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 누님 내외와 함께 여행을 가는 건 결혼 이후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원체 집 밖으로 나다니는 걸 즐겨하지 않는 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식이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싫다고 할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동안 너무 소홀했구나 싶었다. 아버지가 칠순이 되던 해에 해외 여행을 계획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던지라 올해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터였다.
통영으로 가는 연휴의 고속도로는 나들이 차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예정보다 서너시간을 훌쩍 넘겨 힘들게 도착한 펜션은 사진으로 가늠했던 것보다 더 규모가 작았다. 그래도 시설은 그럭저럭 머물만했고, 짐을 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앞뜰을 다람쥐마냥 뛰어다녔다. 여느 펜션에서처럼 숯불을 피워 돼지 목살을 굽고, 제법 여행 분위기를 낸 저녁 식사는 적당히 소란스러웠고 적당히 즐거웠다. 문제가 생긴 것은 잠자리를 준비할 때였다. 부모님은 침대를 쓰시도록 했지만 나머지 가족들을 위한 침구가 부족했고 요는 너무 얇아 등이 결릴 정도였다. 펜션을 예약한게 나였던지라,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불편하게 만들었구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통영의 명물이라는 한려수도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나섰다. 통영 시내는 어제의 고속도로만큼 차들로 북적였다. 서울 시내의 차들이 모조리 이 자그마한 도시로 몰려왔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십킬로 남짓한 길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케이블카 매표소 앞은 연휴 놀이공원에 맞먹을만큼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표를 산 뒤에도 2시간을 기다려야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근처의 국제음악당을 둘러보고 돌아와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내려오니 점심 때가 이미 지난 상황. 내리쬐는 한낮의 땡볕에 다들 지쳐있었다.
연세 많으신 부모님과 더위와 배고픔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검색해두었던 맛집을 찾아가기는 무리일 것 같아 근처의 깔끔해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점심 때가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어렵게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는데, 음식이 나왔을 때 또 문제가 생겼다. 엉뚱한 메뉴가 나온 것이다.
저희는 굴밥이 아니라 굴국밥을 시켰는데요?
지금 주방에 굴국밥은 안되고 굴밥만 되는데예.
서빙을 하는 아주머니는 동네 특유의 투박한 말투로 심드렁하게 대꾸를 하고는 다른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실랑이를 거쳐 폭발한 것은 저쪽 한켠에 있던 다른 아주머니가 주방에 하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냥 저기 국밥 하나 해주이소.
부모님을 포함해 가족들이 모두 생짜를 부리는 손님 취급을 당한 것 같아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을 향해 소리를 친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저희는 분명 굴국밥을 주문했는데 그쪽에서 주문을 제대로 못 받은거잖아요?
테이블 분위기가 금새 싸늘해졌다. 날카로운 말투로 몇 번을 더 따지자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은 난처한 얼굴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막상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굴밥을 열심히 먹고 있었고, 어머니와 누님은 그만 하라며 말렸지만 화는 쉬 가라앉지 않았다.
*
상태가 나빠졌거나 임종을 앞둔 입원 환자의 주치의를 할 때 어려운 것 중 하나는 환자의 가족을 대하는 것이었다. 늘상 병상을 지켰던 가족 이외에 다른 가족들이 불쑥 찾아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기 원할 때. 오늘은 둘째 아들, 다음날은 첫째 사위, 다음날은 환자의 동생, 이런 식으로 매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할 때면 진이 빠지곤 했다. 나중엔 가능한 많은 가족들이 한꺼번에 모이도록 하고 설명을 하는 요령도 생겼는데, 설명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환자의 악화되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을 대할 때였다.
가끔은 의료진의 잘잘못을 따지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심하게는 병동에서 난동을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러니했던 점은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은 대개 환자의 곁을 가장 힘들게 지켰던 이들이 아니라 입원 기간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가족들이었다는 것이다.
가족들간의 사정이야 다 제각각이었겠지만, 평소에 신경쓰지 않다가 애꿏은 담당 의료진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은 꽤나 이중적으로 보였다. 처음 보는 가족들과 실랑이를 겪고 난 뒤엔 저렇게 애틋했던 분이면 평소에나 잘 하지, 라고 동료들과 제멋대로 뒷담화를 하며 울적해진 기분을 털어내곤 했다.
그런 행동 이면에 가족들이 환자에 대해 품고 있는 부채 의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당신에게 해드린 것이 참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제는 막상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 그런 생각이 뒤늦게서야 스스로를 절박하게 만들고 그 절박함이 감정의 균열을 일으켰으리라.
*
그날 저녁, 몇 잔의 맥주에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신지 평소보다 몇 배나 말씀이 많으셨고 어머니는 당신 말씀이 너무 많다고 타박을 하셨다. 막히는 도로와 뒷좌석 아이들의 칭얼거림에 애를 태웠던, 한낮의 땡볕을 맞으며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땀을 흘렸던 이틀간의 시간이 그렇게 느릿느릿 잦아들고 있었다.
아버지는 원체 집 밖으로 나다니는 걸 즐겨하지 않는 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식이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싫다고 할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동안 너무 소홀했구나 싶었다. 아버지가 칠순이 되던 해에 해외 여행을 계획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던지라 올해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터였다.
통영으로 가는 연휴의 고속도로는 나들이 차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예정보다 서너시간을 훌쩍 넘겨 힘들게 도착한 펜션은 사진으로 가늠했던 것보다 더 규모가 작았다. 그래도 시설은 그럭저럭 머물만했고, 짐을 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앞뜰을 다람쥐마냥 뛰어다녔다. 여느 펜션에서처럼 숯불을 피워 돼지 목살을 굽고, 제법 여행 분위기를 낸 저녁 식사는 적당히 소란스러웠고 적당히 즐거웠다. 문제가 생긴 것은 잠자리를 준비할 때였다. 부모님은 침대를 쓰시도록 했지만 나머지 가족들을 위한 침구가 부족했고 요는 너무 얇아 등이 결릴 정도였다. 펜션을 예약한게 나였던지라,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불편하게 만들었구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통영의 명물이라는 한려수도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나섰다. 통영 시내는 어제의 고속도로만큼 차들로 북적였다. 서울 시내의 차들이 모조리 이 자그마한 도시로 몰려왔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십킬로 남짓한 길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케이블카 매표소 앞은 연휴 놀이공원에 맞먹을만큼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표를 산 뒤에도 2시간을 기다려야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근처의 국제음악당을 둘러보고 돌아와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내려오니 점심 때가 이미 지난 상황. 내리쬐는 한낮의 땡볕에 다들 지쳐있었다.
연세 많으신 부모님과 더위와 배고픔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검색해두었던 맛집을 찾아가기는 무리일 것 같아 근처의 깔끔해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점심 때가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어렵게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는데, 음식이 나왔을 때 또 문제가 생겼다. 엉뚱한 메뉴가 나온 것이다.
저희는 굴밥이 아니라 굴국밥을 시켰는데요?
지금 주방에 굴국밥은 안되고 굴밥만 되는데예.
서빙을 하는 아주머니는 동네 특유의 투박한 말투로 심드렁하게 대꾸를 하고는 다른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실랑이를 거쳐 폭발한 것은 저쪽 한켠에 있던 다른 아주머니가 주방에 하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냥 저기 국밥 하나 해주이소.
부모님을 포함해 가족들이 모두 생짜를 부리는 손님 취급을 당한 것 같아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을 향해 소리를 친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저희는 분명 굴국밥을 주문했는데 그쪽에서 주문을 제대로 못 받은거잖아요?
테이블 분위기가 금새 싸늘해졌다. 날카로운 말투로 몇 번을 더 따지자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은 난처한 얼굴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막상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굴밥을 열심히 먹고 있었고, 어머니와 누님은 그만 하라며 말렸지만 화는 쉬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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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가 나빠졌거나 임종을 앞둔 입원 환자의 주치의를 할 때 어려운 것 중 하나는 환자의 가족을 대하는 것이었다. 늘상 병상을 지켰던 가족 이외에 다른 가족들이 불쑥 찾아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기 원할 때. 오늘은 둘째 아들, 다음날은 첫째 사위, 다음날은 환자의 동생, 이런 식으로 매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할 때면 진이 빠지곤 했다. 나중엔 가능한 많은 가족들이 한꺼번에 모이도록 하고 설명을 하는 요령도 생겼는데, 설명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환자의 악화되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을 대할 때였다.
가끔은 의료진의 잘잘못을 따지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심하게는 병동에서 난동을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러니했던 점은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은 대개 환자의 곁을 가장 힘들게 지켰던 이들이 아니라 입원 기간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가족들이었다는 것이다.
가족들간의 사정이야 다 제각각이었겠지만, 평소에 신경쓰지 않다가 애꿏은 담당 의료진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은 꽤나 이중적으로 보였다. 처음 보는 가족들과 실랑이를 겪고 난 뒤엔 저렇게 애틋했던 분이면 평소에나 잘 하지, 라고 동료들과 제멋대로 뒷담화를 하며 울적해진 기분을 털어내곤 했다.
그런 행동 이면에 가족들이 환자에 대해 품고 있는 부채 의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당신에게 해드린 것이 참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제는 막상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 그런 생각이 뒤늦게서야 스스로를 절박하게 만들고 그 절박함이 감정의 균열을 일으켰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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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몇 잔의 맥주에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신지 평소보다 몇 배나 말씀이 많으셨고 어머니는 당신 말씀이 너무 많다고 타박을 하셨다. 막히는 도로와 뒷좌석 아이들의 칭얼거림에 애를 태웠던, 한낮의 땡볕을 맞으며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땀을 흘렸던 이틀간의 시간이 그렇게 느릿느릿 잦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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