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트럭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린다. 배달할 석탄을 싣고 가던 트럭은 기운없이 걷고 있는 소년을 지나친다. 트럭을 모는 남자와 같은 마을에 사는 소년이다. 아이에겐 가족을 돌보지 않는 술주정뱅이 아빠가 있다. 아이에게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운전석의 남자는 아이가 자꾸 신경쓰인다.
그러니까 이것은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담긴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내게 일찌감치 올해의 책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으니,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소식에 곧바로 예매를 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 소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아쉽게도 영화에서 소설만큼의 풍부한 감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소설의 이야기가 스크린으로 옮겨지고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은유와 상징이 줄어들고 서사의 구체성은 커진 결과일 것이다. 어쩌면 시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오롯이 스크린에 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인 빌 펄롱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소설에 비해 단선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펄롱의 아내, 단골 식당의 주인, 수녀원장 등의 인물들은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영화에선 모두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이들과 주인공 사이의 거리는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 멀어졌다. 결과적으로 인물의 입체성은 줄어들었다. 감독은 관객들이 다른 인물보다 펄롱의 내면에 집중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제한된 시간 내에 펄롱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뇌와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선 다른 인물들에 대한 아웃포커싱이 어느 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사소한 아쉬움을 날리는 것은 킬리언 머피의 연기다. 그의 연기는 추앙받아야 마땅하다. 영화에서 그는 빌 펄롱 그 자체이며,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을 통해 유약함과 강인함이 복잡하게 포개진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낡은 외투에 싸인 굽은 등과 어깨만으로 일상의 고단함과 삶의 무게를 절절히 깨닫게 할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
펄롱의 아내는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라고. 가진 거 잘 지키고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살면 우리 아이들은 험한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현실에서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대개는 이렇게 산다. 적당히 연민하고 적당히 외면하면서.
하지만 수전 손택은 이렇게 말했다.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까지 증명해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연민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행동은 어디에서 기인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현실에서도 소설의 주인공인 펄롱처럼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리고 이들이 외면하지 못해 행했던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큰 변화를 목격하기도 한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가 광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소설과 영화의 결말에서 펄롱이 선택한 행동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란 제목은 펄롱의 행동을 만들어낸,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뜻할 것이다. 펄롱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받고 싶다고 하는데,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인생의 총합이 된다 (Trifles make the sum of life)'.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고 했던 한강 작가의 말처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수많은 선의가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설도, 영화도, 현실도 모두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야말로 이런 사실을 떠올리기 적당한 때 아닌가. 그러니 아직 보지 않은 분들께 올해가 가기 전에 추천한다. 개인적으론 영화보다 소설이 나았지만 어느 쪽도 좋을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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