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4일 화요일

연수일기 177. 플로리다 여행: 에버글레이즈 국립 공원- 샤크 밸리 트램 투어

1월 3일 월요일. 345일째 날. 밤 10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네시간 반 만에 마이애미 포트로더데일 공항에 도착했다. 캘리포니아 시간으론 한밤중인 2시 반, 플로리다 시간으론 5시 반이다. 깜박잠을 두시간이나 잤을까?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렌트카를 받아 공항을 나서서 호텔로 가는 동안 동이 텄다. 올해 들어 새벽에 뜨는 해를 처음 보는 순간이 마이애미의 도로 한가운데가 될 줄은 몰랐다. 

얼리 체크인 옵션이 있는 호텔을 골랐지만 당일 상황이 안되면 어쩌나 걱정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데다 새벽에 도착해 아이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어제 밤 공항에서 출발 전에 호텔에 문의했고 아침에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답을 들었다. 전날 확인한 게 다행이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체크인이 안된다고 했지만 어제 미리 확인을 한 덕분인지 예약자 이름 확인 후엔 가능하다고 했다. 졸음으로 멍한 상태였기에 데스크 직원의 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짐을 풀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세 시간을 죽은듯이 잤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뒤 아이들도 힘들게 깨워 호텔을 나섰다. 가까운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에버글레이즈 국립 공원으로 향했다. 

예약한 샤크밸리 트램 투어는 오후 두시였다. 이십 분 전에 국립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샤크밸리 비지터 센터는 입구 바로 안쪽에 있다. 그런데 비지터 센터 주차장이 만차라 입구의 차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곳 비지터 센터엔 주차 슬롯이 많지 않았다. 차례를 기다리다간 투어 시작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차를 돌려 공원으로 들어오기 전 큰길까지 나가 길 옆 풀숲에 차를 세웠다. 게이트에서 비지터 센터까지 거리가 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비지터 센터까지 뛰다시피 해 투어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립 공원 게이트를 걸어서 통과하는 색다른 경험도 하게 되었다. 

게이트를 걸어 나오면서 사진도 여유 있게 찍었다.

가이드의 사전 설명 후 트램에 올랐다. 샤크밸리 트램 투어는 국립 공원의 관광 프로그램이다. 그래서인지 투어는 길을 따라 전망탑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조금은 심심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서행하는 트램 버스에서 주변의 풍경과 동물(주로 새와 악어)들을 볼 뿐이다. 그래도 국립 공원의 역사와 동물들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Heron과 egret, stork, 그리고 앨리게이터와 크로커다일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되었다. 전망탑에선 이 구역에 딱 한 마리 있다는 크로커다일도 만날 수 있었다. 

투어 전 가이드 설명

두 시간의 투어가 끝나고 비지터 센터에서 스탬프를 찍고 공원을 나왔다. 트램 앞자리의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앨리게이터를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라 알려준 오아시스 비지터 센터에 들러보기로 했다. 비지터 센터는 문을 닫을 시간이었지만, 들었던 것처럼 센터 앞 수로에서 악어들을 볼 수 있었다. 야생 악어를 본 것도, 이렇게 많은 악어들을 한 자리에서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악어가 가득한 수로

오늘은 트램 투어 외에 다른 일정이 없었음에도 돌아갈 때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아이들도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간단히 장을 보고 판다 익스프레스에서 저녁을 사 호텔로 돌아왔다. 

2022년 1월 3일 월요일

연수일기 176. 플로리다 여행: 출발

1월 2일 일요일. 344일째 날. 며칠 동안 집에 머물렀던 손님들은 아침 일찍 세도나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도 오늘 마이애미행 비행기를 탄다. 그동안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하는 여행에선 LA 공항을 이용했지만 이번엔 샌디에고 공항에서 출발하는 일정이다. 최근 covid-19 환자 폭증으로 인한 승무원 부족과 악천후로 취소되는 항공편이 많다고 해 조금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예약한 항공편은 제시간에 출발하는 걸 확인했다. 

오늘 공항까지는 우버를 이용해 가기로 했다. 공항 주차장의 요금은 하루 30불이 넘는다. LA 까지라면 우버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샌디에고 공항이라면 50불 정도에 갈 수 있다. 저녁 비행기라 드라이버를 연결하는 데에도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저녁 비행기이고 공항까진 20분이면 갈 수 있으므로 천천히 짐을 싸고 집에서 쉬다 출발할 수 있었다. 샌디에고에 살지만 공항 터미널은 처음이다. 터미널 규모는 아주 작았다. 그래도 LA 공항보다 깔끔하고 번잡스러움도 덜했다. 

미국 전역에 걸쳐 코로나 환자가 폭증했고, 그중에서도 플로리다는 상황이 안좋은 편이라 떠나기 전까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고 최대한 조심해가며 여행하려고 한다. 샌디에고 시간으로 한밤중에 도착하는 일정이라 아이들이 너무 힘들 것 같았는데 다행히 내일 묵을 호텔에서 아침에 얼리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전엔 호텔에서 잠을 좀더 자고 점심 이후에 일정을 시작하려 한다.

2022년 1월 2일 일요일

연수일기 175. 연말 그리고 새해

12월 29일 수요일. 340일째 날. 한국으로부터 긴 비행 후 어제 유니버셜 스튜디오까지 다녀온 Y의 가족은 늦잠을 잤다.

라호야 코브의 더 메드에서 점심을 먹었다. 라 발렌시아 호텔 레스토랑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뷰가 좋은 곳이다. 월요일부터 내내 날씨가 흐리고 간간이 비도 흩뿌려서 테라스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식사 후 부머 비치에서 물개와 바다사자를 보았다. 몇 번을 와서 봐도 신기하고 재밌는 광경인데, 오늘은 특히 물개와 바다사자가 많았다. 대충 헤아려도 이백 마리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서울에서 온 아이들은 신이 나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Y 딸의 아이폰을 사러 베스트바이에 들렀다가 언락 폰을 팔지 않는다고 해 허탕을 쳤다. 올 초에 아들의 언락 아이폰은 베스트바이 매장에서 샀는데 그사이 상황이 바뀌었나 보다. 결국 UTC 몰의 애플스토어에서 구입했다. 

해외 입국자에 대한 자가격리 면제 제외가 몇 주 전 전체 국가로 확대되었었는데, 이후로 4주를 더 연장하는 방침이 오늘 발표되었다. 2월 3일 입국자까지 해당되며, 백신 접종 여부와 상관없이 열흘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2월 1일 한국에 도착하는 우리 가족도 꼼짝없이 자가격리를 하게 되었다. 귀국 후 계획을 다 바꿔야할 것 같다.


12월 30일 목요일. 341일째 날. 오전엔 Y의 가족과 씨월드를 방문했다. 두 번째임에도 돌고래, 오르카, 바다사자 쇼는 신기하고 재미있다. 

오후엔 다운타운의 투나 하버 공원에서 키스 동상을 보고 씨포트 빌리지까지 걸었다. 오늘도 날씨가 썩 좋지 않았지만 해질 무렵이 되자 하늘이 예쁘게 물들었다. 캘리포니아 바다의 낙조를 처음 본 Y의 가족들은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저녁엔 집에서 바베큐. 바베큐장에서 고기를 굽는 것도 실력이 나날이 느는데, 그래서 가장 맛있는 고기는 항상 오늘 구운 고기이다. 코스트코 소고기와 와인을 곁들인 근사한 저녁 후 아이들은 수영장으로 직행했다. 어제 저녁에도 수영장에서 한참을 놀았는데, 아이들은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매일 수영장에 갈 기세이다. 항상 따끈하게 몸을 뎁힐 수 있는 자쿠지가 있어 쌀쌀한 날씨에도 수영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12월 31일 금요일. 342일째 날. 아침을 먹고 Y 부부와 버드락 카페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파랗게 개인 하늘이 좋았다.

오후엔 인앤아웃에서 점심을 먹고 샌디에고 주 사파리를 방문. 애뉴얼 패스 혜택인 50퍼센트 할인 티켓 네 장을 Y의 가족을 위해 알뜰하게 썼다. 지난 3월에 가보지 못한 사파리 구역부터 보기로 했다. 아프리카 트램을 타고 사파리 구역을 한 바퀴 돌게 된다. 생각보다 면적이 넓었다. 하지만 쌀쌀한 날씨 탓인지 아프리카 초원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다른 동물원 구역에도 동물을 많이 볼 수 없었다. 딸은 지난 번에 보지 못했던 오리너구리를 보고싶어 했는데, 이번엔 안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오리너구리가 굴 속에 숨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한국은 벌써 새해가 되었다. 가족 어른들께 새해 인사를 보내고 영상 통화를 했다. 감사를 드려야 할 지인들에게도 인사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오늘을 위해 아껴두었던 샴페인을 꺼냈다. 올해가 시작될 때는 한해를 온전히 바이러스와 함께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모두가 아직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올해의 마지막 날을 아끼는 사람들과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1월 1일 토요일. 343일째 날. 샌디에고에도 솔레다드 산과 같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지만,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 정도로 새해 첫 해에 의미를 두진 않는다. 그래도 산과 바다를 보기에 새해 첫 날만큼 어울리는 날이 또 있을까.

오전 느지막히 토리 파인즈 트레일을 찾았다. 연초에 오고 십개월만이다. 샌디에고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일 코스가 아닐까. 아내가 샌디에고를 떠나기 전 꼭 한 번 다시 와보고 싶어했는데 그럴 수 있어 다행이다. 산보다는 언덕에 가깝지만, 주말에 새해 첫 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해 걷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비치 트레일을 따라 해변의 플랫락까지 내려와  바위에 올랐다. 지난 번에 왔을 땐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막혀있어 트레일 코스로 돌아가야 했었다. 이번엔 해변을 따라 주차장까지 걸었다. 

이곳은 샌디에고의 많은 해변 중 맨 처음으로 왔던 곳이다. 도착 후 나흘째였다. 몽돌 해변에 쓸리는 파도 소리와 선선한 바닷 바람이 첫 며칠 동안 지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파도 소리와 바람은 그대로이다. 모래 위에 군데군데 조약돌로 만든, 새해를 뜻하는 숫자 2022가 보였다. 우리 가족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올해는 모두가 조금 더 평안을 느낄 수 있길.

델 마르 플라자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Y 부부의 렌트카를 받기 위해 공항 렌트카 센터에 다녀왔다. 새해 첫 날 휴일이라 그런지 공항 외의 렌트카 사무실은 운영을 하지 않는다. 

내일 Y 가족은 세도나를 거쳐 그랜드 캐년으로, 우리는 마이애미로 여행을 떠난다.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지만 오늘은 여행을 앞두고 조금 일찍  자리를 정리했다. 

2021년 12월 29일 수요일

연수일기 174. LA: 더 게티

12월 28일 화요일. 339일째 날. 호텔 근처의 Porto's Bakery and Cafe에서 아침을 먹었다. 쿠바 출신의 제빵사가 운영하는 베이커리 체인으로 LA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판다고 알려진 곳이다. 아침인데도 빵집 안엔 손님으로 가득했고 계산대 앞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침거리와 함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치즈롤 두 박스를 샀다. 

얼마 전 LA로 연수를 온 아내의 후배 집을 방문했다. 아내가 결혼 전 함께 미국 의사 시험 공부를 했던 후배로 신혼 초에 우리 집에 한 번 온 적이 있다. 십 몇 년 만에 오랜 친구를 만난 아내는 옛 추억을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살림이 갖춰지지 않은 집을 보니 올해 초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났다. 우리가 출국하기 전에 샌디에고에 오라고 초대를 했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다. 

산타모니카 피어를 잠깐 구경하고 게티 뮤지엄으로 이동했다. 정식 이름은 더 게티 The Getty. LA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손꼽히지만 어쩌다 보니 이제야 와보게 되었다. 지난 여름에 갔던 게티 빌라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이곳도 기대가 되었다. 입구에서 트램을 타고 언덕을 올라가 메인 건물에 도착했다. 미국의 유명 미술관은 건물과 외관 자체가 예술품인 경우가 많은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름다웠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리차드 마이어가 설계한 건물은 중후하면서도 주변의 공간과 어우러져 기하학적 미학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고흐와 뭉크, 르노아르,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의 작품이 있었지만 소장한 미술품이 다소 빈약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건물과 공간이 주는 압도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뉘엿뉘엿 저무는 햇볕을 받아 건물의 외벽이 우아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리차드 마이어는 건물의 내외부를 흰색으로 마감하는 것을 선호해서 백색의 건축가로 불린다. 게티 센터 건물 외벽은 순수한 백색은 아니지만 역시 백색에 가까운 밝은 아이보리 색이다. 백색 외벽은 자연광의 밝기에 따라 매번 달라보이는데, 실제 해가 지는 시간에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니 왜 그가 백색을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주변이 온통 노을빛에 휩싸인 공간의 압도적인 느낌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몇 년 전 미투 운동이 활발했을 때 과거 80년대에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여성들의 폭로가 있었고, 이후 그는 실제 설계 업무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아름다움을 넘어 고결함까지 느껴지는 예술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의 성품은 재능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긴 그런 유명인이 한둘이던가.

유니버셜 스튜디오 앞에서 오랜 이웃인 Y 가족을 만났다. 교환 학생으로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다 귀국을 앞둔 딸을 만나러 왔다가 샌디에고에서 며칠 머물 예정이다. 우리가 한국을 떠날 때 공항까지 배웅을 해준 고마운 이들이다. 1년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아이들 모두가 그동안 부쩍 자랐다.

2021년 12월 28일 화요일

연수일기 173. LA: 웨이퍼러스 채플,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투어

12월 27일 월요일. 338일째 날. LA를 거쳐 샌디에고에 올 지인을 마중하러 LA에 다녀오기로 했다. 오늘과 내일 LA에 머물면서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둘러보려 한다. 

아침에 백신 카드를 잊고 나와 다시 집에 돌아갔다 오는 바람에 웨이퍼러스 채플에 도착했을 땐 오전 열 시가 되었다. 웨이퍼러스 채플은 LA 남쪽의 부촌인 랜초 팔로스 베르드, 그곳에서도 아바론 비치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있다. 백 명도 수용하기 어려운 작은 채플을 굳이 찾아가 볼 것까지 있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채플을 설계한 건축가가 로이드 라이트 주니어(구겐하임 미술관과 낙수장을 설계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아들)이며 이 건물이 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로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예배당 내부

제단이 있는 전면부를 비롯해 천정과 벽면 대부분이 유리로 된 건물 안에 서면 탄성을 내뱉게 된다. 특별한 결혼식을 치르고 싶은 커플에게 예식 장소로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직접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은 아마 그 기억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드라마의 촬영 장소로도 여러 차례 쓰였다고 한다. 

예배당 건물 앞의 아담한 정원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정원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 같다. 건물, 정원, 그리고 주변 풍경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로이드 라이트는 특정한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주변의 자연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설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스타일은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채플이 위치한 도로인 Palos Verdes Drive South 길은 LA에서 드라이브를 즐기기 가장 좋은 코스일 것이다. LA 도심의 칙칙한 분위기와 전혀 다른, 캘리포니아 만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근처의 서브웨이에서 점심을 먹었다. 평범한 동네 몰이지만 바다를 보며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다. 이웃한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경치를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아마 전 세계 서브웨이와 스타벅스 지점 중 경치로는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점심을 먹고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투어를 위해 노스 할리우드로 이동했다. 스튜디오에 도착할 때쯤 오전에 맑았던 하늘에 짙은 구름이 끼더니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투어 중에 실외 세트를 볼 때는 차량을 타고 이동하므로 비가 와도 큰 문제는 없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미국 마을 거리와 뉴욕의 몇 번가를 지났다. 뉴욕 거리를 재현한 곳은 실제 스파이더 맨의 물구나무 키스 씬을 찍었던 뒷골목도 있다. 

엘렌 쇼, 올 아메리칸, 프렌즈와 빅뱅 이론 세트장 내부를 구경했다. 프렌즈와 빅뱅 이론 세트장에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우리도 프렌즈 소파에 앉아 포즈를 취해 보았다. 프렌즈의 Central Perk는 투어 중간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실제 카페로 쓰인다. 영화 제작 과정과 기법을 설명하는 코너에선 특수 효과와 사운드를 입히는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서 볼 수 있는 원근법을 이용한 거인과 꼬마가 식탁에 마주 앉은 장면도 재현해보았다. 

프렌즈 오프닝 음악이 들릴 듯한 곳

투어의 마지막은 해리 포터와 히어로를 테마로 꾸민 곳이다. 해리 포터 구역에선 마법 물약을 만들고 호그와트 초대장을 받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 호그와트에서 반 배정을 받는 체험도 한다. 말하는 모자 아래 앉으면 모자가 반을 알려주는데, 우리 가족은 모두가 다른 반이 나왔다. 

코리아 타운에서 감자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원래 계획은 그리피스 천문대에 들러 야경을 보는 것이었는데, 저녁까지 줄곧 비가 내려 그냥 호텔로 일찍 돌아가려 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멈춰 잠깐 천문대에 들러보기로 했다. 비가 오고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사람이 적었다. LA 도심을 바라보는 야경은 아름다웠다. 그동안 LA에 올 때마다 천사들의 도시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날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무수히 많은 불빛들을 보며 처음으로 그 이름이 어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야경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얼마 전 뉴욕 맨해튼의 야경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에 젖은 그리피스 천문대

2021년 12월 27일 월요일

연수일기 172.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

12월 23일 목요일. 334일째 날. 아이들은 올해 마지막 등교 날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모두 단축 수업을 해 12시 30분에 하교했다. 딸은 선생님에게 드릴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갔다. 학교에서 나올 땐 선생님께 받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네 달 동안 받았던 딸의 미술 수업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애초엔 수업을 받으며 미술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기회가 늘 거라고 기대했지만 실제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조용히 스케치만 했다. 그래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은 수업에 가는 걸 좋아했다. 한 시간 반 동안 가만히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쉽지는 않을텐데. 딸은 한국에 돌아가서도 미술 수업을 계속 받고 싶다고 한다. 

저녁엔 후배인 S 선생 집에서 포트럭 파티를 했다. 다섯 가족이 모여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S 선생의 아내는 요리를 잘 하고 손도 크다. 성격이 활달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걸 즐겨서 덕분에 그동안 우리도 즐거운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있었다.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따로 시간을 내어 우리 딸과 시간을 보내주었는데, 그것도 벌써 세 달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작은 기프트 카드를 준비했다. 


12월 24일 금요일. 335일째 날. 크리스마스 이브엔 항상 가까운 친구 가족들과 함께 모여 시간을 보냈었다. 올해는 이곳에 떨어져 있어 늘 보던 이들을 만나지 못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여럿이 모여야 제맛. 이곳에서 오늘같은 날을 조용히 보낸다면 좀 우울해질 것 같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아파트 이웃들을 집에 초대해 포트럭 파티를 하기로 했다. 오후엔 초대한 아이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포장하고 김밥을 준비했다. 나도 아이들 도시락으로 종종 싸주는 스팸 무스비를 만들었다. 

Y 선생님은 어묵꼬치를, L 선생님은 아스파라거스 베이컨 말이를, 다른 L 선생님은 직접 튀긴 치킨을 가져오셨다. 각자 가져온 와인과 맥주까지 곁들이니 넘치도록 풍성한 크리스마스 파티 식탁이 차려졌다. 웃고 떠들다 보니 자정이 훌쩍 넘어버렸다. 이곳에서 좋은 이웃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12월 25일 토요일. 336일째 날. 느지막히 일어나 아이들은 산타의 선물을 개봉했다. 크리스마스인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서 영화를 보며 빈둥거릴 예정. 요즘 아이들과 집에서 보는 영상은 스타워즈이다. 조만간 디즈니랜드 파크에 갈 예정이라 미리 예습도 할 겸, 맨 처음 만들어진 네 번째 에피소드부터 보기 시작해 그동안 세 편을 보았다. 4편이 1977년에 만들어졌으니 40년이 넘었다. 사실 난 스타워즈의 광팬은 아니었다. 단순한 스토리 구조 때문에 어렸을 적 처음 보았을 때도 아주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우주선과 외계인, 광선검, 전투 장면을 보며 어색하다고 느끼진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 한껏 눈높이가 올라간 아이들 눈은 40년 전 아이들과 다를 것이다. 지금 보면 조악한 특수 효과와 유치한 대사가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어김없이 오글거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늘은 에피소드 1, 2를 보았다. 이 영화들도 벌써 이십 년이 되었지만, 만듦새는 앞선 에피소드 세 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하다. 홈시어터를 테스트하는 레퍼런스 타이틀로 꼽히던 에피소드 1의 DVD를 반복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 포드 레이싱 경주 장면은 지금 다시 봐도 흥미진진했다. 디즈니랜드 파크에 가기 전에 남은 에피소드를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12월 26일 일요일. 337일째 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했던 이웃들과 오후에 스파이더 맨 노웨이 홈을 보았다. 미국에서 극장은 두 번째이다. 지난 번에 갔던 시네폴리스는 객석에서 음식 주문이 가능하고 서빙도 받을 수 있었다. 럭셔리를 표방하는 극장이라 좌석 수가 적어서  열한 명의 티켓을 함께 예약하기 어려웠다. 이번엔 UCSD 근처의 AMC에서 보기로 했다. 이곳은 시네폴리스에 비해 좀더 최신 멀티플렉스 분위기였다. 일반 극장이지만 전동식 의자는 시네폴리스 못지 않게 편했다. 

영화관 로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마블 캐릭터 중 아이언 맨과 스파이더 맨을 가장 좋아한다. 아이언 맨은 사라졌고 스파이더 맨만 남았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 시리즈는 몇 번을 반복해 보았다. 이전 스파이더 맨 시리즈들의 후속편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항상 아쉬웠기에 세 명의 스파이더 맨이 나온다는 사실은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일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한 화면에서 셋을 보니 뭉클했다. 다른 우주로 건너온 두 명의 스파이더 맨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한에 젖기도 하고, 그때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매듭짓거나 구하지 못했던 사람 대신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이를 구하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소환은 그들에게도 과거를 되돌릴 수 있는 선물같은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거미줄을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자유롭게 보였다. 중년이 된 토비 맥과이어는 약간은 짠해 보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연휴를 이 영화로 마무리하길 잘 했다.

2021년 12월 23일 목요일

연수일기 171. Cutwater Spirit

12월 21일 화요일. 332일째 날. 이번 주부터 많은 학교가 방학을 시작해서인지 아침 출근길 도로에 차가 줄었다. 이미 휴가를 떠난 이들도 많은 것 같다. 나도 올해 연구실에 나가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C 박사님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C 박사님은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분으로, UCSD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회사를 창업해 운영하고 계신다. 샌디에고에서 사는 이야기나 실리콘밸리, 창업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왔고, 올려주신 정보를 통해 생활에 도움도 받았다. 그동안 가끔 댓글만 다는 정도로 아는 척을 하다 떠날 때가 가까워오니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기회가 마련되어 다행이다. 

약속 장소는 Cutwater Spirit이었다. 샌디에고 최초의 distillery(증류주 제조장)라고 하는데, 발라스트 포인트를 포함해 브루어리가 모여있는 미라마르에 있다. 주변의 브루어리보다 조금 더 힙하고 세련된 분위기였다. 증류주 기반의 칵테일이 주 메뉴로, 메뉴의 첫 번째에 있는 vodka mule, 다음으론 margarita를 시켰다. 캔으로 만든 칵테일은 일반 마트에서도 판매한다고. 칵테일도, 안주로 시킨 음식도 괜찮았다. 알고보니 이곳은 발라스트 포인트의 창업자인 Yuseff Cherney가 세운 곳이었다. 

마트에서 살 수 있는 Cutwater Spirit 칵테일

맛있는 음식과 함께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C 박사님과 샌디에고에서의 생활, 가족, 맛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발라스트 포인트와 Cutwater Spirit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도 들었다. 자세한 스토리는 링크 참고. 발라스트 포인트를 $1 billion이란 어마어마한 가격에 매각한 뒤 곧바로 이 distillery를 오픈했는데, 매각 당시 계약에 조건을 걸어서인지 이곳에선 맥주는 제한된 종류만 팔고 있다. 낮 시간에 오면 가끔 바에서 창업자인 Yuseff Cherney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고 한다.  


12월 22일 수요일. 333일째 날. 귀국해 가족 친지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칼스배드 아울렛을 방문했다. 블랙 프라이데이 이후에 많은 매장에서 50퍼센트 이상 할인을 하고 있다. 덕분에 폴로 매장에서 괜찮은 가격의 티셔츠를 여러 벌 샀다. 한국을 떠날 때 여러 사람에게 고마운 도움을 받았기에 돌아가서 답례를 해야 할 분들도 많다. 선물을 뭘 해야 하나 아내가 고민이 많았는데 오늘 대부분 해결해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다. 

아들의 스케이트 보드 수업에 강사인 Mike가 나타나지 않았다. 미리 연락 없이 수업을 빵꾸내는 게 최근 들어 두 번째이다. 문자에도 답이 늦고 통화 연결도 잘 안된다. 뒤늦게 문자에 답이 오긴 했다. 아들의 스케이트 보딩 실력은 제법 늘었다. 수업 내용과 방식엔 문제가 없고 아들도 Mike를 좋아하지만, 성실함은 부족한 것 같다. 패키지로 예약한 수업은 이제 두 번이 남았을 뿐인데, 기간이 더 남았다고 해도 수업을 계속 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2021년 12월 21일 화요일

연수일기 170. 크리스마스 카드 레인

12월 20일 월요일. 331일째 날. 오늘 아침엔 미션 베이 공원을 뛰었다. 아침 운동을 하러 15마일을 운전해 가는 건 오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조깅을 해보는 게 아내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평소보다 더 길게, 4킬로미터를 뛰었다. 막상 아내는 기대했던 감흥이 없었나 보다. 한강 공원을 뛰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라고. 미션 베이 공원에 몇 번 왔었지만 나도 손에 꼽을만한 곳은 아니었다. 아내는 라호야를 기준으로 북쪽에 비해 남쪽이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못하다고 했는데 동감이다. 뭐랄까, 상대적으로 조금은 어정쩡하게 촌스러운 느낌. 임페리얼 비치처럼 아예 시골스런 분위기면 오히려 낫다.

저녁에 크리스마스 카드 레인이란 이름의 거리를 구경했다. 마침 딸이 다니는 미술 학원과 가까워서 딸을 데리고 오는 길에 들렀다. 크레스몬트의 Oviedo 스트리트 주변을 일컫는데, 부근의 모든 집들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화려하게 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집들은 널렸지만 이곳의 장식 스케일은 남달랐다. 수백 수천 개의 전구와 각자 제작한 특별한 크리스마스 카드는 기본이었다. 그 중에 끝판왕은 오만 개의 전구를 사용했다고 밝힌 집인데, 카드의 테마는 인크레더블 캐릭터였다. 장식 자체가 인크레더블했다. 





개성 가득한 장식들. 마지막이 끝판왕.

집집마다 개성있는 장식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어느 집의 장식이 더 독특하고 화려한지 비교도 하게 된다. 이웃 간에 묘한 경쟁심도 조금은 들지 않을까 싶다. 이 동네에서 살면 크리스마스 장식은 필수일테니 이사를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지고 완전히 깜깜해지자 골목은 차와 사람으로 북적였다. 차들은 서행을 하면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했다. 

2021년 12월 20일 월요일

연수일기 169. 메디테이션 가든

12월 18일 토요일. 329일째 날. 네 번째 유행이 시작되고 이번 달 들어 미국에선 매일 12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얼마 전엔 미국의 covid-19 사망자가 80만 명을 넘었고, 2차 세계 대전 사망자의 두 배가 넘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영국과 독일을 비롯해 유럽도 상황이 나빠지면서 거리두기를 강화하고 있다. 뉴욕주에는 올 초 수준을 넘는 하루 2만 명 이상의 확진자가 쏟아지면서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일부 다시 취소되었다고 한다. 한 달 전 맨해튼 거리를 걸을 때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 급격하게 나빠질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유행의 파고는 얼마나 높게,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까. 매일 기록적인 수치를 보이는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이제는 무감각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다가온다.

이곳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조금은 특별하다. 마을 전체, 아니 도시 전체가 들떠있다. 산타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커다란 크리스마스 장식을 단 자동차를 본다. 집 지붕과 현관, 차고 문, 앞뜰의 나무에 색색의 전구가 걸리고 잔디 위엔 장식이 세워진다. 모두가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환자가 늘어날 것을 대비해 검사소가 더 많이 설치된다고 한다. 뉴스를 들으며 크리스마스 장식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를 지나는데 순간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들이 모두 현실이 아닌 환상처럼 느껴졌다. 중환자 병상의 여유 상황은 다시 나빠지고 있고, 의료진도 지쳐간다. 백신의 효과는 예전같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새로이 나타난 변이는 이제 막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진 것은 많지 않다. 거리 두기, 마스크, 그리고 백신과 부스터. 일 년 동안 줄곧 해왔던 것들이다. 마치 미지의 상대에게 가진 패를 다 읽혀버린 도박꾼이 된 기분이다. 우리는 새로운 상대를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한다. 지금 막 커튼을 걷고 나타난 상대와의 싸움도 버거운데, 커튼 뒤엔 또 다른 상대들이 숨을 죽이며 등장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막혀온다.

2천 년 전 어느 청년이 보여준 것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구원을 가져다줄 대상을 찾다 지친 사람들은 분노와 조롱을 내뱉고 돌을 던진다. 하지만 애초에 모두를 일거에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진 패를 하나하나 다시 확인하고 그저 묵묵히 지루한 싸움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사히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혼자가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했을 때 완성된 패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우리 각자는 온전한 카드 세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는 카드 낱장 무늬 하나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분노와 조롱을 멈추고 조금만 더 손을 내밀어 주길.

다시 긴 겨울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모두에게 다가온다. 

귀국을 한 달 앞두고 미용실에서 일 년 동안 기른 머리를 잘랐다. 미용실에 간다는 이야기에 아내가 제일 좋아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짧아진 아빠 머리가 어색하다고 자꾸 놀린다. 


12월 19일 일요일. 330일째 날. 오후에 문라이트 스테이트 비치에 다녀왔다. 해변에 가기 전, 근처의 메디테이션 가든에 들렀다. Encinitas temple에 딸린 정원으로 올해 내내 닫혀있었다가 최근에 다시 문을 열었다. 올해 여름에 문이 닫힌 걸 모르고 이곳을 찾았다가 허탕을 친 적이 있다. 

서핑하기 좋은 해변으로 유명한 Swami's beach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 이 사원은 요가와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건물은 프로그램에 참여자를 위한 시설이지만 정원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무료로 둘러볼 수 있다. 아담한 정원엔 다양한 식물이 잘 가꾸어져 있다. 정원은 아래 해변과는 달리 조용하고 평화롭다. 중간 중간 벤치에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짧은 산책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광장이 있는데, 갑작스레 나타나는 탁 트인 전망에 놀라게 된다. 조용한 정원에서 벤치에 앉아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메디테이션 가든

문라이트 스테이트 비치는 아이들의 여름 서핑 캠프 이후로 오랜만이다. 오늘은 햇살이 따뜻해 해변에 앉아있을 만했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 아내는 책을 읽고 나와 아이들은 바닷물에 젖은 부드러운 모래 위를 뛰어다녔다.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만 겨울의 바닷물은 발을 오래 담그기엔 차다. 아이들은 돗자리 옆으로 돌아와 모래를 파고 경사를 만들어 미끄럼을 타며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놀았다.

문라이트 스테이트 비치의 일몰


2021년 12월 18일 토요일

연수일기 168. 중학교 발표회

12월 16일 목요일. 327일째 날.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곧장 연구실에 가면 대개는 내가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 된다. 오늘 아침 연구실 건물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올렸지만 작동이 되지 않았다. 컴컴한 복도를 조심조심 걸었다. 복귀가 되기까지는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내가 일하는 곳은 복도 맨 끝 방이라 두 벽면에 걸쳐 창이 있어 전등을 켜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지만 창이 없는 방은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전 때문인지 와이파이 신호도 잡히지 않아서 휴대폰을 테더링해 일을 했다. 이곳에 있으면서 학교 시설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 걸 경험했다. 정전이 되거나 엘리베이터가 고장나거나, 전산에 문제가 생기거나 해킹이 되는 등 문제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드웨어의 문제도 있겠지만 막상 생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도 썩 시원친 않게 느껴진다. 연구실이 있는 별관 건물의 경우 고장난 엘리베이터를 고치는 데 두 달이 넘게 걸렸다. 한국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이 너무 급한 건지, 이곳이 너무 느린 건지는 모르겠다.

비슷한 시기에 연수를 시작한 선생님들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올해 초 UCSD에 연수를 온 의사는 네 명 뿐으로, 예년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였다. 어려운 시기에 연수를 와서 첫 몇 개월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여름 이후론 새로운 분들이 많이 들어오다 보니 막상 네 명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한 적이 없다. 꼼꼼하고 주변을 잘 챙기는 C 선생님 덕에 뒤늦게나마 네 명이 모일 수 있었다. 

아내는 지난 일 년 동안 영어 수업을 함께 했던 할머니들 세 분을 집에 초대해 점심을 대접했다. 클레어, 수잔, 노리 할머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친숙하게 느껴진다. 일주일에 두 번씩 있는 할머니들과의 만남은 아내의 이곳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오늘 할머님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가능하다면 떠나기 전에 뵙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저녁엔 아들의 학교에서 발표회가 있었다. 'Holiday Howl'이란 제목의 행사로(아들 학교의 상징은 늑대이다), 과학, 미술, 음악 등의 선택 과목 결과물을 발표하는 시간이다. 평소와 달리 누구나 들어갈 수 있도록 교문 입구가 활짝 열렸다. 교문 앞엔 푸드 트럭이 자리를 잡았고, 평소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 잔디밭엔 페이스 페인팅과 마술 공연 부스가 설치되었다. 구석에선 자원 봉사를 하는 아이와 부모들이 1불 짜리 핫초코와 팝콘을 팔고 있다. 

교문엔 손님을 환영하는 풍선

다목적실엔 미술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작품이 걸렸다. 건물 앞에 마련된 두 개의 무대에선 음악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보컬, 오케스트라, 밴드(7학년, 8학년), 네 개로 구성된 음악 공연은 오늘 행사의 하이라이트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아들은 오늘 공연할 세 곡을 지난 몇 달 동안 연습했다. 이번 주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생각에 나름 긴장도 하는 눈치였다. 

보컬 공연이 끝나고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연주는 훌륭했다. 두 달 전 있었던 커피 콘서트 때보다 아이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의 지휘도 열정적이었다. 임시 공연장인 건물 입구 계단을 둘러싼 사람들은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열정적인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공연 시작 직전


12월 17일 금요일. 328일째 날.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금요 연구 미팅이다. 오늘은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다음 주 금요일부턴 크리스마스 휴가에 들어간다. 이제 앞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연구 미팅도 세 번 정도에 불과하다. 

딸은 오후에 Covid 백신 2차 접종을 받았다. 오미크론 변이가 급격하게 퍼지기 시작하는 상황이라 접종 스케줄은 빨리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내와 나도 부스터 접종을 받았으니 이제 당분간 가능한 접종은 모두 맞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