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0일 화요일

환자의 마음, 부모의 마음

- 마포 사무실 이사.

"새로 옮기신 사무실은 맘에 드세요?"
당뇨병으로 세 번째 진료를 받는 50대 환자였다. 사람좋은 웃음을 띄고있던 표정이 더 한껏 밝아지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나이 들어 변화가 생긴다는게 쉽지 않네요."

- 남편 위암 수술.

"남편분 건강은 어떠세요?"
여느 때처럼 고혈압 약 처방을 받고 일어서던 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내 환자가 아니었지만 지난번에 남편의 암 진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터였다. 눈빛에 울듯 말듯한 기운이 스친다.
"이제 많이 안정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부서 이동. 스트레스.

"새 부서에 적응하느라 힘들진 않으세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 생각해서인지 환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패션 업체의 과장이었다. 심장병에 대한 불안이 많은 편이었고 오늘도 진료 중에 걱정을 내비친 뒤였지만,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이쪽 일이 그렇죠. 3D 업종입니다."

환자에 대해 기록할 때 병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을 종종 적어둔다. 사람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는데 소질이 없는 편이라 환자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까싶어 적는 것이다.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주치의가 나에 대해 잘 알고있길 바라는 환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다른 방법으로나마 채우고자 하는 얄팍한 바램이 담겨있기도 하다.

이런 기록을 적절히 활용하는 순간 진료실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진다. 환자는 종종 약간의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 나에 대한 신뢰도 게이지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차트에 짧게 기록된 내용 중엔 가족이 병에 걸렸거나 직장을 옮겼다거나 하는 큰 변화도 있지만, 악기 연습을 시작했다거나 강아지를 새로 키운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들도 있다. 효과는 사소한 일들에서 더 크게 발휘된다. 의학적으로도 환자와 의사간의 신뢰가 치료 효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론 기억하지 못하면서 기억하는 척 하며 환자의 마음을 받는 것이 꼼수를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땐 환자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거라 합리화 해본다.

환자가 꺼내는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대개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슬쩍 넘어가지만 눈치빠른 환자의 경우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그 이면에는 그저 수많은 환자 중의 하나에 그치지 않고 내게 보다 특별한 환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속내를 넌지시 비출 때면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지상정인 것을.

*

둘째는 갓난아기 때부터 울음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 울음보가 터지면 쉽게 그치지 않았다. 예민하기도 해서 밤에 자주 깨 엄마 아빠의 수면 사이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낮잠을 재울 때에 잠든 아이를 조심조심 눕히면 등이 땅에 닿는 순간 자지러지게 울어서 다시 안아야 잠이 들곤 했다.

8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을 보내야하는 상황이 되면서 까탈스런 아이를 선생님께서 어떻게 감당하실까 걱정이 많았다. 매일 등원을 시킬 때마다 교실이 떠나가라 울었고 중간중간에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자주 보채 첫 선생님이 애를 먹었다.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는 조금씩 어린이집에 익숙해졌다.

해가 바뀌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두돌이 지나고 말문이 트이면서 늘어난 떼와 고집에 아이와 실랑이를 해야하는 일이 잦았지만, 선생님은 늘 아이를 귀여워해주었다. 어린이집 수첩엔 매일 그날 찍은 아이 사진과 함께 아이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가 꼼꼼히 적혀있었다. 저녁에 아이의 어린이집 수첩을 펼쳐보는 것은 우리 부부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했던 말과 행동을 읽고 가끔은 놀라기도 했고, 그럴 때면 우리 아이가 특별할지도 모른다는 팔불출같은 기대도 했다.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얼마 전, 여느 때처럼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을 열었는데 수첩이 2개 들어있었다. 다른 아이의 수첩이 함께 딸려온 것이었다. 선생님이 다른 아이에게 어떤 이야길 적어주셨는지 궁금했다. 다른 아이의 사적인 부분을 엿보는 것 같아 망설였지만, 결국 조심스레 몇 장을 흝어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수첩의 내용은 우리 아이 것과 대동소이했고, 복사한 것과 같은 문장도 군데군데 있었다.
- 오늘 그림 그리기 활동을 했는데 너무 잘그려서 깜짝 놀랐어요.
- OO이는 피카소가 되려나봐요.

선생님이 아이들을 똑같이 대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선은 안도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선생님에게 있어 우리 아이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이 살짝 아쉽기도 했다. 부모의 못난 욕심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인지상정인 것을. 내 진료실을 찾는 환자의 마음도 이와 비슷한게 아닌가 싶다.


2014년 11월 15일 토요일

벌써 일 년

"3월로 시계를 돌린다면 어떤 과목을 열심히 하고 싶은가요? 이 질문에 상위권 학생들은 수학, 영어, 탐구 순을, 중위권 학생들은 영어, 수학, 탐구 순을 선택했습니다."
수능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곱창집 기름내 섞인 연기 사이로 보이는 티비 화면의 뉴스에선 수험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그래픽을 써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기자는 곱창집의 시끌거림을 이겨내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말투로 수학, 영어, 탐구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했다.

우스웠다. 아홉시 뉴스 꼭지로 이런 내용이라니. 의미없는 질문과 답이 전파를 낭비하는 동안, 내일 하루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될거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스스로의 지난 일 년의 시간을 어떻게 떠올리게 될까를 잠시 생각했다. 

곱창집을 나서는데 바람이 옷깃 사이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올해도 수능 한파라고 했다. 며칠 새에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
매년 이 시기가 되면 건강검진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진료실도 바빠진다. 다음날 방문할 이들의 작년 검사 결과를 미리 검토하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이름에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지난번 그와 상담을 했던 때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일 년이 지난 것이다. 설마 그 사람일까.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차트를 열어보지만 대부분 기대를 벗어나고 만다. 요즘 그런 일이 부쩍 늘었다.

그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룬 것 없이 또 한 해가 훌쩍 지나버렸다는 것. 연초에 다짐했으나 행하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곤 스스로의 모자란 실천력에 좌절감을 느끼며 이제라도 무언가 해야하지 않나 하는 마음에 괜히 조급해지기도 한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의미있고 멋지게 시간을 소비하며 발전해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터넷과 SNS에 가득한, 반짝반짝 빛나보이는 그들의 스토리를 접할 때면 괜한 질투심이 일기도 하고 그에 비해 해야할 일들만 허덕허덕 반복해온 내 지난 일 년의 시간은 밋밋하고 비루하게 느껴졌다. 

벌써 일 년이 되었네요.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빠르지요. 

진료실에서 인사를 나누고 검사 결과를 설명하기 전에 멋적은 듯 허허 웃는 그를 보며, 그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것을 느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일요일, 아이의 두 번째 국기원 심사였다. 작년에 한번 경험을 했다해도 역시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나보다. 국기원에 모인 많은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다. 1품 심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아이는 도장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대기석에 먼저 도착해서 2품 심사 대상인 자기 차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장내 방송을 통해 아이의 번호가 속한 조가 불리고,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과 달리 한껏 굳어있던 얼굴은 품새와 겨루기, 격파까지 그럴듯하게 해내고 나서야 다시 환해졌다.

그날 밤 휴대폰으로 찍은 심사 동영상을 정리하다 일 년 전 이맘 때의 1품 심사 영상을 발견했다. 일 년 전의 영상 안에선 지금보다 한 뼘은 작아보이는 아이가 어설프게 주먹을 지르고 발차기를 했다. 그에 비해 오늘 찍은 영상 속 발차기의 매서움은 차원이 달랐다. 어느 새 이렇게 컸었나.

앞차기와 얼굴 막기, 그리고 몸통 지르기. 입술을 꼭 다문 아이의 절도있는 동작을 되풀이해 돌려보며 엉뚱하게도 나는 내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떠올렸고, 비루했던 그 시간에 대해 관대해짐을 느꼈다.

하루하루 해야할 일들을 하는 동안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들이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변화는 언제나 가까이에 있지만 그 변화를 느끼기는 어렵고, 작은 변화는 흔히 대단찮은 것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인생은 중요한 시험에서 성공을 거두거나 훌륭한 성과를 내는 것과 같은 끝내주는 경험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작은 변화들을 관찰하고, 스스로가 이룬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탄해주는 것이다.
퍽퍽한 일상을 살아가는 데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니까.



2014년 10월 16일 목요일

나이 든다는 것

- 이젠 수영을 하지 않아요.

당뇨병이 있었지만 운동으로 조절을 잘 하는 50대 여자 환자였다. 수영은 그녀가 십여년째 꾸준히 하던 운동이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전 수영을 잘했어요. 수영 클럽에서 여자 회원들 중에 저보다 잘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가 뒤쳐지기 시작하는거에요. 예전만큼 속도를 내기 힘들고 숨도 차고... 다른 젊은 회원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나이가 들은거죠. 근데 그게 싫었어요.

누구나 나이를 똑같이 먹지만 나이듦의 방식은 제각각 다르다. 

모두가 그 과정에서 소쩍새의 울음 소리와 천둥 먹구름을 뒤로 하고 거울 앞에 선 중년의 여성을 떠올리는 시인처럼 평온함과 성찰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종종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둘 잃어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흰머리는 늘어나고 머리칼은 더 듬성듬성해지는 것, 책의 작은 활자가 이전만큼 또렷이 보이지 않게되는 것, 가까운 사람의 이름이 문득 생각나질 않는 것, 이전보다 더 자주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가야하는 것, 짧은 계단을 오를 때도 무릎이 뻐근해지는 것, 피부가 쉽게 말라서 가려움증이 생기는 것, 잇몸이 퇴축되고 잇새가 떠서 치솔질을 더 꼼꼼히 해야하는 것, 가슴이 처지고 폐경을 겪는 것, 발기했던 성기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그라들어 버리는 것, 그런 경험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이다.

소설 '은교'에서 칠십대의 시인 이적요는 삼십대 제자의 젊음을 질투하고 열일곱 소녀의 젊음을 욕망한다. 그는 늙는다는 것의 추함을 서러워하며 항변하듯 이야기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

누구나 나이를 똑같이 먹지만 나이듦의 방식은 제각각 다르다. 

내가 나이 먹었음을 진정으로 실감한 순간은 이전과 같이 노래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음역이 높은 편이라 대개 테너 파트를 맡았고 즐겨 부르는 곡들도 그런 노래들이었다. 제작년이었나, 아주 오랜만에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었는데 이전처럼 고음을 낼 수 없었다. 목에 잠깐 문제가 생긴건가 싶었지만 그 뒤로도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내 음역에서 몇 개의 콩나물 대가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상실감은 꽤 컸다. 수백 번은 불렀음직한 노래들은 그 이후로 예전의 그 노래가 아니었고, 콩나물 대가리 일부가 사라진 세상은 내게 더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게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거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 사람이 내게 가까운 존재라면 내 특별한 상실감을 알아주지 않음에 조금은 서운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상실의 지점과 정도는 제각각인 것이다. 그에게는 그만의 콩나물 대가리가 있을 것이고 그가 내 콩나물 대가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그의 콩나물 대가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필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콩나물 대가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콩나물 대가리를 그리워하지만 그 상실에 그럭저럭 익숙해지며 살아가고, 그것이 어려워질 때 가끔은 병원을 찾기도 한다. 그녀에게 수영은 나의 콩나물 대가리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고, 내가 그런 것처럼 그녀도 그럭저럭 잘 적응해갈 것이다.

수영을 앞으로도 안할거냐는 질문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네, 당분간은요. 대신 이젠 등산을 다녀요.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맥가이버 아저씨

맥가이버 아저씨라 불리는 분이 우리 동네에 계시다는 걸 알게된 건 얼마 전이었다.

어느 집에서 고장난 전자기기를 봐달라 출장 요청을 했는데, 오신김에 그 기기 뿐 아니라 고장난 전등, 망가진 주방용품까지 그동안 애먹이던 것들을 모두 말끔히 고쳐주셨단다. 그 집 엄마는 놀라운 경험을 아파트 맘카페에 공유했고, 그 글을 본 다른 집 엄마들이 하나둘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그는 맥가이버 아저씨로 불리게 되었다.
아파트가 6, 7년쯤 되면 비치된 집기들이 말썽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브랜드 제품이라면 해당 회사에 유상 수리를 요청하겠지만, 아파트의 집기들은 요청을 해도 함흥차사에 수리를 의뢰할 다른 곳도 마땅치않은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전파사가 있었지만 요즘이야 어디 찾기가 쉬운가.
이사를 앞두고 삐걱이는 침대를 어떻게 처리할까 아내와 상의를 하는데 아내가 그 맥가이버 아저씨를 불러보자 한다. 이런 것도 고쳐주실까 싶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전화를 했다. 삐걱이는 침대와 알미늄 관절에 문제가 생긴 스탠딩 조명, 서랍 하나가 닫히지 않는 아이방 서랍장 수리를 요청했는데 흔쾌히 와서 봐주시겠다고 한다.

"아이 아빠가 얼굴은 동안인데 머리는 나만큼 허옇네요. 이래도 되는건가? 허허." 60대쯤으로 보이는 사람 좋은 인상의 아저씨는 공구 가방을 들고 농담을 건네며 들어오셨다. 삐걱이는 침대를 이리저리 돌아보며 소리가 나는 부분을 확인하고, 매트리스를 치운 뒤 프레임을 살펴보던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프레임을 연결하는 쇠가 헐거워져서 마찰이 생긴거네요. 집에 바셀린 있나요?"

기름이나 구리스(물론 그런건 우리집엔 없었지만)도 아니고 바셀린이라니. 갑자기 빰빰빰빰빰빰빰 빰 빰빠빰~ 맥가이버의 테마 음악을 배경으로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로 시작하는 리차드 딘 앤더슨의 대사가 배한성씨 음성으로 들리는 듯 했다.
프레임 연결부위에 바셀린이 쓱쓱 칠해진 침대는 언제 삐걱였나 싶게 조용해졌다. 60대 맥가이버가 침대에 이어 스탠딩 조명과 서랍장을 수리하는 동안 나는 그의 우아한 손놀림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에게서는 약간의 금속 냄새와 묵은 먼지 냄새가 났고, 손톱 밑엔 기름때가 끼어있었다. 의뢰했던 임무가 끝난 뒤 비타500 한 병을 드린 것은 순수한 경의의 표시였다. 거실에 나와 짧은 대화를 하며 한쪽 구석에 놓인 턴테이블을 본 맥가이버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한 번 틀어봐요."

언뜻 그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턴테이블에도 문제가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때때로 오른쪽 스피커 소리가 죽곤 했는데, 턴테이블의 스피커 출력 부분에 접촉 문제가 생긴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던 차였다. 증상을 들은 맥가이버는 스피커 출력 선이 아닌 턴테이블 바늘을 암에서 분리한 뒤 말했다. "신문지 있나요?"

이번엔 신문지다. 나는 그의 주문이 떨어지자마자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주방 수납장에 접혀있던 신문지를 얼른 가져왔고, 맥가이버는 바늘의 분리된 면을 그 신문 지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접촉 문제는 대부분 여기서 생겨요. 신문지에는 기름 성분이 있어서 접촉 부위 때정도는 다 벗겨주죠." 신문지로 몇 번 문지른 턴테이블 바늘을 다시 끼웠을 때, 난 양쪽 스피커가 문제없이 작동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제대로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바늘을 분리해 꼼꼼히 살펴보고는 핀셋으로 바늘의 위치를 조심스럽게 바로잡았다.(물론 도구가 된 속눈썹 핀셋은 현장에서 조달했다.) 바늘을 끼우고 암을 조정해 수평을 맞추는 그의 손길은 마치 애인을 쓰다듬듯 부드러웠다.

"좋은 제품이에요. 이때만 해도 일본 제품들이 최고였죠. 제대로 만들었으니까."

테크닉스 SL1900 모델에 대한 맥가이버의 평이었다. 턴테이블에 올려진 Enya의 LP 한 면이 끝까지 도는 동안 나는 그에게 턴테이블의 원리와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또한 고등학생 때부터 동네 전파사 앞에 버려진 흑백 텔리비젼을 집에 가져와 고치곤 했고, 진공관 앰프와 튜너에 빠져 몇 달치 월급과 새 기기를 바꾸곤 했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전 아파트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버려진 앰프(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델인)를 주워 수리했는데 멀쩡히 소리가 잘 나더라며, 마누라는 또 애물단지를 가져왔다고 타박을 하지만 오늘은 카세트 데크를 수리해야겠다며 말할 때는 재미난 장난감 포장을 막 뜯은 소년처럼 조금은 들떠 있었다.

그 순간 그가 참 행복해 보였다.

지금 그는 30년째 같은 곳에서 전파사를 하고 있다. 언젠가 퇴근길에 한번쯤 그의 작업대를 구경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맥가이버 아저씨의 짧은 강의 흔적.


2014년 9월 6일 토요일

시간

컴퓨터 촬영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안좋았다.

대장의 커다란 종양은 단층 이미지에서도 뚜렷하게 눈에 띄었고 복강 내에 다발성 림프절 전이가 있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의 촬영 결과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폐에도 전이가 의심되는 소견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다시 정밀 검사가 필요하겠지만, 복강 내 상태를 볼 때 십중팔구는 폐 전이일 것이다.

대장암이 다른 장기에 원격 전이 되었을 때 5년 생존율은 일반적으로 20% 미만. 불안한 표정으로 앞에 앉아있는 이 40대 여성을 5년 뒤에도 볼 수 있는 확률이 20%가 채 안된다는 뜻이었다. 부인과 검사 결과를 흝어보았다. 자녀는 2명. 5년 뒤면 아이들이 몇 살이 될까. 아마 성인은 아닐 것이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네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검사 결과와 앞으로의 대략적인 과정을 조목조목 알려주었다. 환자는 외과에 입원을 하게 될 것이고, 몇 가지 검사 후에 치료 방침이 결정될 것이다. 수술로 어느 정도 절제가 가능한 상태라면 생존율은 꽤 높아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좋은 예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떤 상태이든 항암 요법은 필수일 것이다.

  완치는 가능한 건가요.

지금은 치료 결과에 대해 확실한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일단 외과에서 정밀 검사를 해봐야 좀더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있어요.

  수술을 하면 괜찮은 거겠지요?

애가 타는 표정으로 앞에 앉은 낮선 의사로부터 무언가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기대하며 떨리는 말투로 되풀이해 묻는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갑작스런 결과에 힘드실걸로 알아요. 앞으로 저희 의료진이 치료에 최선을 다할겁니다. 최대한 빨리 치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해드릴거에요.

황망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가는 환자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일생에 있어 가장 충격적일 수도 있었던 대화를 나눈 시간은 십오분 남짓. 앞으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

오전 진료를 끝내고 연구실에서 밀린 잡무를 하는데 문자메세지 알람이 울렸다. 오랜 친구 P의 문자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함께 했던 대학 친구였다. 전공은 달랐지만 일년간은 함께 살았었고, 대학 시절엔 꽤 친한 사이였다. 종종 밤을 새워 함께 술을 마시는게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그가 오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졸업을 할 무렵이었다. 자가면역질환이었는데 최종적으로 밝혀진 진단은 그 중에서도 질이 좋지 않은 종류였다. 그 계통의 병이라는게 원래 전신에 시도때도 없이 다양한 증상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는 자주 아파했고, 늘 약을 먹었고, 평생 그런 상태를 안고 살아야할지 모른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쾌활한 편이었다.

졸업 후엔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몇 년이 지나 뜬금없이 그가 연락을 해왔고, 그날 우리는 이전처럼 또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앞으로는 자주 좀 보자고 다짐했지만 그날 이후에도 일년에 고작 한두차례 보는게 전부였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 사이의 관계란게 그렇다. 가끔 잊을만할 때 쯤이면 그에게 전화가 왔고, 약속을 정해 얼굴을 보곤 했다. 그러고보니 최근 몇 년간 내가 먼저 연락은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요즘 몸은 좀 어때?

  좋진 않아. 뭐 늘 그렇지. 그 병이 낫는게 아니잖아.

  난 이번 달엔 좀 바쁜데. 다음 달에나 시간이 날 것 같네. 넌 스케줄이 어때?

  난 요즘 아무때나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고 너 편할 때로 해.

  어쩐 일로 그리 한가하셔?

  요즘은 바쁘게 살면 뭐하나 싶네. 허무하기도 하고. 몸이 아파서 그런가.

짧은 문자였지만 어째 느낌이 이상했다. 병세가 많이 심해진건가. 그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왔기에 가끔씩 그가 본인의 검사 결과나 질병 상태에 대해 궁금해할 때는 전자 차트의 기록을 확인하고 다시 설명해주곤 했다. 내가 담당 의사는 아니었지만, 대학병원의 외래 진료 시간은 환자 입장에선 늘 부족하기 마련이니까.

차트를 열어 P의 최근 진료 기록을 살펴보았다. 원래 앓고있던 병의 상태는 이전보단 나빴지만 예상할 수 있는 정도였다. 괜한 걱정이었나. 조금 더 과거의 기록을 보기 위해 마우스의 스크롤을 내렸다. 늘 진료받는 류마티스내과 외에 소화기내과 진료 기록이 눈에 띄었다. 진료 시기는 몇 개월 전이었는데, 진단명을 보고 가슴이 덜컥했다.

HCC (Hepatocellular Carcinoma). 간암이었다. 이미 진단 후 한 차례 고주파열치료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고보니 그가 간염 보유자였던게 생각났다.

  그런 거였구나.

그가 보낸 짧은 문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 자신이 건강하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병이 조금씩 조금씩 진행하는 걸 느끼면서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럭저럭 잘 견뎌왔는데, 지금 이런 소식을 알게 된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 둘의 아빠이고, 내 기억이 맞다면 아이들은 초등학생이다. 몇 년 전 봤던 그의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에게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생의 남은 시간은 몇 년이나 될까.

문득 내가 앞으로 P를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캘린더를 열어 앞으로의 일정을 확인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예정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메일을 보낼 참이었다. 굳이 기존에 잡힌 일정을 취소하려 한 것이 그동안 내가 먼저 연락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아님 몇 년이 지난 후에 지금보다 더할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려는 얄팍한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다음 월요일 저녁의 몇 시간이 나보다는 그에게 훨씬 더 의미있는 순간이 되리란 것이었다.

2014년 8월 5일 화요일

요즘 과일엔 비타민 함량이 줄었다고?

오늘날 우리가 먹는 과일은 50년 전의 과일과는 다르다고 한다. 50년 사이에 과일의 비타민, 미네랄 함량이 줄어들었다는 근거는 영국과 미국에서 발표된 몇몇 논문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해당 연구들마다 다양한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1,2)

식품 별로 영양소 함량의 변화를 정리한 자료(링크)에 따르면, 예를 들어 사과의 경우 비타민 A는 40%, 비타민 B는 75%, 철분은 53% 줄었다고 한다. 해당 자료를 보면 식품 별로 어떤 영양소는 다소 늘어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토양 성분의 변화, 비료 사용, 짧은 기간에 생산량을 높이는 경작법 등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연구와 관련된 전문가들은 과일과 채소는 여전히 비타민과 미네랄의 좋은 공급원이므로 해당 식품들을 충분히 먹기를 권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연구 결과들이 엉뚱하게 쓰이기도 한다. 이를 비타민 보충제를 복용해야 하는 근거로 삼는 경우이다. 과거에 비해 현대의 식품에 비타민이 충분히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 식품만 먹어서는 충분한 비타민 섭취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물론 50년 전에 비해 현재 개별 식품의 비타민 함량이 줄어들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한데, 이것은 '우리가 식품을 통해 섭취하는 비타민의 총량이 부족한가?' 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영양 섭취에 관한 연구에 가장 많이 쓰이는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 타당하다. 2012년에 발표된 국민건강영양통계에 따르면 남녀 성별 주요 영양소의 권장기준 대비 섭취 비율은 다음 그림과 같다.


인, 철, 비타민A, 티아민(B1), 리보플라빈(B2), 나이아신(B3), 비타민C 등 대부분의 영양소가 섭취 기준 대비 100% 이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칼슘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식단에서 부족한 대표적인 영양소이다.)

국민건강영양조사는 우리 국민 표본 집단에 대해 실제 섭취하는 식품을 조사하고, 식품별 영양소 함량 DB를 바탕으로 각각의 영양소 섭취 총량을 계산해낸다. 예를 들어 조사 대상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사과 1개, 귤 1개을 먹었다면 사과와 귤에 포함된 개별 비타민을 더해 하루 섭취량을 계산하는 것이다. 여기에 쓰이는 식품별 영양소 함량 DB는 농촌진흥청과 보건복지부에서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자료이며, 조사 당시에 국내에서 소비되는 식품들을 수거해 실제 영양소 함량을 분석한 결과이다.3,4)

그러니까 50년 전이 아닌 현대의 식품을 먹는 우리들도 비타민을 부족하게 먹고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섭취가 부족하다면 과일과 채소를 조금 더 신경써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 50년 전 과일보다는 못할지 모르지만, 오늘 마트에서 팔고있는 과일들은 여전히 좋은 비타민 급원 식품이며 특정 비타민 보충제들이 과일과 채소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변함없는 사실이다.


1) Mayer A-M. Historical changes in the mineral content of fruits and vegetables. Brit Food J 1997;96(6):207−11.
2) Davis DR, Epp MD, Riordan HD. Changes in USDA Food Composition for 43 Garden Crops, 1950 to 1999. J Am C Nutr 2004; 23(6):669−82.
3) 농촌자원개발연구소. 식품성분표 제7개정판 I. 2006.
4) 보건복지부,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식품별 영양성분 분석자료의 데이터베이스 추가구축사업 결과보고서. 2000

2014년 7월 27일 일요일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과 팔레스타인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은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이 실시한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한 실험이다.
밀그램은 광고를 통해 기억력에 대한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피실험자들에게는 4달러가 제공되었고, 이들을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사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배우였다.
실험자는 교사 역할의 피실험자에게는 학생에게 테스트할 문제를, 학생 역할의 배우에게는 암기할 단어를 제시했다. 그리고 교사에게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볼트부터 시작하여 450볼트까지 한번에 15볼트 씩 높여가며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실험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전압을 올릴지 말지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실험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전압을 올릴 것을 강요했다. 밀그램이 주시했던 것은 교사들이 전압을 높여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였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 밀그램은 0.1% 정도의 사람들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65%의 피실험자가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실험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밀그램의 실험은 사람들이 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가 성격보다 상황에 있고, 매우 설득력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가학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용 출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이미지: EBS 지식채널e

*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공습 자체보다도 가자 지구 폭격을 언덕 위에서 관전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들을 악마라 욕하기는 참으로 쉽다. 개인적으로 든 의문은, 이들도 상식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일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전까지 그저 어렴풋하게 알고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복잡한 문제를 좀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이 책.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855214&start=slayer

어떤 이는 이 책마저도 지나치게 팔레스타인인 입장에서 쓰여졌다 할지도 모른다. 물론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사 작가의 시각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해도 이미 반대쪽으로 편향된 시각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그나마 균형을 유지하는데 충분히 보탬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는동안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내 무지가 몹시 부끄러웠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적으로 소수자였던 팔레스타인 국민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술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민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힌다는데 있다. 팔레스타인 국민의 아픔에 공감하며 순간순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감정이 격해질 때도 있었지만 책을 덮을 때쯤엔 스데롯 언덕에서 박수를 치며 폭격을 관전하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하고 예민한 소재를 만화를 통해 담아내기로 한 작가의 선택은 탁월하다.

*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은 권위 앞에서 개인의 도덕이나 믿음이 얼마나 유약한 것인지를 증명했다. 실험 안에서 권위는 흰 가운과 엄숙한 명령이었다. 현실에서의 권위는 상관이나 독재자와 같은 구체적인 개인일수도 있고, 집단이나 사회가 담고있는 가치와 같은 보다 간접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이 절대선이 되고 그에 반하는 것이 절대악이 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보편적인 도덕률은 그 설 자리를 잃었다. 밀그램은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에게 행한 홀로코스트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유를 탐구하고자 했지만 그의 실험은 현재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하는 집단 살육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단순히 그들의 도덕과 인간성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80년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을 두고 홍어 말린다 조롱하는 이가 내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임을 우리 역시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현상은 항상 단순하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은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자 지구의 사진과 외신을 접하고 조금이라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면 이 책을 꼭 읽기를 권한다. 

2014년 7월 13일 일요일

고장 수리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공식 서비스센터는 매우 깔끔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긴 흰색 테이블에 칸막이 창구별로 배치된 직원들이 상담을 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창구마다 놓인 작은 전광판은 수시로 띵동거리며 고객의 번호를 부르고 있었다. 대기인 수 일곱 명. 번호표를 뽑고 대기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차례를 기다렸다. 벽걸이 액정에서는 새 태블릿 모델의 홍보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휴대폰 카메라 렌즈에 이상이 생긴 터였다. 사진 중앙에 실모양의 보라색 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먼지가 들어갔나 싶어 휴대폰을 두들기고 흔들어도 보았지만 점은 없어지지 않았고, 카메라 내부를 청소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서비스센터를 찾은 것이다. 십오분쯤 지났을까. 전광판에 내 손에 들린 종이쪽지의 번호가 떠올랐다. 담당 기사는 예의바른 미소와 말투로 빠르게 물었다.

- 어떤 문제가 있으신가요?

- 카메라에 보라색 점이 생겼는데 청소를 할 수 있을까 해서요. 

카메라 앱을 실행하고 액정과 렌즈 부분을 십여초쯤 살펴보았을까. 기사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 이건 청소로 해결 안되겠네요. 그냥 폰을 교체하셔야 하는데 비용은 25만원입니다.

당황스러웠다. 카메라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정도의 비용을 들여야하다니. 카메라만을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는 없는지 물었지만 역시 어렵다는 대답 뿐. 직원의 딱딱한 어투는 더 이상의 다른 질문을 거부하는 듯 느껴졌다.

- 사설 수리업체들도 있던데 그런 곳에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일까요?

- 글쎄요. 그건 모르겠네요.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말투다. 괜한 질문을 했나 싶었다. 그 순간 직원의 얼굴에 잠깐 비친 표정은 난처함이었을까 귀찮음이었을까.

일분도 안되는 상담을 마치고 일어섰다. 직원은 처음의 예의바른 표정으로 돌아가 웃으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오는 길에 가까운 사설 수리업체를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곳은 길 건너편 한 블럭 거리였고, 오피스텔을 개조한 작은 사무실을 사장이자 기사인 한 분이 지키고 있었다. 카메라 액정에 문제가 생겼음을 확인하고 교체하는 데 든 시간은 삼십분 가량. 오만원을 지불했다. 손놀림이 무척 꼼꼼한 분이였다. 수리는 깔끔하게 끝났고, 서비스는 만족스러웠다.

*

그날 따라 외래 환자의 표정이 무언가 불편해 보였다. 삼사개월에 한번씩 고혈압 약을 처방받아가시는, 항상 예의바르고 다소곳한 60대 여성분이었다. 가끔 실없는 농담으로 눙칠 때에도 한 손으로 입을 가리시고 호호호 하고 웃으시곤 했다.

처방을 끝내고 늘상 하던 질문을 던졌다.

- 뭐 더 궁금한 건 없으세요?

잠깐 망설이는 듯 하던 환자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 지난 번에 보내주셨던 정형외과 말인데요...

그제서야 지난 번 진료 때 발바닥의 통증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던 것이 떠올랐다. 오래된 족저근막염이었다. 족저근막염 자체가 원체 쉽게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당시에 대기 환자가 많은 상황이어서 주사 치료를 할 여유는 없어보였다. 마음이 급해 별다른 처방 없이 족부를 보는 정형외과에 의뢰를 해 보내드렸던 것이다.

- 별다른 설명도 없고 그냥 보조기 하나를 주더라구요. 약도 처방했는데 소염진통제야 그전에도 여러 번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어요.

항상 차분했던 환자의 어투가 평소보다 높아지고 있었다.

- 원래 이 병이 아픈거니 별다른 방법 없다고. 선생님 말씀에 성의도 없고 다른 것보다 나는 많이 아픈데 그렇게 말씀하시는게 참 실망스럽데요. 보조기는 불편하기만 해서 한두번 하고 사용도 안했어요. 안되겠다 싶어 여기저기 주변에 알아보고 개인 병원에 갔지요.

순간 진땀이 났다. 다른 과로 의뢰를 했을 때 그 결과가 늘 좋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진료 과정에서 마음이 상한 환자의 이야길 들을 때면 의뢰를 한 입장에선 미안하고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 충격파 시술이라는게 있다고 하더라구요. 치료 받고 증상이 절반정도 좋아졌어요. 이제는 살 만하네요. 이런 치료 방법이 있는데 왜 안 알려줬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 병원에서 가르쳐준 스트레칭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예의 그 잔잔한 표정으로 돌아간 환자는 그래도 신경써주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신다. 애초에 내가 뭐 해드린게 있다고. 그저 불편한게 나아져서 다행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

어떤 질병에 대한 치료법은 여러 가지이며, 대개는 근거와 효과가 확실한 치료를 우선시하게 된다. 하지만 당연스럽게도 치료에 대한 결과가 모두 좋지는 않다. 일차적인 치료법의 효과가 기대를 저버렸을 때, 상대적으로 근거가 덜 명확한 치료들 중 어떤 치료를 어느 정도까지 적용할 것인가는 정답이 없는 문제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설명했느냐 못지 않게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문제를 공감한다는 것.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가 도움을 주고싶다는 것.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종종 단어 그 자체보다 무성의 언어가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른 관계의 문제를 손보는데 있어서도 이것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6월 17일 화요일

부모님과의 여행

부모님과 누님 내외와 함께 여행을 가는 건 결혼 이후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원체 집 밖으로 나다니는 걸 즐겨하지 않는 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식이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싫다고 할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동안 너무 소홀했구나 싶었다. 아버지가 칠순이 되던 해에 해외 여행을 계획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던지라 올해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터였다.

통영으로 가는 연휴의 고속도로는 나들이 차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예정보다 서너시간을 훌쩍 넘겨 힘들게 도착한 펜션은 사진으로 가늠했던 것보다 더 규모가 작았다. 그래도 시설은 그럭저럭 머물만했고, 짐을 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앞뜰을 다람쥐마냥 뛰어다녔다. 여느 펜션에서처럼 숯불을 피워 돼지 목살을 굽고, 제법 여행 분위기를 낸 저녁 식사는 적당히 소란스러웠고 적당히 즐거웠다. 문제가 생긴 것은 잠자리를 준비할 때였다. 부모님은 침대를 쓰시도록 했지만 나머지 가족들을 위한 침구가 부족했고 요는 너무 얇아 등이 결릴 정도였다. 펜션을 예약한게 나였던지라,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불편하게 만들었구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통영의 명물이라는 한려수도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나섰다. 통영 시내는 어제의 고속도로만큼 차들로 북적였다. 서울 시내의 차들이 모조리 이 자그마한 도시로 몰려왔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십킬로 남짓한 길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케이블카 매표소 앞은 연휴 놀이공원에 맞먹을만큼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표를 산 뒤에도 2시간을 기다려야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근처의 국제음악당을 둘러보고 돌아와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내려오니 점심 때가 이미 지난 상황. 내리쬐는 한낮의 땡볕에 다들 지쳐있었다.

연세 많으신 부모님과 더위와 배고픔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검색해두었던 맛집을 찾아가기는 무리일 것 같아 근처의 깔끔해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점심 때가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어렵게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는데, 음식이 나왔을 때 또 문제가 생겼다. 엉뚱한 메뉴가 나온 것이다.

저희는 굴밥이 아니라 굴국밥을 시켰는데요?

지금 주방에 굴국밥은 안되고 굴밥만 되는데예.

서빙을 하는 아주머니는 동네 특유의 투박한 말투로 심드렁하게 대꾸를 하고는 다른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실랑이를 거쳐 폭발한 것은 저쪽 한켠에 있던 다른 아주머니가 주방에 하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냥 저기 국밥 하나 해주이소.

부모님을 포함해 가족들이 모두 생짜를 부리는 손님 취급을 당한 것 같아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을 향해 소리를 친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저희는 분명 굴국밥을 주문했는데 그쪽에서 주문을 제대로 못 받은거잖아요?

테이블 분위기가 금새 싸늘해졌다. 날카로운 말투로 몇 번을 더 따지자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은 난처한 얼굴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막상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굴밥을 열심히 먹고 있었고, 어머니와 누님은 그만 하라며 말렸지만 화는 쉬 가라앉지 않았다.

*

상태가 나빠졌거나 임종을 앞둔 입원 환자의 주치의를 할 때 어려운 것 중 하나는 환자의 가족을 대하는 것이었다. 늘상 병상을 지켰던 가족 이외에 다른 가족들이 불쑥 찾아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기 원할 때. 오늘은 둘째 아들, 다음날은 첫째 사위, 다음날은 환자의 동생, 이런 식으로 매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할 때면 진이 빠지곤 했다. 나중엔 가능한 많은 가족들이 한꺼번에 모이도록 하고 설명을 하는 요령도 생겼는데, 설명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환자의 악화되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을 대할 때였다.

가끔은 의료진의 잘잘못을 따지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심하게는 병동에서 난동을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러니했던 점은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은 대개 환자의 곁을 가장 힘들게 지켰던 이들이 아니라 입원 기간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가족들이었다는 것이다.
가족들간의 사정이야 다 제각각이었겠지만, 평소에 신경쓰지 않다가 애꿏은 담당 의료진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은 꽤나 이중적으로 보였다. 처음 보는 가족들과 실랑이를 겪고 난 뒤엔 저렇게 애틋했던 분이면 평소에나 잘 하지, 라고 동료들과 제멋대로 뒷담화를 하며 울적해진 기분을 털어내곤 했다.

그런 행동 이면에 가족들이 환자에 대해 품고 있는 부채 의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당신에게 해드린 것이 참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제는 막상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 그런 생각이 뒤늦게서야 스스로를 절박하게 만들고 그 절박함이 감정의 균열을 일으켰으리라.

*

그날 저녁, 몇 잔의 맥주에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신지 평소보다 몇 배나 말씀이 많으셨고 어머니는 당신 말씀이 너무 많다고 타박을 하셨다. 막히는 도로와 뒷좌석 아이들의 칭얼거림에 애를 태웠던, 한낮의 땡볕을 맞으며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땀을 흘렸던 이틀간의 시간이 그렇게 느릿느릿 잦아들고 있었다.

2014년 5월 26일 월요일

더러운 손의 의사들 'On the Take - How Medicine's Complicity with Big Business Can Endanger Your Health'

철모르던 전공의 시절에, 저녁에 전공의실에 남아있으면 가끔 모 외국계 제약회사 직원분이 살짝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조심스레 "선생님, 저녁 안드셨으면 저희 도시락이 좀 남아있는데 드시겠어요?" 하고 묻곤 했다.

도시락도 급수가 있는데, 그 직원분이 가져다주는 도시락은 매우 상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활짝 웃으며 공손하게 말을 건네는 그 여직원이 건네주던 도시락은 힘든 하루에 저녁도 못먹고 퍼져있던 나를 비롯한 여러 전공의들에게 비타민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늘상 피곤에 쩔어있는 전공의나 전임의들을 대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영업을 하는), 비용 대비 효율이 좋은 방법은 역시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 제약회사와 그 직원이 담당하던 약품에 대한 인상이 덩달아 좋아지기도 했다. 도시락을 먹은 다음날 새로 해당 계통의 약을 처방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회사의 약을 좀더 처방하기도 했던 것 같다. 비슷한 효과에 가격도 별 차이가 없다면 내게 따뜻한 도시락을 주었던 직원의 약을 써주는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 약은 대개 장기적으로 복용을 하고 때론 평생 먹기도 하므로 아마 그때 내게서 처방을 받고 지금까지 먹고있는 환자분들도 계실 것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처방했던 그 약은 현재도 세계적으로 판매량이 매우 많은 약이고 나 스스로도 자주 처방하고 있지만 지금 처방하는 이유는 그 직원이 주었던 도시락 때문은 아니다. 임상 경험이 쌓이고, 내 환자에 대해 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넓이가 커지면서 제약회사의 도시락이나 판촉물은 내가 약제를 선택하는데 훨씬 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의바른 제약회사 직원분들이 제공하는 도시락이나 식사를 먹는 일은 지금도 종종 있는 일이다.

문득 오래 전의 도시락을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읽었던 이 책 때문이다. NEJM의 편집장이었던 제롬 캐시러가 집필한 이 책에서 저자는 기업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환자보다 스스로와 기업의 이익을 우선 순위에 놓고있는 일부 의사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책 말미에 그는 의료계에 만연한 탐욕을 없애기 위한 로드맵을 제안하는데, 그 첫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203913


1. 기업으로부터의 모든 선물을 배제한다. 의사가 진료하고 교육하는 데 유용한 것일지라도 선물은 받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의사들은 기업이 후원하는 대변인 부서에 참여하지 않는다.


20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