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2일 금요일

병아리 키우기

삐약이 입주 3주째.

며칠 전 아침에 머리를 감고 있는데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욕실로 뛰어들어왔다.
"탈출했어! 탈출했다구!"

아내는 처음부터 병아리를 탐탁치 않아했다. 아니, 탐탁치 않아했다기 보다 무서워 했다는게 맞겠다. 운동회 날 아이가 졸라 사오긴 했지만 곤충과 조류를 끔찍히 싫어하는 지라 병아리 곁엔 가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삐약이라고 이름붙인 병아리를 데리고 노느라 매일 신이 났다. 산책시킨다고 상자 밖에 풀어놓을 때면 깔깔거리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아이 친구들의 병아리는 며칠만에 죽었다고 했다. 추우면 죽는다길래 상자에 백열 전구를 켜두었더니 삐약이는 별 탈 없이 잘 커갔다. 똥을 얼마나 자주 싸는지 하루 한 번씩 상자 바닥의 신문지를 갈아주어야 했다. 문제는 이녀석이 하루가 다르게 너무 빠른 속도로 자란다는 것이었다. 솜털이 빠지고 날개부터 깃털이 제법 자리를 잡으면서 병아리인지 닭인지 애매한 상태가 되었다. 2주째부터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그날 아침 드디어 제 힘으로 상자를 탈출한 것이다.

탈출한 병아리는 다시 잡혀서 상자로 들어갔고, 그날 이후 상자엔 비닐 천장이 씌워졌다. 병아리 모이만 먹었을 뿐인데 2주 남짓한 기간에 부쩍 커진 녀석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병아리 때의 귀여움이 줄어든게 아쉽기도 했다. 조만간 어딘가로 보내야할 듯 싶다.

*

매주 한 번 정도 오전 진료가 없을 때면 첫째 아이와 함께 출근을 해왔다. 첫째가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엔 집을 나서는 시간이 다소 일러졌고 어린이집 대신 학교를 들르게 되었지만 아침 풍경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과 아침을 먹고 집을 나와 잠깐이나마 함께 걷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같이 어린이집에 갈 때면 손을 꼭 잡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던 아이가 입학 후 두 달쯤 지나자 등교길에 이전보다 말수가 적어졌다. 같은 반 친구를 따라 앞으로 종종걸음을 쳐 뒤에서 슬금슬금 따라가야 하는 일도 잦았다. 급기야 지난 주엔 교문이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머뭇거리더니 아빠는 이제 가라고 눈치를 준다. 그러고보니 혼자 등교하는 남자 아이들이 많다. 제딴에는 친구들은 혼자 오는데 아빠가 교문 앞까지 따라오는게 멋적었나 보다.

혼자 하려는게 또 늘었구나 싶어 기특하기도 하고 벌써 쑤욱 커버린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아이들이 크면 막상 시간이 나서 함께하려 해도 쉽지 않으니 힘들더라도 어릴 때 부대끼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데. 아이들이 커갈수록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순간이 늘어나지만 늘 변화는 갑작스레 찾아온다. 이번 주부턴 당장 작은 즐거움 하나가 없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2015년 5월 14일 목요일

5월 이후

"일어나봐."

어머니가 어깨를 가만히 흔드셨다. 단잠을 자던 소년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떴다. 아직 안방에 텔레비젼이 켜져있는 모양인지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다. 수명이 다된 형광등 빛이 파르르 떨렸다.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큰일이 나부렀어야..."

어머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해보였지만 어머니는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셨다. 소년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자고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긴걸까. 1987년 겨울, 소년은 열네살이었다. 텔리비젼에선 밤늦게까지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날은 새 대통령이 선출된 날이었고, 뉴스의 내용과 어머니의 어두운 표정이 무언가 관련이 있을거라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새 대통령은 '보통 사람'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걱정과는 달리 그날 이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날 밤의 일은 소년의 기억에 봉인되었다. 소년은 몇 년이 지나 성인이 되서야, '보통 사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날 어머니의 표정이 왜 그리 어두웠는지 알게 되었다.

80년 5월에 소년은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탄광촌에서 약국을 하시던 아버지는 소년이 입학하던 해에 시내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온 집은 시의 가장 변두리였기 때문에 늘 조용한 편이었다. 5월의 그 열흘간이 어떠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휴교를 했기에 동네 친구들과 늘 하던 술래잡기나 구슬치기 같은 걸 했을 것이다. 부모님이 함부로 나다니지 않도록 주의를 주셨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저녁, 약국 앞길을 지나던 트럭에서 내린 청년들에게 아버지가 박카스 몇 박스를 주었던 것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것은 시커먼 총을 든 청년들의 비장한 표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년이 모르고 있었지만, 그 열흘간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10년쯤 지나 고등학생이 되어 금남로 지하도를 지나던 소년이 본 시뻘건 사진들은 그때 죽은 사람들이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시내 지하도 벽엔 비슷한 사진들이 붙었다가 떼어지길 반복했다. 그 사진 앞을 지날때면 사람들은 굳은 표정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처음 멋모르고 다가가 사진을 보고 메슥거림을 느낀 뒤로, 소년은 다신 그 사진들 가까이 가지 않았다. 80년 5월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게된 것은 광주를 떠나 대학에 들어간 이후였다.

열네살 소년이 단잠을 깨던 날, 어머니의 불안 가득한 표정은 7년 전의 일이 다시 반복될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7년 전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날은 그 군인들이 다시 통치권을 쥐게 된 날이었다. 되돌아보면 지나친 걱정이었지만, 그 도시에서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었던 이들이라면 당연히 가질 법한 공포였다. 어머니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 밤 불안은 도시 전체를 진득하게 뒤덮고 있었을 것이다.

1987년 겨울,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밤 어머니가 했던 말은 아이에게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그것을 알게된 뒤로 해마다 5월이 되면 그 도시의 사람들을 오랜 세월동안 괴롭혔을 악몽을 떠올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모와 삼촌,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 모두가 그런 불안과 공포를 십수년간 느꼈을 것이란 사실은 소년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곤 했다. 아직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총성을 직접 듣지 않은 소년에게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2015년 5월 13일 수요일

진짜 문제는 가짜 백수오가 아니다.

최근 백수오 파동으로 매스컴이 뜨겁습니다. 모 회사에서 백수오 대신 이엽우피소를 제품 원료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서 해당사의 주가는 곤두박질하고 홈쇼핑 업체엔 환불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기능식품 시장엔 유행이 있습니다. 홍삼이나 종합비타민 등 꾸준히 인기가 있는 스테디셀러도 있지만, 특정 제품이 갑작스레 인기를 끌었다가 또 금새 사그러들기도 합니다. 그 인기에는 대개 책이나 매스컴의 보도 등이 영향을 미칩니다. 백수오의 인기가 늘었다고 느낀 것은 1-2년 전부터였습니다. 백수오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년 여성 환자들이 부쩍 많아진게 그쯤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백수오 파동의 핵심이 해당 회사가 백수오라고 믿고 구입한 소비자들의 신뢰를 저버렸다는데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백수오는 확실히 효과가 있고 이엽우피소는 효과가 없을까요? 백수오는 여성 갱년기 증상 개선 효과가 있다고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백수오(cynanchum wilfordii)와 이엽우피소(cynanchum auriculatum) 이름으로 국내, 국제 학술지 데이터베이스(RISS, Pubmed, Embase, Cochrane Library)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긍정적인 결과를 보인 실험실 연구나 동물 연구들이 있었지만, 사람에게도 같은 효과를 보인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의약품이 출시되기까지 여러 차례의 사람 대상 임상 시험을 거치고, 건강기능식품의 허가에 최소한의 임상 시험 결과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내 학술지 164건 중 해당 물질과 관련한 논문은 총 21편이었으며 이 중 19편은 실험실 연구나 동물실험 연구였고 단 2편 만이 사람을 대상으로 시행된 임상 시험이었습니다. 이중 1편은 20대 여성의 월경전증후군에 대한 것이었고, 나머지 1편이 갱년기 여성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이 연구는 2003년 한국생물공학회지에 발표되었으며, 백수오 효능에 대한 첫 임상 시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48명의 폐경기 여성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은 백수오, 속단, 마른 생강, 당귀, 대두, 해조칼슘, 아미노산, 다양한 종류의 비타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합추출물을, 다른 그룹에게는 가짜약을 투여했습니다. 3개월 뒤 백수오 등 복합추출물을 섭취한 그룹은 58.3%가 폐경 증상 호전을 보인 데 비해 대조 그룹은 21.7%만 증상 호전을 나타내 백수오 등 복합추출물이 갱년기 증상을 완화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국제 학술지로 검색된 논문 중 백수오는 20편, 이엽우피소는 42편이었습니다.(이엽우피소의 효과에 대한 연구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이중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2012년 Phytotherapy Research에 발표된 논문이 유일합니다. 64명의 폐경기 여성을 둘로 나누어 각각 백수오, 당귀, 속단의 3가지 혼합물인 에스트로지-100(EstroG-100)와 가짜약을 12주간 복용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에스트로지-100 그룹은 가짜약을 복용한 그룹에 비해 폐경기 증상이 유의하게 개선되었습니다.

이들 연구는 N사가 백수오 제품의 건강기능식품 허가를 받고 백수오의 효과를 홍보할 때 활용해온 연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연구 모두 연구 대상자 수가 적어 이 결과를 일반화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효과를 보인 성분이 백수오인지, 백수오와 함께 투여된 기타 성분 중 하나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다른 문제는 두 연구 모두 N사의 지원으로 이루어졌거나 이 회사의 대표가 공동 저자로 포함된 연구라는 것입니다. 의학 연구에서 이해관계(conflict of interest)는 연구의 신뢰성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 현재까지 백수오와 갱년기 여성에 대한 연구는 2편에 불과합니다. 
- 두 연구 모두 연구대상자 수가 작아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 두 연구 모두 백수오를 단독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갱년기 증상 완화에 백수오가 도움이 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 두 연구 모두 백수오 제조 회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었습니다.

이번 논란으로 진짜 백수오의 인기가 더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백수오나 이엽우피소나 그 효과가 충분히 검증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