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0일 화요일

가족이 해야할 일

- 네 아버지가 말이다.

아이들이 잠들자 어머니께서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보통은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가기 전에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를 드리고 안방 중문을 닫고 나오는데, 하고싶었던 말씀이 있었나보다. 어머니의 말씀은 평소보다 더 길게 이어졌지만 내용은 그간 종종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환갑을 넘으시면서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 흉을 보셨다. 그렇다고 친구나 이웃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성격은 아니신지라 아버지에 대한 넋두리를 듣는건 자연스레 누님과 나의 몫이 되었다. 겨우 두세달에 한번씩 본가에 갔었던 나에 비해 가까운 곳에 사는 누님은 훨씬 자주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을 것이다. 지난 일년간 누님이 조카의 입시 준비 때문에 왕래가 줄어들자 그동안 쌓인 게 많으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다. 설 전날 밤늦게 시작된 모자간의 대화는 내가 또 아들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구나 하는 어머니의 자조 섞인 후회로 끝이 났다.

설날엔 처가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평소와 같이 반주를 얼큰하게 하신 장인께선 일찍 잠이 드셨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책상에 앉았는데 거실에서 장모님과 아내가 나누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 네 아빠가 말이다.

장녀인 아내는 장모님을 닮은 걸로는 외모와 성격 모두 딸 셋 중 제일이다. 그래서인지 장모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내이다. 아내는 꼼꼼하고 모든 일들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걱정이 많아지는 성격인데, 장모님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장인께선 다소 즉흥적이고 급한 성격이시라 종종 말다툼이 생기곤 한다. 최근엔 처제의 결혼을 앞두고 신경을 쓰시면서 두 분 사이에 충돌이 늘어난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온 아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하고싶은 말씀이 많으셨나 봐. 따로 이야기하실 곳도 없을텐데 이럴 때라도 잘 들어드려야죠.”

연휴 마지막 날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아내와 다음 주에 있을 처제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들 녀석이 짜증 섞인 말투로 이야기한다.

-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니깐.

제딴에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귀기울여 듣지 않고 다른 대화만 하고 있으니 골이 났나보다. 열한살이 되었지만 아직까진 조잘조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내용이라 해봐야 친구랑 했던 놀이, 최근에 봤던 만화책이나 티비에서 보았던 만화 영화 이야기 정도가 다이지만. 요즘엔 하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포켓몬고 게임에 대한 것이다. 주말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포켓몬들의 소식을 반복해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엄마 아빠에게 자주 말을 건네주는 걸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남자 아이는 사춘기가 되면 말수가 확 줄어든다는데 언젠가 그 시기가 오면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할까 미리 걱정을 하기도 한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렸을 적엔 나도 어머니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랑 했던 놀이, 문구점에 들러 했던 뽑기 이야기나 텔레비젼 만화 이야기 정도가 대부분이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이젠 짐작이 간다. 그땐 주로 내가 말을 하고 어머니가 그걸 들어주셨겠지만 내가 중년이 된 지금은 어머니가 말을 하고 나는 듣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방통행에 가까운 대화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때로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족간에 가장 중요한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