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3일 금요일

구두 밑창을 갈며

길건너에 있는 구두 수선 노점에 들렀다. 구두를 자주 닦는 편은 아니다. 길가다가 문득 생각이 날 때 가까운 노점을 찾는 정도라 막상 회사 근처에 있으면서도 오랜만에 방문한 곳이었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선지 노점 안의 손님은 중년 신사 한 명 뿐이었다. 희끗희끗한 스포츠 머리에 다부진 체격의 주인이 손을 재게 놀리며 낡은 검정 구두를 닦고 있었다. 밑창과 굽을 갈아달라는 말에 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 국산으로 하면 밑창하고 굽 각각 만오천원, 수입으로 하면 각각 이만오천원입니다.

구두를 닦던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벗은 구두를 작업대 옆에 놓은 뒤 삼선슬리퍼를 신고 노점 한켠의 벤치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바닥에 열선이 깔렸는지 엉덩이가 뜨끈했다. 닦던 구두를 마무리하고 손님을 보낸 그가 밑창 샘플을 내밀었다. 좀더 두껍고 오래 간다는 수입산 제품을 선택했다. 밑창과 굽 합쳐 오만원이다. 구두를 살펴보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좋은 구두네요. 아무래도 두꺼운 게 더 나을 겁니다.

닳아버린 뒷굽을 그라인더로 갈아내 평평하게 만들고 구두 바닥에 본드를 바른다. 새 밑창과 굽에도 본드를 바르고 드라이기로 가열한 뒤 구두에 단단히 붙인다. 새로 붙인 밑창이 들뜨지 않도록 모서리 부분을 꾹꾹 누르며 힘을 줄 때마다 세월에 단련되었음직한 그의 팔뚝 근육이 꿈틀거렸다. 구두를 돌려가며 접착 상태를 확인한 뒤 끌칼로 기존 굽과 밑창에 맞춰 새 밑창을 잘라내는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거침이 없었다.

새 손님이 방문했다. 기다리는 손님이 생기자 구두를 매만지는 그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새 밑창과 굽으로 갈아신은 구두는 다시 작업대에 올랐다. 광택을 내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다. 장인의 손길이 다시 물흐르듯 움직였다. 팔뚝 길이만한 흰 천을 오른손 검지와 중지에 야무지게 두르고는 느슨해지지 않도록 엄지에 다시 돌려 감는다. 천을 두른 손가락으로 젖은 스펀지를 두드린 뒤 갈색 구두약을 발라 구두 가죽을 문지르기 시작한다. 물광을 내기 위함이다. 약통과 구두를 오가는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우아했다.

뜨끈한 의자때문에 중간중간 엉덩이를 움찔거려야 했지만 삽십분 남짓한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늘 그렇지만 구두를 닦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오히려 즐겁기까지 하다. 가끔은 그 과정이 숙련된 예술가의 공연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오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을 때 나는 마치 그의 노동력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그의 행위에 대한 관람료를 지불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평이 채 안되는 공간이었으나 공연은 훌륭했고 그는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그러므로 까만 구두약 때가 잔뜩 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지폐를 받는 그를 향해 나 역시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9년 3월 18일 월요일

확실과 불확실

아이에게 수학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이 삼각형을 포함하는 삼각형이라는 건, 이 작은 삼각형을 품고있는 큰 삼각형을 말하는 거야."
"아니, 근데 포함하는 거면 이 삼각형도 되고 다른 삼각형도 되는 거잖아."
"그러러면 이 삼각형을 포함해서라고 되어 있었어야지."
"그러니까, 이 삼각형도 넣어서 세어야 한다는 거잖아."
같은 대화가 몇 번 더 오고가면서 결국 언성이 높아져버렸다.
"포함해서가 아니고 포함하는이라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나서 아차 싶었다. 아이가 억울한 표정으로 한참 문제집을 내려보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휙 제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부모 역할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은 여전히 불쑥 찾아온다. 팽팽해진 고무줄이 툭 끊어지는 것처럼. 또 그러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아이에게 사과를 한 뒤에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포함하는'과 '포함해서'의 차이를 설명할 그럴싸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선생님들은 이런 차이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하는 걸까.) 그렇지만 역시 어미가 다른 이 두 단어가 같은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수학 문제에서라면. 아름다운 수학 문제라면 문제의 모든 단어는 하나의 답을 향해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기 마련이다. 일단 답이 정해진 수학 문제에서 '포함하는'과 '포함해서'의 차이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만큼이나 명확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접하는 일들이란 수학 문제처럼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삶은 불확실함으로 가득하다. 오늘 내가 보고 들었던 것 중에 진실은 얼마나 있었을까. 짧은 말과 행동과 사건의 이면엔 대개 그 몇 배의 맥락이 있고 그 흐름 어느쯤에 발을 담구었느냐에 따라 그 일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진실이란 알기보다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이 확실함을 가장해 내뱉는 말은 공허한 푸념이 되거나 실제 그 흐름 가운데에 있었던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이다.
쉽게 판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선 그 전에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를 반복해 되묻는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의학자로 살면서 배인 태도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의학이란 불확실 투성이의 학문이다. 이십여년 전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 중 지금까지 쓸만한 것은 많지 않다. 그때 찬란한 진리로 우러렀던 교과서는 지금은 쓸 수 없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시골집 창고처럼 활용할 수 없는 지식을 담고 먼지가 쌓인 채 책장 구석에 박혀있다. 그러니 오랫동안 진리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고 남아있는 의학적 발견이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낮추는 것이 좋다.'라는 단순한 명제와 같은 것들. 물론 어디서부터가 고혈압인가, 또는 혈압을 얼마만큼 낮추어야 하는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새로운 논란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의학이란 불확실 투성이라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혈압 환자의 혈압을 '적당히' 낮추면 뇌졸중과 심근경색과 같은, 살면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병들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진 흔들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약을 써야 하는가란 문제로 가면 역시 불확실성의 힘이 강해진다. 진료실에서 낯선 처방전을 조심스럽게 내미는 환자들을 종종 만난다. 복용 중인 약이 괜찮은지 확인해달라는 것인데, 고혈압 약도 그 중 하나이다. 고혈압 약은 성분명 만으로도 수십 종류가 있지만 대개는 어떤 종류를 선택해도 무방하다. 환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피해야 할 약도 있지만, 그럴만한 문제가 없는 환자의 경우 선택의 기준은 기껏해야 경험적인 선호일 뿐인 것이다. 그런 경우 그가 복용하는 약은 선택이 가능한 수십 가지 약들 중 하나이며, 그보다 더 나은 최적의 약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할 일은 처방전에 인쇄된 약 이름을 주의깊은 태도로 살펴보고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아주 좋은 약입니다. 선생님께서 처방을 잘 해주셨네요.'
편안한 얼굴로 돌아서는 환자를 보며 생각한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도 때로는 일부러 확실함을 가장한 태도를 보여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태도가 지나쳐 강요가 되진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아이에게 수학 문제를 가르칠 때와 같은 상황에서는.


최근 화제가 되었던 스카이캐슬을 보진 않았지만, 김서형 씨의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란 대사는 인상적이었다. 대사와 말투, 표정 모두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와 같은 이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와는 다르겠지만, 말들로 가득찬 드라마에서 그녀의 대사가 남겨진 것은 불확실로 가득한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확실함을 대하는 기분을 선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2019년 1월 5일 토요일

올리버 색스의 유작을 읽고.

올리버 색스의 유작(고맙습니다. Gratitude)을 읽었다. 어려서부터 숫자와 주기율표를 친구로 삼았던 이 특이한 학자가 생일을 맞이하는 방식은 나이에 해당하는 번호의 원소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열한 번째 생일은 나트륨, 일흔아홉 번째는 금,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네 개의 에세이 중 첫 번째는 그가 여든 번째 생일을 앞두고 쓴 '수은'이란 제목의 글이다. 새해에 처음 읽은 글이 삶에 대한 통찰과 애정으로 가득한 것이어서 감사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주기율표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수소H의 시기에서 생을 시작한 두 명의 아이들은 이제 열 번째 네온Ne과 여섯 번째 탄소C의 시기가 되었다. 화학에 대해선 까막눈인 내게 두 원소는 금속이 아니라는 것 말고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두 아이는 네온과 탄소의 거리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르다. 순한 성격인 오빠와 달리 둘째는 까탈스럽고 고집이 세다. 식습관도 달라서 간식을 따로 준비해주곤 한다. 첫째는 단맛을 좋아하지만 둘째는 그렇지 않다. 달걀 프라이도 첫째는 완숙, 둘째는 반숙이다.

십년 뒤쯤의 아이들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쉽게 그려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율표 상단의 오른쪽 끄트머리, 네온의 위치를 보며 생각한다. 눈부신 빛은 오래 바라보기 어렵다. 눈이 부실만큼 밝진 않아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주홍빛 네온 조명처럼 온기를 전달해주는 존재로 성장하길. 그리고 탄소. 탄소가 없는 삶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탄소에서 출발한 변주에 불과하지 않던가. 탄소는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부드러운 흑연부터 가장 강한 물질인 다이아몬드까지. 지금 내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생기를 불어넣는 이 존재는 시간이 지나 무엇이 될까.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아이의 미래는 그저 바램일 뿐, 역시 나는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 알지 못한다.

처음 만났던 열몇 해 전에 나와 아내는 갈륨Ga과 니켈Ni이었고,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루테늄Ru과 나이오븀Nb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둘 다 지구상엔 지극히 적은 금속이라고 한다. 갈륨과 루테늄의 사이를 지나는 동안 큰 풍랑은 없었던 것 같다. 비교적 평온한 항해를 했던 것에 대해 감사해야 마땅하지만, 요즘엔 무채색의 세상 한가운데서 그저 꾸역꾸역 판에 찍어낸 듯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불안한 마음이 문득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그런 순간, 지구상에 드문 존재인 이 금속의 이름을 되뇌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다.

지난 연말, 오랜만에 컴퓨터에 저장해둔 사진을 살펴보았다. 마우스 스크롤을 길게 당길 때마다, 겨우 몇 년 사이의 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던 장면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찍었던 사진임은 분명한데 이곳에 갔었던가 싶은 풍경도 있었다. 장소가 어딘지 헷갈릴 때는 사진에 숨겨진 지오태깅을 확인했다. 기록을 남겨두지 않은 기억은 잊는다. 잊혀지는 것이 많아질수록 기억을 붙잡아두고 싶어진다. 언젠가부터 익숙하지 않은 곳을 지나칠 때 사진을 더 찍어두려 하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이다.

루테늄은 백금 원소이고 하드디스크를 만드는 데 쓰인다. 디스크 밀도를 높여 안정적으로 저장 용량을 늘리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역할을 하는 것은 겨우 원자 세 개 두께의 루테늄 층이다.(물론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Pixie Dust(요정의 먼지)'라 부른다고 한다. 팅커벨이 막대를 흔들 때 나오는 반짝이는 가루 말이다. 오늘도 건망증 때문에 치매를 걱정하는 환자에게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그리고 주기율표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이제 조금은 친숙해진 느낌이 드는 원소 이름을 보며 부질없이 생각했다. 해가 갈수록 휘발성이 강해지는 기억 장치를 위해 루테늄의 시기가 끝나기 전 내 머리 위에서도 요정이 막대를 한 번 흔들어 주었으면.

2019년 1월 2일 수요일

의사가 되길 원하는 학생들에게

의대 진학이 목표라는 네 명의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멀리 대구에서부터 찾아왔다. 앳된 얼굴이지만 뽀얀 피부에 가벼운 화장을 하고 비슷한 색깔의 틴트를 바른 입술이 요즘 학생들다웠다.

내가 할 일은 학생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 뿐이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질문은 다양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 뭘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의대 졸업 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문제점이나 의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한계 등 쉽게 답하기 어려운 것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눈높이에 맞지 않는, 너무 주관적이고 지엽적인 내용만 꼰대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의사가 되길 준비하면서 읽었으면 싶은 책 리스트를 뒤늦게 문자로 보내주었다. 아이들은 오늘 처음 만난 의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이내 잊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문답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 대학 생활을 하면서, 수련을 받으면서 꼭 해야할 활동이 있나요?

- 구체적인 활동을 추천하긴 어렵지만 의사가 될 분들이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어요. 학교와 병원에서 배우고 공부할 것들이 많아 힘들거에요. 그래도 학교와 병원 밖에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서 관심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의사가 된 다음,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좌절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병원과 의료계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더 많은 부조리와 문제들이 있고, 내 문제만큼이나 타인의 문제도 중요하다는 걸 잊으면 안됩니다. 적절한 균형 감각이 필요해요. 
지금 의사를 둘러싼 여러 문제는 저를 포함한 의사들이 나와 타인의 문제 인식에 있어 균형 감각을 잊은 채 살아온 것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내 문제야 나만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는 그렇지 않을테니,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금새 균형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책을 읽어도 좋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도 좋아요. 어떤 방식이든 외부에 대한 관심의 끈, 그걸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2018년 12월 7일 금요일

진주장 이야기

"번데기탕도 파는데, 사갈까요?"

퇴근길이었다. 며칠새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잰걸음을 더 재촉하던 참이었다. 전화기 너머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고춧가루를 푼 뜨끈한 번데기탕 맛이 떠올라 입안에 침이 고였다.

길 건너 아파트 단지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장이 선다. 아파트 이름을 앞에 붙여 **장이라 불리지만 파는 것은 먹거리들 뿐이다. 그래도 종류는 꽤나 다양하다. 아파트 단지 특성상 닭강정, 돈가스, 꽈배기, 만두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간식들이 많다. 잔치국수와 육개장은 저녁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족발, 순대, 곱창볶음과 같은 음식은 소주 한잔 곁들여 먹기에 좋다.

일주일 내내 오늘 저녁엔 뭘 해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동네에서 열리는 장은 하루 저녁이나마 고민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우리 집도 수요일 저녁은 장에서 사온 음식들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닭강정과 잔치국수를 즐겨 먹는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도 아내가 장에 간다기에 내 몫으로는 순대를 주문해놓은 터였는데, 옆집에서 번데기탕을 판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애들은 제 몫의 국수와 닭강정을 해치운 뒤였다. 작은 냄비 안에서 번데기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소주잔을 챙겨 식탁에 앉았다. 순대 한 접시와 번데기탕이 든 냄비를 함께 놓으니 넉넉한 한 상이 된다.

"닭강정집 쿠폰을 열 장 다 모았네."

싱크대 앞에 서있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말투에 힘이 없다. 아내는 연말에 직장 일이 많아지면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체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단 자신이 나서는 성격이라 일이 많은 편이다. 스스로도 일은 타고난 것 같다고, 전생에 무수리였나 보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늘 씩씩하게 헤쳐가는 그녀이다. 그럼에도 요즘은 지나치게 버거운 상황에 힘겨운 것 같아 걱정이다. 오늘도 어깨가 축 처져보인다.
아내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열 장 모으면 닭강정 1인분이 공짜거든요.”

멀뚱한 표정인 나를 보며 아내는 말을 이었다. 

“근데 추운 날씨에 너무 고생하면서 팔고 있어가지구, 미안해서 쿠폰을 못쓰겠어요.”

일전에 아이들 손을 잡고 닭강정을 사러 갔을 때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활기찬 표정으로 응대하던 젊은 사장님이 생각나 난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겨우 만원어치 쿠폰 열 장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아내의 이야기는 이내 오후에 들었던 둘째 어린이집 소식을 거쳐 요즘 날씨에 대한 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일 날씨는 조금 더 포근해질 거라 했다. 거실 형광등 빛 아래 아내의 어깨가 조금은 더 단단해져 보였다.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문제는 호르몬

감성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우는 남자가 환영받기란 어렵다. 박보검이나 송중기가 아닌 평범한 중년의 아재가 아무데서나 눈물을 보였다간 주접을 떤다거나 찌질하다는 핀잔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본래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 책이나 드라마를 보며, 음악을 들으며 훌쩍거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그다지 슬픈 장면이 아님에도 흘러나오는 눈물에 주변의 눈치를 보며 민망함을 느낀 적도 많았다.

근래에 뜬금없이 눈물이 나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진 건 호르몬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은 줄고 여성호르몬이 늘어난다고 하니까. 지난 겨울,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스노우보드 경기를 보는 중이었다. 하프파이프 끝에서 로켓처럼 튀어올라 몸을 몇 차례 비튼 뒤 곡예사처럼 우아하게 착지를 해대는 경이로운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찬란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엉뚱하게도 코끝이 찡해져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피했던 기억이 난다.

더 당황스러운 순간은 아이들을 나무랄 때이다. 아이들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호통을 치는 찰나에 매번 눈물이 핑 돌아버리는데, 이럴 때면 아이들에게 들킬까 상황을 아내에게 맡기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 돌아와야 한다. 아이들에 대한 화는 잠깐이다.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태도는 금새 사라지고, 감정을 이기지 못한데 대한 자괴감과 실망감이 해일처럼 밀려오곤 한다. 몇마디 훈계를 더해보긴 하지만 매번 경기는 결국 내 패배로 끝난다. 큰애는 예전과 달리 이제 아빠가 야단을 쳐도 여간해선 울지 않는데, 이쯤이면 그냥 패배가 아니라 콜드게임 패 정도인 셈이다.

4학년 아이들의 학예회 날이었다. 아이들은 머리만큼이나 큰 리본을 가슴에 달고 탬버린 춤을 추고, 양손에 든 깃발을 음악에 맞춰 돌려대고, 다양한 악기를 들고 합주를 하고, 수화를 응용한 율동을 하고, 스케치북을 한장한장 넘겨가며 카드섹션 무대를 만들었다. 아이들의 몸짓은 서툴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사실 무엇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제작년보다 한뼘씩은 더 큰 아이들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신비로웠다. 아이들 모두가 '자기 자신'에 성큼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음악은 경쾌하고 아이들의 표정은 발랄했지만 이상하게 난 또 코끝이 시큰거렸다.

역시 호르몬이 문제인가 보다.


2018년 4월 6일 금요일

의뢰회신서

장인께서 다음 주에 수술을 받으실 예정이다. 언젠가부터 한쪽 눈이 어른어른하다시더니, 근처 안과 진료 결과 망막에 주름이 잡혔다고 한다. 모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보고 수술 날짜를 받은게 두어달 전이다. 

입원 날짜, 수술 날짜가 정해졌고 지난 주엔 입원 전 검사를 위해 병원에 다녀가셨다. 검사 잘 하고 돌아가셨느냐고 통화를 하는데, 입원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신 모양이다. 수술 이틀 전에 입원을 하고, 수술 이후에도 며칠은 병원에 계셔야할 것 같은데 입원 기간에 대한 설명을 못들으신 모양이다. 
예기치 않게 일상을 비워야하는 환자 입장에선 얼마동안의 공백을 준비해야할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설명이 없었던걸까, 아님 검사실과 진료실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당신이 들었던 것을 잊으신걸까. 

외래에 전화해 입원 기간을 물어볼까 싶었지만 내가 직원임에도 막상 환자 보호자 입장이 되니 선뜻 문의하기가 망설여진다. 결국 '망막 수술 입원 기간' 등을 구글링하고 있노라니 늘상 느끼는 거지만 이 병원도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출근하니 책상 위에 봉투가 놓여있다. 안에 든 건 지난달에 외부 병원으로 의뢰한 환자의 회신서였다. 

이곳에서 모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의뢰하는 것은 대개 환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이렇게 회신서를 받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회신서야 해당 병원의 행정 시스템에 따라 보내졌을 것이다. 흔한 시술이고 회신 내용도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보냈던 환자에 대한 치료가 별탈 없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치료를 담당한 선생님께 조금은 고맙기도 했다.


회신서를 보내는 것은 의뢰를 한 의료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일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론 환자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와 이후에도 환자를 보내달라는 뜻이 깔려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간에 회신서를 챙겨보내는 것은 제대로 된 의료전달체계를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예전 모 대학병원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일일이 회신서를 작성해 보내셨다는 일화도 있지만, 대개 행정적인 지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행정적인 지원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신경쓰지 않는 병원들도 있다. 그런 곳은 굳이 이런 애프터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환자로 넘쳐나서일텐데, 또 환자가 많은 병원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무수히 많은 환자 의뢰서를 받고있는, 내가 속한 이 병원은 답장을 몇 통이나 보내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늘상 느끼는 거지만 역시나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2017. 4. 6)


2018년 2월 22일 목요일

다이하드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 저녁이면 아이들과 영화를 본다. 웬만한 초딩용 애니는 두루 섭렵한고로 그렇잖아도 최근엔 애니 외의 장르를 곁눈질한 터였다.(무엇보다 디즈니건 드림웍스건 픽사건 이제 엄마 아빠가 더이상 애니는 못보겠어!) 더빙판을 구할 수 없어 자막으로 보았던 '프리윌리'의 경우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재미있게 본 눈치였다. 그에 반해 '인디아나존스’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아이와 함께 볼 영화로 '(키아누리브스와 산드라블럭의) 스피드'를 골랐는데 아이가 손에 땀을 쥐어가며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다는 모 페친의 글을 보고, 우리 집에서도 며칠 뒤 같은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다. (두 초딩은 같은 나이다.) 만화가 아니란 소식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던 우리 집 초딩 역시 영화의 줄거리를 대강 이야기해줬더니 나름 관심을 보인다.
20년이 넘은 영화는 세월만큼이나 때깔이 구리고 대사는 유치하며 편집은 툭툭 끊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녀석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가끔은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늦게 엉뚱한 소리를 하긴 하지만. 여섯 살 둘째는...... 뭐 그냥 패스하자. 아이들과 함께 볼 명목으로 골랐건만 막상 가장 신이 난 관객은 대학 초년생 시절 이 영화를 보고 키아누리브스의 팬이 되었던 아내였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점이 나쁘지 않음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얻은 아빠와 엄마는 올디스벗구디스를 외치며 당분간 추억의 걸작 시리즈를 상영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다이하드'.
다이하드가 어떤 영화인가. 80년대 최고의 액숀 영화이고 브루스윌리스를 일약 최고의 액숀 배우로 만들어 주었으며, 한국에선 서울올림픽 기간에 개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 대박을 일으킨 영화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론 단체 관람 후 엔딩크레딧을 보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던, 십대 시절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던 것이다.
생김새가 다른 서양 배우들의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아이가 가끔 우리 편과 나쁜 놈들을 헷갈리긴 했지만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껄쩍지근한 뒷맛이 남은 건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열광적인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내친김에 이번 주말엔 다이하드 2를 보기로 했다. 참고로 난 존 맥티어넌의 1편보단 레니 할린의 2편을 더 좋아한다.


개고생을 하는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맥클레인 형사 캐릭터는 액션과 함께 영화를 이끄는 두 축이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지금은 촌시러우나 당시엔 그렇지 않았을) 유들유들한 멘트들을 열 살 관객이 이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계속되는 총격전과 폭파씬이 좀 지루해졌는지 약간 삐딱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악당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조용히 추적하는 맥클레인
- 쟤네가 다 나쁜 놈들 아냐? 근데 왜 그냥 보내?
좁은 송풍기 통로로 들어가기 전 윗옷을 벗어던지는 맥클레인
- 옷은 왜 벗는 거야?
맥클레인의 총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악당들
- 저기 나오는 나쁜 놈들은 다 바보인 것 같아.
자동 소총 탄피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격전 중에
- 영화에서 나오는 건 다 가짜 총 아냐?
"야, 그렇게 생각하면 아예 영화를 보지 말아야지. 또 만화는 뭐 하러 보냐? 다 그림인데."
향수에 젖은 40대 관객들의 흥을 딱딱 끊어주는 말에 짜증이 나서 한마디 던지니 입을 다물고 샐쭉해진 녀석. 악당의 비행기가 폭파되고 엔딩크레딧과 함께 '렛 잇 스노우'가 울려퍼지는데 마지막 멘트를 날리고 휙 나간다.
"정말 다이 하드(Die Hard)네."
브루스 형님. 욕 보셨어요.

2018년 2월 20일 화요일

가족이 해야할 일

- 네 아버지가 말이다.

아이들이 잠들자 어머니께서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보통은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가기 전에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를 드리고 안방 중문을 닫고 나오는데, 하고싶었던 말씀이 있었나보다. 어머니의 말씀은 평소보다 더 길게 이어졌지만 내용은 그간 종종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환갑을 넘으시면서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 흉을 보셨다. 그렇다고 친구나 이웃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성격은 아니신지라 아버지에 대한 넋두리를 듣는건 자연스레 누님과 나의 몫이 되었다. 겨우 두세달에 한번씩 본가에 갔었던 나에 비해 가까운 곳에 사는 누님은 훨씬 자주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을 것이다. 지난 일년간 누님이 조카의 입시 준비 때문에 왕래가 줄어들자 그동안 쌓인 게 많으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다. 설 전날 밤늦게 시작된 모자간의 대화는 내가 또 아들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구나 하는 어머니의 자조 섞인 후회로 끝이 났다.

설날엔 처가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평소와 같이 반주를 얼큰하게 하신 장인께선 일찍 잠이 드셨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책상에 앉았는데 거실에서 장모님과 아내가 나누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 네 아빠가 말이다.

장녀인 아내는 장모님을 닮은 걸로는 외모와 성격 모두 딸 셋 중 제일이다. 그래서인지 장모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내이다. 아내는 꼼꼼하고 모든 일들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걱정이 많아지는 성격인데, 장모님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장인께선 다소 즉흥적이고 급한 성격이시라 종종 말다툼이 생기곤 한다. 최근엔 처제의 결혼을 앞두고 신경을 쓰시면서 두 분 사이에 충돌이 늘어난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온 아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하고싶은 말씀이 많으셨나 봐. 따로 이야기하실 곳도 없을텐데 이럴 때라도 잘 들어드려야죠.”

연휴 마지막 날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아내와 다음 주에 있을 처제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들 녀석이 짜증 섞인 말투로 이야기한다.

-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니깐.

제딴에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귀기울여 듣지 않고 다른 대화만 하고 있으니 골이 났나보다. 열한살이 되었지만 아직까진 조잘조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내용이라 해봐야 친구랑 했던 놀이, 최근에 봤던 만화책이나 티비에서 보았던 만화 영화 이야기 정도가 다이지만. 요즘엔 하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포켓몬고 게임에 대한 것이다. 주말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포켓몬들의 소식을 반복해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엄마 아빠에게 자주 말을 건네주는 걸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남자 아이는 사춘기가 되면 말수가 확 줄어든다는데 언젠가 그 시기가 오면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할까 미리 걱정을 하기도 한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렸을 적엔 나도 어머니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랑 했던 놀이, 문구점에 들러 했던 뽑기 이야기나 텔레비젼 만화 이야기 정도가 대부분이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이젠 짐작이 간다. 그땐 주로 내가 말을 하고 어머니가 그걸 들어주셨겠지만 내가 중년이 된 지금은 어머니가 말을 하고 나는 듣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방통행에 가까운 대화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때로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족간에 가장 중요한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개학날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었다.

방학 내내 늦잠을 자는데 익숙해졌던 아들은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잠이 덜깬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밥알을 한알한알 세듯 입을 오물거리던 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빠. 근데 왜 오늘은 늦게 출근해?"
"오늘은 아침에 진료가 없어. 개학날이기도 해서, 너랑 같이 나가려구."
"그렇구나."

심드렁하게 대답한 아이는 숟가락으로 밥공기를 뒤적거렸다.

남자 아이의 등교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를 닦고, 까치집이 생긴 머리칼에 물을 묻혀 가라앉히고, 허물을 벗었다가 새 껍질을 쓰듯 옷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두터운 자켓을 입고, 가방을 메고 현관에 서기까진 십분 정도면 충분했다.

영하 십도를 훌쩍 넘는 아침 날씨였다. 며칠째 한파였으므로 단단히 채비를 하고 나왔지만 코끝이 시렸다.

"아빠가 하나 들어줄게."

개학날이라 들고갈 준비물과 과제가 많았다. 양손에 든 가방 중 하나를 선뜻 건네지 않고 망설이던 아이는 머뭇거리며 로봇영재 수업 가방을 내밀었다.

학교까진 오 분이 채 안되는 거리이다. 어제까지와 달리 아파트단지 내 인도는 학교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약간의 흥분과 소란스러움이 섞인 공기가 볼을 간질였다. 딱 하루 차이인데 아침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새로 출현한 포켓몬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이는 학교가 가까워지면서 불편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빠, 이제 그 가방 나한테 줘."
"왜, 얼마 안남았잖아. 그냥 아빠가 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아이참. 내가 들 수 있어. 그냥 줘."

녀석은 아빠와 나란히 등교를 하는게 부끄러운 눈치였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녀석이 이겼다. 가방을 건네받아 양손에 짐을 든 아이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아빠, 나 간다."

녀석은 재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너 재잘대는 아이들 틈에 끼어 학교 후문 안으로 사라졌다. 한번쯤 뒤돌아 손을 흔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그사이 아빠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