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내부는 단출했다. 책상과
의자들
외의
집기는
구석의
정수기와
인스턴트
커피
박스
정도였다. 임시로 급히 차려진 공간에 굳이 여러 물품을 구비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가
놓인
사무용
책상들
사이사이마다
야트막한
칸막이가
있었다. 얼핏 보면 콜센터와 비슷했지만, ‘중앙모니터링본부’라 쓰여진 현수막과 대형 벽걸이 모니터가 이곳이 일반 콜센터가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현황판
역할을
하는
모니터에는
병실
번호와
환자
이름, 나이가 적혀있었다. 여느
병동과
다른
점은
병실
대부분이 1인실이라는 것, 그리고
현황판
속의
병실과
의료진의
사무실이 180킬로미터 떨어져있다는 것이었다.
생활치료센터는 입원이 필요치 않은 경증 환자를 위한 시설로, 지난
3월 경상북도와 대구 지역에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면서 만들어졌다. 매일
수백
명의
환자들이
새로
생기는
상황에서
기존
병원이
환자
모두를
수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증상이 없거나 가벼운 증상만을 보이는 환자가 많은 것도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시설을 따로 마련하게 된 이유였다. 위중한
증상을
위한
집중
치료
장비는
없지만, 경증 환자를 격리하고 바이러스가 사라질 때까지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 곳. 경상북도
문경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한적한
환경에
위치한
연수원은
그런
시설로
탈바꿈하기에
맞춤한
곳이었다. 몇 개의 네 명 정원 객실은 가족 환자 병실로, 건물
대부분을
차지한
두
명
정원의
객실은
격리를
위해
일인
병실로
만들어졌다. 본래는 병원 직원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물이고 직원들은 숙박 목적으로도 예약이 가능해 나도 여러 번 머물렀던 곳이다. 현황판을
보고
있자니
내게도
익숙한
방
구조가
떠올랐다. 일인용 침대 두 개와 책상 하나, 소형
벽걸이
티비와
냉장고, 샤워 부스가 딸린 화장실. 저렴한
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방이다. 환자 한 명만 써야 하니 침대 하나는 비워뒀을 것이다. 환자들은
이
방에서 2주 이상을 머물러야 했다.
환자들이 하루에 두 번 스스로 체온을 측정하고 증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 서울의 의료진이 기록을 확인하고 상담을 한다. 감염내과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상담과 진료는 모두 이곳 서울의 중앙모니터링본부 사무실에서
스마트폰
메신저를
이용해
화상으로
이루어진다. 문경 현지의 파견 의료진은 대면이 필요한 진찰과 혈액 검사, 코로나
바이러스 PCR, 흉부 X선
촬영
등의
검사
시행과
현장에서
생기는
문제
해결을
맡는다. 환자의 퇴소나 상태가 악화된 환자의 전원 등 중요한 결정을 위해선 문경과 서울의 의료진이 함께 상의했다.
중앙모니터링본부에는 두 명의 의사와 열 명 가량의 간호사가 상주했다. 자리마다
배정된
업무용
스마트폰
메신저에선
이름
대신
의사 1, 간호사 5와
같이
고유
번호를
쓴다. 여러 부서에서 돌아가며 파견을 나오므로 해당 번호를 항상 같은 사람이 맡진 않는다. 나도
사흘
전엔
의사 1, 이날 오후엔 의사 2를
맡았다. 초기에는 의료진의 어려움이 많았지만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새로 발생하는 환자 수가 안정을 찾으면서 업무도 수월해졌다고 한다. 현황판에 찍힌 현재 입소 환자 수는 63명이었다. 이날 오후엔 의사 2에게
예정된
정기
상담은
없었으므로, 자리를 지킨 채 가끔 전달되는 환자의 문의에만 답을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게요.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간호사실에서 아이를 어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후
정기
상담
시간에
어느
환자가
하소연을
하는
모양이다. 2주 이상 한 곳에 갇혀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일까. 지내다
보면
없던
두통이
생기기도
하고, 마른 기침만 해도 덜컥 겁이 날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의
경중에
대한
판단
못지않게
불안을
호소하는
환자에
대한
다독임과
공감이
중요하다. 개중엔 심한 불안과 우울 증상을 호소해서 따로 심리 상담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일반
진료실과
달리
전화와
모니터만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과정에
어려움도
있을
테지만
우리
간호사들은
제
역할을
잘
해내주고
있었다.
선생님. 오전에
검사
결과가
양성이라고
들었는데, 다음 검사는 언제 받게 되나요?
환자의 문의를 받은 건 오후 근무 시간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메신저의
이름을
확인하고
의무기록을
살폈다. 젊은 여자 환자였다. 치료센터를
연
첫날에
입소했으니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환자들은 정기적으로 PCR 검사를
받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두 차례 결과가 연속 음성이어야 퇴소할 수 있었다. 해당
환자는 3월 중순에 시행한 검사 결과 음성이었으나 사흘
뒤
양성이
나와
퇴소가
한
차례
미뤄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직전 검사에서 다시 음성이 나왔고, 어제
재검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결과가
양성이었던
것이다. 오전에 그 검사 결과를 들었던 모양이다. 다음
검사는
사흘
후라는
답
문자를
보내자
바로
감사하다는
짧은
답신이
왔다. 담담한 답신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환자는
그동안
총
열
번의
검사를
받았다. 음성이었다가 양성이 나와서 퇴소가 미뤄진 게 벌써 두 번째이니 실망이 무척 컸으리라. 오늘
검사
결과를
듣기
전까진
이번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가족들과 마주앉아 저녁 식사를 하게 될 거라고, 친구를
만나
거리를
걷고
차를
마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래 전 수영을 처음 배웠을 때 기억이 났다. 물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가고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초급반을 졸업하려면 쉬지 않고 한번에 레인 끝까지 갈 수 있어야 했는데, 일단
물에
들어가면
그
끝이
그렇게
까마득해
보일
수
없었다. 물 위에 엎드려서는 푸른색 타일이 깔린 수영장 바닥을 보며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배수구
세
개를
지나면
곧
맞은
편
끝이었다. 처음 한 개는 수월했고, 그
다음
한
개는
힘에
부쳤고, 마지막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번번이 포기했다. 힘을
줘가며
쥐가
날
정도로
발차기를
해도
몸은
그저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것
같았으니까. 환자의 프로필 사진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밝게 웃고 있었는데, 사진
속
그녀
역시
지난
한
달
동안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두 차례의 음성 판정 이후 다시 결과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되풀이해 품었던 희망이 사그라드는 경험을 하며. 자신의
존재가
말끔히
도려내진
채
여느
해와
같이
봄날을
맞는
바깥
세상을
보며.
36일간의 생활치료센터 운영이
마무리되면서
자연스럽게
중앙모니터링본부도
문을
닫았다. 그동안 이곳 생활치료센터를 거쳐간
환자들은
모두 118명이었다. 남은
소수의
환자들은
가까운
다른
센터로
옮겨갈
예정이었다. 센터의 문을 닫던 날, 겨우
몇
차례
근무했을
뿐이었지만
남은
환자
명단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리고 몇 명 남지 않은 환자 명단의 끄트머리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레인 끝에 무사히 닿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그때까지
물을
젓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첫 번째 유행이 지나고 한동안 50명
안팎을
유지하던
하루
환자
수는
8월이 되면서 거짓말처럼 다시 늘어났고,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도
강화되었다. 생활치료센터로 쓰였던 문경의 연수원을 찾은 것은 2차
유행이
잦아들던
10월의 주말이었다. 거리두기와
방역은
이번에도
효과를
거둔
듯
했고, 환자 수가 줄어들면서 거리를 걷는 사람들 표정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나들이를
떠났다. 미세먼지가 걷힌 문경의 가을 하늘은 청명했다. 생활치료센터
운영을
마치고도
몇
개월간
닫혀있던
연수원
역시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운영을 재개한 것은 아니기에 숙박객은 거의 없었다. 1층의
데스크는
비어있었고
식당과
매점도
불이
꺼진
채
문이
닫혀
조금은
을씨년스런
분위기도
풍겼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객실 정리가 잘 되었을까 걱정스런 마음도 들었지만, 막상
문을
열고
확인한
객실
모습은
이전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반듯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와 집기에서 이곳이 바이러스와 벌인 싸움의 최전선이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욕실에서 낯선 문구가 쓰여진 스티커를 발견하기 전에는.
‘환자분의 빠른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흰색 스티커는 욕실 벽 타일 눈 높이에 붙어있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욕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문구가
이전에
이
방에
머무르던
사람이
있었음을
깨닫게
했다. 하루아침에 몇 번 확진자라는 꼬리표가 붙어버린 그는 자신이 감염된 경로를 되짚으며 원망과 후회를 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우울해하다가도
한편으론
바깥에
있는
가족을
걱정했을
것이다. 갑작스레 들어오느라 미처 처리하지 못한 직장 일을 챙기거나 학교에 제출할 과제와 공부도 했을 것이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면
조마조마한
마음에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탓하며
애꿎은
시계만
반복해
확인했을
수도
있다. 바뀐 잠자리에 잠을 설치고 없던 두통이 생기기도 하고, 마른
기침만
해도
덜컥
겁이
나
또
잠을
이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문득 여섯 달 전에 메신저에서 밝게 웃던 환자가 생각났다. 이
스티커는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욕실을 나오기 전, 그
문구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었다.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환자들이
떠난
뒤에도
남겨진
그
문구는
마치
나를
포함해
이
방을
거쳐가는
누구든
환자가
될
수
있다고, 바이러스와의 지난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마침내 세 번째 유행이 시작되었다. 닫혔던 생활치료센터들도 대부분 운영을 재개했다. 환자 숫자의 파고는 3월의 첫 번째 유행만큼 가팔랐다. 먼 바다를 항해할 때는 중간에 항로가 조금만 바뀌어도 그 영향이 크다. 오래지 않아 방향을 수정하면 다시 본래의 항로로 돌아가겠지만, 그동안의 변화가 너무 크다면 바다를 표류하거나 엉뚱한 곳에 도착하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서 길고 고된 항해를 하고 있다. 앞으로도 몇 차례의 격랑을 더 겪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폭풍이 지나가면 바다도 잠잠해지고 우리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항로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일을 겪어버린 우리가 이전과 똑같은 길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새로 찾은 그 길의 목적지가 이전보다 나은 곳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까지, 당신과 우리 모두의 쾌유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