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7일 금요일

진주장 이야기

"번데기탕도 파는데, 사갈까요?"

퇴근길이었다. 며칠새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잰걸음을 더 재촉하던 참이었다. 전화기 너머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고춧가루를 푼 뜨끈한 번데기탕 맛이 떠올라 입안에 침이 고였다.

길 건너 아파트 단지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장이 선다. 아파트 이름을 앞에 붙여 **장이라 불리지만 파는 것은 먹거리들 뿐이다. 그래도 종류는 꽤나 다양하다. 아파트 단지 특성상 닭강정, 돈가스, 꽈배기, 만두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간식들이 많다. 잔치국수와 육개장은 저녁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족발, 순대, 곱창볶음과 같은 음식은 소주 한잔 곁들여 먹기에 좋다.

일주일 내내 오늘 저녁엔 뭘 해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동네에서 열리는 장은 하루 저녁이나마 고민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우리 집도 수요일 저녁은 장에서 사온 음식들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닭강정과 잔치국수를 즐겨 먹는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도 아내가 장에 간다기에 내 몫으로는 순대를 주문해놓은 터였는데, 옆집에서 번데기탕을 판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애들은 제 몫의 국수와 닭강정을 해치운 뒤였다. 작은 냄비 안에서 번데기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소주잔을 챙겨 식탁에 앉았다. 순대 한 접시와 번데기탕이 든 냄비를 함께 놓으니 넉넉한 한 상이 된다.

"닭강정집 쿠폰을 열 장 다 모았네."

싱크대 앞에 서있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말투에 힘이 없다. 아내는 연말에 직장 일이 많아지면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체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단 자신이 나서는 성격이라 일이 많은 편이다. 스스로도 일은 타고난 것 같다고, 전생에 무수리였나 보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늘 씩씩하게 헤쳐가는 그녀이다. 그럼에도 요즘은 지나치게 버거운 상황에 힘겨운 것 같아 걱정이다. 오늘도 어깨가 축 처져보인다.
아내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열 장 모으면 닭강정 1인분이 공짜거든요.”

멀뚱한 표정인 나를 보며 아내는 말을 이었다. 

“근데 추운 날씨에 너무 고생하면서 팔고 있어가지구, 미안해서 쿠폰을 못쓰겠어요.”

일전에 아이들 손을 잡고 닭강정을 사러 갔을 때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활기찬 표정으로 응대하던 젊은 사장님이 생각나 난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겨우 만원어치 쿠폰 열 장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아내의 이야기는 이내 오후에 들었던 둘째 어린이집 소식을 거쳐 요즘 날씨에 대한 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일 날씨는 조금 더 포근해질 거라 했다. 거실 형광등 빛 아래 아내의 어깨가 조금은 더 단단해져 보였다.

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문제는 호르몬

감성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우는 남자가 환영받기란 어렵다. 박보검이나 송중기가 아닌 평범한 중년의 아재가 아무데서나 눈물을 보였다간 주접을 떤다거나 찌질하다는 핀잔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본래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 책이나 드라마를 보며, 음악을 들으며 훌쩍거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그다지 슬픈 장면이 아님에도 흘러나오는 눈물에 주변의 눈치를 보며 민망함을 느낀 적도 많았다.

근래에 뜬금없이 눈물이 나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진 건 호르몬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은 줄고 여성호르몬이 늘어난다고 하니까. 지난 겨울,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스노우보드 경기를 보는 중이었다. 하프파이프 끝에서 로켓처럼 튀어올라 몸을 몇 차례 비튼 뒤 곡예사처럼 우아하게 착지를 해대는 경이로운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찬란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엉뚱하게도 코끝이 찡해져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피했던 기억이 난다.

더 당황스러운 순간은 아이들을 나무랄 때이다. 아이들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호통을 치는 찰나에 매번 눈물이 핑 돌아버리는데, 이럴 때면 아이들에게 들킬까 상황을 아내에게 맡기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 돌아와야 한다. 아이들에 대한 화는 잠깐이다.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태도는 금새 사라지고, 감정을 이기지 못한데 대한 자괴감과 실망감이 해일처럼 밀려오곤 한다. 몇마디 훈계를 더해보긴 하지만 매번 경기는 결국 내 패배로 끝난다. 큰애는 예전과 달리 이제 아빠가 야단을 쳐도 여간해선 울지 않는데, 이쯤이면 그냥 패배가 아니라 콜드게임 패 정도인 셈이다.

4학년 아이들의 학예회 날이었다. 아이들은 머리만큼이나 큰 리본을 가슴에 달고 탬버린 춤을 추고, 양손에 든 깃발을 음악에 맞춰 돌려대고, 다양한 악기를 들고 합주를 하고, 수화를 응용한 율동을 하고, 스케치북을 한장한장 넘겨가며 카드섹션 무대를 만들었다. 아이들의 몸짓은 서툴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사실 무엇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제작년보다 한뼘씩은 더 큰 아이들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신비로웠다. 아이들 모두가 '자기 자신'에 성큼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음악은 경쾌하고 아이들의 표정은 발랄했지만 이상하게 난 또 코끝이 시큰거렸다.

역시 호르몬이 문제인가 보다.


2018년 4월 6일 금요일

의뢰회신서

장인께서 다음 주에 수술을 받으실 예정이다. 언젠가부터 한쪽 눈이 어른어른하다시더니, 근처 안과 진료 결과 망막에 주름이 잡혔다고 한다. 모병원에서 다시 진료를 보고 수술 날짜를 받은게 두어달 전이다. 

입원 날짜, 수술 날짜가 정해졌고 지난 주엔 입원 전 검사를 위해 병원에 다녀가셨다. 검사 잘 하고 돌아가셨느냐고 통화를 하는데, 입원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신 모양이다. 수술 이틀 전에 입원을 하고, 수술 이후에도 며칠은 병원에 계셔야할 것 같은데 입원 기간에 대한 설명을 못들으신 모양이다. 
예기치 않게 일상을 비워야하는 환자 입장에선 얼마동안의 공백을 준비해야할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런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설명이 없었던걸까, 아님 검사실과 진료실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당신이 들었던 것을 잊으신걸까. 

외래에 전화해 입원 기간을 물어볼까 싶었지만 내가 직원임에도 막상 환자 보호자 입장이 되니 선뜻 문의하기가 망설여진다. 결국 '망막 수술 입원 기간' 등을 구글링하고 있노라니 늘상 느끼는 거지만 이 병원도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출근하니 책상 위에 봉투가 놓여있다. 안에 든 건 지난달에 외부 병원으로 의뢰한 환자의 회신서였다. 

이곳에서 모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의뢰하는 것은 대개 환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이렇게 회신서를 받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회신서야 해당 병원의 행정 시스템에 따라 보내졌을 것이다. 흔한 시술이고 회신 내용도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보냈던 환자에 대한 치료가 별탈 없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치료를 담당한 선생님께 조금은 고맙기도 했다.


회신서를 보내는 것은 의뢰를 한 의료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일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론 환자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와 이후에도 환자를 보내달라는 뜻이 깔려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간에 회신서를 챙겨보내는 것은 제대로 된 의료전달체계를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예전 모 대학병원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일일이 회신서를 작성해 보내셨다는 일화도 있지만, 대개 행정적인 지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행정적인 지원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신경쓰지 않는 병원들도 있다. 그런 곳은 굳이 이런 애프터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환자로 넘쳐나서일텐데, 또 환자가 많은 병원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무수히 많은 환자 의뢰서를 받고있는, 내가 속한 이 병원은 답장을 몇 통이나 보내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늘상 느끼는 거지만 역시나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2017. 4. 6)


2018년 2월 22일 목요일

다이하드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 저녁이면 아이들과 영화를 본다. 웬만한 초딩용 애니는 두루 섭렵한고로 그렇잖아도 최근엔 애니 외의 장르를 곁눈질한 터였다.(무엇보다 디즈니건 드림웍스건 픽사건 이제 엄마 아빠가 더이상 애니는 못보겠어!) 더빙판을 구할 수 없어 자막으로 보았던 '프리윌리'의 경우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재미있게 본 눈치였다. 그에 반해 '인디아나존스’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아이와 함께 볼 영화로 '(키아누리브스와 산드라블럭의) 스피드'를 골랐는데 아이가 손에 땀을 쥐어가며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다는 모 페친의 글을 보고, 우리 집에서도 며칠 뒤 같은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다. (두 초딩은 같은 나이다.) 만화가 아니란 소식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던 우리 집 초딩 역시 영화의 줄거리를 대강 이야기해줬더니 나름 관심을 보인다.
20년이 넘은 영화는 세월만큼이나 때깔이 구리고 대사는 유치하며 편집은 툭툭 끊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녀석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가끔은 영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늦게 엉뚱한 소리를 하긴 하지만. 여섯 살 둘째는...... 뭐 그냥 패스하자. 아이들과 함께 볼 명목으로 골랐건만 막상 가장 신이 난 관객은 대학 초년생 시절 이 영화를 보고 키아누리브스의 팬이 되었던 아내였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평점이 나쁘지 않음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얻은 아빠와 엄마는 올디스벗구디스를 외치며 당분간 추억의 걸작 시리즈를 상영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영화가 '다이하드'.
다이하드가 어떤 영화인가. 80년대 최고의 액숀 영화이고 브루스윌리스를 일약 최고의 액숀 배우로 만들어 주었으며, 한국에선 서울올림픽 기간에 개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흥행 대박을 일으킨 영화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론 단체 관람 후 엔딩크레딧을 보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던, 십대 시절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던 것이다.
생김새가 다른 서양 배우들의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워하는 아이가 가끔 우리 편과 나쁜 놈들을 헷갈리긴 했지만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껄쩍지근한 뒷맛이 남은 건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열광적인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데, 내친김에 이번 주말엔 다이하드 2를 보기로 했다. 참고로 난 존 맥티어넌의 1편보단 레니 할린의 2편을 더 좋아한다.


개고생을 하는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맥클레인 형사 캐릭터는 액션과 함께 영화를 이끄는 두 축이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지금은 촌시러우나 당시엔 그렇지 않았을) 유들유들한 멘트들을 열 살 관객이 이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계속되는 총격전과 폭파씬이 좀 지루해졌는지 약간 삐딱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데, 예를 들면.
악당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채고 조용히 추적하는 맥클레인
- 쟤네가 다 나쁜 놈들 아냐? 근데 왜 그냥 보내?
좁은 송풍기 통로로 들어가기 전 윗옷을 벗어던지는 맥클레인
- 옷은 왜 벗는 거야?
맥클레인의 총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악당들
- 저기 나오는 나쁜 놈들은 다 바보인 것 같아.
자동 소총 탄피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격전 중에
- 영화에서 나오는 건 다 가짜 총 아냐?
"야, 그렇게 생각하면 아예 영화를 보지 말아야지. 또 만화는 뭐 하러 보냐? 다 그림인데."
향수에 젖은 40대 관객들의 흥을 딱딱 끊어주는 말에 짜증이 나서 한마디 던지니 입을 다물고 샐쭉해진 녀석. 악당의 비행기가 폭파되고 엔딩크레딧과 함께 '렛 잇 스노우'가 울려퍼지는데 마지막 멘트를 날리고 휙 나간다.
"정말 다이 하드(Die Hard)네."
브루스 형님. 욕 보셨어요.

2018년 2월 20일 화요일

가족이 해야할 일

- 네 아버지가 말이다.

아이들이 잠들자 어머니께서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보통은 아이들을 재우러 들어가기 전에 안녕히 주무시란 인사를 드리고 안방 중문을 닫고 나오는데, 하고싶었던 말씀이 있었나보다. 어머니의 말씀은 평소보다 더 길게 이어졌지만 내용은 그간 종종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환갑을 넘으시면서 어머니는 가끔 아버지 흉을 보셨다. 그렇다고 친구나 이웃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성격은 아니신지라 아버지에 대한 넋두리를 듣는건 자연스레 누님과 나의 몫이 되었다. 겨우 두세달에 한번씩 본가에 갔었던 나에 비해 가까운 곳에 사는 누님은 훨씬 자주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을 것이다. 지난 일년간 누님이 조카의 입시 준비 때문에 왕래가 줄어들자 그동안 쌓인 게 많으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말씀이 이어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다. 설 전날 밤늦게 시작된 모자간의 대화는 내가 또 아들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구나 하는 어머니의 자조 섞인 후회로 끝이 났다.

설날엔 처가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평소와 같이 반주를 얼큰하게 하신 장인께선 일찍 잠이 드셨다. 건넌방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책상에 앉았는데 거실에서 장모님과 아내가 나누는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린다.

- 네 아빠가 말이다.

장녀인 아내는 장모님을 닮은 걸로는 외모와 성격 모두 딸 셋 중 제일이다. 그래서인지 장모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내이다. 아내는 꼼꼼하고 모든 일들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걱정이 많아지는 성격인데, 장모님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장인께선 다소 즉흥적이고 급한 성격이시라 종종 말다툼이 생기곤 한다. 최근엔 처제의 결혼을 앞두고 신경을 쓰시면서 두 분 사이에 충돌이 늘어난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온 아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하고싶은 말씀이 많으셨나 봐. 따로 이야기하실 곳도 없을텐데 이럴 때라도 잘 들어드려야죠.”

연휴 마지막 날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아내와 다음 주에 있을 처제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들 녀석이 짜증 섞인 말투로 이야기한다.

-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니깐.

제딴에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귀기울여 듣지 않고 다른 대화만 하고 있으니 골이 났나보다. 열한살이 되었지만 아직까진 조잘조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내용이라 해봐야 친구랑 했던 놀이, 최근에 봤던 만화책이나 티비에서 보았던 만화 영화 이야기 정도가 다이지만. 요즘엔 하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는 포켓몬고 게임에 대한 것이다. 주말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포켓몬들의 소식을 반복해 듣고 있노라면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엄마 아빠에게 자주 말을 건네주는 걸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남자 아이는 사춘기가 되면 말수가 확 줄어든다는데 언젠가 그 시기가 오면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할까 미리 걱정을 하기도 한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렸을 적엔 나도 어머니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랑 했던 놀이, 문구점에 들러 했던 뽑기 이야기나 텔레비젼 만화 이야기 정도가 대부분이었을 테지만.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이젠 짐작이 간다. 그땐 주로 내가 말을 하고 어머니가 그걸 들어주셨겠지만 내가 중년이 된 지금은 어머니가 말을 하고 나는 듣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방통행에 가까운 대화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때로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가족간에 가장 중요한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개학날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었다.

방학 내내 늦잠을 자는데 익숙해졌던 아들은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잠이 덜깬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밥알을 한알한알 세듯 입을 오물거리던 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빠. 근데 왜 오늘은 늦게 출근해?"
"오늘은 아침에 진료가 없어. 개학날이기도 해서, 너랑 같이 나가려구."
"그렇구나."

심드렁하게 대답한 아이는 숟가락으로 밥공기를 뒤적거렸다.

남자 아이의 등교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를 닦고, 까치집이 생긴 머리칼에 물을 묻혀 가라앉히고, 허물을 벗었다가 새 껍질을 쓰듯 옷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두터운 자켓을 입고, 가방을 메고 현관에 서기까진 십분 정도면 충분했다.

영하 십도를 훌쩍 넘는 아침 날씨였다. 며칠째 한파였으므로 단단히 채비를 하고 나왔지만 코끝이 시렸다.

"아빠가 하나 들어줄게."

개학날이라 들고갈 준비물과 과제가 많았다. 양손에 든 가방 중 하나를 선뜻 건네지 않고 망설이던 아이는 머뭇거리며 로봇영재 수업 가방을 내밀었다.

학교까진 오 분이 채 안되는 거리이다. 어제까지와 달리 아파트단지 내 인도는 학교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약간의 흥분과 소란스러움이 섞인 공기가 볼을 간질였다. 딱 하루 차이인데 아침 풍경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새로 출현한 포켓몬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이는 학교가 가까워지면서 불편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빠, 이제 그 가방 나한테 줘."
"왜, 얼마 안남았잖아. 그냥 아빠가 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아이참. 내가 들 수 있어. 그냥 줘."

녀석은 아빠와 나란히 등교를 하는게 부끄러운 눈치였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녀석이 이겼다. 가방을 건네받아 양손에 짐을 든 아이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아빠, 나 간다."

녀석은 재빠르게 횡단보도를 건너 재잘대는 아이들 틈에 끼어 학교 후문 안으로 사라졌다. 한번쯤 뒤돌아 손을 흔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그사이 아빠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