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탕도 파는데, 사갈까요?"
퇴근길이었다. 며칠새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잰걸음을 더 재촉하던 참이었다. 전화기 너머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고춧가루를 푼 뜨끈한 번데기탕 맛이 떠올라 입안에 침이 고였다.
길 건너 아파트 단지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장이 선다. 아파트 이름을 앞에 붙여 **장이라 불리지만 파는 것은 먹거리들 뿐이다. 그래도 종류는 꽤나 다양하다. 아파트 단지 특성상 닭강정, 돈가스, 꽈배기, 만두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간식들이 많다. 잔치국수와 육개장은 저녁 식사 대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족발, 순대, 곱창볶음과 같은 음식은 소주 한잔 곁들여 먹기에 좋다.
일주일 내내 오늘 저녁엔 뭘 해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동네에서 열리는 장은 하루 저녁이나마 고민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우리 집도 수요일 저녁은 장에서 사온 음식들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닭강정과 잔치국수를 즐겨 먹는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도 아내가 장에 간다기에 내 몫으로는 순대를 주문해놓은 터였는데, 옆집에서 번데기탕을 판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단지 앞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애들은 제 몫의 국수와 닭강정을 해치운 뒤였다. 작은 냄비 안에서 번데기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소주잔을 챙겨 식탁에 앉았다. 순대 한 접시와 번데기탕이 든 냄비를 함께 놓으니 넉넉한 한 상이 된다.
"닭강정집 쿠폰을 열 장 다 모았네."
싱크대 앞에 서있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이야기했다. 말투에 힘이 없다. 아내는 연말에 직장 일이 많아지면서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체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보단 자신이 나서는 성격이라 일이 많은 편이다. 스스로도 일은 타고난 것 같다고, 전생에 무수리였나 보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늘 씩씩하게 헤쳐가는 그녀이다. 그럼에도 요즘은 지나치게 버거운 상황에 힘겨운 것 같아 걱정이다. 오늘도 어깨가 축 처져보인다.
아내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열 장 모으면 닭강정 1인분이 공짜거든요.”
멀뚱한 표정인 나를 보며 아내는 말을 이었다.
“근데 추운 날씨에 너무 고생하면서 팔고 있어가지구, 미안해서 쿠폰을 못쓰겠어요.”
일전에 아이들 손을 잡고 닭강정을 사러 갔을 때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활기찬 표정으로 응대하던 젊은 사장님이 생각나 난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겨우 만원어치 쿠폰 열 장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아내의 이야기는 이내 오후에 들었던 둘째 어린이집 소식을 거쳐 요즘 날씨에 대한 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일 날씨는 조금 더 포근해질 거라 했다. 거실 형광등 빛 아래 아내의 어깨가 조금은 더 단단해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