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4일 토요일

비만 치료에서 요요 현상을 예방하는 방법



많은 체중을 한꺼번에 줄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처음엔 체중이 잘 빠지다가 빠지는 속도가 줄어드는 정체기를 겪어보았을 것이다. 대개 정체기에 접어들면 내 마음이 좀 느슨해졌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식사량을 더 줄이거나 과도한 운동을 하게 되지만, 이전만큼 효과는 없으며 조금 줄어든 체중도 다시 며칠 전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 동안 줄어드는 체중계 눈금과 허리띠 사이즈를 보며 느꼈던 즐거움과 보람은 사라지고, ‘지금까지 해 왔던 방법이 잘못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불안해진다. 이러한 시기가 지속되면 내 한계는 여기까지 인가보다하고 자책감도 들고, ‘또 실패했구나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기도 한다.


체중을 뺄 때 시간이 지날수록 체중 감량의 속도가 줄어드는 것은 다이어트 방법과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거치는 과정이다. 저열량식사(1200-1500kcal) 6개월 하면 체중은 5-6% 정도 빠지고, 초저열량식사(800kcal 미만)의 경우는 10-12% 정도 빠지는데, 이때 다시 정상적인 식사를 하게 되면 체중은 1년 이내에 다시 체중 감량 전, 또는 그 이상으로 찌게 된다. 저열량식사를 계속한다고 해도 체중은 대개 다시 증가하여 4년이 지나면 원래 체중으로 거의 돌아오게 된다. 요요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체중 감량 후 줄어든 체중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체중을 10% 이상 감량한 후 최소 1년간 감량한 체중상태를 유지했을 때성공적으로 감량 체중을 유지했다고 말한다. 외국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체중 감량에 성공한 사람들 중 이러한 기준을 만족하는 사람은 대개 20% 미만이었다. 결국 원래 체중의 10% 이상을 뺐다고 하더라도 1년이 지나면 이중 8-9명이 원래 체중에 가깝게 돌아간다는 말이다.
다이어트를 했을 때 체중이 빠지는 속도가 느려지고, 체중이 빠졌다가도 결국 원래 체중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우리 몸 안에 체중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조절 시스템이 존재하며, 체중이 변화 했을 때 이러한 조절 시스템의 스위치가 켜지기 때문이다.

체중 감량 이후 5년 동안의 체중 변화 * 출처: Wadden T. A., 1993

(VLCD : 초저열량식사, BMOD: 행동수정요법, Combined: 초저열량식사+행동수정요법)

왜 체중이 더 줄지 않을까?


우리 몸은 기존의 체중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실제로 체중이 변화할 만한 장기적인 원인이 없는 이상 성인에서 체중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며칠간 감기 몸살이나 장염을 앓고 체중이 빠졌더라도 병이 나은 다음 1-2주 이내로 빠진 체중이 회복되며, 시험 기간에 스트레스로 밥을 잘 못 먹어 체중이 빠졌더라도 시험이 끝나면 금새 원래 체중으로 돌아간다. 매일매일 먹는 음식과 양이 다르고 활동량도 같을 수 없을 터인데 말이다. 일반적으로 성인은 20년간 10% 가량의 체중이 증가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일반적으로 근육량이 조금씩 줄어들고 지방이 늘어나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매우 적은 변화이다.

-       에너지 섭취와 소비의 균형

일정한 체중은 에너지 섭취량과 소비량 사이의 균형의 산물이다. 전체 에너지 소비량 중 60-70%는 숨을 쉬고, 혈액을 순환시키고, 위장을 움직이고, 체온을 유지하는 등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쓰이며, 의도적인 활동에 의한 소비는 30%에 불과하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늘릴 수 있는 에너지 소비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쓰이는 에너지 소비량을 휴식기 에너지 소비량(Resting Energy Expenditure, REE)이라 부르는데, 이는 흔히 말하는 기초대사량과 비슷한 개념이다. 에너지 소비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휴식기 에너지 소비량(REE)의 경우 작은 변화도 에너지 균형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적게 먹어서, 즉 에너지 섭취를 줄여서 살을 뺐을 때 생기는 문제는 체중이 줄어듦에 따라 이에 대한 보상작용으로 휴식기 에너지 소비량(REE)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이어트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몸은 이러한 변화를 비상 사태로 받아들이고 에너지를 적게 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소비량의 감소로 에너지 대사는 균형을 맞추고 이에 따라 체중은 감소를 멈춘다. 다시 식사를 줄이면 체중 역시 줄어들 수 있지만, 곧 에너지 소비량이 다시 감소해 에너지 대사의 균형을 맞추므로 체중은 얼마간 감소하다 또 다시 정지한다. 체중을 뺄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체중 감량 속도가 줄어드는 일차적인 원인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하면 체중을 뺄 때 동시에 에너지 소비량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휴식기 에너지 소비량(REE)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제지방량(fat-free mass)이다. 제지방량이란 우리 몸에서 지방을 제외한 부분인데, 근육이나 뼈가 여기에 해당한다. 뼈는 의도적으로 줄이거나 늘릴 수 없기 때문에 근육량 변화가 휴식기 에너지 소비량(REE) 변화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 똑같이 10kg를 빼더라도 근육량을 유지해준다면 에너지 소비 감소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체중 감량을 할 때 적절한 근력 운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호르몬에 의한 항상성 유지

최근의 많은 연구 결과들을 통해 여러 종류의 호르몬이 에너지 대사와 체중을 조절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렙틴(leptin)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지방세포에서 분비되며 뇌에서 일종의 식욕억제호르몬으로 작용한다. 체중이 증가해 지방세포가 늘면 렙틴 분비도 늘어, 배고픔 신호를 감소시켜 음식 섭취가 줄고 에너지 소비가 늘어나도록 한다. 렙틴의 이러한 작용은 체중과 에너지 균형을 유지하는데 필요하지만, 결국 체중 감량 후 줄어든 체중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체중 감량을 하게 되면 그에 대한 보상 작용으로 렙틴 분비가 줄면서 기초대사량이 떨어지고 배고픔 신호가 강해진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본능적 반응을 잘 극복해야 요요현상을 막을 수 있는데, 방법은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는 것이다. 이전에 먹던 양을 절반 정도로 줄이고, 중간에 배가 고프면 간단한 간식을 먹어 하루 5-6끼를 먹는다. 이렇게 하면 우리 몸은 위기감을 덜 느끼고, 기초대사량 역시 떨어지는 폭이 작아진다. 동시에 빠르게 걷기와 같은 적절한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하면 렙틴의 작용을 개선시켜 요요현상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

감량 체중 유지를 위한 생활 습관


어떻게 하면 요요현상 없이, 빠진 체중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까? 앞에서 본 우리 몸의 체중 유지 기전을 잘 이해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어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체중 감량이라는 과제가 장기전을 필요로 한다면, 평소 어떠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느냐가 그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감량한 체중을 성공적으로 유지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활습관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러한 습관을 내 것으로 만든다면 요요현상 없이 체중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l  열량과 지방이 적은 식사를 한다.
칼로리를 적게 섭취하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습관이지만 과도한 칼로리 제한은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저지방 식사를 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l  자주, 나누어, 천천히 먹는다.
배고플 때 먹고 포만감을 느끼면 그만 먹는다. 우리 몸이 이러한 변화에 익숙해지도록 한다. 천천히 먹으면 많은 양을 먹기 전에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l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공복 시간이 길어지면 호르몬 분비에 변화가 생겨 단기적인 비상사태와 같은 상황이 된다. 배고픔 신호가 강해지고 에너지 소비는 줄어들어, 이후의 식사로 인해 체중이 늘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l  일관된 식습관을 유지한다.
주중에는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주말 내내 과식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일주일에 한끼 정도는 먹고 싶은 근사한 음식을 먹는 것은 다이어트로 인한 스트레스를 푸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l  매일 30분 이상 운동한다. 운동을 할 수 없다 해도 가능한 한 많이 움직여 신체활동량을 늘린다.
장기적으로 일상 생활에서 신체활동량을 늘림으로써 칼로리를 소비하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가까운 거리는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또한 기초대사량을 유지하려면 유산소운동 이외에 근력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l  체중을 정기적으로 측정한다.
스스로의 체중에 관심이 많을수록 빠진 체중을 잘 유지한다. , 강박적으로 매일매일의 체중계 수치에 얽매여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금물.


감량된 체중을 성공적으로 유지하려면


우리 몸은 변화된 환경에서 스스로 안정적인 체중 상태를 유지하려는 생체항상성(homeostasis)을 지니고 있다. 체중 감량 후 발생하는 생리적인 변화 역시 대부분 기존의 안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우리 몸의 적응 과정이며, 이러한 면에서 체중을 감량하는 것보다 감량된 체중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임은 당연하다. 감량한 체중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량한 상태에 맞춘 새로운 생체항상성이 생길 때까지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비만 바로알기(보건복지가족부)' 집필 원고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 (Wherever I wind up)




어렸을 적엔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가 참 많았다. 이상무 화백의 만화에서 주인공 독고탁은 뱀처럼 에스자로 휘어 들어가는 드라이브 볼이란 마구를 던지는데, 그 만화를 읽던 당시에는 자고 일어나면 내일이라도 당장 이런 공을 던지는 투수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물리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공이지만 그때는 드라이브 볼을 던지겠다고 독고탁과 같은 폼으로 쓰러지며 테니스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곤 했다. 이제 그런 볼은 실제 경기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현재도 변화가 심한 공을 일컬어 마구(魔球)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실제 구종 중 마구에 가까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너클볼이 될 것이다.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배트에 맞은 공이 쭉 뻗어나갈 때의 청량감,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호수비가 주는 카타르시스, 역전 홈런의 짜릿함... 야구가 주는 매력은 다양하지만, 95마일(시속 152.9km)이 넘는 공을 포수 미트에 꽂아대며 타자를 윽박지르는 투수야말로 그중 제일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느리게 춤을 추는 너클볼은 애초부터 이런 호쾌한 속도의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공이다. 이 책은 메이저리그에서 그저 그런 선수 생활을 하다 30세가 넘어 너클볼 투수로 변신을 하고, 마침내 최고의 영예인 사이영상까지 받게 된 한 투수의 이야기이다. 그의 인생은 변화무쌍한 너클볼처럼 굴곡이 심했고 옛날 야구 만화의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했다.

# 2013년 4월 2일 6.0이닝 4실점 패전: 2012년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새로 계약한 팀에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개막전에 등판한 그의 첫 경기 성적 

R.A. 디키의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이혼을 했고, 양육권을 가졌던 어머니는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시작하는 가정이라면 아이의 인생은 여간해서 잘 풀리기 어려운 법이지만, 고교 시절 야구 팀의 주전이 된 이후 그의 삶은 야구 선수라는 확고한 정체성 아래 비교적 순탄했다. 야구 선수로서 그의 재능은 뛰어난 편이어서 대학 진학 이후에는 미국 대표 선수로 애틀랜타 올림픽에까지 출전하는 영예를 얻게 되며, 이후 1996년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에 1순위로 드래프트 된다. 하지만 신체 검사 과정에서 우측 팔꿈치 측부인대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애초의 81만 달러가 아닌 7만 5천 달러에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 2013년 4월 18일 6.0이닝 7탈삼진 2안타 무실점 (2승) / 5월 4일 6.0이닝 3피홈런 7실점 (5패)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하면서 고교 친구의 여동생이자 첫사랑과 결혼을 한다. 착실히 마이너리그 경력을 쌓던 중 다섯 시즌만에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지만 18일 동안 네 경기, 12이닝을 던지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강등된다. 골프장의 악어가 사는 연못에 빠진 골프공을 몰래 수거해 팔고, 물리치료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야구 외 일을 병행하며 생계를 꾸리기도 한다.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30세가 되던 2005년까지 아홉 시즌 동안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거둔 성적은 15승 17패, 평균자책점 5.48이었다.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그곳에서 성공적인 성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수치이다. 

# 2013년 5월 14일 6.0이닝 10탈삼진 3실점 (3승) / 5월 30일 6.0이닝 11안타 6실점 (7패)

그저 그런 선수로 끝날 가능성이 많았던 그의 선수 생활에서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은, 코치진의 권유에 따라 너클볼 투수로 변신을 택했을 때였다. 고된 연습 끝에 너클볼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2006년 드디어 메이저리그 선발진에 합류하지만 첫 경기에서 홈런 여섯 방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고 곧바로 마이너리그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숨겨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이로 인해 별거를 하는 등 가정과 일 모두에서 힘든 시간이 계속된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미주리 강을 수영으로 건너는 충동적인 도전을 하며 익사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 2013년 6월 10일 5.0이닝 10안타 7실점 (8패) / 6월 26일 9이닝 2안타 무실점 완봉 (7승)

생사를 넘나든 경험 이후 그의 투구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지만 팀에서 그의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한국 프로야구 팀으로부터의 계약 제의를 고민 끝에 뿌리치고 난 이후에도 두 개의 팀을 더 거쳐 2010년에 와서야 뉴욕 메츠에 정착하지만 기쁨도 잠시, 35세 노장 투수는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먼저 마이너리그로 강등된다. 실망 끝에 야구 선수가 아닌 영어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기도 하지만, 1안타 완봉승을 거둔 이후 다시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는다. 이후 두 시즌 동안 선발로서 안정적인 성적을 올리고, 마침내 2012년에는 20승 6패 평균자책점 2.73의 성적으로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한다. 

투수도 자신이 던진 공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이 너클볼이다. 그는 너클볼 투수가 되길 결심한 뒤 겪은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공을 천천히 던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시속 140킬로미터 중반을 넘는 공 수천 개를 평생 던져온 내가 이제 거의 시속 100킬로미터짜리 공을 던지고 있다. 마치 스포츠카를 팔고 세발자전거를 산 느낌이다." (240p)

"똑같은 동작으로 똑같은 지점에서 공을 놓아도 각각의 너클볼은 모두 다르게 날아간다... 너클볼 투수는 보이는 힘과 보이지 않는 힘이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너클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투수는 자신도 예측하지 못하는 공에 당황하고 만다."(257p)

완봉승을 거둔 바로 다음 게임에서 홈런을 서너개씩 맞고 패전 투수가 되는 경험을 흔히 해야하는 너클볼 투수의 숙명은 마치 굴곡진 우리네 인생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너클볼 투수끼리의 유대감은 팀 동료 이상이라고 한다. 너클볼로 통산 200승을 거둔 팀 웨이크필드의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필 니크로, 조 니크로, 찰리 허프, 톰 캔디오티 등 선배 너클볼 투수에게 감사를 전하며 R.A. 디키를 너클볼의 명맥을 이어갈 선수로 언급한다. 

다큐멘터리 'Knuckleball!' 시사회에서의 전, 현직 너클볼 투수들. 
Charlie Hough, R.A. Dickey, Tim Wakefield, Jim Bouton
(Photo by Craig Barritt/Getty Images)

좋지 않은 가정 환경에서 자란, 팔꿈치 인대가 없는 야구 선수가 수많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과 종교, 그리고 인생의 갈림길마다 지침이 되어 준 멘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야구 선수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해준 프레드 포핸드 감독, 자신의 어릴적 상처와 아내와의 불화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상담사 스티븐 제임스, 그리고 선배 너클볼 투수 찰리 허프와 필 니크로가 그들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373승을 거뒀으며 명예의 전당 첫 멤버로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투수 크리스티 매튜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You can learn a little from victory. You can learn everything from defeat. (승리를 통해서는 조금 배울 수 있지만, 패배로부터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빛나는 승리보다 패배가 훨씬 많았고, 마이너리그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이 명언에 적합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간결한 문장과 흥미로운 구성은 공동 집필자인 웨인 코피의 도움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이 던지는 공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이 책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회고하는 기간의 절반 이상이 흑역사에 가깝지만 그는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삶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한 사람에게 감동을 느낄 것이고, 야구를 모르는 독자라도 R.A. 디키의 팬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그의 인생을 엿보고 난 지금,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 그가 최선을 다할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의 메이저리그 통산 승수는 올해 8월까지 71승으로, 필 니크로의 318승은 물론 팀 웨이크필드의 200승을 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야구 팬으로서, 유일하게 남은 너클볼 투수인 그의 투구를 오랫동안 보고 싶다. R.A. 디키는 올 시즌 8월 마지막 경기에서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6.1이닝 2실점으로 10승째를 거둬 2년 연속 10승 투수가 되는 소중한 기록을 세웠다. 이번 시즌 그의 성적은 현재까지 10승 12패로 여전히 승보다는 패가 더 많다. 

2013년 4월 1일 월요일

아이의 배앓이

주말 내내 아들이 아프다.

금요일에 어린이집에서 구토를 하더니 열이 오르락내리락해서 약을 먹였다. 장염이 아닐까. 병치레를 안하는 편이고 감기를 앓더라도 하루이틀 정도면 나아지곤 했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헌데 이번엔 쉬 나아지질 않는다. 주말동안 배가 아파 밥을 거의 먹지 못했고 어제 밤에도 물을 마시고 구토를 했다. 아침에 퀭한 눈을 깜빡이면서 배가 아프다고 울먹거리는 걸 두고 출근을 하는데 발걸음이 무겁다.

"엄마 아빠는 안아프게 해줄 수 있는데..." 

금요일에 아이가 도우미 아주머니께 했던 말이란다. 이전부터 가끔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를 문질러주면서 예전 어머니가 해주시던대로 '아빠 손은 약손'이라 나지막히 읊조리곤 했다. 감기든 장염이든 약을 먹이면 이내 좋아졌고 오래 앓진 않았기때문에 아이는 아픔이란 엄마 아빠가 옆에 있으면 금새 나아지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주말엔 엄마 아빠가 줄곧 함께 있었음에도 사흘 밤이 지나도록 낫지 않았다. 약을 먹이고 뜨거운 물을 부은 주머니를 배에 대어주며 이제 곧 나아질거야, 라고 이야기했을 때, 여느 때처럼 편안한 표정을 짓지 않았던 아이의 눈엔 언뜻 불안한 기색도 비쳤던 것 같다. 엄마 아빠가 옆에 있는데도 아픔이 계속될지 모른다는 느낌. 세상은 불확실한 것이고 엄마 아빠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제 몸을 통해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단치 않은 병이고 또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만, 아이에게 받아오던 무조건적인 신뢰가 무뎌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내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문제는 점점 더 많아지겠지. 슈퍼맨처럼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로 오래도록 남아있고픈 것은 애초에 유효기간이 정해진 바램일 뿐일 것이나, 갑작스레 그 유효기간을 확인하게 되는 오늘같은 날엔 조금은 서글퍼진다.

2013년 2월 6일 수요일

WHO의 소금 섭취에 대한 새로운 지침

WHO에서 나트륨과 칼륨 섭취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발표했습니다.

http://www.who.int/mediacentre/news/notes/2013/salt_potassium_20130131/en/index.html

성인은 하루 sodium 2g (salt로 5g) 미만, potassium 3.5g 이상 섭취해야한다는 내용.

sodium의 경우 이전 지침과 큰 변화는 없지만, 소아에서 에너지 섭취를 고려해 성인과 동일한 수준으로 제한해야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고, potassium에 대한 지침은 이번에 새로 추가되었네요.

기사에서 sodium과 potassium이 많은 음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Sodium- rich foods: bread (approximately 250 mg/100 g), processed meats like bacon (approximately 1,500 mg/100 g), snack foods such as pretzels, cheese puffs and popcorn (approximately 1,500 mg/100 g), as well as in condiments such as soy sauce (approximately 7,000 mg/100 g), and bouillon or stock cubes (approximately 20,000 mg/100 g).

Potassium-rich foods: beans and peas (approximately 1,300 mg of potassium per 100 g), nuts (approximately 600 mg/100 g), vegetables such as spinach, cabbage and parsley (approximately 550 mg/100 g) and fruits such as bananas, papayas and dates (approximately 300 mg/100 g)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나트륨의 주된 급원식품은 라면, 김치, 찌개, 젓갈 등이고 신라면 1개에는 sodium 1930mg, 나트륨을 줄였다는 신라면블랙의 경우 1790mg 들어있습니다.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건강식에 대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요?”
“조심해야 할 음식이 있는지요?”

진료실에서 환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는 일반인들도 그만큼 건강에 있어 먹는 문제가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질병의 관리, 치료와 건강 증진과 관련해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현대인은 풍요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영양 불균형, 과다한 스트레스, 운동 부족 등으로 인해 건강에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질병의 양상 또한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 퇴행성 질환 위주로 바뀌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영양 부족보다는 영양 과잉, 영양 불균형이 더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만성 질환이 음식과 깊은 관련성이 있음이 밝혀지고 있고, 질환의 발생과 관리에 있어 영양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맞는 영양 처방으로 적절한 식단을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은 건강과 관련된 정보를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건강 정보가 부족했던 과거에는 병원을 찾아가야만 믿을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TV, 라디오, 각종 서적, 잡지, 광고, 인터넷 등을 통해 수없이 많은 정보들이 쏟아집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수많은 방법들을 따라하기에도 벅찬 현실입니다. 대형 서점에서 책장 가득 꽂힌 수많은 영양과 음식 관련 서적을 봐도, 정말 내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을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정보를 취사 선택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근거가 확실한 권고사항부터 근거가 전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정보가 난무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경우 어떤 정보가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니는 병원의 의사선생님이나 영양사, 건강관련 전문가에게 문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문가에게 문의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접한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 믿을만한 전문가인지, 그리고 정보의 근거가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인지 등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좋습니다.

질병이나 증상을 단숨에 해결해주는 비법과 같은 음식은 없습니다. 매스컴에 소개되는 단편적인 정보들은 그 속성상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어떤 음식이 어느 병에 좋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대개 근거가 부족한 통념이거나 일부 연구를 확대 해석한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음식도 과하게 먹었을 때는 해가 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음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음식보다는 다양한 음식으로 자신의 상태에 맞게 조화로운 식단을 짜는 것이 좋습니다.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건강검진의 원칙


오승원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들어가며 



환경 위생의 개선과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만성퇴행성질환이 증가하면서 이전의 치료 중심의 의학에서 예방, 건강증진 중심의 의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단순한 수명의 연장보다 삶의 질이 중요시되면서 질병 예방과 건강증진뿐 아니라 이후의 삶의 질을 좌우할 수 있는 질병의 조기 발견, 조기 치료 여부가 관심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다.


이러한 면에서 증상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질병을 조기에 찾는 것이 목표인 검진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과거의 의료인들은 질병이 발생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행위를 해왔으나, 질병이 증상을 나타나기 전에 전임상단계(preclinical stage)에서 질병을 찾아내는 선별검사(screening test)의 발달과 더불어 검진의 개념 역시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1980년대 급격한 경제 성장과 더불어 ‘정기 검진’ 또는 ‘종합 검진’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검진(screening)은 무증상 집단을 대상으로 특정 질병으로 인한 부담과 사망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그 질병을 조기 발견하기 위해 시행하는 선별 검사를 뜻하며, 건강 진단(general medical examination, general health examination, general health check)과는 차이가 있는 개념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개념이 혼재되어 쓰인다. 우리나라에서 종합 검진은 특정 질병에 대한 조기 발견 이외에도 수검자의 건강 상태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뜻하는 건강 진단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최근 질병의 예방 및 조기발견을 위한 조기검진의 필요성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검진사업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가 검진이 1980년에 시작되었으니 검진의 역사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정기 검진을 받지 않는 것이 건강을 소홀히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검진이 활성화되어 있으며 민간 검진 시장도 점점 커져가는 추세이다. 


국내 건강검진 현황



국가 검진의 경우, 1980년 의료보험관리공단 피보험자(공무원 및 교직원)에 대한 검진이 시작 된 이후 보험재원 중 질병예방사업에 투입 가능한 예산범위 내에서 검진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 개선하여 실시해 왔다. 현재는 생애주기에 따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1-2년 간격의 검진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으며, 성인의 경우 일반건강검진, 5대암검진, 그리고 16세/40세/66세 특정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생애전환기 건강진단 등이 시행되고 있다.

출처: 2012년 건강검진사업 안내. 보건복지부


일반건강검진의 1차 검진에서 시행하는 검사 항목과 우리나라 국가 암검진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민간 검진 영역에서는 대개 이보다 다양한 검사 항목을 포함한 패키지 검진을 상품화시켜 제공하고 있다. 국내 민간 검진기관 수는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왔으며 검사 항목의 변화, 환자 교육 자료의 다양화, 사후 관리의 강화를 추구하며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발 빠르게 변화해왔다. 또한 검사 항목 결정과 검사 결과 해석에 수검자의 개인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고 개인적 특성을 반영해 만족도를 향상시켜 왔으며, CRM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전, 사후 관리를 강화해왔다. 하지만 다양한 검사를 시행하면서 발생하는 위양성, 검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adverse event, 검사 항목의 근거 부족, 비용의 상승 등이 민간 검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민간 검진 시장이 커지면서 의료의 상업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검진의 조건과 원칙



특정 질병에 대한 검진의 효용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으며 많은 연구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일찍이 WHO에서는 검진(screening)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Principles of early disease detection (WHO, 1968)
1.     중요한 건강 문제를 다룰 것 (The condition sought should be an important health problem.)
2.     용인된 치료가 있는 질병일 것 (There should be an accepted treatment for patients with recognized disease.)
3.     진단과 치료를 위한 장비 이용이 가능한 질병일 것 (Facilities for diagnosis and treatment should be available.)
4.     잠복기나 초기 증상 단계가 있어 검진으로 발견 가능한 질병일 것 (There should be a recognizable latent or early symptomatic stage. )
5.     적절한 진단 방법이 있을 것 (There should be a suitable test or examination.)
6.     일반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단 방법일 것 (The test should be acceptable to the population.)
7.     질병의 발생과 진행이 잘 밝혀진 질병일 것 (The natural history of the condition, including development from latent to declared disease, should be adequately understood.)
8.     검진 결과에 따른 추가 검사와 환자의 선택에 대해 용인된 방침이 있는 질병일 것 (There should be an agreed policy on whom to treat as patients.)
9.     비용 효과가 적절할 것 (The cost of case-finding (including diagnosis and treatment of patients diagnosed) should be economically balanced in relation to possible expenditure on medical care as a whole.)
10.   검진을 통한 질병 발견이 반복적으로 꾸준히 유지될 수 있을 것 (Case-finding should be a continuing process and not a “once and for all” project.)





















이러한 원칙에 맞는 검진이라면 대개 효용 가치가 있다 할 수 있으나 원칙을 만족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검진으로 인한 이득은 검진을 통해 중한 합병증의 발생과 사망이 줄었을 때 생기므로 생존율을 높이고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필요한데, 이러한 근거가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위음성과 위양성

좋은 검진이란 한번에 다양한 질병에 대해 정확하게 검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가지 검사법으로 진단할 수 있는 질병은 한계가 있기에 이런 조건을 만족하려면 결국 많은 검사가 포함되어 비싸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검진, 고가의 검진이 좋은 검진이라는 인식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검사이든 100% 정확하지는 않으며, 위음성과 위양성의 가능성이 있다. 위음성이란 질병이 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일반인들은 위음성을 더 문제시하겠지만 반대의 경우인 위양성의 경우에도 검사 결과에 대한 불안감이나 불필요한 추가 검사로 인한 시간적, 금전적 비용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많다. 다른 의료행위와는 달리, 검진으로 인한 특수한 해(harm)는 주로 여기서 발생한다. 위양성에는 목표로 하는 질병에 대한 결과뿐 아니라 관리나 치료가 불필요하고 큰 의미 없는 유소견도 포함되는데,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경우 이 유소견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불안하게 생각하거나 추후에 불필요한 추적 검사를 받게 된다. 문제는 검사 항목이 많아질 수록 전체 결과에 위양성 결과가 포함될 확률 또한 높아진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 전립선암, 폐암, 대장암, 난소암의 선별검사 효용을 확인하기 위해 대규모로 진행된 PLCO(Prostate, Lung, Colorectal, and Ovarian) cancer screening trial에 참여했던 대상자들에 대한 연구 결과는 이와 같은 현상을 잘 보여준다(Croswell JM et al., 2009). 매년 흉부X선촬영, 난소암표지자검사/질초음파검사(여성), 전립선암표지자검사/항문수지검사(남성)을 시행하고 3-5년 간격으로 S결장내시경을 시행하며 경과를 분석했을 때, 3년에 걸쳐 14개의 검사를 받는 동안 1개 이상의 위양성 결과가 나올 확률은 남성의 경우 60.4%, 여성의 경우 48.8%에 달했다. 이러한 위양성 소견은 그림과 같이 검사 항목이 많아질수록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림. 암 검사 수와 위양성 누적 발생율
 출처: Croswell JM et al., 2009


또한 이러한 결과로 인해 침습적인 추가 검사를 받는 비율은 남성의 경우 28.5%, 여성의 경우 22.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러한 불필요한 침습적인 추가 검사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조직검사나 내시경 등의 검사로 인해 합병증이 발생하는 경우 더 큰 문제가 된다기관지 내시경으로 인한 출혈이나 대장내시경으로 인한 천공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2.     검진과 관련된 비뚤림(bias)과 과진단 (overdiagnosis)

검진으로 질병을 진단했더라도 진행된 경우여서 적절한 치료 방법이 없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진행된 경우가 아니더라도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이후의 질병 경과나 예후를 바꾸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긴 마찬가지이다오히려 불필요한 검사나 치료를 받게 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하지만 검진을 통해 질병의 예후가 달라질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그것은 검진이 불러 일으키는 비뚤림(bias), 즉 착시 현상 때문인데이러한 착시 현상은 검진의 효과가 실제로는 없는데도 마치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예가 lead time bias실제 검진이 효과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단지 진단의 시기를 앞당김으로 인해 진단을 한 후 사망까지의 기간이 검진을 받지 않은 대상자에 비해 더 길어지고이로 인해 검진을 받은 사람들의 생존율이 실제로는 검진 받지 않은 군에 비해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높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예를 들어 증상이 없을 때 검진으로 60세에 암을 발견한 환자가 각종 치료를 받으며 평균 10년을 살고같은 사람이 증상이 생긴 뒤에 진료를 받아 67세에 암을 발견한 뒤 3년을 산다고 가정하자진단 후 5년생존율만 비교하면 전자는 0%, 후자는 100%로 큰 차이가 있고 검진으로 암을 발견한 환자가 7년 더 오래 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착시현상일 뿐이다다른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검진 때문에 암 환자로 살아가는 기간만 7년 더 늘어난 셈이 된다효과적인 검진이라면 그림과 같이 단지 질병 발견만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생존 기간을 연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림. Lead-time bias

또 다른 예는 length bias인데, 검진으로 발견한 암과, 증상이 생겨서 진단을 받는 암이 같은 암이 아니라, ‘생물학적 성질이 다른 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폐암이라 할지라도 빠르게 진행하는 암종과 서서히 진행하는 암종이 있을 수 있으며, 서서히 자라는 암은 증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검진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서서히 자라는 암의 경우 증상이 생긴 이후에 발견해도 경과가 좋을 것이고, 검진을 통해 이러한 종류의 암만 발견한다면 검진의 효과가 실제보다 과장되어 보일 수 있다.
아래 그림에 생물학적 성질이 다른 A, B, C, D 네 종류의 암의 진행 양상을 표시하였다. A는 암세포가 있지만 검진으로 진단되지 않으며, 진행이 매우 느려 증상이나 징후를 일으키지 않고 사망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암이다. B는 검사를 통해 진단될 수 있으나 원발 장기에 국한되며 마찬가지로 증상이나 사망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C는 전이가 가능하며, 사망에도 이를 수 있으나 적절한 시기의 진단으로 치료가 가능하며, D는 진행과 전이가 매우 빨라 일반적인 검진 간격으로 진단할 수 없고 진단하더라도 대개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 네 종류의 암종 중 검진으로 인한 직접적인 이익이 있는 경우는 C 뿐이다. 서서히 진행하는 암종인 B의 경우 검진으로 진단은 할 수 있으나 놔두어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검진으로 인한 이득은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오히려 암 진단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과 불필요한 수술, 치료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림암의 생물학적 성질과 성장속도에 따른 검진 진단능력

출처: Esserman L et al., 2009

Length bias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과진단(overdiagnosis)이다. 서서히 자라는 암의 경우 검진으로 미리 진단하지 않았다면 환자의 일생동안 해를 입히지 않고 진단으로 인해 치료를 받을 필요도 없었을 수 있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검진으로 발견된 유방암의 15~25%(Kalager M et al. 2012)와 전립선암의 20~70%(Draisma G et al. 2009)가 과진단된 암일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도 갑상선암, 폐암 등이 과진단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암에 해당한다.

그림. Overdiagnosis bias



검진을 받은 사람들의 생존율(암이 진단된 후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향상이 그 검진이 실제 수명을 늘렸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는데, 종종 검진의 효과를 이야기할 때 이 두 개념은 혼동해 쓰이곤 한다. 암 진단 뒤 생존기간은 비뚤림으로 인한 착시현상일 수 있으며, 결국 검진을 받은 군에서 진단 후 5년 생존율이 높아졌다는 것만으로 그 검진이 궁극적인 효과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검진과 관련된 이런 착시 현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좀더 정교한 연구방법이 필요하며, 진단 후 생존율이 아니라 해당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을 비교해야 한다. 비슷한 환경과 조건에서 검진을 받은 군과 그렇지 않은 군의 사망률을 직접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국립암연구소(NCT)에서 주도한 National Lung Screening Trial(NLST)의 경우 무작위대조연구방법으로 저선량 흉부CT 군과 기존의 흉부 X선촬영 군을 비교해 누적 흡연량이 많은 고위험군에서 저선량 흉부CT가 폐암으로 인한 사망을 20% 줄인다는 결과를 보고한 바 있으며 이러한 연구는 검진의 효과를 증명한 좋은 예이다.


검진의 이득


1.     질병에 대한 조기 발견과 사망 위험 감소

일반적으로 검진은 질병의 증상이 없을 때 적절한 검사를 시행하여 조기에 질병이환 여부를 밝혀내는 것을 말한다. 질병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질병이 진행된 상태에서 치료하는 것보다 사전에 예방하고 조기에 치료하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비용-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기 발견으로 얻을 수 있는 직접적인 이득은 질병으로 인한 합병증과 사망의 감소이다. 암의 경우 병기가 진행될수록 생존율은 떨어지기 마련인데, 우리나라 유방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최근 통계를 보아도 1, 2기에서 발견되었을 때는 5년 생존율이 90% 이상이지만 원격 전이가 있는 4기의 경우 30%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정기적인 검진이 질병의 조기 발견을 가능하게 하고, 질병의 조기 발견이 그로 인한 사망을 줄일 수 있다면 결국 잘 계획된 국가 검진 프로그램은 해당 질병으로 인한 국민 전체의 사망률을 줄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1993~2005년까지의 암 발생자 115만여 명을 대상으로 2006년까지 추적 조사한 결과, 국가암조기검진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99년 이후 전체 암에 대한 생존율이 증가되었다. 특히 암조기검진사업에 포함된 5대 암(··대장암·자궁경부·유방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은 2001-2005년과 1993-1995년을 비교할 때 10% 이상 증가하였다. 예후가 좋은 갑상샘암을 제외했을 때, 이러한 증가 폭은 암조기검진사업에 포함되지 않은 암의 생존율 증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큰 결과를 보였다.( 3)

. 국가암조기검진사업 대상 암종의 생존율 추이 (단위: %)
암종
발생년도
‘93-‘95
‘96-‘00
‘01-‘05
증감1)
국가암검진 암종2)
45.7
48.3
56.3
+10.6
국가암검진 이외 암종
(갑상샘암 제외)
31.4
34.2
39.5
+8.1
1) ‘93-’95년 대비 ‘01-’05년 생존율 증감,
2) 남자는 위, , 대장, 여자는 위, , 대장, 유방, 자궁경부암임
출처: 중앙암등록본부, 한국유방암학회

물론 이러한 생존율 증가의 원인이 오직 암검진사업에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국가암검진 암종이 1993년 이후 지속적으로 추가되었으며 국가암조기검진사업 이전에도 특정암 검진이 시행되는 등 암종마다 그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암조기검진사업에 포함된 암종의 치료 성과 자체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생존율 증가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검진의 활성화로 인해 이른 병기의 암과 느리게 진행하는 암의 발견이 주로 늘어나면서 생긴 착시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에서 예로 든 유방암 검진의 경우 외국에서는 사망률 감소 효과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미국에서는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유방암 사망률이 24% 감소했는데, 이러한 사망률 감소에 유방촬영술을 통한 검진이 28~65% 기여했다고 보고했다(Berry DA et al. 2005). 유방촬영술의 유방암 사망 감소 효과를 비교한 기존 연구 결과들을 통해 50세 이상 여성에서 유방암으로 인한 사망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며, 더 젊은 연령에서의 효과에 대해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개 40세 이상의 여성에서 1~2년마다 정기적으로 유방촬영술을 받도록 권유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National Lung Screening Trial(NLST)의 경우 고위험군에서 저선량 흉부CT가 폐암으로 인한 사망을 20% 줄였으며, 이를 근거로 미국암학회에서는 30갑년 이상의 흡연력이 있는 55~74세 성인에게 매년 저선량 흉부CT를 받도록 하는 새로운 폐암 검진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나라 검진 권고안의 경우 외국에서 행해진 임상 연구와 전문가의 합의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근거에 따라 개선되어 온 바 있지만, 효용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려면 현 검진 프로그램에 대해 향후 우리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2.     사후 관리와 건강 증진

전통적인 의미에서 검진의 목표는 질병이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1차 예방)가 아니고, 이미 발생한 질병을 조기 발견하여 조치함으로써 그 질병이 더 진전하는 것을 차단(2차 예방)하여 장애를 얻거나 사망할 확률을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만성질환의 경우 질병 발생에 여러 위험요인이 관여하고, 검진은 질병뿐 아니라 질병의 위험요인을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1차 예방에 있어서의 의의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검진을 통한 질병의 조기발견 못지 않게 검진에서 발견된 건강위험요인에 대한 사후 관리가 중요하다. 뇌졸중, 심혈관질환 등 중한 합병증의 위험요인으로 작용하는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의 질병에 대한 사후 관리와, 다양한 질병의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생활습관 개선을 위한 교육, 상담을 통해 건강증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검진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질병이나 위험요인을 발견하더라도 이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로 인한 위해나 손실을 예방하지 못할 것이다. 고혈압을 예로 들면, 2005년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 30세 이상의 고혈압 환자 중 스스로 고혈압이 있다고 알고 있는 인지율은 56.3%였으나, 전체 고혈압 환자 중 혈압이 140/90mmHg 미만으로 조절되는 비율은 그 절반 정도인 27.0%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에서 고혈압이 원인이 되는 뇌졸중의 유병률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정기 검진 이후의 상담과 사후 관리를 통해 고혈압을 보다 더 잘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다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아직 질병으로 인한 증상이 없는 사람에게 검진이 의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의사의 한마디는 환자의 행동을 바꾸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최소한 흡연자의 70%가 일 년에 한 번은 의사를 만나고, 나머지 30%의 흡연자는 의료보조원, 간호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약사, 기타 의료인을 만난다(CDC, 1993). 미국 정부는 흡연자 관리를 위한 “Treating tobacco use and dependence(2000)” 계획을 수립한 바 있는데, 환자의 금연 준비 상태에 맞춘 의사의 짧은 개입이 주가 되는 것으로, 특히 의사를 만난 흡연자 중에 의사로부터 금연해야 한다고 권고 받은 사람들은 금연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금연율이 높다는 것(Pederson et al., 1982)에 착안한 것이다.

3.     검진의 비용-편익

검진이 건강에 유익한 효과를 불러온다 하더라도 투입비용에 상응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엄청난 비용이 투입되는 검진 사업을 시행하는 이유는 직접적인 비용에도 불구하고 검진을 통해 질병의 중증도와 합병증을 줄임으로써 이후에 발생하는 사후 비용을 절감해 결과적으로 국민 의료비 전체를 일정부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검진에 대한 경제성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때 검진의 편익은 사망률 감소, 발병에 따른 장애율 감소, 입원율 감소 등으로, 검진의 비용은 검사비, 검사에 따른 시간소용비용, 사후 관리를 위한 진료기관 방문비용 등으로 추정된다.
Collen(1984) Kaiser Foundation Health Program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매년 실시한 검진에 대한 경제성을 평가한 결과, 검진을 받은 경우 남자 1인당 11년간 2,152달러의 진료비가 절감된다고 보고한 바 있는데, 이후 외국에서는 검진의 경제성 평가와 관련된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다.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관련 연구가 부족한 편이나, 유승흠 등(1989)1986년 공단 검진을 받은 수검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용-효과분석을 통해, 검진의 비용과 편익비를 최소 4.08배부터 최대 10.49배로 추정하여 검진으로 인한 편익이 비용보다 많다고 보고한 바 있다. 안윤옥(1995)의 연구에서는 순편익이 1,407억원~2,935억원, 비용대비편익이 7.5~16.6배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했다. 배성일 등(2005) 2002년 공단 검진자료를 이용한 고혈압 검진사업에 대한 경제성 분석 결과 186-312억의 비용-편익 차액이 있었다고 했으며, 이애경 등(2006)은 당뇨 검진의 비용-효과 분석에서 당뇨에 대한 검진으로 환자 1인당 평균 누적생존년수는 0.76, 질보정생존년수(QALY) 0.2297년 증가하고, 검진으로 인해 보험자 관점, 사회적 관점 모두에서 비용이 절감되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기존의 우리나라 검진사업은 어느 정도 비용-편익에 있어 성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며 연구들마다 방법과 결과에도 차이가 있다. 또한 검진프로그램 자체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부분 개선, 수정이 되어 왔으므로 향후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현 검진사업 전반에 대한 경제성 평가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검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우리나라는 국가 검진으로 40세 이상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일반건강검진, 조기암검진, 그리고 16/40/66세 특정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생애전환기 건강진단 등이 시행되고 있으며 민간 검진 영역에서는 대개 이보다 다양한 검사 항목을 포함한 패키지 검진을 상품화시켜 제공하고 있다. 건강검진이 활성화되면서 건강검진의 문제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려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1.     목표 질환과 검사 방법의 근거 부족

생애 전반에 걸쳐 다양한 질병이 발생할 수 있기에 일정 기간마다 병력 파악, 이학적, 진단적 검사를 시행하여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주요한 질병을 진단하는 정기 검진의 개념은 분명 매력적이다. 문제는 생애 주기마다 호발하는 질병이 다양하고, 질병의 특성 또한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질병을 목표로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목표 질환이 구체적이고 분명할수록 그에 따른 적절한 검사 방법을 선택하기 쉽고 검진의 효과를 판단하는 것도 용이해진다. 일반적으로 집단 내에서 유병률이 높고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질병을 목표로 하며, 검진을 통해 적절하고 용이하게 진단 할 수 있고 이후에 치료가 가능한 질환이어야 한다.
하지만 기존의 검진프로그램은 불분명한 목표 질환에 대해 획일적인 검사 항목과 검사 주기를 적용해왔다. 암검사의 경우 확실한 목표 질환이 있지만, 그 외의 검사 항목의 경우 목표 질환이 불분명하기에 검사 항목에 대해서도 그 효과를 체계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한계는 국가 검진 프로그램에서 주로 제기되어 왔는데, 국가 검진 프로그램에 포함된 일반건강검진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특이도에 비해 민감도가 떨어지고 특히 1차 검진에서 질환이 의심되는 경우에도 2차 검진 또는 이후의 진단과정에서 질병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양성예측도가 대체로 5% 이하로 매우 낮은 편으로 나타났다(지선하, 2005). 최근 국가 검진제도가 수정, 개선되는 과정에서 일반건강검진의 목표 질환이 심뇌혈관질환으로 구체화되고 검진 기준과 질 관리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검사항목들은 관련 질환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그 근거가 모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선진국의 경우 일찍이 근거가 부족한 획일적인 검진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어 왔으며 1976년 캐나다 질병예방 특별위원회(Canadian Task Force on Preventive Health Care: CTFPHC), 1984년 미국 질병예방 특별위원회(US preventive service task force: USPSTF) 등에서 정기검진 항목에 대해 특정 질병의 유병률과 사망률에 영향을 미치는 선별검사의 효과와 의학적 근거를 확인하려는 대규모 연구 및 평가가 시작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이들 전문가 집단은 새롭게 발표되는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검진이 가능한 질병들과 그 질병들에 대한 검사법에 대해 근거를 검토하고 권고안을 발표하고 있다.

그림. USPSTF의 권고안 도출 과정
AHRQ: Agency for Healthcare Research and Quality, EPC: Evidence-based Practice Center
출처: USPSTF procedure manual

검진의 효용성을 판단하기 위한 국내 연구가 부족한 실정에서는 일정부분 외국의 권고안을 참고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경우 외국의 근거를 우리 국민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며, 국내 실정에 맞는 권고안 마련이 필수적이다.
민간 검진의 경우 국가 검진에 비해 목표 질환과 검사 항목이 폭넓고 다양하지만, 국내에서 유병률이 낮거나 중요성이 떨어지는 질환이나 screening 검사로서의 근거가 부족한 검사가 포함되는 경우도 흔하다. 정기적인 검진 프로그램에 이러한 다양한 목표 질환과 검사가 포함되는 것이 적절한가의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검사 항목이 많아질수록 위양성이 늘어나고 그로 인한 불안과 불필요한 후속 검사 역시 늘어난다. 이로 인한 문제점을 줄이기 위해서는 검진 전후 충분한 의료진의 개입이 필요하다. 사전에 대상자의 특성과 건강 위험요인을 고려해 검진 항목을 결정하고, 검진의 의미, 검진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benefit)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해(harm)에 대해서도 정보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


2.     검진 기관에 대한 질 관리 문제

검진에서 질 관리가 중요한 이유는 증상이 없는 건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므로 선별검사로 이득을 취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수검자들에게 위해(harm)를 최소화해야 하는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 영국, 호주 등 선진국에서는 국가가 인가한 기관의 인증시스템과 질 보장을 위한 모니터링 시스템을 활용해 검진 기관에 대한 질 관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검진에 대한 종합적인 질 평가 및 관리는 없으며, 관련 학회의 정도 관리를 통해서 개별적, 자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어서 체계적인 질 관리가 어려운 상태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06년 시행한 조사 결과 검진기관의 영상의학장비 중 20.1%가 노후, 고장, 정비불량 등 부적절 장비였으며 이외에도 방사선사 촬영기술 미숙, 수검자 인적사항 미기재 등 품질 관리의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이애경 등, 2008).
민간 검진에 비해 국가 검진에 대한 신뢰도는 낮은 편인데, 국가 검진에 대한 수검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검진은 형식적이고 검진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어떤 검사든 위양성, 위음성의 가능성이 있지만, 검사법 자체의 한계가 아닌 일선 기관의 질 저하로 인해 검진 결과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체계적인 질 관리로 개선 가능한 부분이다.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검진 기관에 대한 평가 사업을 통해 질 관리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검진기관 수준에 맞추어 규제 강화를 하되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총체적이고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관리를 통해 검진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3.     검진 사후 관리 미흡

검진이 검진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건강증진이라는 목표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사후 관리를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 국가 검진의 경우 체계적인 사후 관리가 매우 미흡한 실정이며, 검진 이후 건강문고와 생활습관지침서를 제공하고 전화, 방문 상담 등을 제공하고 있지만 사후 관리율 역시 매우 낮은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후 관리는 보건소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선 담당 기관과 부서에서도 사후 관리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인력 부족과 전문성 부족 등의 한계가 지적되고 있다(박용문 등, 2006). 생애전환기 건강진단이 시작되면 검진 이후 1차 의료기관에서 생활습관상담을 받도록 한 것은 기존 국가 검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요한 변화였으며, 시행 초기에 드러난 절차상 번거로움 등의 문제점에 대해 향후 지속적인 개선과 보완이 필요하다. 또한 생활습관상담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 지속적인 관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상담의 연속성과 연계 가능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검진 이후 사후 관리는 검진 결과에 대한 의사의 상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결과에 대한 상담 과정이 질환 관리, 건강위험요인 관리로 연계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일반 수검자의 입장에서 검사의 정확성이나 질에 대해서 잘 알기는 어렵기 때문에, 검진에 대한 만족도와 결과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검진 결과에 대해 충분한 상담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 검진의 경우 결과통보서 발송 이외에 검진 결과에 대해 직접 의사의 상담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으며, 결과 상담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민간 검진기관의 경우 검진 결과에 대한 의사 상담을 제공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검사 자체에 비해 검진 결과 나타난 건강 위험요인에 대한 상담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지곤 한다.


맺음말


목표 질환을 보다 구체화하고, 그 질환에 적절한 검진 방법을 결정하는 과정에는 근거 중심의 접근과 위양성과 위음성, 과진단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대부분의 근거가 집단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개인의 차이를 고려한 접근 역시 필요하다. 가족력, 과거력, 건강 습관 등에 따라 질병 발생의 위험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개인의 특성과 건강 위험요인을 고려해 검진 프로그램을 결정했을 때 검진의 이득을 최대화하고 위해를 줄일 수 있다. 임상적으로 쓰이고 있는 심혈관질환, 유방암 등의 위험도를 예측하는 모델을 비롯한 평가 도구를 검진 프로그램 결정에 활용하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이외에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위험 요인들에 따른 다양한 질병 발생 가능성을 평가하는 도구가 개발될 필요가 있으며, 이와 관련해 질병 발생과 관련된 유전자 검사를 통해 검진 프로그램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아직까지는 그 근거 수준이 낮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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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4일 화요일

외할머니




당신은 1928년 남도의 어느 마을에서 유지의 첫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딸이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어려서 방문 밖으로 들리는 한자책 읽는 소리만을 듣고 전체를 기억할만큼 영특했다고 합니다. 나중 어른들 말씀으론 고등교육을 받았다면 뛰어난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요. 

머리가 좋아 천재로 소문이 났던 오빠는 인물도 훤칠해 많은 동네 처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그 시대에 태어난 죄인지 아님 너무 영리했기 때문인지 어느날 순사에게 잡혀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꽃다운 열일곱 나이에, 어려서부터 일본에서 고학한 건너 마을 남자를 소개받아 결혼을 했어요. 문밖으로 몰래 훔쳐본 남편감의 모습이 은근히 맘에 들었고, 남편이 될 청년은 일본에서 가져온 화장품과 노리개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두 해가 지나 첫 딸이,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 기다리던 첫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당시론 늦게 가진 편이라 정이 많은 남편은 뛸뜻이 기뻐했고, 아이들을 당신 무릎에 앉히다시피 해 키웠지요. 그랬기에 어린 첫째 아들이 무언가를 잘못 먹고 탈이 나 앓기 시작한지 며칠만에 죽었을 때 그 슬픔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스물셋 나이에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마을에서도 군인들 사이의 총질이 있었지만 가족들은 다행히 큰 탈 없이 무사히 종전을 맞았습니다. 그 시대의 여인네들이 그랬지만, 손재주가 뛰어나 남편의 양복을 직접 만들 정도였지요. 음식 솜씨도 좋은데다 손도 커서 명절엔 늘 주변에 음식을 나눠주곤 했었어요. 

첫째 아들을 잃은 뒤 몇 년이 지나 아들 셋, 딸 하나를 더 낳았고, 다행히 아이들은 건강하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성격을 닮아 반듯하게 자랐고, 하나같이 따뜻하고 성실했지요. 이제 부모로서 해야할 일을 다 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하고 평온하게 늙어가리라 생각했습니다. 군 제대를 앞둔 둘째 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군용차를 몰다 생긴 교통사고였습니다. 수술실 앞에서 몇 번을 까무라쳤을까. 뇌출혈을 비롯한 외상으로 몇차례 큰 수술을 받은 아들은 목숨은 건졌지만 네살 아이 지능으로 되돌아가버렸고, 이후로는 보호자가 없으면 길을 잃을까봐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문을 잠궈두어야하는 아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 속 큰 짐의 무게는 더해갔겠지요.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의 연금이 나와 생활에 도움이 되었지만, 쾌활하고 정많던 듬직한 아들을 영영 잃어버린 값이라 생각하면 때론 문득문득 숫자가 찍힌 통장을 찢어버리고픈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당신은 항상 따뜻한 어머니이자 할머니였지요. 

세상을 떠난 뒤 남게 될 둘째 아들에 대한 걱정을 부쩍 입밖에 내게 된 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기력이 쇠해 자주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퇴원해 집에 가면 굽은 허리로 늘상 하던 집안일을 억척스레 해낸 것도 남겨질 아들에 대한 걱정때문이었겠지요. 돌아가시기전 마지막 입원 이후엔 이전보다 더 자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와 동생을 끔찍히 돌보던 첫째 아들에게, 남은 동생을 잘 봐 달라고 자주 이야기하셨대요. 음식을 스스로 삼키지 못해 코에서 위로 연결되는 관을 통해 죽을 넣어야했고 눈을 떠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이후에도 꽤 오랜 기간 살아계셨던 건, 끝까지 이생에 대한 끈을 접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없었을 미약한 존재가, 이렇게 당신의 삶을 다시 생각하며 그래도 편안히 가시길 염치없이 기도합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만큼 많은 걸 받았지만 아무것도 돌려드리질 못했어요. 


2012.6.30.

2012년 12월 2일 일요일

기억


'응급실에 가야겠어요. 지환이가 혈변을 봤어요.'

아내의 문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새벽에 깬 아이는 다시 긴 잠을 자지 않고 울며 보챘다. 태어난지 두해가 되도록 큰 병치레는 커녕 심하게 보채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어딘가 불편한지 자지러지듯 울음을 터뜨리길 몇 차례, 설사를 하길래 장염이구나 싶었다. 아내가 변 색깔이 좀 이상하다고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이때문에 평소보다 출근 준비가 늦어 마음이 조급해진 아침이었다. 아이를 봐주는 아주머님이 오시자 동네 소아과에 아이를 데리고 가보도록 부탁하고 집을 나섰다. 아내의 문자를 받은건 사람들 사이에 꽉 끼어 한발짝 옆으로 내디디기도 힘든 출근길 2호선 지하철 안에서였다.

아주머님의 연락을 받은 아내는 출근 도중에 집으로 다시 돌아간 상황이었다. 왜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았을까. 기저귀 색깔이 평소와 다르다고 했을 때 바로 확인했어야 했다. 휴대폰 액정에 선명하게 찍힌 '혈변'이란 단어는 후회와 함께 한동안 잊고있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십년쯤 전이었다. 나는 전공의 1년차였고, 그날은 첫 파견 병원에서 한달간의 소아과 근무를 마치는 마지막 주말이었다. 병동 당직 근무를 하며 응급실에 오는 소아 환자에 대한 호출을 받아야했다. 2차병원의 특성상 병동엔 폐렴이나 장염 등의 단기 입원 환자들이 많았고 몇번의 응급실 당직 근무 때에도 상태가 위중한 아이는 없었다. 비교적 평온한 한달이었다. 적어도 그날 응급실에서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봄날의 토요일 오후였고, 바깥의 날씨는 너무나 좋았다. 응급실은 여느때와 같이 환자들로 가득했지만, 날씨 때문인지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철제 침대에 누운 여자 아이는 초등학교 3-4학년 쯤 되어보였고 단발머리에 나들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채로 학교 야외 활동을 했는데 열이 나고 구토를 해서 데려왔단다. 창백한 얼굴에 약간 졸려하는 것 빼고는 진찰과 초기 응급 검사 결과 아이에게 큰 이상 소견은 없었다. 탈수가 심한 상태여서 해열제와 수액을 처방하고 입원을 시켰다.

오후 늦게 병실을 찾았을 때 아이의 상태엔 변화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병동 스테이션에 돌아와 입원 시 시행한 검사 결과를 확인했을 때였다. 신장 기능을 나타내는 수치가 정상을 크게 벗어나있었다. 윗년차 전공의에게 전화로 상태를 보고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병실로 돌아가는데, 병실에서 아이의 부모가 뛰쳐나왔다.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아이가 혈변을 본 것이었다. 침대 시트가 선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

"엑스레이 찍었는데 장중첩증 같대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엔 불안이 가득했다. 아이는 몇차례 더 보챘고, 그만큼 혈변을 더 보았다. 소아 환자를 안본지 오래 되었다지만 왜 미리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자책이 다시한번 밀려왔다. 항문을 통해 압력을 주어 장을 풀어주면 대부분 나아지지만, 막상 내 아이의 문제가 되었을 땐 그런 교과서적 지식과 통계는 의미가 없는 법이다. 도통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외래 진료를 보면서도, 머리 속에선 이미 좋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초기 치료가 잘 안되어 수술을 해야했던 몇몇 사례들이 떠올랐다.

십년 전 그날 병실에 있던 아이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의식은 응급실에서 확인했던 것보다 확실히 나빠져있었다. 더이상 이곳에서 관찰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모병원으로 전원하기로 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며 소견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아이는 온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짧은 파도처럼 지나간 몇 차례의 경련 이후 찾아온 심한 발작은 항경련제를 최대 용량까지 올려 주사를 해도 멈추질 않았다. 아이의 부모는 패닉 상태였고, 시시각각 급속도로 악화되는 상태를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당황스러움을 넘어 공포감에 떨고 있었다. 서둘러 아이를 앰블런스에 실어보내고 나니 바깥은 이미 어둠이 걷히고 동이 튼 뒤였다.

전원 이후 아이는 곧바로 모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며칠 뒤 확인된 병명은 전격성 바이러스 뇌염이었다. MRI로 본 뇌는 폭격을 맞고 난 폐허처럼 끔찍할 정도로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파견 병원에서 돌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한 상태였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매일 아침 중환자실 환자 명단을 확인했고, 아이의 이름이 남아있으면 일단 안심을 했다. 아이는 힘겹게 버티고 있었고, 나는 처음 본 의사가 내가 아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 모른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환자실 주치의는 병세가 워낙 빠르게 진행되어 일찍 전원되었다 해도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거라 했지만 그 말이 위안이 되진 않았다. 소아중환자실은 일부러 피해다녔고 밤이면 악몽을 꾸기도 했다.

용기를 내어 아이를 보러 간 건 한달 쯤 지난 뒤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방문한 그 시간은 부모의 면회시간이었고, 침대 곁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아빠는 마스크 위 텅빈 시선으로 아이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몇번쯤 들썩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나는 면회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다시 두달간의 지방 병원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중환자실 환자 명단에서 그 아이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속에 얹혀있던 무거운 돌덩어리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아이가 집으로 돌아갔는지, 다른 병원으로 전원되었는지, 아님 그 힘겨운 싸움을 영영 그만둔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남아있는 의무기록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기록을 찾아보지 않았다. 그날의 공포스런 기억과 일부러 다시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고, 그 아이가 어떻게 병원을 나갔는지 알게되는 걸 피하고 싶었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새로운 환자들이 입원하고 퇴원했고,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레 조금씩 묻혀져갔다.

*

아이는 제 엄마 품에 안겨 잠들어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했던 내 아이와 아내를 향한 것이기도, 십년 전 그 아이와 부모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 아이의 기억은 문득문득 신경통증을 일으키는 오래된 흉터처럼 그동안에도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그 부모의 마음은 이제서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환자들에 대한 기억 중엔 흐뭇하고 뿌듯한 것도 많지만 아프고 안타까운 순간들도 있다. 어느 의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뿌듯한 것이든 안타까운 것이든, 의사로서의 삶을 지속해가는데 도움이 되는 기억들이다. 그 아이와의 만남 이후에도 또다른 아프고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꾸덕꾸덕 굳어진 상처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시 아련한 통증을 일으키곤 한다. 한동안 잊고있던 십년 전 기억이 헤집혀져 뿌옇게 떠올랐다가 가라앉던 오늘처럼.

십년 전 그 봄날의 오후와 같이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만나야 할 의사들로 북적이는 응급실에서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