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1일 화요일

TV, 그리고 Back to the Future

3년 전 쯤 거실의 평면TV가 고장난 뒤 TV를 새로 사지 않았다. 사실 난 TV 보는 걸 좋아한다. 그냥 좋아한다가 아니라 매우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없이 살기로 한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학령 전 아이들에게 TV가 유익한 물건이 아니라는 증거는 도처에 널려있다. 
2년 전 현재 사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생각했다. TV는 못 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모니터는 있어야겠다. 내친김에 결혼 전 혼자 살 때 그랬던 것처럼 프로젝터를 이용한 홈씨어터 시스템을 꾸미기로 했다.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달고 2인용 소파를 구입했다. 그렇게 해 서재는 작은 영화감상실이 되었다. 
하지만 이 그럴듯한 영상 기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생각해 TV를 없앴지만 지금도 아이들은 거의 매일 TV를 본다. 서재의 프로젝터에 물려둔 IPTV 때문이다. 그래도 리모컨 버튼을 한 번 누르는 단순한 행동에 비해 스크린을 내리고 프로젝터와 앰프와 셋톱박스의 전원을 각각 켜는 작업은 꽤 수고로운 일이고, 이러한 수고로움은 시청에 제한을 두는데도 도움이 된다. 평일은 20분짜리 만화 2개, 토요일은 3개, 일요일은 4개씩. 어렸을 적 평일 저녁이면 개구리 왕눈이나 모래요정 바람돌이를, 일요일 아침이면 은하철도999나 천년여왕을 봤던걸 생각하면 그때보다 스크린 앞에 노출되는 시간은 더 길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규칙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훨씬 복잡한 세상이고 바야흐로 조기 교육이 대세인 시대 아닌가. 
주말에 내키면 극장용 만화를 보기도 했다. 디즈니와 픽사, 드림웍스 스튜디오와 미야자키하야오를 비롯해 웬만한 개봉 애니메이션은 다 섭렵했다. 언젠가부턴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주말이면 오늘은 뭘 볼까 뒤적이는게 일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를 고를 때 부딪히는 문제는 더빙이 된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IPTV에 더빙판이 있는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오래된 작품의 경우 종종 더빙판이 없고 아예 작품 자체를 찾을 수 없을 때도 많다. 이럴 때면 어둠의 경로를 따라 뒤지기도 하는데, 요즘은 그나마도 아이템이 동났다. 그런데도 아들 녀석은 으레 주말 저녁이면 영화를 볼 수 있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번 일요일에도 묻는다. 
"아빠, 오늘 저녁엔 뭐 볼까?" 
최근엔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영화를 선택하기도 했는데, 해리포터는 시리즈가 진행되며 성인이 되어가는 주인공들과 부활해가는 볼드모트의 어두운 기운을 따라가기 버거웠던지 당분간 거부한 상태이고 최근에 본 드래곤이 나오는 영화는 심심한 스토리와 구성에 영 반응이 좋지 않았던 터다. 다른 적당한 영화가 없을까 DVD 목록을 살펴보다가 갑작스레 떠오른 것이 백투더퓨쳐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이야기라 소개하니 아들도 솔깃해하는 눈치이다. 

이 영화는 내 유년을 지배했던 영화들 중 하나였다. 영화가 개봉한 것이 1987년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본게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가장 많이 되풀이해 본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첫머리에서 커다란 스피커를 앞에 두고 기타를 멘 마티를 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마티가 드로리안을 타고 30년을 거슬러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난 그만큼의 시간을 거슬러 가 있게 될 것임을.
막상 영화는 시작되었지만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깨알같은 복선은 둘째치고 영화의 스토리만이라도 이해할까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이내 영화에 빠져들어 꼼짝도 않는다. 브라운 박사가 죽는 장면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왜 나타난 것인지를 헷갈려 묻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쟤는 왜 저런 것 같아? 하고 물어보는데, 대부분 맥락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플루토늄이 아닌 쓰레기와 고철을 연료로 간지나게 떠올라 날아가는 드로리안의 섬광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니 30년 전의 엄마가 마티에게 들이대는 장면을 보며 혼란스럽진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이 내용이 문제가 되어 국내 개봉이 2년 늦어졌다고 한다.) 1987년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고, 그때의 나는 마티와 30년 전 엄마의 관계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지만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은 다르지 않을까. 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한데. 
침대에 함께 누워 슬쩍 질문을 했다. 영화 재미있었어? 하니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나도 타임머신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이 영화를 본 뒤의 매우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겠다.
"있으면 뭐 하고 싶은데?"
눈을 반짝이며 하는 대답을 듣고 그만 실소를 짓고 말았다. 
"어제로 돌아가서 주말동안 텔레비젼 실컷 볼래." 
그래. 아쉽지만 토요일은 20분짜리 세 개란다 아들아. 그래도 영화의 내용을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이상 묻는걸 그만두었다. 2편이 있다고 했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음주에 당장 보겠다고 조른다. 그나저나 더빙이 된 2편은 또 어디서 구하나.

꼬리. 예나 지금이나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마티가 아이들이 타고있던 나무판으로 보드를 만들어 거리를 질주하는 추격씬, 그리고 이 장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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