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수학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이 삼각형을 포함하는 삼각형이라는 건, 이 작은 삼각형을 품고있는 큰 삼각형을 말하는 거야."
"아니, 근데 포함하는 거면 이 삼각형도 되고 다른 삼각형도 되는 거잖아."
"그러러면 이 삼각형을 포함해서라고 되어 있었어야지."
"그러니까, 이 삼각형도 넣어서 세어야 한다는 거잖아."
같은 대화가 몇 번 더 오고가면서 결국 언성이 높아져버렸다.
"포함해서가 아니고 포함하는이라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나서 아차 싶었다. 아이가 억울한 표정으로 한참 문제집을 내려보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휙 제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부모 역할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은 여전히 불쑥 찾아온다. 팽팽해진 고무줄이 툭 끊어지는 것처럼. 또 그러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아이에게 사과를 한 뒤에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포함하는'과 '포함해서'의 차이를 설명할 그럴싸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선생님들은 이런 차이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는 걸까.) 그렇지만 역시 어미가 다른 이 두 단어가 같은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수학 문제에서라면. 아름다운 수학 문제라면 문제의 모든 단어는 하나의 답을 향해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기 마련이다. 일단 답이 정해진 수학 문제에서 '포함하는'과 '포함해서'의 차이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만큼이나 명확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접하는 일들이란 수학 문제처럼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삶은 불확실함으로 가득하다. 오늘 내가 보고 들었던 것 중에 진실은 얼마나 있었을까. 짧은 말과 행동과 사건의 이면엔 대개 그 몇 배의 맥락이 있고 그 흐름 어느쯤에 발을 담구었느냐에 따라 그 일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진실이란 알기보다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이 확실함을 가장해 내뱉는 말은 공허한 푸념이 되거나 실제 그 흐름 가운데에 있었던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이다.
쉽게 판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선 그 전에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를 반복해 되묻는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의학자로 살면서 배인 태도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의학이란 불확실 투성이의 학문이다. 이십여년 전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 중 지금까지 쓸만한 것은 많지 않다. 그때 찬란한 진리로 우러렀던 교과서는 지금은 쓸 수 없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시골집 창고처럼 활용할 수 없는 지식을 담고 먼지가 쌓인 채 책장 구석에 박혀있다. 그러니 오랫동안 진리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고 남아있는 의학적 발견이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낮추는 것이 좋다.'라는 단순한 명제와 같은 것들. 물론 어디서부터가 고혈압인가, 또는 혈압을 얼마만큼 낮추어야 하는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새로운 논란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의학이란 불확실 투성이라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적당히' 낮추면 뇌졸중과 심근경색과 같은, 살면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병들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진 흔들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약을 써야 하는가란 문제로 가면 역시 불확실성의 힘이 강해진다. 진료실에서 낯선 처방전을 조심스럽게 내미는 환자들을 종종 만난다. 복용 중인 약이 괜찮은지 확인해달라는 것인데, 고혈압 약도 그 중 하나이다. 고혈압 약은 성분명 만으로도 수십 종류가 있지만 대개는 어떤 종류를 선택해도 무방하다. 환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피해야 할 약도 있지만, 그럴만한 문제가 없는 환자의 경우 선택의 기준은 기껏해야 경험적인 선호일 뿐인 것이다. 그런 경우 그가 복용하는 약은 선택이 가능한 수십 가지 약들 중 하나이며, 그보다 더 나은 최적의 약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할 일은 처방전에 인쇄된 약 이름을 주의깊은 태도로 살펴보고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아주 좋은 약입니다. 선생님께서 처방을 잘 해주셨네요.'
편안한 얼굴로 돌아서는 환자를 보며 생각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도 때로는 일부러 확실함을 가장한 태도를 보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태도가 지나쳐 강요가 되진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아이에게 수학 문제를 가르칠 때와 같은 상황에서는.
최근 화제가 되었던 스카이캐슬을 보진 않았지만, 김서형 씨의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란 대사는 인상적이었다. 대사와 말투, 표정 모두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와 같은 이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와는 다르겠지만, 말들로 가득찬 드라마에서 그녀의 대사가 남겨진 것은 불확실로 가득한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확실함을 대하는 기분을 선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