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0일 화요일

환자의 마음, 부모의 마음

- 마포 사무실 이사.

"새로 옮기신 사무실은 맘에 드세요?"
당뇨병으로 세 번째 진료를 받는 50대 환자였다. 사람좋은 웃음을 띄고있던 표정이 더 한껏 밝아지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나이 들어 변화가 생긴다는게 쉽지 않네요."

- 남편 위암 수술.

"남편분 건강은 어떠세요?"
여느 때처럼 고혈압 약 처방을 받고 일어서던 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내 환자가 아니었지만 지난번에 남편의 암 진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터였다. 눈빛에 울듯 말듯한 기운이 스친다.
"이제 많이 안정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부서 이동. 스트레스.

"새 부서에 적응하느라 힘들진 않으세요?"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라 생각해서인지 환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패션 업체의 과장이었다. 심장병에 대한 불안이 많은 편이었고 오늘도 진료 중에 걱정을 내비친 뒤였지만,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이쪽 일이 그렇죠. 3D 업종입니다."

환자에 대해 기록할 때 병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을 종종 적어둔다. 사람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는데 소질이 없는 편이라 환자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까싶어 적는 것이다.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주치의가 나에 대해 잘 알고있길 바라는 환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다른 방법으로나마 채우고자 하는 얄팍한 바램이 담겨있기도 하다.

이런 기록을 적절히 활용하는 순간 진료실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진다. 환자는 종종 약간의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 나에 대한 신뢰도 게이지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차트에 짧게 기록된 내용 중엔 가족이 병에 걸렸거나 직장을 옮겼다거나 하는 큰 변화도 있지만, 악기 연습을 시작했다거나 강아지를 새로 키운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들도 있다. 효과는 사소한 일들에서 더 크게 발휘된다. 의학적으로도 환자와 의사간의 신뢰가 치료 효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론 기억하지 못하면서 기억하는 척 하며 환자의 마음을 받는 것이 꼼수를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땐 환자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거라 합리화 해본다.

환자가 꺼내는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대개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슬쩍 넘어가지만 눈치빠른 환자의 경우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그 이면에는 그저 수많은 환자 중의 하나에 그치지 않고 내게 보다 특별한 환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속내를 넌지시 비출 때면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지상정인 것을.

*

둘째는 갓난아기 때부터 울음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 울음보가 터지면 쉽게 그치지 않았다. 예민하기도 해서 밤에 자주 깨 엄마 아빠의 수면 사이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낮잠을 재울 때에 잠든 아이를 조심조심 눕히면 등이 땅에 닿는 순간 자지러지게 울어서 다시 안아야 잠이 들곤 했다.

8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을 보내야하는 상황이 되면서 까탈스런 아이를 선생님께서 어떻게 감당하실까 걱정이 많았다. 매일 등원을 시킬 때마다 교실이 떠나가라 울었고 중간중간에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자주 보채 첫 선생님이 애를 먹었다.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이는 조금씩 어린이집에 익숙해졌다.

해가 바뀌면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던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두돌이 지나고 말문이 트이면서 늘어난 떼와 고집에 아이와 실랑이를 해야하는 일이 잦았지만, 선생님은 늘 아이를 귀여워해주었다. 어린이집 수첩엔 매일 그날 찍은 아이 사진과 함께 아이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가 꼼꼼히 적혀있었다. 저녁에 아이의 어린이집 수첩을 펼쳐보는 것은 우리 부부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했던 말과 행동을 읽고 가끔은 놀라기도 했고, 그럴 때면 우리 아이가 특별할지도 모른다는 팔불출같은 기대도 했다.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얼마 전, 여느 때처럼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을 열었는데 수첩이 2개 들어있었다. 다른 아이의 수첩이 함께 딸려온 것이었다. 선생님이 다른 아이에게 어떤 이야길 적어주셨는지 궁금했다. 다른 아이의 사적인 부분을 엿보는 것 같아 망설였지만, 결국 조심스레 몇 장을 흝어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수첩의 내용은 우리 아이 것과 대동소이했고, 복사한 것과 같은 문장도 군데군데 있었다.
- 오늘 그림 그리기 활동을 했는데 너무 잘그려서 깜짝 놀랐어요.
- OO이는 피카소가 되려나봐요.

선생님이 아이들을 똑같이 대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선은 안도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선생님에게 있어 우리 아이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이 살짝 아쉽기도 했다. 부모의 못난 욕심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인지상정인 것을. 내 진료실을 찾는 환자의 마음도 이와 비슷한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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