 왼쪽은 심하지 않았지만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유발 검사를 하니 바로 증상이 생겼다. 안진은 내 자신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석 정복술 방법은 유튜브 영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가끔 시행한 적이 있었지만 내가 스스로 해보게 될 줄은 몰랐다. 유발 검사와 정복술을 셀프 시행하는 과정에서 또 화장실로 가 구토를 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마무리를 했다. 정복술 뒤에는 한동안 머리를 세우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일어나긴 힘들어 침대에 기대어 한참동안 쉬었다. 속이 울렁거려 책을 읽기도 힘들고 움직일 수도 없으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
Epley maneuver at home |
놀란 아내가 응급실에라도 가야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BPPV의 경우 딱히 다른 치료법이 없다. 증상이 워낙 전형적이고 정복술도 했으니 기다려보기로 했다. 일단 응급실에 가면 여러가지 복잡한 절차를 겪어야 할 것이고, 정확한 감별을 위해 행여 MRI와 같은 영상 검사를 받기라도 하면 진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올 것이다. 의사인 나는 자가 진단과 조치가 가능했지만, 의사가 아니었다면 바로 응급실로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장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느 병원으로 가야 했을까? 911을 부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이것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청구될 것이다. 내가 가입한 여행자 보험이 이 비용을 모두 커버해 줄 수 있을까? 새삼 이곳 의료 체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생활을 준비할 때 모든 이들이 걱정하는 부분이 의료 문제이다. 사고로 응급실에 갔다가 청구서에 프린트 된 엄청난 금액에 까무러칠 뻔했다는 경험담은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되도록 병원엔 발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다. 보험이 없다면 문제가 더 크겠지만, 보험이 있어도 보험금 지급 과정에서 이런저런 귀찮은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오기 전에 미리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가 필요한 문제를 미리 해결하려 한다. 미국행 비행기 짐엔 상비약을 잔뜩 넣는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연수를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준비했다. 나는 1년 전부터 말썽이던 오른쪽 어깨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MRI를 찍었다. 예상대로 인대의 손상이 발견되었고, 손상 정도가 꽤 심하긴 하지만 수술을 받지 않고 스트레칭을 하며 지켜볼 수도 있겠다는 의견을 받았다. 만약 미국행 일정이 없었다면 수술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미국에 온 이후 통증은 많이 나아진 상태이다. 아들은 제작년에 다친 무릎이 좋지 않아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역시 MRI 촬영을 했고 큰 문제는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연수가 미뤄지면서 출국을 기다리는 동안 아들의 무릎은 다행히 좋아졌다. 역시 미국에 올 계획이 없었다면 MRI를 찍지 않고 좀더 기다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평소 치아가 썩 좋지 않은 아내는 출국 전에 점검을 위해 다니던 치과 진료를 받았다.
오전 내내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오후엔 증상이 한결 나아져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다닐 수 있었다. 이 정도로 큰 문제가 없이 나아질 수 있어 다행이다. 아내의 경우 이전에도 각막에 상처가 나고 염증이 종종 생겼는데, 얼마 전에도 비슷한 증상이 생겨 한국에서 처방을 받아 가져온 안연고를 꾸준히 넣고 증상이 좋아졌다. 물론 한국이었다면 동네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을 것이다. 이곳 생활에선 나와 아내가 의사라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사고나 외상이라도 생기는 경우엔 별 수 없이 이곳 병원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런 날이 오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