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5일 수요일

항상성과 질병 치유력: 항상성의 바다 위를 항해하는 법

우리 몸은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내부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부르는데, 이 능력은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에 대처하며 회복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항상성은 체온, 혈압, 혈당, 체액의 농도와 같은 중요한 생리적 상태를 일정한 범위 내에서 유지하려는 몸의 자동 조절 메커니즘이다. 이 조절은 신경계, 내분비계, 순환계, 면역계를 비롯한 다양한 시스템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체온이 높아지면 땀이 나고 피부 혈관이 확장되어 열을 방출하고, 반대로 체온이 낮아지면 근육이 떨림으로써 열을 생성한다. 또다른 예로 자율신경계를 들 수 있다. 교감신경은 활동 시에 심장의 박동수를 높이고 혈관을 수축시켜 혈압을 올리며, 소화관의 운동을 감소시킨다. 부교감신경은 주로 휴식 시에 활성화되며, 심장의 박동을 느리게 하고 혈관을 확장시키며 혈류를 늘려 심신을 이완 상태로 유도한다. 적을 만났을 때나 위험에 부딪혔을 때와 같이 스트레스가 큰 상황에선 교감신경의 역할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상태가 평상시에도 지속된다면 우리 몸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협력으로 혈압과 심장의 운동이 일정 범위 이내로 적절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이렇게 항상성에 기반한 조절 능력 덕분에 우리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신체 기능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항상성이 깨어지면 우리 몸은 본래의 기능을 잃게 되고, 이러한 변화는 질병으로 발현된다. 건강한 사람의 혈당 수치는 공복 시 70~100mg/dl 사이에 있고, 식후 2시간 기준 140mg/dL를 넘지 않는다. 하루쯤 금식을 하거나 반대로 설탕 범벅인 음식을 먹는다 해도, 혈액 내 포도당을 일정하게 조절하는 항상성 능력에 따라 혈당 수치는 이 좁은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게 된다. 혈당 항상성을 유지하는 기능이 깨지면 공복이 길어질 때 저혈당 증상이 생기고 식후에는 혈당이 치솟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우리는 당뇨병이라 부른다. 혈압도 마찬가지이다. 휴식 시에 혈압은 수축기 120mmHg, 이완기 80mmHg 미만의 수치를 보이지만, 고혈압 환자의 경우 이 범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수축기 140mmHg 또는 이완기 90mmHg 이상으로 높아지게 된다.

항상성과 질병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나는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를 떠올리곤 한다. 소설의 주무대인 잠수함 노틸러스호는 항해 도중에 폭풍우에 휘말리기도 하고 암초를 만나기도 한다. 중반부에는 잠수함이 호주 근처의 좁은 해협을 지나다 산호초에 좌초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해협은 수심이 얕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쉽게 빠져나가기 어렵고 위험한 지형으로 묘사된다. 위기에 빠진 승무원들은 동요하지만 노틸러스호의 선장인 네모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수면이 높아질 때를 기다리면 산호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달의 공전 주기에 따라 인력이 변하면서 조수 간만의 차도 커지는데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선장의 말처럼 며칠이 지나 바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노틸러스호는 산호초를 벗어나 항해를 계속하게 된다.

인체를 항상성이라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라고 생각해보자. 적당한 날씨와 평온한 바다라면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고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배가 항해를 하면서 크고 작은 파도나 암초를 만나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 우리가 만나는 스트레스는 항상성이라는 바다의 평온을 깨뜨리는 바람과도 같다. 거센 바람으로 파도가 사나워지면 순조로운 항해를 하기 어려운 것처럼, 외부의 스트레스가 지나치게 커지면 건강의 필요조건인 항상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Captain Nemo Takes the Altitude of the Sun', from the book Twenty Thousand Leagues Under the Seas

항해를 하면서 필연적으로 폭풍우나 암초를 만나게 되듯 우리가 살면서 항상성이 깨어지는 순간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무사히 항해를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다음의 두 가지를 기억해 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튼튼한 배와 항해 실력이다. 튼튼한 배라면 웬만한 파도에도 끄떡없이 헤쳐나갈 수 있겠지만 배가 부실하거나 항해 실력이 부족하다면 항로를 잃고 헤매거나 파손을 겪기도 할 것이다. 튼튼한 배와 항해 실력은 우리 몸으로 치면 기초 체력과 같은 것이다. 건강한 식단,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수면을 통해 기초 체력을 키우는 것이 항상성이 흔들리는 순간을 견디고 지탱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된다.

둘째, 항상성이라는 바다의 수위를 유지해야 한다. 자연에서 바다의 수위는 시시각각 달라지지만 이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는 없다. 암초에 걸린 노틸러스호가 항해를 재개하기 위해 며칠을 기다려야 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인체의 항상성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위가 낮아질 수도, 높아질 수도 있다. 습관적인 과로와 만성 스트레스는 항상성의 수위를 낮추는 주범이다. 바닷물이 빠지듯 항상성의 수위가 낮아지면 숨겨져 있던 암초가 모습을 드러내고 항해 중인 배를 위협한다. 배가 암초에 걸린 이후에야 우리는 건강에 이상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 눈에 드러난 암초는 우리가 뒤늦게 느끼는 증상과도 같다. 당장 눈에 드러난 증상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닷물의 수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기초 체력을 키우는 건강한 생활습관은 여기서도 중요하다. 항상성을 고갈시키는 흡연, 과음을 피하고 과로와 지나친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도 해당된다.

물론 중요한 부품의 고장으로 배의 작동이 멈추거나 선체가 파손되어 물이 차오르는 상황이라면 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당장 수리가 필요한 상황에서 돛을 올리고 수위가 높아지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 이상이 느껴질 때 가까운 의원이나 병원을 찾는 것을 망설일 필요는 없다. 전문가의 점검을 받고 수리가 필요한 문제가 발견되었다면 그에 맞는 처방과 도움을 받도록 하자.

항상성의 수위를 높이기 위해선 시간과 끈기가 필요하다. 규칙적인 운동, 균형 잡힌 식습관과 같은 기본적인 건강 관리법은 힘들기도 하고 효과도 금방 나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성을 키우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썰물 때 드러났던 암초가 밀물이 되면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것과 같이, 항상성의 수위가 충분히 높아진다면 우리를 괴롭히던 증상도 자연스레 가라앉고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성은 우리 몸이 가진 가장 강력한 치유 도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항상성이라는 바다의 수위를 잘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항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24년 12월 25일 수요일

이토록 사소한 것들

낡은 트럭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린다. 배달할 석탄을 싣고 가던 트럭은 기운없이 걷고 있는 소년을 지나친다. 트럭을 모는 남자와 같은 마을에 사는 소년이다. 아이에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술주정뱅이 아빠가 있다. 아이에게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운전석의 남자는 아이가 자꾸 신경쓰인다.

그러니까 이것은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담긴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내게 일찌감치 올해의 책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으니,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소식에 곧바로 예매를 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 소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아쉽게도 영화에서 소설만큼의 풍부한 감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소설의 이야기가 스크린으로 옮겨지고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은유와 상징이 줄어들고 서사의 구체성은 커진 결과일 것이다. 어쩌면 시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오롯이 스크린에 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인 빌 펄롱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소설에 비해 단선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펄롱의 아내, 단골 식당의 주인, 수녀원장 등의 인물들은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영화에선 모두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이들과 주인공 사이의 거리는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 멀어졌다. 결과적으로 인물의 입체성은 줄어들었다. 감독은 관객들이 다른 인물보다 펄롱의 내면에 집중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제한된 시간 내에 펄롱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뇌와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선 다른 인물들에 대한 아웃포커싱이 어느 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사소한 아쉬움을 날리는 것은 킬리언 머피의 연기다. 그의 연기는 추앙받아야 마땅하다. 영화에서 그는 빌 펄롱 그 자체이며,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을 통해 유약함과 강인함이 복잡하게 포개진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낡은 외투에 싸인 굽은 등과 어깨만으로 일상의 고단함과 삶의 무게를 절절히 깨닫게 할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

펄롱의 아내는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라고. 가진 거 잘 지키고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살면 우리 아이들은 험한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현실에서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대개는 이렇게 산다. 적당히 연민하고 적당히 외면하면서.

하지만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했다.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 증명해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연민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행동은 어디에서 기인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도 소설의 주인공인 펄롱처럼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리고 이들이 외면하지 못해 행했던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큰 변화를 목격하기도 한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가 광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소설과 영화의 결말에서 펄롱이 선택한 행동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란 제목은 펄롱의 행동을 만들어낸,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뜻할 것이다. 펄롱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받고 싶다고 하는데,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인생의 총합이 된다 (Trifles make the sum of life)'.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고 했던 한강 작가의 말처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수많은 선의가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설도, 영화도, 현실도 모두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야말로 이런 사실을 떠올리기 적당한 때 아닌가. 그러니 아직 보지 않은 분들께 올해가 가기 전에 추천한다. 개인적으론 영화보다 소설이 나았지만 어느 쪽도 좋을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2024년 12월 19일 목요일

R.I.P. 서동욱님

전람회 1집을 다시 들었다. 서해 바다까지 한 시간 반, 운전을 하며 앨범 전체를 듣기에 마침 적당했다. 

이 음반은 수백 번쯤 들었을 것이다. 앨범 전체로만 따지면 지금까지도 아마 가장 많이 들었던 음반이 아닐까. 그래서 모든 곡들이 각별하다. 

지금도 이 음반을 듣던 1994년의 어느 밤들이 생각난다. 

치기로 가득하고 여리고 어설프기 짝이 없던 때였지만, 전람회의 노래들은 엉망이었던 하루도, 비루한 영혼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느껴지게 해주곤 했다.   

이 앨범엔 서동욱의 목소리가 담긴 트랙이 두 개 있다. '여행'과 '향수'가 그것인데, 그의 목소리는 보컬이 아닌 대화와 나레이션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여행'의 첫머리에 담긴 대화에선 신해철의 목소리도 잠깐 등장한다. 그는 마지막 곡인 '세상의 문 앞에서'에도 김동률과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때의 세 사람 중 십 년 전에 한 사람이, 어제 또 한 사람이 그가 썼던 노래 가사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떠났다. 모두가 내 청춘을 지탱해주었던 이들이었다.




2024년 12월 14일 토요일

12.13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광장엔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의료 지원 활동은 오후 5시부터로 예고되어 있었다. 서울시 의사회에서 전문의 두 분과 전공의 한 분이, 우리쪽에선 두 명의 교수가 참여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널찍한 천막을 준비해주어서 의료진과 도움을 주시는 분들 모두 천막 안에서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다. 서울시 의사회에서 의료 장비와 의약품을 넉넉하게 가져오셨다. 의원 하나를 차려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겨우 가방 하나에 혈압계와 약품 몇 개를 챙겨간 우리가 면목이 없을 정도였다. 서울시 의사회에선 평소 쪽방촌 봉사를 정기적으로 나가기에 의약품과 장비가 세팅되어 있다고 했다. 모두에게 감사했다.

구호와 외침, 겨울의 대기를 울리는 음악과 군중의 함성으로 바깥 공기는 달아올랐지만 천막 안은 내내 대체로 평온했다. 환자는 뜸했다. 혈압을 재러 들르신 어르신 한 분이 커프를 팔에 두른채 한참 넋두리를 하다 가셨고, 감기 증상을 호소한 환자 서넛이 있었다. 표결 당일이 아닌 전날이라, 모인 이들의 숫자가 지난 토요일만큼은 아니어서일 것이다.

한 쌍의 남녀가 천막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와 토퍼를 기증해도 되느냐 물었다. 의료 부스라 환자용 베드가 필요할 것 같았나 보다. 천막 한쪽에 얇은 캠핑용 매트리스가 있었는데, 그 위에 토퍼를 올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래지않아 두 사람이 돌돌 말린 새 토퍼를 가져왔다. 두께가 꽤 도톰해서 쓸만해 보였지만 설마 환자가 저기 누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결국엔 괜한 생각이었다.

8시가 넘어 공식 집회가 끝나고, 근처 2차 집회와 공연 장소로 옮아가는 사람들이 천막 앞을 지났다. 이제야 도착해 집회 장소를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회 앞에 남은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탄핵 구호를 외쳤다. 국회 앞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킨다고? 언제까지?

의료 지원 부스는 10시까지 운영될 예정이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강해졌다. 바깥을 지나는 사람들도 잔뜩 웅크린 자세였다. 의약품과 장비를 박스에 넣고 자리를 마무리하던 때였다. 젊은 여성 한 명이 비틀거리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기운이 없는지 의료진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다행히 혈압은 정상이었다. 앉아있기 힘들어하는 환자를 부축해 구석의 토퍼-아까 그 토퍼다-에 눕히고 전기난로를 환자 쪽으로 옮긴 뒤 팔다리를 주물렀다. 손발이 얼음처럼 찼다. 탈수가 심했고, 과호흡으로 호흡곤란도 있는 상태였다. 천막엔 수액 세트가 없었기에 따뜻한 물을 마시게 한 뒤 손발과 등에 핫팩을 붙이고 두꺼운 옷으로 덮어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순간 119를 부를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환자 상태가 나아지면서 그간의 사정도 들을 수 있었다. 함께 집회에 나온 또래들을 안내하고 연락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감기가 심하게 걸렸는데 약을 먹으면 너무 졸릴까 걱정이 되어 먹지를 못했다고 했다. 졸린 걸 왜 걱정을 할까 의아했는데, 이 친구들이 국회 앞에서 릴레이로 밤새 농성을 한단다. 하루종일 뛰어다니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로 조금전까지 무거운 시위 용품을 옮기다가 기운이 빠지고 쓰러질 것 같아 앞에 보이는 천막에 무작정 들어왔다고 했다.

따뜻한 물과 초콜릿을 먹고 기운을 좀 차렸는지, 조금만 더 있다가 동료들이 있는 집회 장소로 다시 가겠다고 한다. 병원이나 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그냥 기운이 빠져서 그런 거고 본래 건강하다고. 삼십분만 쉬면 괜찮다고. 지난 주말에도 밤샘 시위를 했었기에 내 상태는 잘 안다고. 다음 차례에 시위를 이어갈 사람들이 올 때까지는 있어야 한다고. 밤이 늦은 시간이라 연락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결연한 표정에 절박한 말투였다. 결국 우리는 그를 더 말리진 못했다. 그는 자신 때문에 부스를 닫지 못하는 상황인 것을 알았는지 연신 우리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돌아오는 길의 9호선 지하철은 시위를 마친 군중으로 가득했다. 군중의 다수는 젊은 여성이었다. 상기된 표정의 얼굴들을 보며 생각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절박하게 만들었나?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절실하게 만들었나?




2024년 11월 28일 목요일

번식에 관한 단상

바다에 사는 모기인 폰토마이아의 생활 주기는 극단적이다. 유충은 수중에서 1년을 살고, 고치를 거쳐 성체 모기가 된다. 성체의 생애는 겨우 3시간이며 이 짧은 생애 동안의 유일한 임무는 짝짓기이다. 그래서 폰토마이아의 몸은 짝짓기에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생식기관, 다리, 날개다. 이것도 수컷의 경우이고, 암컷은 생식기관을 가득 달고 수면 위를 떠도는 벌레 모양의 자루에 불과하다.

Male Pontomyia natans (from Wikipedia)

최근 읽은 해양생물에 관한 책의 일부이다. 책을 읽으며 문득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생존과 번식은 동물의 본능이라고 한다. 자연 다큐멘터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물의 짝짓기 장면을 보다 보면, 후손을 남기기 위한 다양하고 수고로운 노력에 감탄하곤 한다. 진화생물학의 계통수를 거꾸로 따라가 아래쪽 뿌리에 가까운 동물-말미잘이나 촌충 같은-일수록 단순한 번식 외의 존재 의미가 희미해지는데, 이를 보면 번식이란 수억 년 전 태초부터 부여된 본능임이 분명하다. 이들보다 한참 상위에 위치한 곤충쯤 되면 번식 행위에 고차원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지만-짝짓기 임무를 마친 뒤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수컷 사마귀나 거미의 희생적 결말이라던가-, 위의 책에서 소개한 바다모기의 예만으로도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기엔 충분할 것 같다. 3시간의 짝짓기를 위해 1년 동안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생이라니, 이쯤 되면 본래 동물의 생애는 번식을 위해 프로그래밍 되어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인간은 본능대로만 살지 않는다. 모두가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태초부터의 본능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 그래서 출산율 0.7을 찍고 있는 이 나라에선 본능을 거스르게 만드는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생존과 번식 두 가지 본능을 모두 챙기는 것이 지나치게 고단한 일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바다 모기처럼 인생 모두를 바칠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출산과 육아는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겨우 오십 년 넘게 살았을 뿐이지만 내 인생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또한 그보다 더 특별한 일도 없었다는 것 역시. 세상엔 의미있는 일이 많을 것이나, 타인의 인생 첫날부터 시작해 가장 가까이에서 매일을 목격하고 함께 겪는 경험을 대신할 만한 일이 있을까. 사랑, 기쁨, 행복감, 충만함, 기대와 실망, 공허함, 자괴감, 불안, 분노, 괴로움. 아이들과 함께 하는 매일매일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과 같았다-두 아이가 십대가 된 지금은 불안과 짜증의 업힐을 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고 하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다 동의하진 않지만 그 경험을 거쳐온 지금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경이로운 순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돌이 되기 전까지는 매 순간이 그랬다. 눈맞춤만 해도, 웃기만 해도, 옹알이를 하거나 뒤집기만 해도 머릿 속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지고 팡팡 탄성이 터졌다.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가족 친지 모두가 호들갑을 떨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이 훌쩍 커가면서 불꽃이 터지는 빈도는 줄었지만 지금도 종종 경이로운 순간이 예고없이 찾아온다.

요즘 그런 순간은 주로 아이들이 겪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큰애는 고등학생이다. 얼마 전 학원 수업을 마친 아이를 데려오며 같은 반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 아이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그 친구는 그나마 아들과 가까운 편이란다. 문제는 아들도 막상 그 친구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들어보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아들은 그 친구를 싫어하는 스스로의 감정이 편견 때문은 아닌지, 감정을 드러내고 친구를 멀리해도 되는 괜찮은지를 자문하고 있었다. 딴에는 친구에 대한 부정적인 속마음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었나 보다. 그날 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고민을 털어놓은 아들은 마음이 가벼워졌다며 후련한 얼굴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려서 엄지손가락을 빨던 아이가 이만큼 컸다는 게 신기하고, 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어려선 부모가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가르침에 따라 평화롭게 생활했지만, 지금은 울타리를 넘나들다가 언젠가는 아예 떠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어놓은 복잡한 선으로 가득한 바깥 세상에서 그 선을 따라갈 것인지, 넘을 것인지를 지금처럼 계속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발자국이 새로운 선을 만드는 경험도 할 것이다.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든 그 과정을 목격하고 동참하는 것은 부모로서 경이로울 따름이다.

바다모기의 생애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까지 왔다. 지금이야 한밤중에 눈이 쌓인 창밖을 보며 차분히 감상에 젖어있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런 평화로운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당장 이틀 전만 해도 기말고사를 앞두고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가겠다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으니. 인생을 게임에 비유하자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메인퀘스트이고 나머지는 서브퀘스트라는 말도 있는데, 메인이든 서브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역시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과거의 부모님들과 지금 퀘스트 엔딩을 향해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모든 부모들은 존경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2024년 10월 31일 목요일

80년, 82년, 그리고 타이거즈

나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국민학교 입학 전의 일들은 거의 생각나지 않고 앨범 사진같은 몇 개의 이미지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도 80년과 82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였다.

80년은 탄광촌 마을에서 대도시인 광주로 이사를 온 해이자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였다. 그래선지 그때부터는 조금은 더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릴 수 있다. 아버지가 일하시던 가게, 흐리게 생각나는 등하교길이나, 담임선생님의 얼굴 같은 것들. 그중엔 그해 5월 어느 날인가의 기억도 있지만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해에도 우리 가족은 비교적 안온한 일상을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이건 당시 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의 어렴풋한 기억일 뿐이다.

82년은 프로야구가 시작된 해다. 왜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엔 남자아이들이 모이면 으레 고무공이나 테니스공으로 주먹야구를 했고, 나도 그중 하나였기에 다른 스포츠보다 익숙해서였을 것이다.(광주에선 주먹야구를 '하루'라고 불렀는데 다른 지역에선 '짬뽕'으로 불렀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이유야 뭐였던간에 아이들은 새로 출범한 프로야구와 TV에서 볼 수 있는 야구 중계에 금새 빠져들었다. 팀이 지역을 연고로 했다는 것도 인기의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 동네 야구팀이라니, 당연히 응원할 수밖에.

아이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모든 팀이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고, 해태 타이거즈 회원증은 내게 인생 첫 멤버십이었다. 어린이회원 가입 장소는 해태제과 공장이었는데, 5천원짜리 지폐를 들고 황량한 논밭길을 버스로 지나 작은 사무실을 방문했던 기억, 야구모자와 티셔츠, 사인볼과 스티커 사은품에 두근두근하던 기억이 난다.

이듬해인 83년,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을 했다. 공터에서 고무공을 치고 던지는 동네 아이들은 모두가 김봉연이었고 이상윤이었다. 한국시리즈 때는 온 도시가 들썩였다. 우승 후 겨울에 해태제과에서 광주 시내에 우승 기념 전단지를 뿌렸는데, 전단지 하나를 슈퍼에 가져가면 누가바 하나와 바꿔주었다. 부라보콘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누가바라도 어딘가. 동네 아이들과 아파트 우편함에 꽂힌 전단지를 여러 장 모아 한꺼번에 누가바 다섯 개쯤을 받기도 했다.(한꺼번에 더 많이 가져가면 슈퍼 아저씨가 눈총을 주었던 것 같다.) 마침 하늘에서 싸락눈이 펑펑 내려서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눈보라가 치는 아파트 단지 안 길을 강아지마냥 마구 뛰어다녔던 기억.

그날은 마침 휴일 아침이었을 것이다. 잔뜩 고양된 아이들은 내친김에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 사인을 받기로 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선수들이 몇 있었는데, 우리가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차영화, 김성한, 김무종 선수였나? 김성한 선수에겐 호통만 듣고 도망쳐 나왔고, 김무종 선수에겐 사인을 받았던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휴일 아침에 다짜고짜 집에 쳐들어와 사인을 내놓으라 하는 꼬마들이 선수들에겐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그럼에도 그해엔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구단이 매각되기 전 20년 동안 아홉 번 우승했다. 해마다 봄이면 집단 우울증을 앓던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잠시나마 트라우마를 잊게 해주는 프로작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 경기 후반부에 울려퍼지던 응원가가 '남행열차'가 아니라 처량하기 짝이 없는 '목포의 눈물'이었다는 것, 2000년 이전까지 5월18일에 단 한 번도 홈경기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엔 모기업도 바뀌었고, 새 홈구장도 생겼고, 이제는 예전만큼 밥먹듯이 우승하던 시절도 지났다. 나도 이제는 어렸을적 무등경기장만큼 야구장에 자주 가지 못하지만, 지금도 야구장을 보면 조금은 마음이 설렌다.

한명재 캐스터의 우승콜이 화제다. 어떤 이는 그 우승콜을 듣고 뭐 그리 유난이냐고, 프로야구 출범하기도 전의 일을 왜 끄집어오냐고, 왜 야구장에서 정치질이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그 해설이 타이거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던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보편타당한 헌사로 들렸다.


"광주,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픔을 야구로 극복한 도시에서, 타이거즈는 운명이자 자랑이었습니다. 그런 KIA 타이거즈가 7년 만에 프로야구 챔피언에 오릅니다."




2024년 8월 19일 월요일

멸종 위기를 대하는 자세

영화 '돈룩업'은 우연히 발견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6개월 뒤 혜성 충돌로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천문학자들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백악관에 보고할 기회를 갖지만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당장 있을 중간 선거에만 관심을 보인다. 언론과 방송에도 사실을 제보하지만 역시나 토크쇼의 가십거리 정도로 치부될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치적 위기에 빠진 대통령이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핵폭탄이 탑재된 우주 로켓으로 혜성의 궤도를 변경하겠다는 발표를 하지만, 이 계획은 거액후원자인 IT 사업가에 의해 중단된다. 알고보니 혜성에는 엄청난 양의 희귀 광물이 묻혀 있었고, 이 광물에 눈이 먼 사업가가 드론을 보내 혜성을 작은 조각들으로 쪼개 떨어뜨리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드론 발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모두가 지구의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영화 속 과학적 계산에 따르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확률은 99.78%이다. (과학자는 본래 100%란 말을 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확신을 갖고 말하지만 이 수치 앞에서 정치인은 계산의 정확도를 의심하고, 토크쇼 진행자는 오히려 과학자의 정신 상태를 트집잡는다. 온라인의 댓글들은 과학자들을 조롱한다. 주인공은 이런 반응이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지구 멸망이 6개월 뒤란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지? 하지만 과학적 추론과 점쟁이의 예언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혜성의 충돌로 인한 인류의 멸종은 한때 유행했던 종말론과 다를 게 없다. 누군가는 기후 위기로 인한 북극곰의 멸종보다도 시덥잖은 주장으로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북극곰은 대표적인 멸종 위기 동물로 꼽히지만, 다른 수많은 멸종위기종에 비하면 아직 여유가 있는 편이다. 국제자연보전연맹에서는 멸종 위기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고 한다. 북극곰은 위기 등급이 가장 낮은 '취약' 단계의 동물이다. 이보다 위기 등급이 높은 '위기' 단계엔 아시아코끼리, 갈라파고스펭귄 등이 있고, 전 세계에 남은 개체수가 수백 마리 뿐으로 가장 등급이 높은 '위급' 단계엔 벵골대머리수리나 수마트라코뿔소와 같은 동물이 있다. 

오래 전부터 의료계에는 멸종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대표적인 멸종위기종으로 선천성 심장병 수술을 하는 소아흉부외과 의사가 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소아흉부외과 전문의는 33명이고 10년 뒤엔 17명으로 줄어든다. 비슷한 처지의 소아외과나 소아비뇨의학과 의사 역시 멸종위기종에 속한다. 최근엔 분만을 담당하는 산과 의사(산부인과는 산과와 부인과로 나뉜다)나 뇌혈관 개두술을 하는 신경외과 의사도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해 멸종위기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앞에서의 국제 분류에 비유하면 소아흉부외과 의사는 벵골대머리수리, 뇌혈관외과 의사는 갈라파고스펭귄쯤 될까. 소아청소년과나 응급의학과는 조만간 북극곰 수준이 될 것 같다. 이러한 멸종 위기는 주로 당직이나 응급콜이 존재하는 과의 문제이므로 내가 속한 과의 의사들은 다행히도 멸종위기종에 포함되지 않지만, 나와 무관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미래에 내 뇌혈관이 터지면 과연 나는 무사히 수술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종에 대한 경고는 오랫동안 무시되었다. 영화에서 혜성을 발견한 과학자들의 경고처럼. 6개월 전 갑작스레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멸종위기종 구제책이 발표되었으나, 오히려 이 구제책은 멸종 위기를 급격하게 키우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혜성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오히려 혜성의 가속페달을 밟은 셈이다. 혜성은 더 빠르게 다가오고 절멸의 시간도 그만큼 당겨졌지만, 이후에도 혜성의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책임자들은 다가오는 거대한 혜성은 그냥 두고 열심히 지상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다. 그러니 예상된 멸종을 앞둔 우리는 실존적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그 고민의 과정이 지난 6개월 동안의 시간이었다. 

영화 후반부, 혜성이 가까워지면서 천체망원경으로만 보이던 혜성이 육안으로도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운전 중이던 주인공 과학자는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하늘을 가리키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외친다. 

"저거예요! 저게 그 혜성이예요. 저기 있다고! 내내 말했잖아요. 저기 있다고!"

며칠 전 모 대학병원 응급실 폐쇄 기사를 보며 영화의 그 장면이 생각났다. "그렇게 될 거라고, 우리가 내내 말했잖아요!"

영화의 마지막,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종말을 받아들인다. 파티를 하고,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평소와 같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아이를 목욕시킨다.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한다. 그리고 혜성 충돌로 쓰나미가 닥치기 직전 아내의 손을 잡고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생각해보면, 우린 정말 부족한 게 없었어. 그렇지?" 

종말의 상황이라면 나도 주인공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역시 가족인 것이다. 그러니 절멸의 위기가 닥칠 의료 환경에서 나도 가족도 크게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현재의 실존적 고민은 멸종위기종에 대한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나흘 전 아내가 여행을 갔고, 나와 아이들만 보낼 시간이 아직도 사흘이 더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미래의 위기에 대한 부질없는 넋두리보다 당장의 생존을 고민해야 할 때란 의미다. 

애들 밥이나 챙기러 가야겠다.





2024년 8월 17일 토요일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변한다.

모처럼 일찍 퇴근하는 길이었다. 아파트 상가 앞을 뛰어다니는 꼬마들이 소란스럽다. 단지 입구에서 자전거를 탄 초등학생 서넛이 엉덩이를 치켜들고 쌩 하니 지나간다. 입구를 지나 단지 안을 나른하게 걷는다. 인공잔디가 깔린 공터에선 남자 아이들이 야구 경기 중이다. 인라인장에서 헬멧과 보호대를 차고 수업 중인 아이들이 올망졸망 귀엽다. 여름이 되면서 가장 소란스러워진 곳은 단연 바닥 분수가 있는 놀이터이다. 분수가 솟아오를 때마다 까르륵 아이들 웃음소리가 기분좋게 퍼진다.

십 년이 넘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멀리 여러 번 이사를 다니지 않은 것만 해도 운좋은 일이다. 주변 환경이 좋은 대단지 아파트라 아이들이 많다. 해지기 전에 거실 창을 열면 늘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린다. 늘상 경험하는 일이라 그간 으레 그러려니 생각해왔는데, 아이들이 많은 풍경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언젠가 같은 단지에 사는 이웃의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지방에 사는 부모님이 가끔 집에 오시면 신기한듯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여기는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구나.'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단지 안에만 초등학교가 두 개고 가장 가까운 중학교는 늘 과밀학급이다. 그러나 출산율 0.6을 찍는 현실에서 서울이라고 다 같을까.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풍경이 달라질 것이다. 학생이 줄어 문을 닫는 학교들도 생겨나고 있는데 십년 뒤 서울의 초등학생 수는 반토막이 날거라고 하니 폐교는 더 빠르게 늘 것이다. 지역으로 내려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서 학교는 둘째치고 마을과 도시 전체의 소멸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원 지하철을 타고 도심으로 출근해 아이들이 가득한 동네로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문을 닫는 학교나 지역 소멸은 그저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 멀리 떨어진 곳의 뉴스보다 휴일마다 막히는 집 근처 백화점 앞 사거리 교통 문제나 중학교 신설, 이웃 아파트 재건축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아이들이 많아도 다행히 아파트 단지 단골 소아과엔 오픈런 같은 문제도 없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이 이곳이 아니었다면 일상의 문제들의 경중은 달라졌을 것이다. 서울 변두리였다면, 지방 광역시였다면, 그보다도 더 작은 도시였다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각자가 자신에게 가까운 문제를 자신이 서있는 시선에서 생각하고 사는 것은. 웹툰 <송곳>에서 주인공 구고신의 명대사,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는 말은 그래서 진리다. 하지만 가까운 풍경만을 바라보는 시선은 쉽게 편협해진다. 때로는 내 시선이 다른 각도가 되도록 서 있는 자리를 바꾸어보기도 하고, 더 먼 곳을 보기 위해 관심과 노력도 해야 한다. 타인의 글을 읽든, 이야기를 나누든,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든.

어느 분의 페이스북 글을 보았다. 이번 의료대란 사태를 겪으며 사회적 편견을 억울해하는 의사들의 심정을 공감하고 다독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그런 정도의 억울함이 없는 집단은 없다는 것도 의사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억울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에 맞이할 억울함들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도 했다. 동의한다. 세상에 만연한 억울함들에 관해선 어린아이 수준의 경험만을 가지고 있는지라, 내가 모르는 억울함들이 어디에나 있고 내가 무얼 생각하든 그 무게는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 되새기곤 한다. 다섯달 전 내가 서명한 사직서의 무게와 전장연의 오체투지 시위의 무게는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진료만 잘 하면, 수술만 잘 하면, 의학적으로 최선의 처방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료들을 종종 만난다. 직업인으로서의 지식과 역량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각자의 날을 갈고 닦는다고 모든 톱니가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는 안타깝지만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식과 역량의 부족을 나무라는 것만큼 우리에겐 태도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나 시민의식같은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내가 서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미지의 풍경에 겸허한 태도를 가지는 것, 우선 그 정도면 될 것이다.




2023년 12월 26일 화요일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읽었던 정아은 작가의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만큼 솔직한 글쓰기 책은 없다는 카피가 어울리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솔직함과 자기 비하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 좋았다. 읽으면서 여러 번 킥킥거리며 웃기도 했다. 글쓰기 경험에선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내 입장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인상깊었던 몇 가지 내용을 적어본다. 기억에만 의존한 내용이라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책의 첫머리에서는 잘 써야 한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나아가 '잘 쓰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 써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히면 초고 자체도 아예 쓰지 못할 수 있다. 나도 머릿 속의 생각이 내 손을 거쳐 활자화 되는 순간에 그 문장의 조악함과 유치함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종종 한다. 머릿 속을 맴도는 아이디어는 왜 그대로 멋지게 옮겨지지 않는 걸까 괴로워하다 보면 어찌어찌 써냈던 몇 줄의 문장도 그냥 깔끔하게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게 나을 거란 유혹에 무릎을 꿇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고를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방점은 '초고'보다 '완성'에 찍힌다. 유치함과 설익음, 비문 투성이의 글이라 해도 일단 초고를 끝까지 써야 한다는 것.

- 퇴고는 초고의 완성보다 더 중요하다. 내가 쓰고 나서 괜찮다 생각했던 글이 다음날 다시 읽어보면 눈뜨고 못봐줄 글이 되어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 경우 여러 번 퇴고를 거친 뒤라 해도 그 글을 한 번 더 봤을 때 퇴고가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퇴고는 여러 번 할 수록 좋다. (그러려면 초고를 빠르게 완성해야겠지...)

- 글을 쓰는 이유는 인정욕구이다. 일단 깊게 동감하고. 내 경우엔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실재하던 생각이 글을 쓰다보면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고, 내가 이래서 그렇게 느꼈구나 하고 이유를 알게 되기도 한다. 내게 글쓰기란, 갖추어진 생각을 단순히 글로 바꾸는 과정이 아니고, 뒤죽박죽 정리가 안 된 상자 한 구석을 뒤져 꺼낸 찰흙덩어리를 요모조모 살펴보며 그 안에 숨겨진 본래 모양을 깎아내는 작업에 가까울 때가 많다. 그 작업은 대개 힘들고 수고롭지만 내 생각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다시 무언가를 쓰게 된다.

- 칼럼, 에세이, 논픽션, 소설을 집필하는 자세와 방식의 차이. 글의 형태와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작업 방식이 흥미로웠다. 내 경우에도 논문이나 교과서와 같은 학술 원고와 에세이는 차이가 크다. 이과생의 글쓰기와 문과생의 글쓰기라고나 할까. 양쪽의 모드를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쉽게 바꿀 수 있다면 좋을텐데 딱딱한 글쓰기 모드에서 말랑말랑한 글쓰기 모드로 바꾸는 게 쉽지 않다. 내게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일을 어떤 이들은 너무나 쉽게 해내는 듯 보인다. 분명 의학을 다룬 책임에도 유려한 문체와 문학적 향기로 감탄과 질투를 자아내는 글도 있다. (이런 문장으로 채워진 책은 보통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퓰리처상을 받는다.)

- 작가를 둘러싼 사람들, 그중에서도 편집자에 대한 글에서도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책 두 권을 쓰면서 네 명의 편집자를 만났는데, 모두가 예의바르고 성실한 분들이었다. 겨우 네 명의 편집자를 만나면서도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편집자의 세계는 지금 내가 알게 된 것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되었다. 마음 한 구석이 뜨끔거리기도 했다. 나는 그들에게 괜찮은 저자였던가? 출판의 세계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내 글의 주인이라는 생각에 은근슬쩍 자만과 허영을 내비치지는 않았던가?

- 정아은 작가님의 책은 오래 전 읽었던 '잠실동 사람들'이 전부였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었고, 작가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내가 살고있는 동네라 슬쩍 호기심이 들어 빌려왔었고, 잠실이라는 동네에 사는 인간군상을 꽤나 사실적으로 그렸구나 하고 생각했던 걸로 기억한다. 주말에 들렀던 서점에서 그의 다른 책 한 권을 더 샀다.

2023년 11월 9일 목요일

어느 '저자의 말'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를 엮은 첫 번째 책이 나온 이후 벌써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채널예스에 연재를 시작한 때부터 치자면 육 년입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빠릅니다. ‘첫 번째’란 말은 곧 첫 번째에 그치지 않음을, 그러니까 ‘두 번째’가 존재함을 의미하겠지요. 반딧불 의원의 두 번째 책에 실릴 저자의 말을 쓰면서 이제는 첫 번째라 불리게 될 책을 만들던 때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밤에 여는 작은 의원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과정을 그저 놀랍고 기쁘게 지켜보던 그때는 저자의 말을 다시 쓰게 되리란 기대를 감히 품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작은 진료실이 있는 동네의원과 그곳을 찾는 환자들의 사연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반딧불 의원의 이야기를 이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조금씩 생겼지만 금세 실행에 옮기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해외연수로 이전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이면 초고를 완성할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막상 책으로 엮어낼 만큼의 분량을 더 쓰는 데에 반년이 더 걸렸고, 이후로 책 출간까지 또 일 년이 지났습니다. 늘 그렇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빠릅니다.

전문의가 된 뒤로 줄곧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동네의원 의사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게 꼭 밤에만 여는 의원은 아니라 해도. 지금도 가끔 상상합니다. 환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진료실 밖에서의 사는 모습도 좀 더 들여다보는 그런 작은 의원을. 종종 왕진도 나갈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반딧불 의원의 진료실에는 제 사사로운 바램도 조금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진료실은 멀지 않은 곳에 실재합니다. 정부의 시범사업을 통해 왕진에 참여하는 동네의원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동네의원에서 단골 환자의 주치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는 의사 모두의 마음을 조금씩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읽은 어느 독자의 후기를 떠올렸습니다. 책에서는 동네의원을 믿고 치료를 잘 받으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마음이 편해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반딧불 의원이 환자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법 같은 공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책 속에서처럼 몇 번의 진료로 환자의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질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다 보면 의사로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 매 순간 깨닫고 겸손해지게 됩니다. 다만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동네의원과 대학병원이 각자의 역할을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환경이 환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더 많은 이들이 동네의원을 먼저, 그리고 꾸준히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지난 오 년 동안 도움을 준 이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의힘 김병준 대표와 채널예스 엄지혜 기자께 감사를 전합니다. 두 분이 마련해준 기회가 없었다면 반딧불 의원 이야기도, 두 권의 책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두 권의 책을 내는 동안 김진형, 유승재, 김서영, 우상희, 이렇게 네 분의 편집자와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제게 재능 있고 성실한 편집자들과의 작업은 큰 즐거움이자 깨달음이었습니다. 지금 제게 편집자란 단어는 이들의 모습을 적당히 합쳐놓은 것을 뜻합니다. 이들은 원고의 교정 이외에 원고의 내용이나 방향에 대해 서도 종종 의견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경우 그 조언을 충실히 따랐는데, 되돌아보면 무엇보다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두 권의 책은 이들과의 공동 저작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제 몫일 것입니다.

첫 책을 함께 작업했던 김진형 편집자께는 좀 더 특별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건강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에 지금과 같은 페이크 다큐 형식의 글을 제안해준 이가 그였습니다. 그러니 반딧불 의원은 태생부터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한 편의 원고를 보낼 때마다 그는 빨간펜 선생님처럼 첨삭과 의견을 더한 답신을 보냈고, 책으로 빚기에 글의 얼개가 부족했던 초창기에 그 피드백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초고가 과연 읽을만한 것인지 불안해하다 그의 검토를 받고서야 안심을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가 편집을 담당한 다른 책들을 보면서 첫 편집자로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운 좋은 일이었는지 실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막상 첫 책의 마지막 장에 그의 이름이 함께 인쇄되지 못한 점이 늘 아쉬웠습니다. 이 글로 뒤늦게나마 그 아쉬움을 조금은 덜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마지막엔 항상 가족이 있습니다. 아내 지령은 모든 원고의 첫 독자였습니다. 다독가인 그의 객관적인 시각은 원고를 쓸 때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일깨워 주곤 했습니다. 처음 밤에 여는 의원의 이름을 고민할 때 반딧불이란 이름을 냉큼 붙여준 첫째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말 밤 서재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아빠에게 놀아달라 칭얼대던 둘째 아이는 이제 책상 옆 소파에서 얌전히 책을 읽으며 작업이 끝나길 기다릴 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 같은 존재인 세 사람에게 깊은 고마움과 애정을 전합니다.

2023년 초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