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8일 수요일

연수일기 164. 선생님의 메일

12월 5일 일요일. 316일째 날. 라호야의 글라이더 포트에 가보기로 했다. 바다와 맞닿은 언덕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실제 하늘을 난다면 더 좋겠지만 파란 하늘을 떠다니는 패러글라이더만 봐도 좋을 것 같다. 코스트코에서 간단히 장을 보며 주유를 하고 인앤아웃에서 버거를 산 뒤 라호야로 이동을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 오후 네 시가 넘었다. 해가 질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고, 하늘을 날고 있는 글라이더(무동력 비행기) 모형 한두 개만 볼 수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 좀더 이른 시간에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12월 6일 월요일. 317일째 날. 오전에 Cardiff-by-the-Sea 카디프 바이 더 시 도서관에서 논문 원고를 썼다. 샌디에고 카운티 도서관 중 하나이다. 이곳은 처음이었는데 아담하고 깔끔한 건물과 실내가 마음에 들었다. 도서관 앞의 Pipes cafe에서 브런치를 먹고 San Elijo State Beach 샌 엘리요 스테이트 비치를 잠깐 산책했다. 해변 캠핑장엔 RV 몇 대와 텐트들이 있었다. 몇 발짝만 걸으면 바다이고 깨끗한 화장실도 가까이 있어 캠핑 하기엔 아주 좋을 것 같다. 바닷 바람을 쐬다 심심하면 카페에 걸어가 맛있는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어도 좋겠다. 한국의 어느 해변에 이런 곳이 있다면 이렇게 한적한 분위기는 아닐 것이다.  

Cardiff-by-the-Sea Branch Library

해변 앞의 서퍼 동상. 뒤에 새겨진 시 제목은 Magic Carpet Ride

아들의 농구 수업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당분간 윈터 브레이크가 있고 1월 중순에 새 시즌이 시작되어 더 등록하긴 힘들 것 같다. 가끔은 수업 가는 걸 귀찮아 하기도 했지만, 꾸준히 했던 수업이라 아들도 마지막 수업이 못내 아쉬운 눈치이다. 


12월 7일 화요일. 318일째 날. 비가 오고 날씨가 쌀쌀해졌다. 딸을 학교에서 데리고 와 집에서 다른 일을 하다 학교 선생님의 메일을 받았다. 오늘 딸이 교실에서 필통을 바닥에 던지고 울었다고 한다.

놀란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나와 이유를 물었다. 네 명이 앉은 책상에 함께 앉은 남자 아이가 책상에 선을 긋고 자신을 밀어냈다고 한다. 책을 펴지 못할 정도로 선을 그어서 책과 학용품을 가지고 바닥으로 내려가 앉았는데(여기 교실에서 아이들은 종종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는다) 그 아이가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했고, 딸은 그 행동에 화가 폭발해 필통을 바닥에 던지게 되었다고. 그 남자 아이는 지난 학기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그때부터 종종 짖궂은 행동을 했다고 한다. 

딸은 오빠에 비해 감정적이고 아직은 감정을 제어하는 데에도 서툴러서 가끔 분을 참지 못하고 과한 행동을 한다. 겨우 아홉 살이니 당연할 수도 있다. 선생님도 당부하셨지만, 교실에서 물건을 던지는 건 해서는 안되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을 한번 더 이야기해 주었다. 앞으로 그런 행동을 다시 하지 않기로 약속도 했다. 한편으론 아이가 좀 안쓰럽기도 했다. 한국에서처럼 말이 쉽게 통하는 상황이었다면 먼저 말싸움을 해서 감정을 누그러뜨렸을 수도 있었을텐데. 화가 난 마음을 표현하고 그 아이에게 따지기 어려우니 순간 욱하는 행동이 더 나왔을 것이다. 

영어를 잘 못하는 작은 동양 여자 아이라 그 아이가 더 우습게 본 건 아닌지 걱정도 조금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에서 차별이나 따돌림은 드문 일일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 보고 들은 일들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선생님께 딸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함께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를 주겠다고 메일로 말씀드렸다. 더불어 그 아이의 평소 행동에 대해서도 알려드리고 앞으로 잘 지켜봐달라 부탁했다. 


2021년 12월 5일 일요일

연수일기 163. Oxford 고등학교 총격 사건, 그리고 학교 뉴스 레터

12월 3일 금요일. 314일째 날. 사흘 전 미시간 주의 Oxford 고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으로 학생 네 명이 사망하고 일곱 명이 다쳤다. 학교에서의 총격 사건은 일상에 가깝고, 한 사건이 채 잊혀지기도 전에 다시 반복된다. 올해만 벌써 서른 번의 교내 총격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했다. 이번 총격에선 2018년 열 명이 사망한 텍사스 사건 이후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건의 전후 상황을 자세히 밝힌 기사를 보았다. 친구들에게 총을 쏜 범인은 15세 아이였다. 그가 사용한 반자동 9밀리 권총은 부모가 사준 것으로,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 아빠는 아이와 총기샵에 함께 갔고, 그날 엄마는 새로 산 총을 아이와 함께 테스트했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 아이가 온라인으로 탄약을 검색하는 걸 본 선생님이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엄마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LOL I’m not mad at you. You have to learn not to get caught.” 

사건이 발생하기 하루 전의 일이다. 

이후에도 사건을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사건 당일 아침, 선생님이 아이의 노트에 총과 총상을 입은 사람과 함께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이 그려진 것을 발견했다. 노트엔 “Blood everywhere”, “The thoughts won’t stop. Help me.”라는 글귀도 함께 적혀 있었다. 학교에선 즉시 부모를 불렀고 아이에게 상담을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는 그날 아이가 학교에 있길 원했다. 아이에게 총을 가져왔는지 묻지 않았고 아이의 백팩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겨우 몇 시간 뒤, 아이는 화장실에서 백팩에 든 권총을 꺼내 친구들을 향해 쏘기 시작했다. 

기사의 내용은 끔찍했다. 아이의 부모는 과실 치사 혐의로 구속되었다. 가장 화가 났던 것은 사건을 미리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아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총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면. 총을 다른 곳에 보관했더라면. 선생님의 알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더라면. 그날 아침 아이의 가방을 열어보기만 했더라면. 네 명의 꽃다운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총기 소지를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해진다. 

semiautomatic 9-millimeter Sig Sauer handgun
(아이가 사용한 총과 유사한 모델)

사건이 발생하고 학교에서 보낸 뉴스 레터를 받았다. 이천 마일 건너의 일이었지만 레터에선 사망한 학생들에 대한 애도와 슬픔, 그리고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을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당부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또 다른 레터를 받았다. 어제 토리파인즈 고등학교 남자 화장실 벽에서 나찌 문양의 낙서가, 다른 고등학교 여자 화장실에는 특정 학생을 위협하는 낙서가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차별이 적다고 하는 캘리포니아의 학교에서도 hate crime을 걱정해야 할 만한 일이 종종 생긴다. 

미국 학교의 교육 방식은 훌륭하다. 

하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은 안전한가? 잘 모르겠다.


12월 4일 토요일. 315일째 날. 아내가 부스터 접종을 받았다. 오미크론 변이로 부스터 접종을 독려하는 상황이라 이전보다 접종 예약 슬롯에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다른 곳에 예약을 해 둔 상태지만, 시온 마트의 약국에서 워크인 접종이 가능하다고 해 오늘 장을 보러 간 김에 이른 날짜에 맞았다. 2차 접종 후 열이 나고 이상 반응이 심했는데, 다행히 이번 접종 후엔 열은 나지 않았고 다른 증상도 접종 부위의 통증과 피로감 정도에 그쳤다.  

저녁엔 집 앞 몰에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이 있었다. 레스토랑 야외 좌석에서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몰 안의 광장엔 캐럴이 울려퍼지고 장난감 기차가 돌아다녔다. 트리 앞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방문한 산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한국에선 언젠가부터 인파가 많은 특별한 장소에 가지 않으면 크리스마스 기분을 느끼기 어려운데, 여기선 어딜 가든 벌써 크리스마스가 찾아온 것 같다. 

2021년 12월 3일 금요일

연수일기 162. 12월

12월 2일 목요일. 313일째 날. 백악관에서 오미크론 변이 관련 대응책을 발표했다. 소아와 청소년에 대한 접종과 부스터 샷에 대한 접종률을 높이는 것, 자가 진단 키트 보급 등이 주된 내용이다. 여행과 입국 관련 강화된 조치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행 항공기 탑승 3일 전 검사에서 1일 전 검사로 강화, 입국 후 3-5일에 재검, 입국 후 자가 격리 의무화 등 세 가지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던 게 며칠 전이다. 이 세 가지 중 실제 대응책에 포함된 것은 첫 번째 항목인 검사 일정 뿐이었다. 미국행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다행스런 소식이다.

딸은 어제부터 Advent calendar 초콜릿을 매일 아침 하나씩 열어서 학교에 간식으로 가져간다. 12월 첫째 날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숨겨진 선물을 하나씩 뜯어보는 재미가 있는데, 초콜릿이 든 캘린더는 가격도 부담이 없어 좋다. 오늘은 루돌프 얼굴 모양의 초콜릿이 나왔다.

트레이더 조에서 산 어드벤트 캘린더

라디오 채널에선 하루 종일 크리스마스 노래가 나온다. 상가엔 이미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이 들어섰다. 12월이 왔고 곧 휴가 시즌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2021년 12월 2일 목요일

연수일기 161. 오미크론

12월 1일 수요일. 312일째 날. 며칠 전부터 뉴스는 새로운 오미크론 변이 기사로 가득하다. 델타 변이의 위력에 호되게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전 세계가 이번 변이엔 훨씬 빠르게 대응하는 것 같다. 변이를 대하는 각국의 표정도 심각하다. 백악관에선 이미 지난 금요일에 대통령이 직접 대응 방향을 발표했다.

한국도 새 변이에 감염된 환자가 보고되면서 모든 입국자에게 열흘 간의 자가 격리를 의무화하는 방침을 오늘 발표했다. 12월 3일 0시부터 입국하는 사람들이 대상인데, 해외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갑작스레 귀국을 하는 등 만 하루 동안 일대 혼란이 벌어질 것 같다.

새 변이 출현의 원인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의 낮은 백신 접종률이다. 1회 접종률을 예로 들면 에티오피아는 7%, 나이지리아는 3%, 콩고는 0%이다. 미국의 부스터 접종률보다 낮은 수치다. 가난한 나라들의 접종률이 낮은 상황에서 부유한 나라들의 부스터 접종을 진행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시각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부스터 접종 전에 가난한 나라에 백신을 더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더 나아가 이러한 불공정한 상황이 이번 오미크론 변이 출현을 불러 일으켰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오늘 뉴욕 타임즈 기사를 보면 상황이 그리 단순하진 않은 것 같다.

인구 6천만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비축된 백신은 이미 1천6백만 도즈에 이르고, 사용하지 못하는 백신을 폐기할 가능성이 높아져 더 이상의 백신 원조를 거절했다고 한다. 화이자 등 제약회사에서도 가난한 나라엔 할인 가격으로 백신을 판다. 백신이 쌓여 있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최소 1회 이상 접종한 인구는 29%에 불과하다.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지 않는 이유는 백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란 의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일단 백신이 있다 해도 인력과 시설 등 접종을 할 수 있는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것이 첫 번째이다. 백신이 부족하다면 다른 나라의 생산 라인을 늘려 해결할 수 있겠지만 인프라의 부족과 관련해선 단기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병상과 의료진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을 보면 더욱.

두 번째 이유는 부유한 나라와 마찬가지로 백신 맞기를 꺼리는 현상이다. 올 2월에 아프리카 15개 국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다섯 명 중 한 명은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답했다. 이는 미국의 통계 수치와 비슷한 결과이지만, 미국은 정치적 신념이 백신에 대한 믿음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반면 아프리카에선 가난과 착취, 정부에 대한 불신과 과거의 경험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HIV 치료제가 개발된 이후 가격이 떨어지기까지 막상 환자가 가장 많은 아프리카에서 너무나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었고, 그 동안 정부 역시 손을 놓고 있었던 것. 다국적 제약회사 임상 시험 과정에서 동의서 없이 연구 참여가 이루어졌던 사례 등이 그러한 경험이다. 앞의 조사에선 응답자의 45%가 백신 관련 연구에서 아프리카인이 실험 동물처럼 다루어졌다고 답했다.

두 가지 문제 모두 쉽게 해결하기 어렵다. 그건 오미크론을 넘어 파이와 오메가까지,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변이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다. 답답하다. 

2021년 12월 1일 수요일

연수일기 160. 쓰레기 재활용

11월 29일 월요일. 310일째 날. 잃어버린 비치 체어를 찾기 위해 허츠 렌트카 사무실을 방문했다. 2주 전 B가 렌트카 트렁크에 비치 체어를 실었다가 깜빡 잊고 그대로 차를 반납해버렸다. 뒤늦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깨닫고 B가 라호야 허츠 사무실에 전화했다. 다행히 미라 메사 지점에서 비치 체어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고, 뉴욕 여행을 다녀와서 찾으러 가기로 했다.

지난 토요일에 지점에 들렀다. 그런데 이날 사무실에 있던 직원은 비치 체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차량이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려서 잃어버린 물건은 지금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날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오늘 다시 지점에 전화를 했고, 이전에 B와 통화했던 직원과 연결이 되었다. 그런데 들었던대로 체어는 잘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토요일에 있었던 직원이 왜 허탕을 치게 했는지는 본인도 모르는 눈치. 오전에 사무실에 다시 들렀다. 통화했던 직원이 안쪽의 창고에서 비치 체어를 찾아 주었다. 토요일에 있던 직원도 이 창고를 들여다봤지만 빈손으로 나왔던 걸 보면 성의가 없었던 것 같다. 두 번을 방문하는 수고가 있었어도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서 다행이다. 

카멜 밸리 도서관에서 아내가 예약한 책을 찾고 리사이클링 센터에도 들렀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페트병과 캔, 유리병을 팔고 받은 돈은 3불이 채 안되었다. 지난 번보다 재활용품 양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금액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인앤아웃 햄버거 하나는 먹을 수 있는 금액이다. 돈보다도 환경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미국에 와서 놀란 점 중 하나는 어마어마한 쓰레기 양, 그리고 도통 분리 수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국립공원 등 관광지는 놀랄만큼 깨끗하게 관리되며 사람들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도심의 쓰레기통은 대개 음식과 재활용품, 일반 쓰레기가 마구 섞여있다. 아파트 쓰레기함은 일반과 재활용, 두 종류로 나뉘어 있지만 엄격하게 나누어 버리진 않는다. 그나마 이렇게 분리된 쓰레기함이 없는 곳도 많을 것이다. 한국처럼 요일을 정해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재활용률도 낮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미국 전체의 재활용률은 2018년 기준으로 32.1%라고 한다. 다음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엔 중국의 쓰레기 수입 금지로 재활용률이 낮아졌다고 하는데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다. 

https://www.epa.gov/facts-and-figures-about-materials-waste-and-recycling/national-overview-facts-and-figures-materials

미국에서 재활용률이 가장 높은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나 LA의 경우 80%라고 하는데, 이는 독일이나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높은 수치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계에 따르면 60%로 재활용을 잘 하는 국가로 꼽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낮은 40% 정도라고 한다. 80%란 수치는 무질서하고 우중충한 LA 도심을 생각하면 놀랍게 느껴진다. 재활용, 퇴비용, 일반 쓰레기를 색깔 별로 분리한 쓰레기통, 레스토랑의 재활용 가능 용기 사용 등에 의한 결과라고 하는데 쉽게 믿기진 않는다. 그보다는 결국 쓰레기 수거 업체를 통한 재활용 프로세스를 열심히 해서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만큼의 비용이 들 것이다.

포장 용기 보증금제를 시행하는 캘리포니아는 다른 주에 비해 재활용률이 높은 편이다. 전 세계에서 포장 용기 보증금제를 제일 먼저 시행한 곳이 1970년대 미국 오리건 주라고 한다. 그 나라가 지금은 세계 제일의 쓰레기 대국이라니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현재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10개 주에서 보증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보증금제를 실시하는 주와 실시하지 않는 주 사이엔 포장 용기의 재활용률에 차이가 크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알루미늄 캔의 경우 82.5%, 46.1%로 두 배 가까운 차이가 나며, PET나 유리병은 그 차이가 더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렸을 적 집 앞 수퍼에 빈 병이 가득 든 봉지를 낑낑거리며 가지고 가 받은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샀던 생각이 난다. 한국도 이 제도를 시행하면 어떨까. 

포장용기 보증금제 시행 여부에 따른 재활용률

미국이 세계 제일의 쓰레기 배출국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재활용률 수치 역시 낮은 편이다. 미국에 대한 뒷담화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것도 쓰레기와 분리 수거 문제이다. 분리 수거를 잘 하는 한국과 비교하며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통계를 찾아보면 주마다 차이가 크다. 잘 하고 있는 주도 있고 엉망인 주도 있다. 이 나라도 쓰레기 관리에 뒷짐만 지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모든 주가 당장 캘리포니아와 같은 수준이 되긴 어렵겠지만 좀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자그마치 336 페이지!

11월 30일 화요일. 311일째 날. 딸이 학교에서 빌려온 영어 소설을 다 읽었다. 꽤 두껍고 글밥도 많은 책이라 처음 도서관에서 빌려온 걸 보고 저걸 얼마나 읽을까 생각했는데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결국 다 읽는 데 성공했다. 반 친구들이 많이 읽는 책이라 내용이 궁금해서 빌려왔다고 한다. 역시 아이들에게는 또래 친구들이 미치는 영향만큼 강력한 것이 없다. 저녁에 자쿠지에 앉아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니 이해 못한 부분도 있고 건너뛴 대목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읽어낸 것이 어딘가 싶다. 다음 권도 도서관에서 빌려올 거라고. 

미술 학원 수업 날짜를 옮겼는데 중간에 착오가 있어 수업을 받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학원에 컴플레인을 했더니 추가로 수업 한 번을 해주기로 했다. 

밤엔 아들이 배앓이를 심하게 했다. 장이 예민한 편이라 어려서부터 종종 배앓이를 했는데 미국에 와선 다행히 그 횟수가 줄었다. 최근엔 심하게 아픈 적이 없었는데, 오늘 저녁에 먹은 새우가 문제였던 것 같다. 집에 있는 상비약을 먹였지만 쉬 나아지지 않았다. 잠을 못 자고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는 아들 옆에서 배를 만져주기도 하고 핫팩을 올려주기도 하면서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나와 아내야 의사라 스스로 진단과 처방이 가능하지만, 의사가 아니라면 이런 경우에 참 답답할 것이다. 통증이 서서히 누그러들면서 아이는 잠이 들었다. 미국에서 열 달을 살면서 가족 중 누구도 병원에 갈 만큼 심하게 아프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아서 항상 감사할 따름이다. 

2021년 11월 29일 월요일

연수일기 159. 딸의 covid-19 백신 접종, Happy Thanksgiving

11월 26일 금요일. 307일째 날.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갑다. 여느 아침처럼 공원의 펌프 트랙에선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어제와는 딴판의 날씨. 샌디에고에 돌아온 걸 실감했다. 

집 앞 상가엔 그새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졌다. 다음 주 토요일에 점등식을 한다니 그날엔 상가에서 저녁을 먹고 구경해도 좋을 것 같다.

오후에 딸이 covid-19 백신을 맞았다. 다행히 특별한 부작용은 없었다. 2차 접종은 1월로 예약이 되었다. 백신 예약 슬롯에 이전만큼 여유가 많진 않아 보인다. 더 이른 일정인 3주 뒤에 워크인으로 와서 접종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안내를 받았다. 한국에 가기 전에 격리 면제 신청 등 처리할 일이 있음을 고려하면 2차도 되도록 빨리 맞는 게 좋을 것 같다. 

H 선생님 가족을 집에 초대해 저녁을 먹었다. 원래 다음 달에 출국 예정이었는데, 둘째의 어린이집 등록 문제로 이번 일요일에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출국을 하게 되었다. 오늘 식사가 페어웰이 되는 셈이다. 오늘 오전에 귀국을 위한 PCR 검사를 받았는데, 주말이라 결과가 늦게 나올지도 몰라 두 군데서 검사했다고 한다. 2학년인 첫째는 백신 접종을 1차만 끝낸 상태라 한국에 돌아가면 자가 격리 대상이 된다. 


11월 27일 토요일. 308일째 날. 뉴욕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던 이웃 가족들을 포함해 네 가족이 다시 모였다. C, Y 선생님 딸의 생일이기도 하다. 중학교 2학년인 아이는 우리 아들과 등하교를 같이 한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누나가 있다는 게 학교 생활엔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Y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 치즈 떡볶이와 꼬치 어묵을 준비해 주셨다. 미국에 와서 꼬치 어묵은 처음이다. 아이들이 한국에 있을 때 아파트 앞 상가에서 자주 먹던 어묵을 그리워했는데 오늘 소원을 풀었다. 어제와 오늘, 연휴의 마지막을 추수감사절 답게 보낸 것 같아 감사하다.


11월 28일 일요일. 309일째 날. 아내와 아이들이 트레이더 조에서 사온 진저브레드 하우스를 만들었다. 미국에선 흔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이들과 만든다고 한다. 쿠키는 벽과 지붕이 되고 화이트 크림이 접착제 역할을 한다. 키트에 따라 미리 만들어진 크림이 들어있기도 한 모양인데, 우리가 샀던 건 머랭을 쳐야 해서 아내의 손목이 고생을 좀 했다. 크림에 레몬즙을 넣어서 나중에 굳어질 수 있도록 했다. 만들어진 쿠키 하우스를 보니 그럴 듯 하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집이 생각나는 모양. 

진저브레드 하우스 완성!

오후엔 아이들과 공원을 산책했다. 저녁엔 한국의 후배들과 연구 미팅이 있었다.  

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연수일기 158. 뉴욕 여행- 집으로

11월 25일 목요일. 306일째 날. 추수감사절이다. 체크 아웃 전에 아침을 먹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오늘 아침엔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다. 메이시스 퍼레이드 때문인지 일찍부터 호텔 앞 웨스트 48번가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통제를 한 상태다. 가까이 문을 연 빵집에서 아침 거리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11시에 체크 아웃을 하고 호텔 앞에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뒤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미리 왕복 예약해 둔 한인 택시였는데, 이어서 예약한 손님이 있었는지 기사님이 운전을 험하게 한다. 아들은 원래 멀미가 심한 편인데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초죽음이 된 상태였다.  

마지막 날 아침 호텔 방에서

돌아가는 항공편 역시 제트 블루이다. 13시55분 출발, LA 도착은 17시11분. 동부가 세 시간이 빠르니 돌아갈 때는 세 시간을 버는 셈이다. 동부를 다녀 오는 건 해외 여행을 하는 느낌이 든다더니, 시간대도 그렇고 날씨도 그렇고 그 말이 맞다.

여섯 시간 비행 후 제 시간에 LA 공항에 도착했다. 뉴욕에서 내내 입었던 겨울 점퍼는 가방 속으로 쑤셔 넣었다. 이제 미국을 떠날 때까지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이들도 나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네비게이션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했다. 저녁 메뉴는 집에서 짜파게티를 끓여 먹기로. 돌아오는 길에 알라딘과 디즈니 뮤지컬 음악을 들었다. 

뉴욕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 가족 중 가장 기대를 했던 이는 아내였다. 여행 시기는 아내가 결정한 대로 정했다. 보통 대부분의 계획을 내가 세우는 편이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항공편과 호텔, 뮤지컬 티켓을 예약했을 뿐 그외 구체적인 일정에 대해선 출발 일주일 전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대신 아내가 방문할 곳들을 정하고 할인 패스도 주문했다. 전망대는 이곳이 더 낫대. 스테이크 하우스는 여기로 예약하는 게 좋겠다. 항상 아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내 시큰둥한 반응 때문에 출발 며칠 전엔 조금 다투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내는 결혼 전에 뉴욕에서 십 개월을 살았다. 종종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곤 한다. 십 수년 전에 살던 도시를 다시 가는 기분은 남달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뉴욕 아닌가. 라스베가스나 LA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이지만 아내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뉴욕은 달라."

다르긴 달랐다. 백년은 되었음직한 붉은 벽돌색 아파트, 건물 외벽 낡은 철제 비상 계단, 사람들의 옷차림, 거리를 부유하는 각종 소음들. 쌀쌀한 날씨도, 코끝을 시리게 하는 차가운 공기도 오랜만이니 좋았다. 샌디에고에서 느끼지 못하는 늦가을의 정취도 그랬다. 붉게 물든 단풍 아래 길 위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폭신함만큼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사실 그래서 서울 생각도 많이 났다.) 그래도 그저 처음 와 본 도시이니 새로워 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시가 진정 특별하게 느껴진 순간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널 때였던 것 같다. 다리 입구 주변을 무질서하게 둘러싼 건물들을 벗어나 보행교 중앙에 깔린 나무 데크에 발을 들여놓자 무언가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쇠 난간 아래로 맨해튼을 향해 질주하는 차들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거대한 아치형 주탑 꼭대기에서 거미줄처럼 뻗어나온 철근 케이블 아래에 접어들었을 때, 문득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막상 예전에 살던 동네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일주일 내내 아내는 행복해 했다. 아내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뒤늦게 처음 방문한 이 도시를 즐겼다. 여섯 밤을 오롯이 맨해튼에서 머물기를 잘한 것 같다. 언젠가 또 올 수 있겠지. 그렇게 되었음 한다. 그땐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적당한 흥분과 기대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2021년 11월 25일 목요일

연수일기 157. 뉴욕 여행- 자연사 박물관, 뮤지컬 알라딘

11월 24일 수요일. 305일째 날. 내일은 체크아웃 후 바로 공항으로 갈 예정이라 오늘이 뉴욕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원래 일요일에 자연사 박물관에 갈 계획이었는데, 예약한 바우처를 주말에 받을 수가 없어서 오늘로 변경했었다. 예약을 다시 하면서 입장 시간이 12시로 늦춰졌다. 덕분에 오전 시간이 비어 늦잠을 자고 오전에는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그동안 갔던 미술관과 박물관은 개장 즈음에 입장을 해서 붐비는 시간을 피할 수 있었다. 오늘은 입구에서부터 백신 접종 카드를 확인하는 긴 줄이 늘어서있다. 입장 후에도 바우처를 티켓으로 바꾸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1층 로비에서부터 뼈만 남은 거대한 공룡 두 마리가 시선을 끈다. 우주의 탄생과 빅뱅 이론을 설명하는 짧은 영상을 보고 지구의 다양한 광물과 단층을 전시하는 방을 지났다. 1, 2층엔 박제된 동물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 국립 공원에서 직접 볼 수 있는 동물들이라 새롭진 않았다. 딸이 보고싶어하는 해양생물관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뒤 4층의 공룡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등장한 살아 움직이던 공룡 화석 모형이 있는 곳이다. 복원 가능한 공룡 중 가장 크다고 알려진 Titanosaur의 모형은 전시실 하나를 다 차지했다. 아이들은 전시된 공룡 알과 머리뼈를 만져보며 신기해했다.

박물관 로비

자연사 박물관은 스마트폰 앱이 잘 만들어져 있다. 전시물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고, 지도는 실시간 위치를 파악해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안내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어서 잘 사용하면 동선을 줄일 수 있다. 

박물관의 절반도 못 보았지만 금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관람객은 많은데 카페는 대부분 문을 닫아 휴식 공간이 부족했다. 지하의 푸드 코트는 운영을 했지만 막상 내려가 보니 정신없는 분위기에 음식도 시원치 않았다. 아이스크림만 하나씩 먹고 박물관을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호텔 근처로 돌아와 중국 국수 전문점인 Mee noodle shop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딸이 구글 맵을 검색해 찾은 음식점이다. 코코넛카레 국물에 고기를 넣은 요리, 돼지고기 볶음, 국수는 다 맛있었다. 곁들여 시킨 만두는 피가 너무 두꺼웠다. 

그동안의 빡빡한 일정에 지친 몸을 달래며 호텔에서 게으름을 피워본다. 방에서 쉬다가 알라딘 뮤지컬을 보기 위해 다시 나섰다. 극장에 입장하기 전 타임스퀘어 근처의 파이브 가이즈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언젠가는 먹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뉴욕에서 처음 먹게 될 줄은 몰랐다. 햄버거는 충분히 맛있었지만 내 기준엔 역시 인앤아웃이 최고. 

라이온 킹을 보았던 민스코프 극장에 비해 New Amsterdam Theatre는 고전적인 옛 극장에 좀 더 가까운 모습이다. 좌석 간격도 더 좁은 느낌이다. 지난 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극장은 관객으로 가득 찼다. 브로드웨이 극장이 1년 반 동안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던 게 올 9월이니 이제 겨우 두 달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의 흥분과 기대가 더한 듯 하다. 뮤지컬이 시작할 때 울려 퍼지는 환호와 박수엔 오랜 기다림에 목말라한 관객들의 마음이 녹아들었을 것이다. 

공연 시작 전

알라딘 뮤지컬에 대한 한 줄 평은 역시 '지니가 다 했다.' 양탄자를 타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Whole new world' 신은 괜찮았다. 아이들은 라이온 킹보다 알라딘이 더 재미있었다고 한다. 익숙한 음악이 더 많아서인듯. 더 난 라이온 킹에 한 표. 

돌아오는 길에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 한 번 더 들렀는데 폐점 시간이 가까워 오리지널 글레이즈드 도넛이 다 떨어졌다. 달달한 도넛에 맛을 들인 아들이 아쉬워 했다. 이렇게 뉴욕에서의 마지막 밤도 지나간다. 

2021년 11월 24일 수요일

연수일기 156. 뉴욕 여행-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하이 라인

11월 23일 화요일. 304일째 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규모가 크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단 1층 앞쪽에 있는 이집트관과 그리스, 로마관 전시물 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이다. 아들은 미이라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미이라가 있는 박물관은 많지만 이렇게 많은 미이라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 같다. 이집트관 하나만 해도 작은 박물관 하나 정도 크기인데, 심지어는 신전을 통째로 뜯어다 놓은 방도 있었다. 

이집트 신전이 있는 방

아메리카관의 카페에서 카페인을 충전하고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상을 비롯해 중세 유럽 조각품들을 구경했다. 아프리카 오세아니아관은 과감히 스킵. 맨 안쪽에 있는 Robert Lehman Collection에서부터 그림 전시실이 시작된다. 점묘법 화풍으로 유명한 폴 시냑, 마티스, 고갱을 거쳐 2층의 갤러리로 이동해 르누아르와 드가를 만났다.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르누아르의 대표작을 볼 수 있는 미술관도 드물 것 같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아내와 나는 특히 'Woman in White'가 마음에 들었다.)도 있었고, 클림트와 모네, 세잔, 반 고흐의 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미술관을 나와 우버를 타고 첼시 마켓으로 이동했다. 오늘과 내일은 기온이 뚝 떨어졌고 바람도 차다. 아이들과 걷는 거리를 최대한 줄이려 하는데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다. 첼시 마켓의 김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와서 보니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구글 맵의 영업 시간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게 잘못이다. 마켓 안엔 사람이 많고 웬만한 레스토랑 앞엔 대기 줄이 있었는데, 다행히 타이 음식점 한 곳은 레스토랑 안 공간도 넓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지쳤던 아이들도 기운을 차렸다. 

첼시 마켓에서 나와 리틀 아일랜드에 들렀다. 올해 개장한 작은 수상 공원으로, 영국의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이 설계했다. 허드슨 야드의 유명한 건물인 베슬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첼시 구역에선 하이 라인이 가장 유명하지만, 개성으로 따지자면 베슬과 리틀 아일랜드의 명성이 더 높아질 지도 모르겠다. 하이힐 뒤축을 닮은 거대한 콘크리트 화분들은 제각각 높낮이가 달라 묘한 느낌을 주는데, 그 화분들 위에 나무와 잔디, 산책길로 공원을 조성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원형 극장도 있어 날씨가 좋은 계절엔 공연도 볼 수 있다고 한다. 

리틀 아일랜드(왼쪽)로 들어가는 입구

공원을 나와 하이 라인에 올랐다. 휘트니 미술관부터 허드슨 야드까지 이어진 1.5마일 정도의 고가 산책로이자 공원이다. 버려진 화물 철로를 공원으로 만들어 뉴욕에서도 가장 획기적이고 매력적인 장소로 탈바꿈시킨 아이디어는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가을을 흠뻑 느낄 수 있는 단풍 나무와 갈대까지, 다양한 종류의 풀과 나무가 있어 공원이란 이름이 어색하지 않았다. 뉴욕의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건물들을 다른 눈높이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곳을 모티브로 한 서울로 7017도 개장 초기엔 보잘 것 없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지역 명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하이 라인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길로 자리매김 하길. 

빌딩 숲 사이를 걷는 기분

기온이 내려가고 허드슨 강의 바람이 세서 걷기 쉽지 않았지만 공원의 끝인 허드슨 야드 쇼핑몰에 도착했다. 쇼핑몰 안에서 커피로 잠시 추위를 녹인 뒤 베슬 Vessel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벌집 모양의 독특한 외관으로 2009년 개장 후 단숨에 관광 명소로 떠올랐고 포토 스팟으로 유명해졌지만, 최근 투신 자살 사건이 잇따르면서 현재는 폐쇄된 상태였다. 올 7월에 네 번째 사고 이후 영구 폐쇄도 검토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건물 밖에서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벌집 핏자가 생각나는 외관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Becco는 파스타를 리필해 먹을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마침 같은 시기에 여행을 온 우리 아파트 이웃인 C, Y, L 선생님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 뉴욕의 거리에서 만난 이웃과의 저녁 식사는 따뜻하고 즐거웠다. 하루 종일 추운데서 걷느라 피곤에 지친 아이들도 친구들을 만나니 금새 기운을 차리고 재잘거린다. 

2021년 11월 23일 화요일

연수일기 155. 뉴욕 여행- MoMA, Top of the Rock

11월 22일 월요일. 303일째 날. 오늘 가기로 한 뉴욕 현대 미술관(MoMA)은 호텔에서 걸어서 15분 거리다. 어제 많이 걸어서 오늘은 미술관과 저녁 록펠러 센터 전망대, 두 개의 일정만 소화하기로 했다. 록펠러 2세가 록펠러 센터를 지었고, MoMA를 설립한 이는 록펠러 2세의 부인인 애비 올드리치 록펠러였으므로 오늘 하루는 이 부부의 유산을 보는 셈이다. 

이번 여행에서 세 개의 미술관과 한 개의 박물관을 예약했는데 그중 가장 기대가 되는 게 MoMA 였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외에도 피카소, 달리, 샤갈, 세잔, 모네 등 익숙한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잭슨 폴록이나 앤디 워홀 등의 작품도 유명하지만 이들 현대 미술 작가보단 18-19세기 초까지 작가들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 이들의 작품이 모여있는 5층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캔버스의 크기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 그리고 노래. 푸른색과 회색 하늘, 보라색 안개와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보며 이 노래의 가사와 선율을 떠올렸다.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Look out on a summer's day
With eyes that know the darkness in my soul

Shadows on the hills
Sketch the trees and the daffodils
Catch the breeze and the winter chills
In colors on the snowy linen land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ry, starry night
Flaming flowers that brightly blaze
Swirling clouds in violet haze
Reflect in Vincent's eyes of china blue

Colors changing hue
Morning fields of amber grain
Weathered faces lined in pain
Are soothed beneath the artist's loving hand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For they could not love you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And when no hope was left in sight

On that starry, starry night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But I could'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Starry, starry night

Portraits hung in empty halls

Frame-less heads on nameless walls

With eyes that watch the world and can't forget


Like the strangers that you've met

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The silver thorn of bloody rose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Now I think I know

What you tried to say to me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세잔과 피카소, 루소와 칸딘스키, 클림트와 샤갈, 마티스와 프리다 칼로, 그리고 달리를 지나쳤다. 유명한 그림이 너무 많아서인지 오랜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금새 지친다. 1층 조각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모딜리아니와 몬드리안을 거쳐 모네의 수련이 있는 방에서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곳에선 마음이 평안해지는 듯 했다. 잭슨 폴락,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지났을 때는 이미 두시간 반이 지난 뒤였다. 아이들이 힘들어 해서 더 머물기는 어려웠다. 나오기 전 기념품 샵에서 마그넷을 샀다. 

미술관을 나오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C, Y 선생님 부부와 마주쳤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연휴에 뉴욕에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뉴욕에 있는 동안 식사를 한 번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오늘 점심은 뉴욕 정통 스테이크. Gallaghers Steakhouse를 예약해 두었다. 29불 짜리 점심 코스 가성비가 훌륭한 곳으로 유명하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편안한 인테리어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메인으로 필렛 미뇽, 양고기, 연어를 주문했다. 고기는 역시 훌륭, 다른 음식 맛도 다 괜찮았다. 하우스 와인 두 잔을 시켰는데, 코스의 가격이 매우 저렴한 반면 와인은 뉴욕 레스토랑 다운 가격이다.

미국의 레스토랑에선 항상 식사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여기서도 식사를 마치기까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예약해 둔 록펠러 센터의 Top of the Rock 전망대 입장이 네 시여서 바로 이동하니 시간이 딱 맞았다. 맨해튼의 랜드 마크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고, 전망대 중에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볼 수 있는 이곳이 가장 인기가 많다.

맨해튼의 야경

일몰과 야경을 볼 수 있는 이 시간에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한다. 예전엔 사람으로 가득해 사진을 찍기도 어려울 때가 많았다고 하는데, 판데믹으로 입장 예약과 제한을 하는 지금은 오히려 전망대에서 차분히 시간을 보내기 더 나은 것 같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저무는 해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그리고 하나둘 켜지는 빌딩 숲 불빛들을 지켜보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딸은 할랄가이즈에 들러 저녁 거리를 사고 아들과 나는 여행사 사무실에 가서 예약해 둔 자연사 박물관 바우처를 받았다. 타임 스퀘어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는 청년들을 구경하고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도 들렀다. 아들은 이곳에서 처음 먹은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 맘에 들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