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5일 화요일

요즘 과일엔 비타민 함량이 줄었다고?

오늘날 우리가 먹는 과일은 50년 전의 과일과는 다르다고 한다. 50년 사이에 과일의 비타민, 미네랄 함량이 줄어들었다는 근거는 영국과 미국에서 발표된 몇몇 논문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해당 연구들마다 다양한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1,2)

식품 별로 영양소 함량의 변화를 정리한 자료(링크)에 따르면, 예를 들어 사과의 경우 비타민 A는 40%, 비타민 B는 75%, 철분은 53% 줄었다고 한다. 해당 자료를 보면 식품 별로 어떤 영양소는 다소 늘어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토양 성분의 변화, 비료 사용, 짧은 기간에 생산량을 높이는 경작법 등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연구와 관련된 전문가들은 과일과 채소는 여전히 비타민과 미네랄의 좋은 공급원이므로 해당 식품들을 충분히 먹기를 권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연구 결과들이 엉뚱하게 쓰이기도 한다. 이를 비타민 보충제를 복용해야 하는 근거로 삼는 경우이다. 과거에 비해 현대의 식품에 비타민이 충분히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 식품만 먹어서는 충분한 비타민 섭취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물론 50년 전에 비해 현재 개별 식품의 비타민 함량이 줄어들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한데, 이것은 '우리가 식품을 통해 섭취하는 비타민의 총량이 부족한가?' 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영양 섭취에 관한 연구에 가장 많이 쓰이는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 타당하다. 2012년에 발표된 국민건강영양통계에 따르면 남녀 성별 주요 영양소의 권장기준 대비 섭취 비율은 다음 그림과 같다.


인, 철, 비타민A, 티아민(B1), 리보플라빈(B2), 나이아신(B3), 비타민C 등 대부분의 영양소가 섭취 기준 대비 100% 이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칼슘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식단에서 부족한 대표적인 영양소이다.)

국민건강영양조사는 우리 국민 표본 집단에 대해 실제 섭취하는 식품을 조사하고, 식품별 영양소 함량 DB를 바탕으로 각각의 영양소 섭취 총량을 계산해낸다. 예를 들어 조사 대상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사과 1개, 귤 1개을 먹었다면 사과와 귤에 포함된 개별 비타민을 더해 하루 섭취량을 계산하는 것이다. 여기에 쓰이는 식품별 영양소 함량 DB는 농촌진흥청과 보건복지부에서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자료이며, 조사 당시에 국내에서 소비되는 식품들을 수거해 실제 영양소 함량을 분석한 결과이다.3,4)

그러니까 50년 전이 아닌 현대의 식품을 먹는 우리들도 비타민을 부족하게 먹고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섭취가 부족하다면 과일과 채소를 조금 더 신경써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 50년 전 과일보다는 못할지 모르지만, 오늘 마트에서 팔고있는 과일들은 여전히 좋은 비타민 급원 식품이며 특정 비타민 보충제들이 과일과 채소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변함없는 사실이다.


1) Mayer A-M. Historical changes in the mineral content of fruits and vegetables. Brit Food J 1997;96(6):207−11.
2) Davis DR, Epp MD, Riordan HD. Changes in USDA Food Composition for 43 Garden Crops, 1950 to 1999. J Am C Nutr 2004; 23(6):669−82.
3) 농촌자원개발연구소. 식품성분표 제7개정판 I. 2006.
4) 보건복지부,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식품별 영양성분 분석자료의 데이터베이스 추가구축사업 결과보고서. 2000

2014년 7월 27일 일요일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과 팔레스타인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은 1961년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이 실시한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한 실험이다.
밀그램은 광고를 통해 기억력에 대한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피실험자들에게는 4달러가 제공되었고, 이들을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사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배우였다.
실험자는 교사 역할의 피실험자에게는 학생에게 테스트할 문제를, 학생 역할의 배우에게는 암기할 단어를 제시했다. 그리고 교사에게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볼트부터 시작하여 450볼트까지 한번에 15볼트 씩 높여가며 전기 충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실험자는 흰색 가운을 입고 전압을 올릴지 말지 고민하는 교사들에게 '실험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전압을 올릴 것을 강요했다. 밀그램이 주시했던 것은 교사들이 전압을 높여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였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 밀그램은 0.1% 정도의 사람들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65%의 피실험자가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실험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밀그램의 실험은 사람들이 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가 성격보다 상황에 있고, 매우 설득력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가학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내용 출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이미지: EBS 지식채널e

*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공습 자체보다도 가자 지구 폭격을 언덕 위에서 관전하는 이스라엘 국민들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들을 악마라 욕하기는 참으로 쉽다. 개인적으로 든 의문은, 이들도 상식과 양심이 있는 사람들일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이전까지 그저 어렴풋하게 알고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복잡한 문제를 좀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나게 된 이 책.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855214&start=slayer

어떤 이는 이 책마저도 지나치게 팔레스타인인 입장에서 쓰여졌다 할지도 모른다. 물론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사 작가의 시각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해도 이미 반대쪽으로 편향된 시각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그나마 균형을 유지하는데 충분히 보탬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는동안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내 무지가 몹시 부끄러웠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적으로 소수자였던 팔레스타인 국민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술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민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힌다는데 있다. 팔레스타인 국민의 아픔에 공감하며 순간순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감정이 격해질 때도 있었지만 책을 덮을 때쯤엔 스데롯 언덕에서 박수를 치며 폭격을 관전하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하고 예민한 소재를 만화를 통해 담아내기로 한 작가의 선택은 탁월하다.

*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은 권위 앞에서 개인의 도덕이나 믿음이 얼마나 유약한 것인지를 증명했다. 실험 안에서 권위는 흰 가운과 엄숙한 명령이었다. 현실에서의 권위는 상관이나 독재자와 같은 구체적인 개인일수도 있고, 집단이나 사회가 담고있는 가치와 같은 보다 간접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이 절대선이 되고 그에 반하는 것이 절대악이 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보편적인 도덕률은 그 설 자리를 잃었다. 밀그램은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에게 행한 홀로코스트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유를 탐구하고자 했지만 그의 실험은 현재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행하는 집단 살육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단순히 그들의 도덕과 인간성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80년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을 두고 홍어 말린다 조롱하는 이가 내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임을 우리 역시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고, 현상은 항상 단순하지 않으며, 문제의 해결은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자 지구의 사진과 외신을 접하고 조금이라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면 이 책을 꼭 읽기를 권한다. 

2014년 7월 13일 일요일

고장 수리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공식 서비스센터는 매우 깔끔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긴 흰색 테이블에 칸막이 창구별로 배치된 직원들이 상담을 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창구마다 놓인 작은 전광판은 수시로 띵동거리며 고객의 번호를 부르고 있었다. 대기인 수 일곱 명. 번호표를 뽑고 대기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차례를 기다렸다. 벽걸이 액정에서는 새 태블릿 모델의 홍보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휴대폰 카메라 렌즈에 이상이 생긴 터였다. 사진 중앙에 실모양의 보라색 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먼지가 들어갔나 싶어 휴대폰을 두들기고 흔들어도 보았지만 점은 없어지지 않았고, 카메라 내부를 청소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서비스센터를 찾은 것이다. 십오분쯤 지났을까. 전광판에 내 손에 들린 종이쪽지의 번호가 떠올랐다. 담당 기사는 예의바른 미소와 말투로 빠르게 물었다.

- 어떤 문제가 있으신가요?

- 카메라에 보라색 점이 생겼는데 청소를 할 수 있을까 해서요. 

카메라 앱을 실행하고 액정과 렌즈 부분을 십여초쯤 살펴보았을까. 기사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 이건 청소로 해결 안되겠네요. 그냥 폰을 교체하셔야 하는데 비용은 25만원입니다.

당황스러웠다. 카메라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정도의 비용을 들여야하다니. 카메라만을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는 없는지 물었지만 역시 어렵다는 대답 뿐. 직원의 딱딱한 어투는 더 이상의 다른 질문을 거부하는 듯 느껴졌다.

- 사설 수리업체들도 있던데 그런 곳에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일까요?

- 글쎄요. 그건 모르겠네요.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말투다. 괜한 질문을 했나 싶었다. 그 순간 직원의 얼굴에 잠깐 비친 표정은 난처함이었을까 귀찮음이었을까.

일분도 안되는 상담을 마치고 일어섰다. 직원은 처음의 예의바른 표정으로 돌아가 웃으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오는 길에 가까운 사설 수리업체를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곳은 길 건너편 한 블럭 거리였고, 오피스텔을 개조한 작은 사무실을 사장이자 기사인 한 분이 지키고 있었다. 카메라 액정에 문제가 생겼음을 확인하고 교체하는 데 든 시간은 삼십분 가량. 오만원을 지불했다. 손놀림이 무척 꼼꼼한 분이였다. 수리는 깔끔하게 끝났고, 서비스는 만족스러웠다.

*

그날 따라 외래 환자의 표정이 무언가 불편해 보였다. 삼사개월에 한번씩 고혈압 약을 처방받아가시는, 항상 예의바르고 다소곳한 60대 여성분이었다. 가끔 실없는 농담으로 눙칠 때에도 한 손으로 입을 가리시고 호호호 하고 웃으시곤 했다.

처방을 끝내고 늘상 하던 질문을 던졌다.

- 뭐 더 궁금한 건 없으세요?

잠깐 망설이는 듯 하던 환자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 지난 번에 보내주셨던 정형외과 말인데요...

그제서야 지난 번 진료 때 발바닥의 통증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던 것이 떠올랐다. 오래된 족저근막염이었다. 족저근막염 자체가 원체 쉽게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당시에 대기 환자가 많은 상황이어서 주사 치료를 할 여유는 없어보였다. 마음이 급해 별다른 처방 없이 족부를 보는 정형외과에 의뢰를 해 보내드렸던 것이다.

- 별다른 설명도 없고 그냥 보조기 하나를 주더라구요. 약도 처방했는데 소염진통제야 그전에도 여러 번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어요.

항상 차분했던 환자의 어투가 평소보다 높아지고 있었다.

- 원래 이 병이 아픈거니 별다른 방법 없다고. 선생님 말씀에 성의도 없고 다른 것보다 나는 많이 아픈데 그렇게 말씀하시는게 참 실망스럽데요. 보조기는 불편하기만 해서 한두번 하고 사용도 안했어요. 안되겠다 싶어 여기저기 주변에 알아보고 개인 병원에 갔지요.

순간 진땀이 났다. 다른 과로 의뢰를 했을 때 그 결과가 늘 좋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진료 과정에서 마음이 상한 환자의 이야길 들을 때면 의뢰를 한 입장에선 미안하고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 충격파 시술이라는게 있다고 하더라구요. 치료 받고 증상이 절반정도 좋아졌어요. 이제는 살 만하네요. 이런 치료 방법이 있는데 왜 안 알려줬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 병원에서 가르쳐준 스트레칭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예의 그 잔잔한 표정으로 돌아간 환자는 그래도 신경써주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신다. 애초에 내가 뭐 해드린게 있다고. 그저 불편한게 나아져서 다행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

어떤 질병에 대한 치료법은 여러 가지이며, 대개는 근거와 효과가 확실한 치료를 우선시하게 된다. 하지만 당연스럽게도 치료에 대한 결과가 모두 좋지는 않다. 일차적인 치료법의 효과가 기대를 저버렸을 때, 상대적으로 근거가 덜 명확한 치료들 중 어떤 치료를 어느 정도까지 적용할 것인가는 정답이 없는 문제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설명했느냐 못지 않게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문제를 공감한다는 것.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가 도움을 주고싶다는 것.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종종 단어 그 자체보다 무성의 언어가 훨씬 더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다른 관계의 문제를 손보는데 있어서도 이것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14년 6월 17일 화요일

부모님과의 여행

부모님과 누님 내외와 함께 여행을 가는 건 결혼 이후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원체 집 밖으로 나다니는 걸 즐겨하지 않는 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식이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싫다고 할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동안 너무 소홀했구나 싶었다. 아버지가 칠순이 되던 해에 해외 여행을 계획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던지라 올해는 단단히 마음을 먹은 터였다.

통영으로 가는 연휴의 고속도로는 나들이 차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예정보다 서너시간을 훌쩍 넘겨 힘들게 도착한 펜션은 사진으로 가늠했던 것보다 더 규모가 작았다. 그래도 시설은 그럭저럭 머물만했고, 짐을 풀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앞뜰을 다람쥐마냥 뛰어다녔다. 여느 펜션에서처럼 숯불을 피워 돼지 목살을 굽고, 제법 여행 분위기를 낸 저녁 식사는 적당히 소란스러웠고 적당히 즐거웠다. 문제가 생긴 것은 잠자리를 준비할 때였다. 부모님은 침대를 쓰시도록 했지만 나머지 가족들을 위한 침구가 부족했고 요는 너무 얇아 등이 결릴 정도였다. 펜션을 예약한게 나였던지라, 모처럼의 가족 여행을 불편하게 만들었구나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날 아침, 통영의 명물이라는 한려수도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나섰다. 통영 시내는 어제의 고속도로만큼 차들로 북적였다. 서울 시내의 차들이 모조리 이 자그마한 도시로 몰려왔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십킬로 남짓한 길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케이블카 매표소 앞은 연휴 놀이공원에 맞먹을만큼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표를 산 뒤에도 2시간을 기다려야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근처의 국제음악당을 둘러보고 돌아와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내려오니 점심 때가 이미 지난 상황. 내리쬐는 한낮의 땡볕에 다들 지쳐있었다.

연세 많으신 부모님과 더위와 배고픔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검색해두었던 맛집을 찾아가기는 무리일 것 같아 근처의 깔끔해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점심 때가 지난 시간이었음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어렵게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는데, 음식이 나왔을 때 또 문제가 생겼다. 엉뚱한 메뉴가 나온 것이다.

저희는 굴밥이 아니라 굴국밥을 시켰는데요?

지금 주방에 굴국밥은 안되고 굴밥만 되는데예.

서빙을 하는 아주머니는 동네 특유의 투박한 말투로 심드렁하게 대꾸를 하고는 다른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실랑이를 거쳐 폭발한 것은 저쪽 한켠에 있던 다른 아주머니가 주방에 하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냥 저기 국밥 하나 해주이소.

부모님을 포함해 가족들이 모두 생짜를 부리는 손님 취급을 당한 것 같아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을 향해 소리를 친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저희는 분명 굴국밥을 주문했는데 그쪽에서 주문을 제대로 못 받은거잖아요?

테이블 분위기가 금새 싸늘해졌다. 날카로운 말투로 몇 번을 더 따지자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은 난처한 얼굴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막상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굴밥을 열심히 먹고 있었고, 어머니와 누님은 그만 하라며 말렸지만 화는 쉬 가라앉지 않았다.

*

상태가 나빠졌거나 임종을 앞둔 입원 환자의 주치의를 할 때 어려운 것 중 하나는 환자의 가족을 대하는 것이었다. 늘상 병상을 지켰던 가족 이외에 다른 가족들이 불쑥 찾아와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기 원할 때. 오늘은 둘째 아들, 다음날은 첫째 사위, 다음날은 환자의 동생, 이런 식으로 매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할 때면 진이 빠지곤 했다. 나중엔 가능한 많은 가족들이 한꺼번에 모이도록 하고 설명을 하는 요령도 생겼는데, 설명을 되풀이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환자의 악화되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족을 대할 때였다.

가끔은 의료진의 잘잘못을 따지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심하게는 병동에서 난동을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러니했던 점은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은 대개 환자의 곁을 가장 힘들게 지켰던 이들이 아니라 입원 기간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가족들이었다는 것이다.
가족들간의 사정이야 다 제각각이었겠지만, 평소에 신경쓰지 않다가 애꿏은 담당 의료진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은 꽤나 이중적으로 보였다. 처음 보는 가족들과 실랑이를 겪고 난 뒤엔 저렇게 애틋했던 분이면 평소에나 잘 하지, 라고 동료들과 제멋대로 뒷담화를 하며 울적해진 기분을 털어내곤 했다.

그런 행동 이면에 가족들이 환자에 대해 품고 있는 부채 의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당신에게 해드린 것이 참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제는 막상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 그런 생각이 뒤늦게서야 스스로를 절박하게 만들고 그 절박함이 감정의 균열을 일으켰으리라.

*

그날 저녁, 몇 잔의 맥주에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신지 평소보다 몇 배나 말씀이 많으셨고 어머니는 당신 말씀이 너무 많다고 타박을 하셨다. 막히는 도로와 뒷좌석 아이들의 칭얼거림에 애를 태웠던, 한낮의 땡볕을 맞으며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땀을 흘렸던 이틀간의 시간이 그렇게 느릿느릿 잦아들고 있었다.

2014년 5월 26일 월요일

더러운 손의 의사들 'On the Take - How Medicine's Complicity with Big Business Can Endanger Your Health'

철모르던 전공의 시절에, 저녁에 전공의실에 남아있으면 가끔 모 외국계 제약회사 직원분이 살짝 문을 노크하고 들어와 조심스레 "선생님, 저녁 안드셨으면 저희 도시락이 좀 남아있는데 드시겠어요?" 하고 묻곤 했다.

도시락도 급수가 있는데, 그 직원분이 가져다주는 도시락은 매우 상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활짝 웃으며 공손하게 말을 건네는 그 여직원이 건네주던 도시락은 힘든 하루에 저녁도 못먹고 퍼져있던 나를 비롯한 여러 전공의들에게 비타민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늘상 피곤에 쩔어있는 전공의나 전임의들을 대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영업을 하는), 비용 대비 효율이 좋은 방법은 역시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 제약회사와 그 직원이 담당하던 약품에 대한 인상이 덩달아 좋아지기도 했다. 도시락을 먹은 다음날 새로 해당 계통의 약을 처방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회사의 약을 좀더 처방하기도 했던 것 같다. 비슷한 효과에 가격도 별 차이가 없다면 내게 따뜻한 도시락을 주었던 직원의 약을 써주는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 약은 대개 장기적으로 복용을 하고 때론 평생 먹기도 하므로 아마 그때 내게서 처방을 받고 지금까지 먹고있는 환자분들도 계실 것이다.

전공의 시절부터 처방했던 그 약은 현재도 세계적으로 판매량이 매우 많은 약이고 나 스스로도 자주 처방하고 있지만 지금 처방하는 이유는 그 직원이 주었던 도시락 때문은 아니다. 임상 경험이 쌓이고, 내 환자에 대해 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넓이가 커지면서 제약회사의 도시락이나 판촉물은 내가 약제를 선택하는데 훨씬 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의바른 제약회사 직원분들이 제공하는 도시락이나 식사를 먹는 일은 지금도 종종 있는 일이다.

문득 오래 전의 도시락을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읽었던 이 책 때문이다. NEJM의 편집장이었던 제롬 캐시러가 집필한 이 책에서 저자는 기업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환자보다 스스로와 기업의 이익을 우선 순위에 놓고있는 일부 의사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책 말미에 그는 의료계에 만연한 탐욕을 없애기 위한 로드맵을 제안하는데, 그 첫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203913


1. 기업으로부터의 모든 선물을 배제한다. 의사가 진료하고 교육하는 데 유용한 것일지라도 선물은 받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의사들은 기업이 후원하는 대변인 부서에 참여하지 않는다.


2013.11.

2014년 5월 20일 화요일

환자 편에 서기

콜레스테롤이 높아 진료를 받아오던 60대 여성 환자. 항상 다소곳한 태도로 조용히 다녀가시던 분이었는데 오늘은 진료실을 나가기 전에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린다.

 “저… 제가 뇌 MRI 검사를 해야할까 싶어서요.”

노년의 환자 스스로 먼저 이런 말씀을 할 때는 대개 치매에 대한 걱정이 이유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실제 검사가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다. 잘 알던 사람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물건을 둔 곳을 잊고 한참을 찾아 헤맸다는 등의 비슷비슷한 에피소드를 잘 들어주고 나이에 따른 건망증이니 치매 걱정은 덜으셔도 된다고 안심시키면 환자는 밝은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간다. 그럼 상황 끝.

“어떤 문제가 있으세요?”

“가족들이 검사를 해보라고 하네요.”

본인이 아닌, 가족이나 지인이 검사를 권하는 경우는 주의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환자의 기억력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다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 대기 리스트를 보니 시간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좀더 대화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검사를 권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이전과 달라져서인 것 같아요. 예전엔 가족들 돌보면서도 집안 대소사를 다 챙겼는데. 이전보다 기억력도 떨어지고, 행동도 굼떠지고…”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해보면 자기들은 더한다고 그래요. 나이 들면서 그 정도 변화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친구들 사이에선 지금도 제가 참 적극적인 편이고 모이면 즐거운데, 가족들에겐 미안하기도 하고 자꾸 위축이 되요.”

가족에 대해 좀더 물어보았다. 남편은 모 회사의 중역이였고, 30대의 두 딸은 둘 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고, 미혼이었지만 부모와 따로 살고 있다 했다.

“딸들이 엄마가 뒤쳐지는 게 싫다고 그래요. 예전엔 그렇게 똑똑했던 엄마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잘 다루지 못하고…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새로 배우는 거 참 잘했거든요.”

“남편분은 뭐라 하세요?”

“남편은 나이 들수록 더 머리를 쓰고 노력해야 하는데 왜 노력을 안하냐고 그래요. 남편이나 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들을 나왔고, 젊어서는 제가 남편보다 더 머리도 좋고 계산도 잘 했어요. 남편은 지금도 회사 경영을 하고 있는데 저는 집안일만 하다 보니 저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네요. 책도 읽고 이런저런 공부도 해보려 하는데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힘들어요.
사실 제가 가족들 몰래 보건소에서 치매 검사를 받았어요. 거기 선생님이 결과가 좋다고, 치매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해서 기분좋게 집에 돌아갔지요. 딸들에게 슬쩍 이야기했더니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요. 그런 반응을 보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더라구요. 애들은 다들 독립해있지만 막상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직도 엄마가 도와주길 바라면서…”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과 딸들에게 서운함을 말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기억력과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감을 떨어뜨린 것은 자신의 기억력이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이었다.

진료실에서 지키는 내 사소한 원칙 중의 하나는 가능한 한 환자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물론 항상 환자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입장을 공감하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격려해준다는 의미이다. 내 역할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온 환자를 돕는 것이기에. 이 환자의 경우엔 그런 원칙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마주앉아 한시간쯤 신나게 남편과 딸들을 함께 씹어주고 싶어졌다.

MRI 검사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하니 가족들 이야기를 하며 어두워졌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그럼 선생님 말씀 믿고 갈께요.”

진료실을 나가는 그녀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남편분 밥 차려주지 마시구요. 따님들은 혹시 결혼한다 하면 혼수는 본인들이 알아서 장만하라고 하세요.”

“아유 참 선생님도.” 환한 표정으로 킥킥거리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쑥 세우고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진료 끝나고 어머니께 전화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4월 29일 화요일

전립선암 검진을 둘러싼 논란

증상이 없는 환자에서 검진을 시행하는 목적은 검진을 통해 암을 조기에 발견하여 암으로 인한 사망률을 낮추려는 것이다.

전립선암의 경우 최근 혈액 내 종양표지자인 PSA를 통한 검진의 유용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 이유는 전립선암이 다른 암에 비해 서서히 진행하기 때문에 임상적으로 의미 없는 암을 진단할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경우 검진으로 인한 조기진단은 과진단 및 과치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인포그래픽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1000명이 PSA 검사를 했을 때, 100-120명이 위양성 결과로 불필요한 불안, 조직검사 등의 문제를 겪고, 110명이 전립선암 진단을 받으며, 이중 50명에게 수술로 인한 부작용이 생기고, 4-5명이 전립선암으로 사망하는데 결국 검진으로 사망을 피할 수 있는 사람 수는 0-1명에 불과하다는 것.

출처: NCI Cancer Bulletin
http://www.cancer.gov/ncicancerbulletin/112712/page12


PSA를 이용한 전립선암 검진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진행된 미국과 유럽에서의 대단위 연구는 상반된 결과를 보고했다. 가장 중요한 결과인 전립선암 사망률을 비교한 대표적인 연구들이다.
유럽에서 시행된 European Randomized Study of Screening for Prostate Cancer(ERSPC)에서는 전립선암 검진을 하는 경우 9년간 추적 시 검진을 하지 않는 경우보다 전립선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20% 감소했으며,1) 11년 추적 시 21% 감소했다.2)
그러나 미국 National Cancer Institute(NCI)의 Prostate, Lung, Colon, and Ovary(PLCO) Trial에서는 7~10년간 추적한 결과 전립선암 검진이 전립선암 사망률을 낮추지 못하였고,3) 13년간 추적에서도 검진 유무에 따른 사망률은 차이가 없었다.4) Goteborg Prostate Cancer Screening Trial에서도 전립선암 검진이 전립선암 사망률을 낮추는 데 실패하였다.5)

2012년 미국 예방의료서비스 특별위원회(USPSTF)에서는 PLCO 연구 결과를 반영해 전립선암 검진을 권고하지 않는 연령을 기존 75세 이상에서 전 연령으로 확대했고, 전립선암 검진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반면 미국비뇨기과학회의 경우 PSA를 통한 검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단, 2013년 미국비뇨기과학회에서 기존 가이드라인을 수정해 대상 연령을 55-69세로 조정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http://urologist.kr/319 (전립선암 건강검진의 가이드라인 : 55-69세의 건강한 남성의 경우 PSA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ERSPC 연구는 현재까지 전립선암 검진이 전립선암으로 인한 사망을 줄인다고 보고한 유일한 대규모 연구이지만, 이 연구에서도 과진단으로 인한 불필요한 조직 검사, 치료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NNT(1건의 전립선암 사망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검진 수)는 작을수록 불필요한 검사가 적다는 뜻인데 기존 분석 결과 9년 1410 -> 11년 1055로 줄어든 바 있다.
최근 이 연구의 13년 추적 관찰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이 숫자가 더 줄어들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내용이 출판되는 것을 기다려야겠지만, 앞으로도 전립선암 검진 효과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1) Schröder FH, et al. Screening and prostate-cancer mortality in a randomized European study. N Engl J Med 2009;360:1320-8.
2) Schröder FH, et al. Prostate-cancer mortality at 11 years of follow-up. N Engl J Med. 2012 Mar 15;366(11):981-90.
3) Andriole GL, et al. Mortality results from a randomized prostate-cancer screening trial. N Engl J Med.2009;360:1310-9.
4) Andriole GL, et al. Prostate cancer screening in the randomized Prostate, Lung, Colorectal, and Ovarian Cancer Screening Trial: mortality results after 13 years of follow-up. J Natl Cancer Inst 2012;104:125-32.
5) Hugosson J, et al. Mortality results from the Göteborg randomised population-based prostate-cancer screening trial. Lancet Oncol 2010;11:725-32.

2014년 4월 28일 월요일

2014년 설 명절의 기억.

어머니가 잠깐 외출하신 사이 주방에서 일을 하던 아내가 밥통의 물받이를 빼내 씻기 시작했다. 한동안 물받이 청소가 안되었는지 곰팡이가 파랗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주변이 잘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일을 못하는 성격인데, 어려서부터 깔끔한 성격의 어머니가 주변을 정리하시는 모습을 보고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니는 늘 집안의 먼지 하나도 그냥 두고 넘기지 못하셨다. 헌데 몇 년 전부터는 가끔 본가에 머물 때면 잘 안쓰는 가구에 엷게 앉은 먼지를 발견하곤 했다. 어머니가 이전처럼 청소를 하기가 힘에 부치시나보다 생각하면서 그 먼지를 볼 때면, 왠지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기도 하고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했다.

이전만큼 집안일에 힘을 못쓰신다 해도 매일 만지는 밥통의 물받이가 저지경이 되도록 두실 분은 아닐텐데. 요즘 성당 사목회 일에 참 바쁘셨나보다 생각하고 넘겼지만 영 마음이 찜찜했다. 아내는 밥통 청소를 마치고 이번엔 가스레인지의 묵은 때를 씻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면 예전엔 가스레인지도 반짝반짝 광이 났는데 지금은 아니다. 칠순을 앞둔 연세에 하루하루를 너무 고단하게 보내시는 건 아닌지. 눈이 많이 어두워지신 건 아닌지.

*
그믐날 오후엔 외갓집에 인사드리러 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명절이면 외가 식구들은 늘 이 집에 모인다. 군 제대를 앞두고 당한 교통사고로 지능이 유아 수준으로 퇴행해버린 막내 외삼촌은 이 집이 아니면 길을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집엔 여전히 막내 외삼촌이 살고있다.

오래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외할머니는 막내 아들을 돌보며 이 집을 지키셨다. 어린애가 되어버린 아들을 수십년간 지켜보는 당신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하지만 할머니는 슬퍼하거나 원망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이지 않으셨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갑작스레 건강이 나빠져 입원한 병실에서 눈을 감은 채 짧게 말씀하셨단다. '이젠 고만 두련다...' 큰아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이제 어머니가 진짜 돌아가시겠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명절이라 네가 가족들과 함께 오니까 참 좋구나."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시던 첫째 외삼촌이 나를 보고 허허 웃으며 말씀하신다. 첫째 외삼촌은 지금도 주말이면 아이가 되어버린 막내 동생을 데리고 목욕탕도 가고, 차를 태워 교외에 바람도 씌워준다. 외조부모님이 살아계실 땐 두 분께 더할나위 없이 지극한 효자였고, 두분이 돌아가신 지금엔 누님인 우리 어머니를 당신 어머니인 외할머니 대하듯 살뜰하게 챙기는, 그런 정많은 분이시다.

외할머니가 안계신 명절에도 사촌동생들이 같은 모양새로 모여앉아 전을 부친다. 집안 가득 고소한 기름 냄새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꼈을 때, 비로소 명절임을 확인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설날 오후를 처가에서 보내고 다음날 아침 처가 동생들과 읍내의 목욕탕에 갔다. 시골 읍내 목욕탕이니 조그맣겠거니 생각했다가 제법 큰 규모에 놀라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더 놀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빠들이 특히 많았다. 두 개의 온탕은 얼굴이 벌개진 사람들로 가득차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성인이 된 다음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은 일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한 일인데, 산좋고 물좋은 관광지가 아닌 동네 목욕탕에 간 것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냉탕을 뛰어다니는 꼬마녀석들과 아이의 등을 밀어주는 아빠의 흐뭇한 표정을 보며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일요일마다 다니던 목욕탕 건물의 굴뚝이 기억났다. 탈의실의 싸구려 남성화장품 냄새와 수건에서 풍기는 덜마른 빨래냄새, 탕 안에서 울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
이번 설은 유난히 따뜻했다. 남들보다 하루 늦은 귀경길 도로에서 계기판의 외기는 오십킬로미터마다 일도씩 떨어졌다. 그곳에선 봄냄새 가득한 바람이었지만 서울에 도착하니 삭풍이었다. 내일은 입춘 한파라니, 잔뜩 추스리고 나서야할 것 같다.

2014. 2. 3

눈 영양제, 먹어야하나?

많은 분들이 '눈 영양제'를 복용합니다. 그 근거는 얼마나 있을까요?

눈 건강을 위해 먹는 비타민, 미네랄 등의 보충제에 대한 근거로 흔히 언급되는 것은 황반 변성 환자에 대한 AREDS(Age-Related Eye Disease Study) 연구입니다.
http://archopht.jamanetwork.com/article.aspx?articleid=268224

이 연구는 황반 변성이 있는 3,600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항산화 비타민(비타민C 500mg + 비타민E 400iu + 베타카로텐 15mg)과 아연 80mg + 구리 2mg 등 미네랄의 효과를 위약과 비교한 것으로, 황반 변성에 대한 영양제의 효과가 확인된 유일한 위약-대조 연구입니다. 특정 약의 효과에 대해 가장 신뢰할만한 연구 방법이 위약과 비교하는 것이지요. (위약에 대해서는 이전에 포스팅을 한 바 있습니다. http://fmdoctor.blogspot.kr/2011/11/placebo-effect.html)

연구 결과 해당 항산화 비타민과 아연, 구리 보충제를 함께 복용한 경우 위약 대비 25% 정도의 황반 변성 진행, 시력 약화 억제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출시된 것이 콘택트렌즈 회사로 잘 알려진 바슈-롬의 '오큐바이트 프리저비전'입니다.


성분은 AREDS 연구에 쓰인 성분과 동일한데, 정제 형태로 같은 용량을 복용하기 위해서는 2알씩 하루 2회, 총 4알을 먹어야하는 불편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2배 용량의 연질 캡슐 제품이 나와 있으므로 이것을 복용하는 것이 불편을 줄일 수 있겠습니다. 연질 캡슐의 경우 아래의 성분표에서 볼 수 있듯이 1캡슐에 AREDS formula의 절반 용량이 들어있으므로 1캡슐씩 하루 2회 복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AREDS 연구에 쓰인 비타민 성분 중 고용량 베타카로틴의 경우 흡연자에서 폐암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것이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진행된 후속 연구가 AREDS 2 연구입니다.
http://jama.jamanetwork.com/article.aspx?articleid=1684847
이 연구에서는 기존 AREDS formula에 더해 루테인(lutein)+지아잔틴(zeaxanthin), 오메가-3 등의 효과를 분석했는데, 연구 결과 이들 성분을 첨가했을 때 부가적인 효과는 없었지만 AREDS formula에서 베타카로틴을 빼고 루테인, 지아잔틴을 넣었을 때도 기존의 황반 변성 진행 억제 효과는 동일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이 결과를 고려할 때 흡연력이 있는 황반 변성 환자의 경우 베타카로틴 대신 루테인+지아잔틴을 포함시킨 제제를 복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바슈롬 사이트에서 위의 제품들 포함해 관련 제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http://www.bausch.com/en/our-products/eye-vitamins/age-related-eye-vitamins-landing/

이중 우리나라에는 하루 4알을 복용해야 하는 AREDS 정제 제품만 정식 수입되어 있습니다. http://www.bausch.kr/ko-kr/our-products/eye-vitamins/ocuvite-preservision/
안과에서 황반 변성 환자들에게 처방하는 제품이기도 합니다. 국내 성분표에는 하루 1알을 복용하도록 되어있으나, 효과가 확인된 것은 AREDS formula 뿐이므로 2알씩 2회, 하루 4알을 복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연질 캡슐이나 AREDS 2 제제는 정식 수입이 안되었지만 인터넷을 통해 구입할 수 있는 것 같네요.

비타민A의 경우 망막 세포에서 빛을 신경 전달 신호로 바꾸는데 필요하고, 부족한 경우 야맹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베타카로틴은 비타민 A의 전구체이며, 루테인의 경우 망막 황반의 주요 성분입니다. 이들 성분을 따로 복용하는 것이 시력 개선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 이유이지요.

AREDS formula의 주요 성분 용량을 줄여 눈 영양제로 판매하는 제품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황반 변성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외에 단순한 시력 개선 목적이나 눈 건강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시력 저하 예방 목적으로 복용하는 '눈 영양제'들에 대한 근거는 빈약합니다.

블루베리 계통으로 안토시아닌 성분이 풍푸한 빌베리(Bilberry) 역시 눈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학명은 바키니움 미르틸루스, vaccinium myrtillus)  2차 대전 당시 어느 전투기 조종사가 빌베리 잼을 먹고 야간 시력이 좋아졌다는 보고를 했다고 알려졌지만 근거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후 빌베리 추출물에 대한 몇몇 소규모 연구들에서 야간 시력 개선 효과를 보이기도 했지만 비교적 최근에 수행된 질 높은 연구들에선 대부분 유의한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http://www.ncbi.nlm.nih.gov/pubmed/14711439?dopt=Abstract)

빌베리 추출물을 주 성분으로 한 눈 영양제들은 이 성분을 두고 시력 보호와 개선 효과가 입증되었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역시 그 과학적 근거는 빈약합니다. 눈 영양제를 먹고 눈이 밝아졌다거나 눈이 덜 피로하다고 하는 주변의 경험들도 위약 효과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2014년 4월 9일 수요일

걱정과 불안이 병원을 찾게 한다.

50대 여성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건강 검진 결과를 듣기 위해 진료실에 들어왔다.

건강 검진을 받는 이유는 다양하다. 요즈음은 특별히 불편한 곳이 없어도 1-2년에 한번씩 때가 되면 건강 검진을 챙겨 받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개는 역시 건강 검진을 위해 병원을 방문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최근 위경련이 자주 있어 걱정임.’ 

미리 흝어본 환자 관련 정보를 다시 확인하고, 일상적인 질문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이번에 건강 검진 받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불안한 표정의 그녀가 마주앉은 의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짜고짜 묻는다. 
“위 조직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어떤가요?”
"위에 염증이 있어서 확인차 조직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도 뭔가 찜찜한 표정인 그녀에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전체적인 결과도 괜찮습니다. 편한 마음으로 들으시면 되요."
그제서야 그녀의 굳어있던 얼굴이 좀 부드러워지고, 본인도 어색함을 느꼈는지 멋쩍게 웃는다.
"검사 받고 불안해서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잤는데 정말 다행이네요."

그녀의 아버지는 위암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녀 역시 젊어서부터 조금만 신경을 쓰면 소화가 안되곤 했다. 그럴 때면 명치 아래에 돌덩이가 놓여있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며 대개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럴 때면 꼭 꾀병 환자 취급을 받은 듯해 기분이 상하기 일쑤였다. 용하다는 한의원에서는 비위가 약한 체질이라고 했다. 이곳 저곳에서 처방을 받아 약을 먹었지만 그때 뿐, 시간이 지나면 명치 끝의 돌덩이는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남편은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아내를 보고 예민한 그녀의 성격 탓이라 했다. 결혼 초기와는 달리 그녀의 증상에 심드렁하거나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는 남편에게 종종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성격이 문제겠거니 생각했다. 아버지의 병명을 알게 된 이후로 증상은 더 심해졌고, 이전보다 더 걱정이 되었음에도 한편으론 겁이 나기도 해서 부러 병원을 찾지 않았다. 

위에 무언가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고교 동창의 병문안을 다녀온 날 밤이었다. 명치 끝이 뒤틀리는 통증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깼고, 결국 구급차를 불러 근처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수액과 진경제를 맞고 통증이 가라앉았지만 그날 밤의 경험으로 그녀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응급실 의사는 스트레스로 인한 위경련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니 자신의 위에도 암세포가 자라고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큰맘 먹고 종합 검진을 신청했다. 위내시경 검사가 끝나고 조직검사를 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불편한 증상이 생겼을 때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만나야할 사람도 많고 보고 들어야 할 매체도 많은 요즘에는 병원을 찾는 이유가 꼭 특정 증상 때문만은 아니다. 증상보다 걱정과 불안 때문에 외래 진료실을 방문하거나 건강 검진을 신청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그 불안을 키우는 것이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건강 문제일 때도 있고 대중 매체의 잘못된 정보일 때도 있다. 

물론 그녀처럼 원래 있던 증상이 걱정과 불안 때문에 더 심해지기도 한다. 위경련은 위장이 과도하게 수축해서 명치 끝을 비트는 통증을 일으키는 것으로, 위장의 본래 운동 기능이 어그러져서 생기는 증상이다. 우리가 모르는 와중에도 위장은 자율신경의 명령을 받아 열심히 소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 걱정과 불안으로 신경 계통의 명령 체계가 흐트러지면 위장도 제대로 운동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종종 위경련이나 기능성 위장장애, 과민성 장질환과 같은 흔한 질환으로 나타난다. 

위장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체 장기의 기능성 질환은 대부분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악화된다. 긴장성 두통, 어지럼증, 근막통, 불면증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암과 같은 위중한 질환은 치료가 가능한 초기엔 대개 증상이 없어 병원을 찾지 않는다. 반면에 기능성 질환은 위중하진 않지만 오히려 환자 입장에선 때론 죽을만큼 괴로운 병이기에 병원을 찾는 훨씬 흔한 원인이 되곤 한다.

전반적인 컨디션이 나아지면 밀물에 암초가 잠기듯 증상은 수면 밑으로 자연스레 가라앉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능성 질환의 경우 증상 자체를 없애려 애를 쓰기보다 스스로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과로를 피하고 운동을 통해 체력을 늘리는, 어찌 보면 뻔한 방법이 다양한 기능성 질환의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