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일 일요일

기억


'응급실에 가야겠어요. 지환이가 혈변을 봤어요.'

아내의 문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새벽에 깬 아이는 다시 긴 잠을 자지 않고 울며 보챘다. 태어난지 두해가 되도록 큰 병치레는 커녕 심하게 보채본 적도 없는 아이였다. 어딘가 불편한지 자지러지듯 울음을 터뜨리길 몇 차례, 설사를 하길래 장염이구나 싶었다. 아내가 변 색깔이 좀 이상하다고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이때문에 평소보다 출근 준비가 늦어 마음이 조급해진 아침이었다. 아이를 봐주는 아주머님이 오시자 동네 소아과에 아이를 데리고 가보도록 부탁하고 집을 나섰다. 아내의 문자를 받은건 사람들 사이에 꽉 끼어 한발짝 옆으로 내디디기도 힘든 출근길 2호선 지하철 안에서였다.

아주머님의 연락을 받은 아내는 출근 도중에 집으로 다시 돌아간 상황이었다. 왜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았을까. 기저귀 색깔이 평소와 다르다고 했을 때 바로 확인했어야 했다. 휴대폰 액정에 선명하게 찍힌 '혈변'이란 단어는 후회와 함께 한동안 잊고있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십년쯤 전이었다. 나는 전공의 1년차였고, 그날은 첫 파견 병원에서 한달간의 소아과 근무를 마치는 마지막 주말이었다. 병동 당직 근무를 하며 응급실에 오는 소아 환자에 대한 호출을 받아야했다. 2차병원의 특성상 병동엔 폐렴이나 장염 등의 단기 입원 환자들이 많았고 몇번의 응급실 당직 근무 때에도 상태가 위중한 아이는 없었다. 비교적 평온한 한달이었다. 적어도 그날 응급실에서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봄날의 토요일 오후였고, 바깥의 날씨는 너무나 좋았다. 응급실은 여느때와 같이 환자들로 가득했지만, 날씨 때문인지 고즈넉하게 느껴졌다. 철제 침대에 누운 여자 아이는 초등학교 3-4학년 쯤 되어보였고 단발머리에 나들이 복장을 하고 있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채로 학교 야외 활동을 했는데 열이 나고 구토를 해서 데려왔단다. 창백한 얼굴에 약간 졸려하는 것 빼고는 진찰과 초기 응급 검사 결과 아이에게 큰 이상 소견은 없었다. 탈수가 심한 상태여서 해열제와 수액을 처방하고 입원을 시켰다.

오후 늦게 병실을 찾았을 때 아이의 상태엔 변화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병동 스테이션에 돌아와 입원 시 시행한 검사 결과를 확인했을 때였다. 신장 기능을 나타내는 수치가 정상을 크게 벗어나있었다. 윗년차 전공의에게 전화로 상태를 보고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병실로 돌아가는데, 병실에서 아이의 부모가 뛰쳐나왔다.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아이가 혈변을 본 것이었다. 침대 시트가 선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

"엑스레이 찍었는데 장중첩증 같대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엔 불안이 가득했다. 아이는 몇차례 더 보챘고, 그만큼 혈변을 더 보았다. 소아 환자를 안본지 오래 되었다지만 왜 미리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와 자책이 다시한번 밀려왔다. 항문을 통해 압력을 주어 장을 풀어주면 대부분 나아지지만, 막상 내 아이의 문제가 되었을 땐 그런 교과서적 지식과 통계는 의미가 없는 법이다. 도통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외래 진료를 보면서도, 머리 속에선 이미 좋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초기 치료가 잘 안되어 수술을 해야했던 몇몇 사례들이 떠올랐다.

십년 전 그날 병실에 있던 아이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의식은 응급실에서 확인했던 것보다 확실히 나빠져있었다. 더이상 이곳에서 관찰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모병원으로 전원하기로 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며 소견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아이는 온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짧은 파도처럼 지나간 몇 차례의 경련 이후 찾아온 심한 발작은 항경련제를 최대 용량까지 올려 주사를 해도 멈추질 않았다. 아이의 부모는 패닉 상태였고, 시시각각 급속도로 악화되는 상태를 곁에서 지켜보는 나도 당황스러움을 넘어 공포감에 떨고 있었다. 서둘러 아이를 앰블런스에 실어보내고 나니 바깥은 이미 어둠이 걷히고 동이 튼 뒤였다.

전원 이후 아이는 곧바로 모병원의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며칠 뒤 확인된 병명은 전격성 바이러스 뇌염이었다. MRI로 본 뇌는 폭격을 맞고 난 폐허처럼 끔찍할 정도로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파견 병원에서 돌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한 상태였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매일 아침 중환자실 환자 명단을 확인했고, 아이의 이름이 남아있으면 일단 안심을 했다. 아이는 힘겹게 버티고 있었고, 나는 처음 본 의사가 내가 아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 모른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환자실 주치의는 병세가 워낙 빠르게 진행되어 일찍 전원되었다 해도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거라 했지만 그 말이 위안이 되진 않았다. 소아중환자실은 일부러 피해다녔고 밤이면 악몽을 꾸기도 했다.

용기를 내어 아이를 보러 간 건 한달 쯤 지난 뒤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방문한 그 시간은 부모의 면회시간이었고, 침대 곁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아빠는 마스크 위 텅빈 시선으로 아이의 손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몇번쯤 들썩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나는 면회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다시 두달간의 지방 병원 파견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중환자실 환자 명단에서 그 아이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속에 얹혀있던 무거운 돌덩어리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아이가 집으로 돌아갔는지, 다른 병원으로 전원되었는지, 아님 그 힘겨운 싸움을 영영 그만둔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남아있는 의무기록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기록을 찾아보지 않았다. 그날의 공포스런 기억과 일부러 다시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고, 그 아이가 어떻게 병원을 나갔는지 알게되는 걸 피하고 싶었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새로운 환자들이 입원하고 퇴원했고,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자연스레 조금씩 묻혀져갔다.

*

아이는 제 엄마 품에 안겨 잠들어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왔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했던 내 아이와 아내를 향한 것이기도, 십년 전 그 아이와 부모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 아이의 기억은 문득문득 신경통증을 일으키는 오래된 흉터처럼 그동안에도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그 부모의 마음은 이제서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환자들에 대한 기억 중엔 흐뭇하고 뿌듯한 것도 많지만 아프고 안타까운 순간들도 있다. 어느 의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뿌듯한 것이든 안타까운 것이든, 의사로서의 삶을 지속해가는데 도움이 되는 기억들이다. 그 아이와의 만남 이후에도 또다른 아프고 안타까운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꾸덕꾸덕 굳어진 상처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시 아련한 통증을 일으키곤 한다. 한동안 잊고있던 십년 전 기억이 헤집혀져 뿌옇게 떠올랐다가 가라앉던 오늘처럼.

십년 전 그 봄날의 오후와 같이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만나야 할 의사들로 북적이는 응급실에서의 일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